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고찰의 결과
* * *
남자는 직원이 죽었음에도 '이게 무슨 일이냐', '왜 그러냐' 같은 말을 꺼내지 않고, 어떤 변명도 내보이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숨을 참았다.
땅이 울렸다.
"달님이한테 위험한 마법은 안 돼. 내가 허락 안 해."
땅에서 무언가 올라올 때쯤에 칼리우스가 자신의 마나로 짓눌러버렸다.
쿵!
"…커헉."
남자가 피를 토하며 부들거리는 얼굴로 칼리우스를 바라보았다.
마법이 멈추다니. 그런 일이 있을 수가.
"햇님아. 개미를 죽일 땐 딱 그만큼 힘만 주면 되는 거야. 마나 아껴야지."
하벨이 대놓고 마법사들을 비아냥거렸지만, 남자는 뒤틀리는 속을 다독이는 것만으로도 벅차 보였다.
"알았어. 살짝만 힘을……."
칼리우스는 대답하다 말고 시선을 돌렸다.
또 마나가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이 몸이 해, 용용아!]
마나가 일렁거리는 그 지점에 아라가 정확히 바람을 일으켰다.
과하지도 않고, 뺨을 때리는 수준의 바람이었기에 직원으로 위장했던 마법사들은 갑작스러운 사태에 주춤했다.
하벨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로 독의 힘을 끌어오며 입꼬리를 잠깐 올렸다.
아라의 결연한 의지가 보였기에 하벨은 튀어나온 삼지창을 잡아선 아라가 일으킨 바람을 이용해 던졌다.
푸욱!
마법사의 어깻죽지에 박히자 아라가 깜짝 놀랐다.
[세, 세상에. 이 몸이 해냈어! 대장하고 합을 맞췄어!]
"커, 커커컥!"
숨을 참던 마법사가 몸에 퍼지는 독에 입에 거품을 물고 늘어지자 하벨은 손을 들었다.
마법사의 어깻죽지에 박혔던 삼지창이 다시 제 손에 들어오며 하벨은 마법사들을 보았다.
"반항하지 말고 곱게 죽어."
하지만 숨을 참는 소리가 들려왔고, 조용한 침묵 속 레디나가 나타나 마법사의 목을 그어버렸다.
콰드득!
바로 옆에서 일어난 동료의 죽음에 마법사들은 흔들렸고, 레디나는 다리를 길게 뻗으며 옆에 있던 마법사의 턱을 걷어찼다.
쓰러지는 다른 마법사 위에 올라타 심장에 단검을 박아넣으며 키득거렸다.
"당황했나 봐요. 귀여워라."
레디나는 죽어가는 마법사의 볼을 쓰다듬어주었다.
"안녕."
푸욱!
성큼 달려온 카샬이 레디나를 노리던 마법사의 마법이 발현되기 전에 머리를 꿰뚫고는 바로 배를 밀어버리며 검을 빼냈다.
"아직 웃을 때는 아닌데."
카샬이 입을 열자 레디나는 단검을 흔들며 말했다.
"에이, 당연히 올 줄 알았죠. 믿고 있었다고요."
레디나가 도구 주머니에서 암기를 꺼내던 그때, 가게가 흔들렸다.
"어……?"
쩌어어억.
하벨이 식물을 키워 가게 안을 가득 채워버렸다.
이성을 찾아가던 몇 남지 않는 마법사들마저 그 광경에 다시금 흔들렸다.
또 뭐가 오려는지 몰라도 마법사 중 한 명이 숨을 참았다.
그의 몸에 불이 붙어버렸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증거까지 싹 다 태워버릴 셈이었다.
화르르륵!
"저런. 잔머리는 허락할 마음이 없는데."
하벨의 말과 함께 모든 마법사들의 목 주변까지 불꽃의 링이 만들어졌다.
"자, 어떤 게 네 불꽃일까?"
태연한 목소리와 함께 하벨은 손에 쥔 삼지창을 흔들었다.
방금 보여주지 않았던가.
이 삼지창에 꽂혔던 놈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불에 휩싸였던 마법사는 조용히 불꽃을 꺼트렸다.
"너희가 마법사 협회 내에 어떤 위치였는지 내가 예상해볼게. 너희는 말이야."
하벨은 팔짱을 끼며 손가락을 톡톡 두드렸다.
"말단이네?"
아무리 자신이 이렇게 기습적으로 찾아왔다고 해도 너무도 쉽게 무너져내렸다.
"맞아. 여기에 달님 말대로 장로는 없어."
칼리우스가 하벨의 말을 보충해주자 그는 거침없이 물었다.
"장로는 어디로 갔지?"
이곳에 장로가 있는 게 확실한지 마법사들은 밀려오는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잠깐 깜박했네.'
마법사들의 탁한 눈동자에 하벨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죽여."
하벨의 말이 떨어지자 크게 휘두른 카샬의 검이, 레디나가 찌른 단검이 마법사들의 마지막 목숨을 끊어버렸다.
"일단 피를 모으겠습니다."
카샬은 검에 묻은 피를 저들의 옷으로 닦아내며 말했다.
재수 없지만, 하벨은 분명 페트리오의 힘을 빌릴 테니까.
"그럼 저는 비밀 통로를 찾아볼래요. 저 이런 거 잘 찾아요."
레디나의 말에 칼리우스와 아라가 곧바로 반응했다.
"비밀 통로?"
[우와아! 비밀 통로!]
"네. 마법사 협회가 멀쩡하게 빵집을 운영할 수는 있지만, 너무 수상하잖아요. 보통 이런 곳에 뭐가 짠하고 나오기 마련이죠."
레디나가 벽으로 다가가 두드렸다.
덩달아 그녀와 같이 벽에 붙은 칼리우스와 아라가 열심히 손바닥 발바닥으로 벽을 쳤다.
그때, 코를 벌름거리던 아라가 귀를 쫑긋 세우며 하벨을 바라보았다.
[어? 여기에 바람의 냄새가 나.]
"아라가 제일 먼저 찾았네."
하벨이 씩 웃자 칼리우스가 하벨을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그런데 도련님."
"왜?"
"이 식물은 왜 없애지 않아? 도련님은 힘을 많이 쓰면 아프잖아."
"혹시 모르니까."
"혹시 모른다니?"
"장로가 자리를 비웠으니까. 무슨 수작을 해도 이상하지 않……."
하벨은 말을 멈췄다.
털이 바짝 곤두서는 느낌이 밀려오자 눈동자를 굴렸다.
속닥속닥.
그때, 장례식장에서 폭탄이 터지기 전에 들었던 그 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래, 도련님?"
칼리우스의 재촉에도 하벨은 찝찝하게 올라오는 그 느낌에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뭔가 이상하다.'
"잠깐만요, 아라 님!"
아라와 같이 벽을 부수던 레디나가 다급히 손을 멈추고 아라를 불렀다.
코에 화약 냄새가 맴돌았다.
웬만한 이들은 모를 정도로 아주 희미한 냄새였다.
레디나는 소리를 유추해 조심스레 아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응? 왜 그래?]
아라가 눈을 동그랗게 뜰 때쯤 하벨은 자신이 펼쳐 놓은 식물들을 움직여 레디나와 아라, 그리고 칼리우스를 감쌌다.
콰아아앙!
폭발이 시작되며 뜨거운 열기와 함께 거대한 소리가 울리다 말고 갑자기 차단됐다.
"…허, 허억."
칼리우스가 숨을 몰아쉬며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뻗고 있었다.
소리도, 열도 죄다 마법으로 억눌렀다.
하지만 얼마 전에 하벨을 잡아먹을 뻔했던 그 폭탄이 생각이나 온몸이 떨리다시피 했다.
너무 무서웠다.
너무, 너무.
"…용아? 칼리우스. 칼리우스!"
귀를 꿰뚫는 하벨의 목소리에 칼리우스가 고개를 돌렸다.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것 외에는 하벨은 멀쩡했다.
정말 어딜 쳐다보아도 아무 문제도 없었기에 칼리우스는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왜 이렇게 놀라?"
하벨이 손을 뻗자 칼리우스는 그 손을 잡으며 울먹였다.
"도련님이… 이번에는 아무 이상이 없어."
"아니, 멀쩡해야지. 이제 마법 지워도 돼."
하벨이 키득거렸지만, 칼리우스는 그 웃음소리에도 풀린 다리에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용용아. 대장은 진짜 괜찮아. 이 몸도 이번에는 힘을 냈다구!]
아라마저 칼리우스를 다독이자 그제야 칼리우스는 눈을 크게 뜨며 주변을 살폈다.
거의 다 타버린 식물, 그 식물 뒤쪽에 휘날리고 있는 바람, 그 바람 뒤에 출렁거리는 물, 그리고 점점 모습을 감추고 있는 불꽃.
"용용아."
하벨이 손으로 칼리우스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키득거렸다.
"봤지?"
그러나 사실 자신도 놀랐다.
폭탄이 터지자마자 가슴이 쿵쿵 뛴 것도 사실이고, 지금 속이 울렁거리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여유가 있었다.
정령수가 있어 식물로 레디나와 아라 그리고 칼리우스를 덮었고, 바로 바람을 만들어 추가 벽을 만든 뒤 또 물로 몸을 보호했다.
그렇기에 날아간 벽 말고는 다들 아무 이상도 없었다.
"이번에는 폭발의 위력도 그때와 비교하면 턱없이 약하고, 아라도 내 옆에 있는데 당연히 다르지. 겁먹지 마, 용용아."
"정말로?"
[그으럼! 이 몸은 이제 달라! 그때 얼마나 후회를 했는데!]
칼리우스가 묻자 아라는 눈과 목소리에 힘을 가득 주었다.
아라는 폭탄이 터졌을 때 너무너무 무서웠지만, 곧 집중했다.
하벨이 폭발에 휘말렸을 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신이 바보 같아 보여 얼마나 울었던가.
자신이 손가락에 불을 만들어내는 연습 때처럼 차분히 숨을 내쉬니 차차 눈과 귀에 익어갔다.
불꽃이 흔들리는 모습과 그들의 목소리가.
―안녕.
그 수줍은 목소리에 아라는 저 불이 무섭지 않았다.
자신이 멈춰달라 부탁하니, 불꽃은 더는 몸을 팽창하지 않고 사그라들어주었다.
그때, 자신을 향한 불의 무한한 존중이 느꼈다.
[이 몸은 이제 할 수 있어!]
아라는 자신감이 마구마구 샘솟았다.
―그래, 아라야. 너한테는 다음이 존재하잖아? 오늘을 떠올리고, 다음에 더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야.
[대장 말이 맞았어! 이 몸에게는 다음이 있었고, 더 최선을 다하니까 달라졌어!]
물론 아라는 아쉬움을 느꼈다.
그때, 자신이 하벨에게 날아가 그 파편만이라도 잡았으면 이렇게나 크게 다치지 않았을 텐데.
"…레디나."
카샬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위로 올리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벨이 멀쩡해서 다행이지 설마하니 폭발에 또 휘말릴 줄이야.
피를 뽑고 있다가 등 뒤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고개를 돌렸더니 이미 폭발이 시작됐다.
하벨에게 바로 움직였는데 그는 괜찮다며 여유 있게 손을 흔들지 않았던가.
"…억울해요, 이건. 알잖아요. 설마하니 여기에 폭탄을 설치했을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레디나는 뻥 뚫린 벽면을 가리켰다.
안이 완전히 사그라들뻔했지만, 때마침 불꽃이 사라지지 않았던가.
"그래. 이건 예측하기 어렵지."
하벨의 목소리에 즐거움이 가득했다.
"잘했어, 아라야."
하벨이 아라를 배를 쓰다듬자 아라는 배시시 웃으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헤헤. 대장, 있잖아. 이 몸이 불꽃을 통제했어. 이 몸은 이제 이 몸이 만들어낸 불꽃 말고도 아까처럼 나타난 불꽃도 잡을 수 있다?]
아라가 양발을 벌리자 목에 멘 푸른 리본이 덩달아 흔들렸다.
하벨은 어쩐지 그 모습이 애처로웠다.
폭파 사건 때 아라가 서글프게 울던 모습도 생각이 났고, 괜히 그 사건을 의식해 저러나 싶어 아라의 볼을 잡아 말을 꺼냈다.
"아라야."
[응?]
"나는 괜찮아."
아라가 그 말에 손을 뻗어 마치 온기를 느끼려는 것처럼 하벨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으응. 이 몸은 알고 있어. 오늘 대장은 진짜, 진짜 멀쩡하니까.]
아라의 눈시울이 잠깐 일렁거리자 하벨은 칼리우스와 카샬, 그리고 레디나를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봐. 나는 멀쩡해."
"알고 있습니다. 굳이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카샬은 한숨을 내쉬었고, 레디나는 낄낄거렸다.
"아니. 왜 당연한 소리를 하세요?"
사실 엄청 놀랐다.
쿵쿵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하벨을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 멀쩡하게 손을 흔드는 그 모습에 웃음이 튀어 나와버렸다.
너무 웃기지 않은가.
"용용아."
하벨이 입을 열자 칼리우스가 대답하며 하벨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으응."
"안에 마나 반응이 느껴져?"
"아니. 안에 어, 아무것도 안 느껴져."
칼리우스가 고개를 가로젓자 하벨은 그제야 정령수를 거두며 위쪽을 바라보았다.
자신들이 폭발에 휘말리지 않았을 뿐, 미처 막지 못한 폭발의 흔적으로 지붕이 부서지지 않았는가.
"경비병들이 오겠네. 그리고……."
쿠웅!
누군가 날아와 땅을 힘껏 내리찍었다.
파동이 일어나자 칼리우스가 앞으로 나아가 손을 휘둘렀다.
강한 중력이 일어나며 누군가 일으킨 거센 파동이 사그라들었다.
남자가 휘날리는 머리카락과 함께 입꼬리를 올리며 서 있었다.
'장로다.'
하벨은 놈을 보자마자 확신했다.
화륵!
장로가 숨을 참자마자 화염으로 둘러싸인 호랑이가 나타나자 카샬은 그 모습에 현혹되지 않고 매개체를 잘라버렸다.
반으로 갈린 돌멩이에 호랑이가 사라졌다고 생각할 무렵, 칼리우스가 다급히 위를 쳐다보았다.
거대한 돌덩어리가 모든 걸 깔아뭉갤 기세로 내려오지 않던가.
"내가 해!"
칼리우스가 손을 위로 올리자 돌의 중력이 역행하며 거꾸로 하늘로 솟구쳤고, 그의 손이 움켜쥐어지는 순간, 중력이 한가운데로 몰려 돌덩어리를 바스러뜨렸다.
"…아. 우리가 찾던 분이셨군요."
장로는 마법을 보자마자 눈이 가늘어졌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법인가.
마나가 기뻐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는 듯했다.
"……!"
칼리우스는 그 말에 숨도 멈출 만큼 깜짝 놀랐다.
어떻게 단번에 알아본 걸까.
쿵쿵.
심장이 요란하게 울렸다. 자신 때문에 하벨이 들키게 되어버린 게 아닌가.
"그리고 이런 장난을 치면 됩니까? 이건 단지 장난이라고 보기 힘든데요."
무너져버린 가게를 살피던 장로의 눈이 살포시 감겼다.
마치 어린아이를 다독이는 할아버지 같은 모습이었다.
"하벨 티에라 공?"
하벨의 이름이 기어코 거론되자 칼리우스는 당황함에 손이 바들바들 떨었다.
하벨은 다리에 바람을 둘러 단번에 장로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쿠웅.
'…으아악.'
하벨은 비명을 꾹 참았다.
몸이 이 속도를 처음 느껴보았는지 당장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았고 어질거리고 온몸이 욱신거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하벨은 아무렇지 않은 척 삼지창을 들어 장로의 목에 겨눴다.
"그래서 어쩔 건데?"
하벨이 장난스레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