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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188화 (188/415)

188화. 눈 좀 똑바로 떠(2)

* * *

"오, 그게 바로 제가 생각한 정답입니다, 전하."

하벨은 아주 해맑게 웃었다.

'사실 이미 정해진 결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랜턴을 힐끔 본 하벨은 분위기를 살폈다.

설령 세계가 멸망한다고 해도 이 사실을 그대로 전달할 수 없으니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래도 제대로 전달이 되어 무척 다행이네.'

흡족한 하벨의 표정에 묵묵히 듣고 있던 페트리오가 바안 못지않게 놀란 눈으로 손가락만 까닥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바안을 생각해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공이… 방금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어떤 놈이 코스모피안 왕국을 무너트릴 초석을 쌓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바안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처럼 보여 하벨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바안은 그 대답에 숨을 삼켰다.

코스모피안 왕국을 무너트릴 초석을 쌓은 것과 별개로 이를 이용해 다른 나라를 무너트릴 수 있다면 이 얼마나 큰 이득일까.

특히나 강한 쇄국 정책을 펼쳐 외부에서 어떤 정보도 알 수 없는 왕국이라면?

바안은 마른 침을 삼킨 뒤에 목소리를 냈다.

"…그래서 공이 사실 놈이 진짜 노리는 건 헤스트리아라는 말을 한 겁니까?"

"예. 이는 누님께 직접 들은 말입니다. 이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전하?"

하벨은 낄낄 웃으며 유자차를 마시다 손에 힘이 빠져 조금 흘리고 말았다.

익숙하게 뒤를 돌아 손수건을 요구하던 차 잠깐 멈칫했다.

카샬이 자신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무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지 않은가.

"카샬?"

하벨이 묻자 카샬은 그제야 놀라며 하벨을 바라보았다.

일순간 카샬이 멈춘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아 하벨은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정말… 그놈이 바라는 게 헤스트리아의 멸망이란 말입니까?"

카샬답지 않게 예의는 어디다 팔았는지, 심지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지. 쇄국 정책을 펼치고 있으니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누가……."

하벨이 말을 하다 말고 한쪽 눈썹을 올렸다.

카샬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지 않은가.

그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감정을 내보인 적이 얼마나 있던가.

하벨은 건드리면 안 될 걸 건드린 찝찝함이 거세게 몰려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이, 이상이 생긴 건 사실이지만, 이건 어디까지 기우였어, 카샬. 가능성 말이야."

말을 돌리긴 했지만, 하벨은 여전히 카샬의 태도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왜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지?'

혹시 카샬이 헤스트리아와 관련이 있는 걸까.

"흔한 일은 아니지만, 헤스트리아 왕국에서 내쫓긴 사람들이 더러 있다고 들었습니다."

바안은 차 받침대에 놓였던 티스푼을 들어 차를 천천히 저어나갔다.

카샬은 마른 침을 삼켰다.

찻잔을 쥔 바안이 미묘한 시선으로 카샬을 바라보았다.

"하벨 공의 집사. 자네는 헤스트리아 왕국 출신입니까?"

느긋한 바안의 분위기와 달리 카샬은 강한 압박감을 느꼈다.

"저는……."

"전하."

하벨이 도중에 끼어들었다.

헤스트리아 왕국이 거론됐고, 때마침 카샬이 이상한 반응을 보여 이를 파고들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이건 자신이 허락할 수 없었다.

"제 집사는 걱정이 많습니다. 혹여나 제가 헤스트리아 왕국으로 갈까 이를 걱정했음이 분명하고, 전하를 처음 뵙는 자리라 왜 긴장하지 않았겠습니까? 예의에 어긋난 행동을 하여 전하의 마음이 상했다면 저를 탓하십시오."

하벨이 머리까지 숙이자 바안은 난감한 표정을 드러냈다.

하벨이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아닙니다. 내 개인적인 호기심이 과했어요. 어릴 적부터 헤스트리아 왕국에 대한 궁금증이 많아서 실례했네요."

바안은 속으로 아쉬움을 숨겼다.

헤스트리아 왕국 출신이 세계로 퍼져 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은 있지만, 실제로 본 적은 아직 없었다.

그러던 중 혹시나 하는 생각에 흥분한 건 사실이었고.

"내 표정이… 좀 이상했겠지만, 결코 자네를 추궁한 건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해요."

바안은 카샬을 다독였다.

하벨 말대로 귀족들의 집사로 평생을 지내도 자신을 이렇게 가까이 볼 횟수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그제야 카샬의 얼굴과 목에 맺힌 땀이 보였다.

어쩌면 긴장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맴돌았다.

"…아닙니다, 전하. 제가 무척 송구합니다."

카샬은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깊게 숙였다.

"이제 됐습니다."

바안은 손을 휘젓다 갑자기 드는 생각에 살짝 정색하며 하벨을 쳐다보았다.

"하벨 공."

"예, 전하."

"내가 아는 사람 중 공이 가장 예의를 지키지 않는 분입니다. 그건 명확히 짚고 가겠습니다."

하벨은 카샬의 상태를 살핀 뒤에 찻잔을 가볍게 흔들었다.

하벨의 미소가 길어졌다.

"영광이네요. 앞으로도 열심히 그 자리를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네. 계속 그래 주세요. 왕은 혼자서 나아갈 수 없고 반드시 옆에서 싫은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면서요?"

"예. 그럼 판을 깔아주셨으니 말씀 좀 올리겠습니다."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말에 바안은 찻잔을 꽉 쥐었다.

또 이렇게 빈틈을 찔러오다니.

어떻게 된 건지 한 번을 지는 꼴을 못 보지 않았던가.

"잘하셨습니다, 전하."

"……."

바안은 살짝 얼이 빠진 표정으로 차를 꿀꺽 삼켰다.

"잘 참으셨습니다."

이어진 하벨의 칭찬에 그제야 바안은 민망한 표정을 짓다 고개를 살짝 숙였다.

"…참아야 하니까요."

바안은 찻잔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오늘도 참아야지요."

바안의 시선이 잠깐 서류뭉치로 향했다.

해결해야 할 일은 많은데 자꾸 여기저기 터져나가니 맨정신으로 버티는 게 꽤 버거웠다.

"그러니 방금 세상이… 멸망한다는 그 말이, 그게 참, 섣불리 받아들일 수 없는 건 이해해주세요. 하지만 일단 인정은 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하벨이 겪었던 일들이 하나씩 이어지면 그 모든 게 세상의 멸망으로 향하는 길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 길이 보였다고 해서 바로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만큼 큰일이고, 너무 아득해 어쩌면 우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발목을 잡고 있었으니.

자신이 지금 '왕'이라고 불리기는 하나, 아직 즉위식을 치른 것도 아니라 버겁기까지 했다.

"이해합니다. 솔직히 이만큼 받아주신 것만으로도 고마울 뿐입니다."

하벨이 어쩐지 어른스러워 보이는 미소를 짓자 바안은 그 모습마저 무척 수상하게 느껴졌다.

찻잔을 들려다 바안은 하벨이 아직 아무것도 꺼내지 않았다는 걸 알아챘다.

조금 전에 언급한 건 세상이 멸망한다는 밑바탕이 필요하기에 내뱉은 게 아닌가.

"그럼, 하벨 공. 이제 본론을 꺼내야지요. 내게 무얼 요구하러 왔습니까?"

바안의 물음에 하벨은 씩 웃었다.

"요새 눈치가 더 빨라지셨습니다."

"더 빨라져야죠. 에르티안에 나를 언제든 물어뜯으려고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잡아 먹히지 않으려면 눈치가 빨라야지 않겠습니까."

나날이 강해지는 왕권에 반대하는 이들이 점점 나타나고 있었다.

좋은 신호였다. 귀족들이 경계할 만큼 회복되었다는 의미였으니.

"그럼 이참에 검술도 덤으로 배우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벨이 살짝 돌려 말했지만, 요컨대 자신의 몸을 지킬 수단을 마련하라는 의미였다.

"음……."

바안은 티스푼을 손에 쥐고는 그대로 테이블에 깔끔하게 박아 넣었다.

"보이죠? 내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어요."

바안이 활짝 웃으며 가리킨 곳을 따라가던 하벨은 입을 벌렸다.

원목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데 너무도 쉽게 테이블을 파고들었다.

'…바안을 노리지 않은 이유가 이것도 포함된 건가?'

하벨은 입가에 묻은 유자차를 핥았다.

"내가 재주가 좀 좋습니다. 위에 형님이나, 아래 동생이 없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 그게 아니라 내가 악착같이 살아남은 겁니다, 하벨 공."

바안은 다시 티스푼을 빼내서는 테이블에 올렸다.

그의 눈동자에 어린 슬픔이 제법 깊었다.

"이제 말씀하세요."

"제가 협상하겠습니다."

하벨도 이제 장난은 관두고 본론을 꺼냈다.

"협상이라뇨?"

"코스모피안 왕국 대신을 만나겠습니다. 하여 동맹을 체결하겠습니다."

"내게 요구하는 건요?"

"절 사절단의 우두머리로 임명해주십시오."

"……!"

바안이 입을 살짝 벌렸고, 페트리오의 눈이 커졌으며 카샬은 하고 싶은 말을 꾹 참았다.

"사절단… 이라뇨? 갑자기 사절단 이야기는 왜 나오는 겁니까?"

"아, 지금 당장 간다는 말은 아닙니다. 여기서 정리해야 할 게 몇 가지 있어서 말입니다."

하벨은 입안에 퍼지는 향긋한 유자차에 행복함을 드러냈다.

에르티안 왕국에 있는 마법사 협회를 박살 내고 검은 달의 지부를 불태워버린 뒤에 움직일 생각이었다.

"그, 그러니까 왜 공이 간다는 말입니까? 물론 지금 공의 말을 듣고 나니 다른 나라의 흐름을 직접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긴 했습니다."

"맞습니다. 양심에 찔려서든 휘말리기 싫어서든 어쨌든 장례식장에 와줬고, 폭발 사건도 벌어졌으니 사절단을 꾸리기에는 아주 적절한 시기가 아니겠습니까?"

큰 사건을 정면으로 부딪치려는 하벨의 태도에 바안은 경악에 가까운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공이 가야 하는 이유는 없습니다."

"제가 구했잖습니까. 유일한 물 마법사에다 그 나라의 백성들을 폭발에서 구했는데 이를 마다할 왕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제가 가는 겁니다."

현재 에르티안 왕국이 가진 위치.

그 위치를 생각한다면 환영받기 어려운 건 사실이었다.

하벨은 자신을 가리켰다.

"대신들 중 누가 가장 믿음직합니까, 전하?"

안대에 가려져 하벨의 눈이 하나밖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아주 깊고 은은하게 반짝였다.

바안은 하벨의 물음에 입술을 깨물며 부르르 떨었다.

당연히 하벨이 아닌가.

그는 자신에게 단 한 번도 실망을 안겨주지 않았다.

오히려 이번에 벌어진 폭파 사건에 자신이 보았던 하벨의 모습이 진짜라는 것까지 알게 되어 신뢰는 더 깊어진 상태였다.

"예. 바로 접니다."

하벨은 뻔뻔하게도 입을 놀리자 바안은 이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몹시 안타까웠다.

"아, 이참에 현재 감옥에 갇힌 가짜 코스모피안 왕국의 대신 놈이랑 지금 감금된 진짜 코스모피안 대신들도 보고 싶습니다. 이건 무조건 허락하셔야 합니다."

부들거리는 바안의 표정에 하벨은 신이 난 채로 하나를 더 요구했다.

"요구가 많… 습니다, 하벨 공?"

"요새 저한테 뭘 줘야 하나 고민이 깊지 않습니까?"

"……."

바안은 깊게 숨을 내뱉었다.

하벨이 허를 찌르길 좋아해도 너무 좋아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제가 자진해서 사절단의 우두머리로 임명해달라고 전하께 요청하고, 전하께서는 이를 보상으로 주는 식으로 흉내 낸다면야 공평하지……."

"그건 보상이 될 수 없습니다. 물론 공이 그 부분을 해준다면야 받겠지만, 보상으로 덮어쓰겠다는 말은 거부하겠습니다. 그건 보상이 아닙니다."

바안이 테이블을 살짝 쳤다.

단호함을 넘어 불쾌함까지 보였다.

"알겠습니다. 이건 제가 접겠습니다."

이번에는 하벨이 한발 물러났다.

바안을 보러온 목적을 모두 충족했으니.

"그럼. 더는 전하의 시간을 빼앗지 않고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자, 주시죠."

가라고 할 때는 버티고 있다가 목적을 달성하니 너무도 쉽게 가버리는 모습에 바안은 허탈감이 살짝 들었다.

"내가… 속은 기분이 강하게 듭니다. 어떻게 된 건지, 홀라당 벗겨진 기분이 들기도 하고요."

바안의 옷을 빤히 보던 하벨이 싱긋 웃었다.

"옷은 멀쩡히 잘 입으셨습니다. 아주 멋지시네요."

"그 말이 아니잖습니까."

"쿠키 가져가도 됩니까?"

"…예예. 잠깐만 기다리세요. 다 들고 가도 됩니다."

바안은 빨리 포기하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

"쿠키 말고 유자차도 마실 수 있게 넉넉하게 준비하라 말하겠습니다."

"거대 정화 장치를 귀족이 아닌 나라에서 관리하도록 바꿔주셨으면 합니다. 이게 제가 바라는 보상입니다."

"…차라리 유자차를 달라 했으면 덜 마음이 쓰였을 텐데. 그건 당연하잖습니까."

바안은 짧은 한숨과 함께 안쓰러움을 드러냈다.

"그러면 제가 가진 땅이 하나 있습니다."

"공이 가진 땅이요?"

바안은 눈동자를 굴리다 곧 최근에 티에라 가문이 소유했다던 땅을 떠올려보았다.

"아……. 그 땅 말하는 겁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그 땅은 왜 언급하시는 겁니까?"

"소유권을 왕실에서 인정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미 티에라 가문이 소유한 게 아닙니까?"

"마법사 협회가 그 땅을 노리고 있습니다. 뭔들 못 하겠습니까? 하여 왕실에서 인정만 해주신다면야 이제 안심이죠."

"그럼, 하나 더 주겠습니다."

"하나 더요?"

"기대하세요."

바안은 그저 웃었고, 차를 마신 후에 손바닥으로 문을 가리켰다.

"나가는 문은 저쪽입니다, 하벨 공."

바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웅도 하고 싶으나, 지금 머리에 든 걸 정리해야 해서 배웅은 할 수 없으니 이해해주세요."

하벨은 바안을 바라보며 눈만 깜박거렸다.

"이제 3분 뒤에 나가면 됩니다."

바안은 책상으로 걸어가 대충 휘갈겨 쓴 종이를 내밀었다.

카샬이 얼른 뛰어와 받고는 하벨에게 넘겼다.

"임시 임명장이요. 거기 적힌 거 보이죠?"

바안의 말을 들으며 하벨은 시선을 내렸다.

받은 종이는 총 두 장.

―(감옥에 갇힌) 가짜 코스모피안 대신들 만나기 1회.

그냥 대충 갈겨 쓴 흔적이 고스란히 보였다.

―대리인.

두 번째도 첫 번째랑 비슷했다.

그 밑에 주절주절 적혀 있지만, 없느니만 못한 말이 아닌가.

"왜요? 못 믿겠습니까?"

바안은 주머니에서 도장을 꺼내서 흔들었다.

"인장을 찍었으니 확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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