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나랑 같이, 어때요?(3)
* * *
하벨의 얼굴에 금세 장난기가 어렸다.
"아, 범인은 레놀드 왕국이라고 했죠. 제가 깜박했네요."
"아니, 그건."
하벨이 갑자기 뒷걸음치는 듯한 소리를 내자 게리온이 다급히 그의 말을 붙잡았다.
"아니었어요?"
하벨의 입꼬리가 올라가자 게리온은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건 그냥 내지른 겁니다. 어제 레놀드 왕국에서 지껄인 말이 기가 차서요. 솔직히 범인이 누구인지 두 왕국을 위해서라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여 은밀히 제안하는 겁니다. 범인을 찾고 싶은 건 이 에르티안도 마찬가지니까요."
하벨은 다시금 게리온은 살살 긁었다.
게리온은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침음을 흘렸다.
"하지만 저나 당신도 너무 대놓고 오지 않았습니까? 이걸 애초에 '은밀히'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의심이 되는데 말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대신께서 말씀하신 대로 대놓고 찾아왔으니까요. 그럼 다른 이들이 보기에 제가 왜 당신을 만나러 온 거라 생각하겠습니까?"
"그거야… 화를 내러 오는 거겠거니 생각하지 않을까 합니다. 애초에 저도 그렇게 짐작했으니 말입니다."
"뭐, 물론 모든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대부분 제가 코스모피안 왕국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거라 생각할 게 분명합니다. 그러니 이 거래는 은밀하게 진행되기에 딱 좋지 않습니까?"
적어도 자신이나 게리온이 입을 벙긋하지 않은 이상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누가 알겠는가.
"그, 다시 묻기가 좀 그렇긴 한데 정말로 에르티안 왕국이 우리 코스모피안 왕국을 믿는단 말입니까?"
게리온은 괜스레 팔을 긁적였다.
처음에는 반가웠을지 모르겠지만, 조금만 시선을 돌려보아도 솔직히 너무 이상했다.
에르티안 왕국이 굳이 왜 코스모피안 왕국을 도와야 하는가.
"찔리는 구석이 많으시죠?"
하벨이 넌지시 찌르는 말에 게리온은 코를 먹었다.
찔리는 구석이 왜 없겠는가.
아주 많았기에 팔을 긁적이던 게리온은 시선마저 흘렸다.
"지금 주도권을 에르티안 왕국이 가진 걸 알고 있으니. 거, 속 시원하게 말씀해보시죠."
"코스모피안 왕국이 에르티안 왕국에 어떤 짓을 했는지는 지금 따지지는 않겠습니다. 에르티안 왕국이 탐이 나 첩자를 둘 수도 있고, 그 첩자를 이용해 티에라 가문을 압박하려고 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하."
게리온은 기가 찬 소리를 했다.
그냥 아예 대놓고 비난했지만, 말을 하면 할수록 자신이 불리해지는 상황에서 뭐라고 말하겠는가.
"아주 잘 참았습니다."
하벨이 이를 칭찬하자 게리온은 숨을 들이켜며 올라오는 화를 삼켰다.
마치 똥개훈련을 시키는 것 같지 않은가.
"지금 코스모피안 왕국에 이빨을 드러낸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때다 싶어서 우르르 달려들어 뜯어먹는 꼴이 왠지 어떤 왕국을 닮아있긴 합니다."
바로 에르티안 왕국이 휘청거리는 틈을 타 아주 깊은 뿌리를 박아넣은 코스모피안 왕국이.
하벨이 웃자 게리온은 언성을 살짝 높였다.
"…거, 비난하러 왔습니까? 그리고 야금야금 먹으려고 달려든 게 우리뿐인 줄 아십니까?"
"그 속에 레놀드 왕국도 있습니까?"
"당연한 거 아닙니까?"
게리온은 콧바람을 내쉬었다.
"대체 뭘 어디까지 캐냈는지 몰라도 그놈들이 아무것도 안 할 줄 아십니까? 아주, 순진하시네요. 사실 우리보다 더 독한 건 레놀드 왕국입니다."
하벨은 잠깐 눈동자를 굴렸다.
이게 단순한 비난인지 아니면 사실인지가 몹시 중요한 순간이 아닌가.
"역시 모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게리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 이후가 궁금하시다면 이제 뭘 하는 게 좋을지 아시겠습니까?"
단번에 주도권을 바꾸려는 게리온의 모습에 하벨은 작게 감탄했다.
"오."
"오……?"
"예. 감탄했습니다. 지금 누가 봐도 구석에 몰린 건 코스모피안 왕국인데, 거래를 제안하다니. 무슨 정신인가 했네요."
하벨은 휠체어 바퀴를 만지작거렸다.
"거래는 말입니다. 서로 균등하다고 생각할 때 하는 겁니다."
도발적인 말에 게리온의 눈썹이 올라갔다.
"아직도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게리온 대신?"
하벨이 싱긋 웃었지만, 눈동자는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제야 게리온은 숨을 낮게 내쉬며 하벨을 제대로 경계했다.
하벨을 얕봤던 상황이 파도가 되어 밀려왔기에 이를 꽉 다물었고, 하벨은 한층 더 여유로운 모습으로 게리온을 바라보았다.
"사실 알고 보면 진실이라는 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바라보는 건 이득이죠. 코스모피안 왕국이 무너졌을 때 자신들에 오는 이득 말입니다."
"말조심하십시오, 하벨 공."
"말조심해야 하는 건 지금 당신이잖습니까. 본국에 연락하지 못하는 지금 상황이 무척 답답하실 텐데 거래를 논하다뇨. 건방지잖아요."
하벨이 그제야 눈웃음을 지었다.
"게리온 대신. 지금 당신은 누구의 손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일 겁니다. 갑자기 큰 사건에 휩쓸렸으니 그 마음이 오죽하겠습니까?"
방금은 자신을 억압하는 듯했다가 또 이번에는 다독이는 느낌에 게리온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니,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겁니까?"
"후자요. 전자는 당연히 거짓말이죠. 제가 대신께 왜 그런 말을 하겠습니까?"
하벨은 게리온에게 지껄이고 싶었던 말을 꺼내 속이 후련했기에 다시 게리온은 다독여주었다.
"……?"
게리온은 당최 하벨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놀리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 입을 열려던 차 하벨이 자연스럽게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이렇게 서로 계속 으르렁거려줘야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시간을… 번다뇨?"
"코스모피안 왕국이 위기에 빠졌다 생각한 범인이 이제 어떻게 움직일지 멀리서 보자는 겁니다. 하여 곧 본국에 연락할 기회를 줄 겁니다."
"저, 정말입니까?"
게리온이 입을 벌리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반응했다.
조금 전 하벨의 태도가 어쨌건 간에 머릿속에서 싹 지워졌다. 지금은 본국에 연락해 이 피해 상황을 최대한 줄이는 게 중요하니까.
"물론입니다. 이제 서로가 어떤 상황인지 공유해야 하니 당연히 그렇게 해드려야겠죠."
하벨이 손을 내밀자, 게리온은 망설임 없이 그 손을 꼭 쥐었다.
"저 게리온은 코스모피안 왕국의 대표로서 에르티안 왕국의 의지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이는 밖으로 새어나가면 안 될 이야기인 걸 알고 계시겠죠? 다른 코스모피안 대신들까지도요."
"당연한 거 아닙니까? 이건 저와 전하만이 알고 있어야 할 이야기입니다."
게리온은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였다.
지금 코스모피안 왕국 내에 배신자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음에도 다른 이들에게 떠드는 건 미친 짓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럼, 지금처럼 계속 항의하세요. 외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전하께서 사람을 시켜 대신께 알려드릴 겁니다."
하벨의 지시에 귀를 기울이던 게리온은 잠깐 밀려온 생각에 입을 열었다.
"혹시, 그, 지금 일어나는 일은 어떻게 미룰 셈입니까? 다른 나라들이 동시에 항의하고 있지 않습니까?"
"조사 권한은 지금 에르티안 왕국에 있습니다. 게다가 조만간 즉위식이 열릴 겁니다."
하벨은 이미 예정되어 있던 일정을 먼저 꺼냈다.
"즉위식이요?"
"예. 즉위식 말입니다."
게리온이 턱밑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 사건 때문에 즉위식을 미룰 수는 없으니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제 안도하실 수 있겠습니까?"
"예. 즉위식이야 누가 막을 수 있습니까? 거, 이제 저한테 뭘 요구하는지 말씀해보십시오. 지금 이 사건이 얼마나 큰지 아니까 웬만한 것들은 들어주겠다 약속하겠습니다."
"그 점은 차후 전하와 찬찬히 말을 나누는 걸로 하고. 여기까지가 공적인 일이었다면 이제 사적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하벨은 선을 확실히 매듭지었다.
게리온 입으로 코스모피안 왕국을 언급했으니 이번 동맹은 체결된 것과 같았다.
서류 작업이나 여러 가지는 바안이 준비해야 할 몫이었다.
이 이상 해준다면 바안이 성장할 여지를 자신이 빼앗는 셈이 될 테니.
"사적인… 일이라니."
게리온은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말에 당황했다.
"이렇게 당신들을 구제한 건 접니다. 제가 전하를 설득시켰으니까요."
하벨은 당당히 자신을 가리키며 맞는 말만 꺼냈다.
"그렇다면 당연히 저한테 따로 주셔야죠."
"…그거야 맞는 말이지만, 조금 실망했습니다."
게리온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결론적으로 하벨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이 은밀한 동맹을 체결할 수밖에 없는 위치였고, 동맹 체결이 가능하도록 중간 다리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이 바로 하벨 티에라였으니.
"실망이라뇨.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대신의 얼굴에 주먹을 휘둘러도 당당한 입장인데요?"
하벨이 손깍지를 끼며 방긋 웃었다.
"아니면 코스모피안 왕국의 대표로서 저한테 한 대 맞으시는 건 어떠십니까? 그럼 덜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저한테 맞으면 솔직히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뭘… 원하십니까?"
게리온이 더욱 껄끄러움을 내비치자 하벨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티에라 가문과 관련된 레놀드 왕국의 정보. 그리고 코스모피안 왕국 내 마법사 협회 정보. 그걸 원합니다. 이 정도면 '실망'이라는 말을 꺼낸 게 부끄러워지시겠죠?"
하벨의 물음에 게리온은 하마터면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확실히 하벨이 요구한 건 터무니없을 만큼 적은 보상이었으니.
"레놀드야 방금 제가 계속 언급한 말 때문에 신경 쓰여서 그렇다 치는데 마법사 협회 정보는 왜 달라는 겁니까?"
"잊으셨습니까? 저는 물 마법사입니다."
하벨은 보란 듯이 물을 만들어내 게리온의 볼을 찌르자 그는 흠칫 놀랐다.
"…아."
하벨이 게리온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보다 그제야 눈앞의 인물이 누구인지 똑바로 바라보았다.
하벨 티에라는 물 마법사였다.
그것도 수백 년간 사라졌다는 물 마법사.
게리온의 눈동자에 욕심이 어리자 하벨은 만족하며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
"제가 들려야 할 곳이 꼭 에르티안 왕국의 마법사 협회에만 한정되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렇습니다. 코스모피안 왕국의 마법사 협회에도 들려야지요."
게리온은 그제야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벨이 코스모피안 왕국 내 마법사 협회 이야기를 꺼낸다는 말은 달리 보자면 코스모피안 왕국으로 온다는 말이었다.
이 좋은 기회를 날려버릴 수 없지.
게리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떤 정보가 필요한 겁니까?"
"알고 있는 정보 모두요. 지금 안에 계셔서 모르겠지만, 절 질투하는 마법사들도 있고 제가 티에라 가문의 막내아들이라 싫어하는 이들도 정말 많습니다."
"그거야 안 봐도 뻔합니다. 마법사 놈들이야, 아, 하벨 공을 말한 게 아닙니다."
게리온은 말을 이어가다 말고 일단 손을 휘휘 저었다.
"마법사 놈들이야 이상한 짓을 꾸미는 게 하루 이틀 일입니까?"
"혹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마법사들이 자꾸 귀족들에게 접근하는 게 너무 수상해서 하는 말입니다. 에르티안 왕국 내에서 그런 일은 없었습니까?"
'코스모피안 왕국 내에서도 뭔가가 일어난다는 말이지?'
하벨은 일반 반만 받아들였다.
게르온이 여타 귀족과 달리 화끈한 면모가 있지만, 저자 역시 귀족이었다.
정보를 쉽게 주진 않을 테지.
"저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정치를 잘 모릅니다. 하여 방금 질문도 정말 몰라서 물어본 거니 오해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다만 조금 신경 쓰이는 건 있습니다."
하벨이 이전과 달리 조심스레 말을 하자 게르온은 그 모습을 참 낯설게 바라보았다.
"아까는 막 말씀하시더니. 거, 아까처럼 막 내지르십시오."
"그럼 코스모피안 왕국에 있는 거대 정화 장치는 괜찮습니까?"
"…으음."
게르온은 금세 침음을 흘렸다.
반사적으로 나온 반응이었다.
이것 때문에 솔직히 얼마나 골치 아픈가.
"문제가… 음, 생기긴 했습니다."
"만약 코스모피안 왕국으로 간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거대 정화 장치 일에 저도 관심이 많으니까요."
하벨은 게리온에게 빚을 지울 셈이었다.
그의 성격은 대충 파악이 됐으니 나중에 코스모피안 왕국에 있는 마법사 협회를 무너트릴 때 도움을 받지 않겠는가.
"…뭐가 또 필요해서 그러는 겁니까? 아니 애초에 왜 도와주려는 겁니까?"
게리온은 하벨을 의심하며 물었다.
"제가 먼저 대신께 신뢰를 보인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제가… 미우실 텐데, 어떻게 그런 반응이 나올 수 있는 겁니까?"
"밉지 않습니다."
하벨은 진실을 말했다.
애초에 자신은 하벨 티에라가 아니었기에 코스모피안 왕국에는 딱히 큰 감정은 없었다.
하벨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 저랑 같이 어떠십니까? 이건 사적인 일입니다."
"뭘… 말입니까?"
"동맹 말입니다. 저와 당신, 이렇게요."
가벼운 목소리와 장난기가 어린 표정임에도 이상하게 신뢰가 가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게리온은 그것과 별개로 하벨 티에라를 붙잡아야 할 이유가 무조건 있었다.
"…진심이십니까?"
"날 원하잖아요?"
게리온의 물음에 하벨은 속마음을 꿰뚫어 본 것처럼 말을 꺼냈다.
"내가 더욱 탐이 나버렸잖아요."
하벨은 게리온의 마음을 다시 긁었다.
하벨 티에라가 필요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바로 룬델이 사랑하는 아들이었고, 라르웬처럼 클로저도 아니고, 넬시아처럼 헤스트리아 왕국과 관련이 되어 있지 않으니 상대해야 할 자들이 적어 얼마나 효율적인 인물인가.
이런 이유를 포함해 지금은 '물 마법사'라는 희귀성까지 생겨버렸으니 탐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나랑 같이, 어때요?"
하벨은 내민 손을 흔들었다.
"놓치면 후회할 텐데요?"
게리온은 마치 마지막 기회처럼 여겨지는 그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처음 하벨을 봤을 때 측은한 마음이 앞섰고, 동시에 얕보고 말았다.
하지만 하벨은 자신의 위치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단순한 희소성이 아닌 그곳에 '희망'이 얹어져 더욱 반짝거렸다.
게리온은 자신이 하벨에게 휘둘렀음을 인정했다.
그렇기에 하벨의 손을 잡았다.
그의 옆에 있어야 자신이 무엇이라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역시 현명하시네요."
하벨은 만족해하며 잡은 손을 몇 번 흔들었다.
"아. 하나 물어도 됩니까?"
"물어보시지요."
"코스모피안 왕국에서 티에라 가문을 원하는 이유가 뭡니까?"
"거, 알다시피 티에라 가문이 가진 힘이 탐이 나서겠지요?"
게리온은 다 아는 사실부터 꺼냈다.
이미 들킨 이상 숨기기보다 차라리 털어놓아 설득하는 편이 좋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전하께서 오염된 물을 정화하길 원하십니다. 신하 된 도리로 이를 이뤄드리고 싶은 게 정상 아닙니까?"
뜻밖의 대답에 하벨은 입을 다문 채로 가만히 기다렸다.
오염된 물을 정화하고 싶다니.
'개소리인가. 개소리가 아닌가.'
하벨의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맴돌 때쯤, 게리온이 뒷말을 이었다.
"안타깝지만, 에르티안 왕국은 티에라 가문을 지원해줄 능력도, 돈도, 힘마저 없는 상태가 아닙니까? 하지만… 티에라 가문은 이상하게도 에르티안 왕국을 떠나지 않더군요."
'에르티안 왕국이 티에라 가문의 목줄을 잡고 있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네?'
하벨은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어 참 재미있다 싶었다.
바안이 그 목줄을 즉위식이 끝난 뒤 풀어준다고 약속한 상태였기에 아마 이 사실을 아는 건 끝까지 에르티안 왕국과 티에라 가문뿐이지 않을까.
"그래서 놔주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니 억지로 뺏겠다는 말을 하려고 하는 겁니까?"
"공이 티에라 가문의 사람이니 더 잘 알 거 아닙니까. 오염된 물이 점점 더 심각해진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코스모피안 왕국은 티에라 가문이 가진 힘이 필요하고, 오지 않겠다니 억지로 데려오려는 것뿐입니다."
게리온은 하벨을 빤히 쳐다보며 뒷말을 이었다.
"세계를 위해선 당연한 겁니다."
순간 하벨은 웃음을 뿜을 뻔했다.
세계를 거론하는 꼴이 왜 이렇게 우스운지.
"좋은 말씀입니다. 그럼 코스모피아 왕국이야말로 세계에 위기가 닥쳤을 때 제일 먼저 움직이겠네요?"
"물론입니다. 그게 코스모피안 왕국이 가진 자부심이니까요."
"기억하겠습니다."
하벨은 정말로 말뿐인지 아닌지 너무도 궁금했다.
하지만 꼭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그렇게 만들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다.
겨우 그딴 이유로 티에라 가문을 건드리다니.
'재수 없네.'
* * *
"……?"
헤레스가 있으면 어쩌나 고민하던 하벨은 자신의 방 앞을 서성이는 이를 쳐다보며 살짝 놀랐다.
"안녕하세요, 하벨 공."
신성 국가 시엘느의 신관인 엘라힘이 활짝 웃으며 자신을 반겼으니.
'아니. 오늘 무슨 날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