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짠. 잡았다
* * *
하벨은 당황했다.
대체 오늘 몇 명의 대신들을 만나는지.
샬룸과 게리온은 물론, 지나오다가 스치듯 마주한 이들까지 포함하면 양 손가락이 다 모자랄 지경이었다.
지금 몸도 엄청 무거운 참인데.
"미리 연락했지만, 닿질 않아 이렇게 죄송스럽게 찾아오게 됐습니다."
엘라힘은 하벨을 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일부러 꾸며낸 표정처럼 보이진 않았다.
"아닙니다. 제가 잠깐 자리를 비웠습니다. 오래 기다리셨……."
"정말 죄송하지만, 잠깐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계속 하벨의 상태를 살피던 엘라힘은 더는 참지 못하고 하벨의 말을 끼어들고 말았다.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엘라힘의 눈에 어떤 강한 의지가 어려 있어 하벨은 저 모습이 뭔가 부담스러웠다.
"지금 좀, 아니, 많이 힘드시지 않습니까?"
엘라힘이 던진 말에 하벨의 휠체어를 잡고 있던 카샬이 멈칫거렸다.
하벨이 너무도 멀쩡하게 입을 놀리고 행동하기에, 주변에서 그에게 말을 걸어보고자 접근하는 이들이 너무도 많았기에 그제야 가장 중요한 걸 놓쳐버렸다는 걸 알았다.
자신은 그 무엇보다 하벨의 상태와 안전에 가장 신경 썼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도련님."
카샬은 속으로 정말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벼랑 끝에 앉아 다리를 흔드는 하벨의 저 모습에 익숙해져 버린 탓인지 몰라도 집사로서 그 중요한 걸 놓쳐버리다니.
"제가 보기에 카샬 씨가 사과할 이유가 보이질 않아요."
헤레스가 코너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말을 꺼냈다.
헤레스를 보자마자 하벨의 심장이 벌렁거려왔다.
쿵쾅쿵쾅.
하지만 뒤이어 고개를 빼꼼히 내미는 칼리우스와 아라의 모습에 요란하게 울리던 심장이 잠잠해지며 오히려 입꼬리가 씰룩 움직였다.
언제 보아도 행복해지는 조합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건 말이죠."
안경 속에 드러나는 헤레스의 눈꼬리는 사나웠지만, 그녀는 싱긋 웃고 있었다.
발걸음마저도 상당히 위협적으로 느껴져 헤레스가 가까워지자 하벨은 얼른 입꼬리를 내리며 몸을 뒤로 빼 등받이에 아주 깊게 기댔다.
"본인이 환자임을 인지하지 못하는 도련님의 탓이 아주 크지요."
"…그렇지."
하벨이 아주 조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헤레스의 귀에 들린 모양이었다.
"그걸 아시는데도 아직도 자각하지 못하시다니.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지는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떨까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신관님?"
이미 몇 번 봤는지 엘라힘과 대화하는 헤레스의 표정이 편안해 보였다.
"저야 상관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하벨 공의 치료를 돕기 위해 찾아왔으니까요."
엘라힘은 사람 좋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봤을 때도 자애롭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지금은 뭔가 수상하게 느껴졌다.
"치료요?"
하지만 속마음과 달리 하벨이 순진하게 묻자 엘라힘은 더욱 미안한 눈빛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렇게 마지막 차례가 되어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마지막 차례라뇨?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희 시엘느에서 이번 사건으로 다친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었습니다. 음, 여기 계신 헤레스 씨도 알고 계신 일입니다."
"맞아요. 저도 틈틈이 돕고 있었어요."
헤레스는 뒷말을 삼켰다.
사실 방 안에 가만히 있기도 그렇고, 하벨 옆에 계속 머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움직이기엔 마법사들을 만날까 봐 걱정이 앞섰다.
아직도 마법사 협회에서 자신과 크라마, 드웰 아저씨를 원하는 건 아닌지, 헤일리스와 마주하면 지금 맨정신으로 그녀를 볼 수 있는 있을지 여러 생각이 맴돌았다.
고민이 깊어지던 차 폭파 사건이 터졌고, 자원봉사에 나섰다.
자신은 사람들한테, 그리고 하벨한테 속죄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오늘 일이 용서되는 건 아니에요, 도련님.'
헤레스는 순진하게 웃고 있는 하벨을 보자 다시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어, 음, 어.
조금 전 칼리우스가 슬쩍 다가와 말꼬리만 길게 늘이자 바로 불길함을 직감하고 말았다.
―도련님이… 잠깐 갔다 온대. 그게 어디냐면…….
자신에게 말을 꺼내는 칼리우스 역시 그때 뭔가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우물쭈물하며 망설이다 이내 당황했다.
―어, 어떡해, 헤레스! 도련님이 준 심부름이 너무 신나서 나랑 아라랑 중요한 걸 잊어버렸어!
칼리우스가 꼭 쥔 손을 보며 하벨이 얼마나 속으로 웃고 있었는지 예상이 갔다.
아주 귀여웠겠지.
놀리고 싶을 만큼.
"도련님."
헤레스가 하벨을 부르자 그는 시선을 흘리며 앞을 가리켰다.
"이, 일단 들어갈까?"
"예. 그러도록 해요. 말을 나눌 시간은 아직 많으니까요."
헤레스의 눈이 잠깐 가늘어지자 하벨은 칼리우스에게 손짓했다.
"너도 들어와."
마음이 찔리는 것과 별개로 칼리우스한테 좋은 걸 보여줄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하벨은 속으로 살짝 신이 났다.
* * *
"…그럼 저는 치료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엘라힘은 하벨이 침대에 걸터앉자 곧바로 말을 꺼냈다.
"그런데요."
하벨이 말을 꺼내자 엘라힘은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하벨을 바라보았다.
그 위치가 매번 보던 눈높이라 하벨은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예. 말씀하시지요."
엘라힘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걸 신성… 력. 음, 이거 맞나요?"
"뭐라고 부르든 괜찮습니다. 저희는 신께서 주신 은총이라고 부르지만, 신성력, 신력 등 이름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저한테 그 힘을 사용하면 소비가 되는 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으니까요."
"혹시 채워집니까?"
그 물음에 엘라힘은 잠깐 구슬픈 눈을 하며 시선을 떨구었다.
"원래는… 신께 정성을 다해 기도를 올리면 은총이 채워졌습니다. 이게 신과 저희의 유일한 교감이라고 할 수 있었지요."
"혹시 그러면 지금은 응답이 없는 겁니까?"
하벨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물어보았다.
신성 국가라는 곳은 이름에서도 추측할 수 있다시피 신과 그 신을 따르는 종인 신관이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신과 교감에서 어떠한 응답도 없다는 사실을 알려줄 리가 없지만, 혹시 모르니 말을 던져보았다.
"예. 언제부턴가 그렇게 됐습니다. 신께서 저희에게 어떤 응답도 하지 않으십니다."
하벨은 서슴없이 꺼내는 엘라힘의 대답에 잠깐 놀라다 말고 딱 잘라 말했다.
"…그럼 됐습니다. 저를 치료할 필요 없습니다."
하벨은 여전히 당황스러웠다. 이건 분명 엄청난 일일 텐데.
"저는 괜찮습니다. 걱정해주니 너무 감사할 뿐입니다."
엘라힘이 자상한 미소를 짓자 하벨은 숨을 잠깐 멈췄다.
'뭐야? 진짜… 제대로 된 사람인가?'
점점 더 엘라힘이 아리송해졌다.
"신께서 제게 베풀어 준 사랑이 큰 만큼 많은 양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림짐작하건대, 앞으로 몇십 년간은 사용할 수 있는 양입니다."
"이렇게 시엘느의 약점을 말씀하셔도 되는 겁니까? 뒤가 두렵지 않으십니까?"
"하벨 공께서는 그런 일을 저지르실 분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여 제가 편안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겁니다."
"…으음."
"긴장 푸셔도 됩니다. 저는 그저 신의 종일 뿐입니다. 혹시 제 의도가 궁금하시다면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엘라힘은 그때처럼 손을 넘겨달라며 하벨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오오오. 이제 손에서 빛이 짠하고 나온다, 용용아? 잘 보고 있어야 해.]
곧 무언가 나올 거라는 아라의 말에 칼리우스의 눈이 덩달아 초롱초롱 빛이 났다.
"당신을 존경합니다."
엘라힘은 하벨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
"망설이지 않고 달려간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 또한 달려갔지만, 이미… 늦었지요. 무척 애석했습니다. 제가 대신 다쳤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엘라힘은 하벨이 머뭇거리다 내민 손을 잡았다.
"폭발이 터지는 와중에 공께서 물의 힘으로 사람들을 보호하는 모습 역시 보았습니다."
하벨은 필사적이었다.
너무도 필사적이었기에 마음이 움직였다.
자신의 미천한 몸뚱어리가 하벨에게 닿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토록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하벨 공을 존경할 이유라면 이미 충분하지 않습니까?"
이전처럼 엘라힘의 손에 빛이 감돌았다.
"만약 예전처럼 신께서 제게 은총을 내리며 말씀하셨다면 공에게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엘라힘의 눈에 은은한 노란빛이 맴돌았다.
우수수 일어나는 소름에 하벨은 이전과 무언가 다르다는 걸 알았다.
헤레스는 자신이 보았던 신관이 가진 힘과 다른 모습에 살짝 긴장했다.
[…어어?]
눈을 초롱초롱 뜨던 아라가 빛에 홀린 듯 멍하니 엘라힘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보아도 빛이 이전과 달랐다.
너무도 다정했다.
"정말, 정말 잘했다고요."
엘라힘이 활짝 웃자 그의 손에 뻗어 나온 빛줄기는 이전보다 더 강하게 하벨의 몸에 퍼져나갔다.
따뜻함을 넘어선 그리운 느낌이 몰려왔다.
"어……."
칼리우스가 말을 꺼내다 삼켰다.
어딘가 익숙한 느낌과 함께 기억 하나가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자신이 알에 있을 때 누군가 해주던 다정한 말이.
저 빛에 입을 벌리고 있던 아라는 슬쩍 본 하벨의 모습에 깜짝 놀라 다가왔다.
차마 앞발로 하벨을 잡지 못하고 자신의 꼬리를 꽉 쥐었다.
[왜 울어, 대장? 혹시 아파?]
하벨은 그제야 자신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알아차렸다.
'딱 한 번.'
딱 한 번이지만, 자신은 기억하고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펼쳐진 낯선 풍경에 놀라, 자연스럽게 터진 울음에 누군가 자신을 쓰다듬어주었다.
'…그 손길과 닮아있다니.'
그럴 리가.
하벨은 그 느낌을 빠르게 부정했다.
엘라힘의 손에서 하벨의 손으로 타고 흐르던 빛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었다.
그 모습에 신의 은총을 내보내던 엘라힘도, 그 힘을 받던 하벨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마치 손처럼 빛이 하벨의 머리를 살포시 쓰다듬었다.
다정함을 내보이듯 위로하듯 그렇게 하벨을 토닥이던 빛은 연기처럼 조용히 사라졌다.
[…빛이 움직였어.]
아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중얼거렸다.
"……."
하벨은 가슴이 요동치는 걸 느꼈다.
그때의 느낌과 거의 비슷했다.
쓰다듬는 손길도, 그 손길에서 전해지는 무언가도.
자신한테 무어라 말을 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럴 리가…….'
하지만 하벨은 자신이 느낀 걸 거부해야만 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
"…그, 그분의 의지를 느꼈습니다."
엘라힘이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믿을 수 없었다.
솟구치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숨마저 다급해졌지만, 엘라힘은 자신이 느낀 그 감각에 행복함으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의지… 라뇨?"
하벨이 반쯤 넋을 놓은 채로 물어보았다.
"제힘은… 이 힘은 신께서 주신 힘입니다. 신께서 방금 본인의 힘에 의지를 담아 제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엘라힘이 말을 하다 말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신께서 아직도… 아직도, 저희를 보고 계셨습니다. 신께서 저희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벨을 보는 엘라힘의 눈동자에 고마움이 가득 어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벨 공."
엘라힘은 머리를 바닥에 숙이고, 또 숙였다.
가슴팍까지 밀려오는 이 느낌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몰랐다.
"정말로… 말을 했습니까?"
하벨은 이 모든 게 낯설고 이상했다.
슬쩍 칼리우스를 보자 그는 아직도 얼이 빠져 있었다.
누가 봐도 신기하고 낯선 걸 본 사람이었다.
'이건 정말로 마나가 아니다.'
마나의 축복을 받은 유일한 용인, 칼리우스가 몸소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예. 신께서 제게 속삭이셨습니다."
엘라힘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
굳건한 의지가 눈동자에 어려 있었다.
"…뭐라고 말입니까?"
하벨은 갑자기 입가가 바짝 말라갔다.
"미안하고."
표정을 싹 지운 엘라힘은 말 하나에 온 신경을 쏟았다.
신이 자신에게 속삭였던 그 말을 하나도 흘리지 않으려 두 손마저 꽉 쥐었다.
"미안하다."
하벨은 멍하니 그 말을 들었다.
왜 이렇게 가슴이 일렁거리는지.
자신을 탄생시킨 누군가는 자신에게 그 말만 남기고 마지막까지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너는 바다와 물의 지배자인 용왕이자 그것들의 심장이다. 네 존재는 세계를 위한 것이며 세계를 위한 열쇠가 되거라.
태어나서 축하한다는 그 말도 아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말.
'그게… 고작이었는데.'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말.
누가 자신을 탄생시켰는지 얼굴도 몰랐기에 왜 원망하지 않았을까.
덩그러니 그 바다에 자신만 남겨놓았다.
뭘 해야 하는지.
뭘 할 수 있는지.
누군가가 자신에게 준 건 아무것도 없었다.
바다가 무엇인지 몰랐다.
바다만큼이나 하늘이 너무도 아득해 그 광경이 그저 무서워 웅크린 채로 얼마나 울었던가.
"…아들아."
엘라힘은 자신이 말하고도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했다.
신이 하벨에게 아들이라는 말을 꺼내다니.
하벨은 바로 입술을 꽉 다물었다.
이내 밀려오는 감정으로 부들부들 떨렸다.
'…그런데.'
그런데 저딴 말이 나오다니.
'그럴 리가 없다……!'
하벨은 온몸으로 그 사실을 부정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아닌가.
"지금… 나한테 거짓말을 하는 겁니까?"
하여 하벨은 엘라힘을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저딴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자신은 누군가의 아들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