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짠. 잡았다(2)
* * *
하벨은 순간, 머릿속에 맴도는 룬델의 모습에 속에서 솟구치던 원망이 빠르게 식어가는 걸 느꼈다.
'…룬델은.'
자신의 손등을 쓰다듬어주던 룬델의 따스한 손길이 생각이 났다.
다정하게 웃어주던 그 미소는 자신이 생각해보았던 아버지의 모습과 다를 게 없었다.
'아니. 이번 일은 룬델과 별개다.'
빠르게 마음을 다잡은 하벨은 현실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곳이 원래 자신이 있던 곳과 같은 곳일 리가 없었다.
이 세계는 용왕을 몰랐으며 자신이 모르던 것들도 얼마나 많았던가.
만약에 여기가 자신이 살던 세계라면.
'아니.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하벨은 말도 안 되는 생각에 비웃음이 날 것만 같았다.
"혼란스럽다는 건 이해합니다. 저 또한 놀라고 있으니까요."
엘라힘은 무릎을 꿇은 그 자세 그대로 하벨을 달랬다.
하벨이 어떤 마음일지 충분히 이해가 갔다.
"하지만 맹세코 저는 거짓을 고하지 않았습니다. 방금 신께서 당신의 머리를 쓰다듬으셨을 때 제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런 말, 듣지 못했습니다."
하벨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더 깊어지자 엘라힘은 모두가 아는 사실에 기댔다.
"공께서는 신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몸이 아닙니다. 마법사니까요. 이미 다른 걸 받았습니다. 이는 자연의 법칙이기에 신이 아닌 이상 뒤집을 수가 없습니다."
마나를 담으면 신의 은총을 그 몸에 담을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신의 은총을 담게 된다면 마나를 담을 수 없었고.
이는 정령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엘라힘은 양손을 가지런히 땅에다 닿은 채로 고개를 숙이는가 싶더니 하벨의 발에 입을 맞췄다.
"…뭐 하시는 겁니까?"
하벨이 질색했음에도 엘라힘은 말을 이어나갔다.
"저는 오늘 일어난 일을 맹세코 무덤까지 덮겠습니다."
신의 아들이 도래했다.
하지만 엘라힘은 그 사실을 발설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신께서 정녕 하벨 공이 신의 아들이라 알리고 싶으셨다면 이 장소가 아닌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강림하셨어야 했습니다. 이는 비밀로 하라는 의미이니 저는 입을 다물겠습니다."
[…대장이 진짜 신의 아들이야?]
아라가 여전히 놀란 표정을 하며 물었다.
하벨은 당장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지금 자신은 마법사였으니.
"하지만 저는 공께 한 가지 맹세하겠습니다."
"하지 마세요."
하벨은 엘라힘의 말을 듣자마자 단호하게 끊었다.
맹세는 곧 얽매인다는 이야기이기에 불쾌감마저 드러냈다.
"나한테 아무것도 맹세하지도 말고, 방금 당신이 말한 것처럼 조용히 입만 다물면 됩니다."
"이 힘의 근원은 신께서 주신 겁니다. 제가 가진 힘이 언젠가 당신께 쓰이는 건 너무도 당연한 겁니다."
"그러니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신의 아들도 아니고 뭣도 아니니까요."
엘라힘은 너무도 강한 하벨의 부정에 더는 말을 이어나가지 않았다.
신을 모시는 신관으로서 신의 아들을 지키는 건 당연한 이치였으니 엘라힘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몸은 어떠십니까?"
엘라힘이 말을 돌리자 하벨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엘라힘은 자신의 허벅지를 꽉 쥐며 목소리에 조금 힘을 주었다.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신은 제 전부이자 모든 것입니다. 이 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직도 엘라힘이 포기하지 못하자 하벨이 잠깐 입술을 깨물었지만, 곧 입꼬리를 올렸다.
"그것참 아쉽게 됐네요. 이제 볼 일은 없을 테니까요."
엘라힘은 장례식장에 초대된 손님이었다.
곧 본국으로 돌아갈 그와 뭘 더 엮일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신께서 정해주신… 이 인연이 어디까지 닿을지 모르겠지만, 부디 노여움을 푸셨으면 좋겠습니다."
엘라힘은 하벨을 올려다보며 울상을 띤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건……."
하벨은 순간 울컥했지만, 자신을 다독이는 아라의 손길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입술을 꽉 다물었다.
[화내지 마, 대장. 응?]
아라가 조심스럽게 꺼낸 말에 하벨은 자신의 표정이 어떤지, 자신이 얼마나 화를 내는 건지 알았다.
'내가… 과했다.'
하벨은 엘라힘이 낸 빛이 자신을 쓰다듬었던 점과 엘라힘이 신이 말했다며 꺼낸 저 말에 흔들렸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저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결국 그걸 받아들이는 건 자신이었는데 왜 엘라힘한테 화풀이를 한 건지.
"…미안합니다. 내가 예민했어요."
하벨은 숨을 길게 내쉬며 말을 꺼냈다.
"아닙니다. 저 역시 정신이 없는데, 하벨 공께서는 오죽하겠습니까. 이해합니다. 제가 오히려 죄송합니다. 공께서 이해할 수 있게 천천히 전달 드렸어야 했는데."
"몸은 덕분에 좋아졌습니다."
하벨은 그제야 옅은 미소를 짓자 엘라힘은 깊게 숨을 토했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제가 여기에 있어봤자 하벨 공께 좋을 건 없어 보이네요."
엘라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이상 하벨을 흔들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을 삼키며 하벨에게 고개를 숙였다.
"엘라힘 신관님."
하지만 하벨이 자신을 부르자 엘라힘은 기쁜 기색을 드러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예, 하벨 공."
"뭘 하든 신관님의 마음이라는 건 압니다. 그러나 날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느니 하는 미련한 짓만은 제발 하지 말아 주십시오."
하벨은 엘라힘이 말을 할 때 지었던 표정과 눈빛, 그리고 목소리에 담긴 결연함을 느꼈다.
이는 자신이 많이 봐왔던 것들이었다.
상대를 위해 자신을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다는 강한 희생정신.
하벨은 이게 싫었다.
증오할 만큼 싫었다.
"…약속하겠습니다."
엘라힘은 하벨이 자신에게 바라는 저 말속에 어떤 애절함을 느꼈기에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벨 공. 저는 당분간 에르티안에 머물 생각입니다. 만약에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찾아오셔도 됩니다."
잠깐, 아주 잠깐 엘라힘은 슬픔이 찬 눈빛을 지으며 그대로 방으로 나갔다.
아라는 엘라힘이 나간 걸 확인한 후에 목소리를 냈다.
[…엘라힘 말이야. 이 몸이 보기에 방금 좀 슬퍼 보였어.]
하벨도 그 눈빛을 보았다.
이는 자신이 처음 신의 존재를, 그리고 이어지는 신의 말을 거부했기에 보였던 슬픔과 달랐다.
'…와아.'
레디나가 손으로 입을 가린 채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다 조심스레 걸어왔다.
자신도 모르게 엄청난 걸 들어버렸다.
자신이 반은 장난으로 말했던, 신이라는 말이 사실은 진짜일지도 모른다니.
하지만 레디나는 심각한 하벨의 표정에 더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아라야, 용용아, 헤레스, 그리고 레디나."
레디나는 자신까지 불리자 흠칫 놀랐다. 아직 하벨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을 텐데.
하벨은 숨을 가볍게 내쉰 뒤, 고개를 들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는 신의 아들 같은 게 아니야."
'신의 아들'을 언급한 순간, 속에서 울컥하고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애초에 정말 그랬다면……."
하벨은 말을 삼켰다.
"예. 도련님께서 아니라고 하시면 아닌 겁니다."
마치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처럼 보였기에 헤레스는 하벨을 다독였다.
"나도 도련님을 믿어! 엄청엄청 믿어!"
칼리우스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렇죠. 신의 아들이 아니라 제 신이니까요. 이번에는 농담하는 게 아닙니다."
말을 이어나가던 레디나 역시 도중에 멈칫하다가 더욱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하벨은 그들의 말에도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정말 그랬다면 내가 괴로워하는 걸 그냥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겠지.'
속에서 점점 올라오는 감정 때문에 하벨은 아랫입술을 꽉 힘을 주었다.
[대장. …이 몸이 괜한 질문을 해서 화가 났어?]
아라가 하벨을 쳐다보며 그의 손등을 살포시 쓰다듬었다.
하벨의 눈동자가 아라를 향했다.
'내가 절망에 사로잡혔을 때, 단 한 번이라도… 이렇게 손을 잡아주었다면.'
그랬다면.
하벨은 일어날 수도 없는 상상을 접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화 안 났어, 아라야."
[진짜?]
아라가 눈을 크게 떴다.
"그래. 정말이야, 아라야."
하벨은 아라를 쓰다듬자 그제야 아라가 배시시 웃었다.
바로 이 감촉이었다. 이 보드라운 느낌과 저 해맑은 웃음이 잠깐이지만 너무 그리웠다.
'어쩌면… 아라만큼이나, 아니 아라보다 더 내가 떠나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도련님, 있잖아."
칼리우스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나 아까 빛을 볼 때 엄청 신기하고 놀랍던 와중에 그 빛이 나한테 뭔가 알려줬어."
"너한테 뭘… 알려줬는데?"
하벨이 말을 더듬거리며 물었다.
칼리우스마저 무언가 들었을까. 그가 용이기에 가능한 일일까.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꼬여갔다.
"내가 알에 있을 때 나한테 뭔가를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어."
[알?]
"알……?"
"아, 알이요?"
아라와 하벨, 헤레스가 거의 동시에 깜짝 놀랐다.
[용용이는 알에서 태어났어? 우와아!]
아라가 입을 크게 벌리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너무너무 신기했다.
눈동자를 반짝거리던 아라가 점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어? 알에서 태어나는 건 새인데?]
고개를 갸웃거린 상태에서 아라의 한쪽 귀가 팔랑팔랑 흔들렸다.
[용용이는 새였어? 아닌데? 용용이는 용인데? 그럼 용이 새인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아라의 생각에 하벨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 나올지 기대가 됐다.
[용용이는 새였어!]
"…내, 내가 새라고?"
아라가 진지하게 꺼낸 말에 칼리우스는 당황했다.
이를 보는 하벨의 미소가 길어졌고, 레디나가 슬쩍 끼어들었다.
"새가 알에서 태어나긴 하죠."
"그, 그렇지만 나는 용인데?"
칼리우스가 놀라자 아라가 진지하게 대답해주었다.
[하지만 알에서 태어나는 건 용이 아니라 새야. 이 몸은 책에 봤다구!]
"…어어, 그럼 나는 진짜 새야? 그럴 리가 없는데……."
정체성에 혼란이 찾아온 듯한 칼리우스의 모습에 그제야 하벨은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헤레스마저 고개를 돌리며 어깨를 흔들자 칼리우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레디나와 아라를 바라보았다.
레디나는 간절한 칼리우스의 눈동자를 보자 입을 꽉 다물었다. 이상하게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이, 이 몸이 잘못 말한 거야? 하지만 책에서 새는 알에서 나온다고 적혀 있었는데. 세렌도 그렇다고 알려줬는데.]
주변 반응에 아라마저 당황했다.
더 내버려 뒀다가 칼리우스가 진짜 새가 될까 봐 하벨은 수습에 나섰다.
"네 말이 맞아, 큽, 아라야. 새는 알에서 태어나지."
하벨이 아라의 말을 두둔하자 칼리우스는 충격받은 얼굴로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나는……."
"하지만 용용아. 너는 용이야."
하벨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라는 칼리우스에게 날아가 꼭 안아주었다.
[미안해, 용용아. 이 몸이 몰랐어. 용용이는 용이야! 이 몸은 다신 그런 말을 하지 않을게!]
"용용아."
하벨이 부르자 안도의 숨을 몰아쉬던 칼리우스가 눈을 동그랗게 떠 하벨을 바라보았다.
"다른 건 몰라도 네가 용이라는 걸 잊으면 안 되잖아."
"하지만… 내가 용이라고 말해주는 건 이 머릿속 지식뿐인걸. 내가 진짜 용이 맞는 걸까 하고 엄청 고민한 적이 있어."
"누가 뭐라든 너는 용이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벨이 말해줬기에 칼리우스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는 용이고, 도련님도 신의 아들이 아니고, 용이야!"
칼리우스가 꺼내는 말에 하벨은 이를 부정하지 않고 그저 키득거렸다.
지금은 칼리우스에게 기댈 곳이 필요해 보였기에 더는 부정하지 않고 멋대로 착각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아! 도련님, 나 아까 본 게 뭐냐면."
확신이 생기자 칼리우스는 조금 전에 자신이 꺼내려고 했던 말을 꺼냈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했던 말이었다.
"나, 버림받은 게 아니었어!"
―…아가. 사랑스러운 우리 아가. 네가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란다.
"내가, 희망이래!"
손바닥이 간질거리는 기분에 광대가 저절로 올라갔다.
"나도… 부모님이 있었어! 나랑 도련님 말고도 용이 또……."
칼리우스의 눈동자가 갑자기 일렁거렸다.
방금 가슴을 건드리던 뭉클함보다 더 짙게 몰려오는 자신의 감정에 아랫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분명 기쁜데.
엄청 기쁜데 이상했다.
"용이 또…… 있었어."
칼리우스는 점점 울상을 지었다.
[뚝. 울지 마, 용용아.]
아라가 칼리우스를 볼을 쿡쿡 찔러도 칼리우스의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고여왔다.
하벨이 손짓하자 칼리우스가 걸어왔다.
"도련님, 나도……."
"그래, 용용아. 잘됐다. 너는 혼자가 아니었어."
하벨은 칼리우스를 쓰다듬었다.
자신이 엘라힘에게 들은 말은 충격적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이는 분명 칼리우스에게 잘된 일이었다.
칼리우스는 자신이 가졌던 마나를 거의 다 써버릴 정도로 동족을 애타게 찾고 있지 않았던가.
하벨은 처음 칼리우스를 데려왔을 때의 마음과 지금이 너무도 달라졌음을 받아들였다.
어쩌면 오직 자신만이 용왕이었던 사실과 유일한 용인 칼리우스를 겹쳐 봤던 게 아닐까.
무엇이 되었든 하벨은 부드럽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