197화. 고찰의 결과(2)
* * *
"뭘 어쩌겠습니까?"
장로가 사람 좋은 얼굴로 웃자 하벨이 키득거리며 물었다.
"날 죽이기라도 하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당신은 이제 우리에게 무척 소중하신 분인데 설마 그러겠습니까?"
장로의 미소가 길어졌다.
"그저 공의 장난이 과했으니 조금은… 따끔하게 혼을 내야겠죠?"
파지지직!
장로의 손아귀에서 번개가 맴도는 그때, 그의 뒤에서 나타난 레디나가 장로의 머리카락과 팔을 잡고는 엎어 쳤다.
"도련님을 혼내는 건 내가 할 테니까."
쾅!
바닥에 쓰러진 장로를 향해 발을 내리찍었다.
"너는 찌그러져 있어!"
팍!
하지만 레디나의 발은 애꿎은 땅을 두드렸고, 장로는 어느새 바람처럼 흘러가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
"…으흠.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예의를 어디에다가 빼먹었나? 더럽긴."
장로는 옷을 툭툭 털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레디나를 역겹게 바라보았다.
"와."
하벨이 놀라워하며 입을 열었다.
"역시 장로라서 다른데?"
"과찬이십니다."
"스르르 미끄러지는 꼴이 한 마리의 벌레와도 같았고, 우뚝 일어나는 꼴이 오뚝이 같아서 말이야. 마법사 협회에서는 이런 걸 배우나 봐?"
도발이 고스란히 담긴 하벨의 말에도 장로는 콧바람을 세게 쉬었다.
"다른 것도 할 줄 압니다. 보여드릴까요?"
"그럼. 할 수 있다면 보여줘야지. 재주 좀 부려봐."
하벨은 삼지창을 흔들며 일부러 비웃어주었다.
파지지직.
장로의 손아귀에 번개가 휘몰아치고, 그를 중심으로 바람이 휘감았다.
"폭풍우는 말입니다."
"용용아."
하벨은 장로의 말을 자르며 칼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장로와 헤일리스는 자신을 죽일 수 없었다.
그렇다면 당당하게 목을 내밀어야지.
"왜 쫄았어? 목줄은 지금 네가 쥐고 있는데?"
하벨은 장로에게 걸어가며 말했다.
"목줄을?"
칼리우스가 눈을 깜박거리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하벨이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그래. 잊었어, 용용아?"
"저런."
장로가 혀를 찼다.
"예의가 없는 건 하벨 공도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아무래도 가르쳐줘야 할 듯합니다."
"글쎄. 나는 생각이 달라. 나처럼 예의 바른 사람이 있을까 싶은데."
쿠르르르릉.
장로의 손에 일어난 번개가 바람을 타고 움직이자 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그럼에도 하벨이 다가오자 장로가 눈살을 찌푸렸다.
"적당히 하시죠. 제가 언제까지 공을 봐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까?"
"누가 널 봐줬다고 생각하지?"
하벨이 손가락을 아래로 가리켰다.
"꿇어."
그 건방진 손가락을 보자마자 장로가 이를 악물었다.
"…에멜 콘스."
하지만 장로는 칼리우스가 꺼낸 저 말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장로를 둘러싼 바람은 조용히 모습을 감췄고, 손아귀에서 피어나던 번개마저 꺼져버렸다.
자신의 본질이나 다름없는 진짜 이름을 칼리우스가 언급하자 마나가 움직이지 않았다.
속에서부터 무언가가 자신을 옭매는 그 느낌에 에멜은 숨을 토했다.
"봐. 꿇으라니까."
어느새 에멜의 눈에 가득한 두려움을 보며 하벨이 키득거렸다.
에멜은 자신의 모든 걸 쥐어버린 칼리우스를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요… 용이셨다."
자신들이 쫓던, 이상을 이뤄줄 거라 믿었던 저자가 설마하니 사라진 용이었다니.
그 이외에 어떤 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용보다 가장 고결한 생명체가 있던가.
이름을 숨겨라.
그 말이 어디에서부터 마법사에게 전해졌는지 몰라도 마법사라면 모두 가명으로 자신의 진짜 이름을 숨기며 살아왔다.
오죽했으면 진짜 이름을 아는 자들을 직접 죽이는 마법사들까지 있을 정도일까.
'…그래서였다.'
에멜은 오늘 알았다.
이름을 숨기라는 그 말이 대체 어디에서부터 왔는지.
용이었다.
위대한 용이 부름에 한평생 자신의 일부였던 마나가 이를 거부하며 멋대로 몸을 옭아매는 과정을 느끼며 알아버렸다.
마법사들은 용에게 지배될 수 없는 자들이었고, 이를 숨기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라는 것을.
"에멜 콘스. 내가 누구인지 알겠어?"
에멜은 칼리우스의 말에 모든 의지를 잃어버리고 고개를 숙였다.
"…위대한 용이시여."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더는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위대한 용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 사실을 인정하자, 마나가 일렁거리며 멋대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앞에 흐려졌던 탁한 것마저 씻어지는 기분에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네가 가진 마나의 본질이 어디에서부터 왔는지 떠올렸어?"
칼리우스는 또 자연스럽게 '마나의 본질'을 꺼내자 하벨은 그 말을 흘리지 않았다.
이 모습을 처음 본 레디나는 너무 놀라 손으로 입을 가렸고, 카샬은 갑작스러운 폭파 소리에 경비병이 달려올까 계속 경계하면서도 내내 칼리우스를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떠올렸습니다."
에멜은 아득한 산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내듯 중얼거렸다.
머릿속을 장악했던, 마법사가 가진 특별함만이 옳으며 이를 억압한 마법사가 아닌 이들을 향한 분노가 가루처럼 너무도 허망하게 사라져버렸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가 이제 눈앞에 보이자 에멜은 너무도 다급히 목소리를 냈다.
"저 안에… 아이들이 있습니다!"
하벨은 그 말에 바로 몸을 돌려 아래로 내려갔다.
'마나 반응은 분명 없었다.'
눈을 돌려 자신을 쫓아온 아라를 보며 또 생각했다.
'그 속에 정령들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아이들이라니.'
[이, 이 몸도 저 안에 뭐가 있는지 모르겠어. 정령들은 진짜 없었어.]
아라는 폭파 소리에 하나둘씩 몰려드는 정령들을 보았다.
"알아, 아라야. 여기는 부정한 게 없으니까."
한층 날카로워진 티에라 가문 소속 정령 기사들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정령들의 의심을 피할 필요가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곳에 부정한 것들은 없었다.
하벨은 어느새 자신보다 앞서 계단을 내려가는 레디나와 카샬이 보았다.
'아니, 이 몸뚱어리는 진짜 왜 이렇게 느려?'
하벨은 답답함을 느끼며 손가락을 튕기자 아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어. 이 몸은 지금 대장한테 정령수를 주지 않을 거야.]
"……?"
[안에서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막 쓰면 안 돼. 아까 폭발을 막느라 지금 순환의 길에 불순물이 벌써 반이나 올라왔…….]
아라가 투덜거리며 말을 꺼내다 깜짝 놀란 얼굴로 귀를 파닥거렸다.
[비 냄새가 나! 곧 비가 올지도 몰라!]
"…뭐? 비라고?"
칼리우스가 그 말에 바로 하벨을 쳐다보았다.
"비가 내린다고?"
카샬이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비라고요?"
모습을 감추려던 레디나조차 우뚝 서 카샬을 바라보았다.
"빨리 가야 하는 거 맞죠, 카샬?"
"당연하지. 비가 오는 날 도련님이 어떻게 되는지 봤잖아?"
"끙끙 앓는 한 마리의 애벌레가 되시죠. 보기 딱할 정도로요."
"나는 양처럼 보였어. 그때 도련님 눈동자가 엄청 순해져."
"…아니."
칼리우스마저 거들자 하벨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비가 오면 자신이 약해지는 건 맞지만, 모두가 거의 동시에 자신을 쳐다보니 당황스러웠다.
방금 만난, 그것도 싸웠던 장로인 에멜한테 뭐라고 하소연할 수도 없고.
"일단 내려가자."
하벨은 우선순위를 언급했다.
칼리우스에게 이름이 불린 그 사실 하나로 탁했던 에멜의 눈동자가 맑아진 걸 보자 처음에 기가 막혔다.
어떤 세뇌가 풀린 게 분명했다.
그런 상태에서 스스로 죄책감에 쌓여 고백할 정도라면 얼마나 큰일이겠는가.
[…아니, 무슨 일이야?]
정령들이 벽에 붙어 기웃거렸다.
곧 불길하기 짝이 없는 하벨을 보며 움찔거렸지만, 아라의 시선에 정령들은 생각한 걸 꺼내기가 어려웠다.
묘한 압박감이 들지 않던가.
[너희가 이렇게 가게를 부순 거야?]
정령의 물음에 하벨은 그들이 모를 정도로 은밀하게 일이 진행되었다는 걸 눈치챘다.
"여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하벨이 허공에 대고 묻자 에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치 정령사가 하는 행동을 하지 않은가.
"쉿. 조용히 해야 해.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약속해줘."
칼리우스가 에멜에게 말하자 그는 갑자기 밀려오는 충격을 애써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하니 지금 마법사 협회는 물론 전 나라를 상대로 사기를 칠 줄이야.
"무, 물론입니다. 제 모든 마나를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이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겠습니다."
에멜은 고개를 넙죽 숙이며 하벨을 힐끔 바라보았다.
[아니, 그걸 우리가 왜 알아야 하는데?]
[그러니까. 다른 걸 알아보느라 지금 정신도 없는데.]
정령이 투덜거리자 하벨은 그 모습이 익숙했기에 자신의 가면을 슬쩍 올렸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
[네가 누구인지 우리가 왜…….]
"하벨 티에라."
그 이름까지 언급하자 정령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뭐야. 네가 하벨 티에라라고? 티에라 가문의 막내아들? 우리를 엄청 도와줬다는 그 하벨 티에라?]
"그래."
하벨이 씩 웃자 정령들의 눈꼬리가 금세 온순해졌다.
긴장을 싹 풀고 나서야 그들 역시 평온하게 말을 걸었다.
[에이, 미리 말해주지.]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야, 하벨? 혹시, 혹시 티에라 가문에 도움을 요청하겠다던 우리를 만난 거야?]
"도움을 요청했다고? 그건 모르겠는데."
하벨이 고개를 가로젓자 정령들은 살짝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도중에 사라진… 건가.]
[…잠깐만. 이놈 얼굴 봐봐.]
정령이 에멜을 지그시 보더니 입을 열었다.
[어? 좀 비슷하게 생겼는데?]
[그러니까. 진짜 비슷한데?]
하벨은 정령들이 꺼내는 그 말을 그냥 흘리지 않았다.
마법사 협회와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일단 내려가면서 말해줘. 무슨 일인지 들어줄 테니까."
[정말? 정말 그래 줄 거야?]
"내가 누구인지 잊었어?"
하벨은 자신이 하벨 티에라라는 사실을 언급할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지만, 정령들을 안도시킬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정령사 가문, 티에라를 향한 정령들의 신뢰도는 상당히 높았으니.
[아니! 아니야! 이제 절대로 잊을 수 없어!]
정령들은 하벨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널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진짜 기뻐! 다른 정령들이 말해준 거랑 똑같아.]
[다른 정령들이 대장을 어떻게 말해줬는데?]
아라가 묻자 정령들은 서로를 보며 키득거렸다.
[엄청 멋지고, 착하고, 다정하고, 사랑스럽다고!]
[맞아! 대장은 그래!]
"응응. 내가 아는 도련님 그대로야."
아라가 활짝 웃자 뒤이어 칼리우스가 두 손을 움켜쥐었다.
하벨은 아라와 칼리우스가 펼치는 호들갑과 이어지는 정령들의 쫑알거림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저 결말이 어떻게 끝이 날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 * *
[…그래서 정령이 자꾸 사라졌어. 대체 어디에서 누가 그랬는지 모르고.]
정령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하벨에게 토로하자 옆에 있던 다른 정령들 역시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다 같이 모였을 때, 그때 사라진 걸 알 수 있었어. 근처에 부정한 것도 없었고, 우리의 흔적이 뒤섞여 있어서 자연도 정확한 답을 주지 못했어.]
[어어업! 부정한 것도 없었다구? 부정한 게?]
아라가 이빨이 보일 정도로 깜짝 놀랐다.
마법사 협회와 얽혀서 검은 물이든, 부정한 것이든 없던 적이 거의 없을 정도였기에 벌어진 아라의 입이 좀처럼 다물어지지 않자 하벨이 배를 간질여 닫아주었다.
[그래. 그래서 범인을 찾는 게 너무 어려웠어. 부정한 게 있었다면 당연히 마법사 짓이겠거니 생각했을 텐데.]
[그런데 진짜 마법사들 짓이었어. 또 마법사들이! 또!]
정령들은 에멜을 단번에 노려보았다.
그들의 살기를 느꼈는지, 에멜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일단 진정해. 모든 건 저기 밑에 있어. 다 드러나면 그때 말해도 늦지 않잖아?"
하벨은 정령들을 다독였다.
[그건 아는데. 왜 자꾸 마법사들과 얽히는 건지 모르겠어.]
[맞아. 너무 억울해. 우리가 언제 마법사들한테 해코지라도 했어? 우린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맨날 우리를 건드리는 거냐고.]
정령들이 하나둘씩 불만을 언급하며 으르렁거리자 아라가 양팔을 쭉 뻗었다.
[다들 진정해. 그렇게 화를 낸다고 해서 저 못된 마법사가 우리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동시에 말해버리면 대장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 이 몸도 이렇게 어지러운걸.]
아라가 꺼낸 말에 정령들은 언제 으르렁거렸냐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그래. 아라 말이 맞아. 일단 진정하자. 진실은 저 앞에 있으니까.]
정령들이 하나둘씩 진정되는 걸 보며 하벨이 입을 열었다.
"에멜."
하벨의 부름에 에멜은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 몰라 갈팡질팡했다.
"마법사 협회에서 내가 필요한 이유가 거대 정화 장치와 얽힌 일 때문이야?"
하벨이 넌지시 묻자 에멜은 흠칫 놀라며 하벨을 바라보았다.
"맞구나."
장난기가 어린 하벨의 물음에도 에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칼리우스가 에멜을 재촉했다.
"에멜. 도련님이 물으면 대답해주면 좋겠는데."
용의 목소리에 에멜은 가슴 속에 부글부글 끓는 죄책감과 기어코 마주해야만 했다.
"…예. 그렇습니다. 말씀하신 게 맞습니다. 물의 힘을 가졌다면 그 힘으로 오염된 물을 넘어 오미너스를 조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오미너스라니?"
하벨이 묻자 에멜은 머뭇거렸지만, 입을 열었다.
"검은 물 말입니다."
"…검은 물?"
하벨은 단번에 일그러지는 자신의 얼굴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