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187화 (187/415)

187화. 눈 좀 똑바로 떠

* * *

충고 같기도 하고 건방진 소리처럼 들리기까지 했지만, 바안은 뒤통수를 맞은 표정으로 멍하니 하벨을 보았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조금 더 멀리 보라고 했습니다."

"아니, 그거 말고요."

"헤스트리아 왕국이 위험합니다. 이런 상황에 코스모피안 왕국에서 테러를 저질렀죠."

태연한 하벨의 말에 바안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아, 다시 정정하겠습니다. 누군가 코스모피안 왕국이 테러를 저지른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었죠."

하벨이 주먹을 쥔 손을 내밀었다.

"애초에 저를 노렸는지, 목표가 바뀌었는지 몰라도 이번 폭파 사건의 주목적은 당연히 접니다."

하벨이 손을 벌렸다.

"퍼엉. 아주 화려했죠?"

이번 폭파 사건에서 사망자를 제외한 중상자는 자신뿐이었다.

그만큼 목표가 확실했기에 코스모피안 왕국에서 물 마법사를 죽이려 했다는 오명을 벗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어떤 놈은 지금 코스모피안 왕국을 무너트릴 초석을 쌓았고 덤으로 하나를 더 얻은 상태입니다. 그 덤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하벨 공?"

바안은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하벨을 불렀다.

힐끔 쳐다본 페트리오와 카샬의 표정에 충격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아마도 저 말은 두 사람한테도 꺼내지 않았던 말인 듯했다.

"예, 전하."

"공의 주장을 부정하고 싶지 않으나 터무니…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점, 충분히 이해합니다. 이렇게만 듣는다면 너무도 이상하고, 이게 무슨 소리일까 싶을 겁니다."

바안은 하벨이 꺼내는 말에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 그대로이니.

"솔직히 저도 긴가민가했습니다."

가만히 누워서 할 수 있는 건 몇 개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보드라운 아라를 쓰다듬으며 이번 일을 생각하다 생각의 고리가 별 꼬리처럼 엮어지고, 이어지다 하벨 티에라의 말을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까지 도달하고 말았다.

―세상이. 이 세상이… 멸망할 겁니다.

작은 사건, 큰 사건이 이어져 하나의 별자리처럼 보이자 하벨 티에라 말대로 세상은 조용히 망가지고 있었으니.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마치 자기 생각에 긍정하는 듯 팔찌에 달린 랜턴이 잠깐 흔들렸다.

'랜턴에 본격적으로 검은 불꽃이 붙었던 시작점이 바로 티에라 가문 근처에 있는 티에라 마을 뒷세계였다.'

그곳에서 마법사 협회가 티에라 가문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과 검은 달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됐지 않은가.

그다음이 티에라 가문을 삼키려던 귀족들에게 반응했다.

그들은 마법사 협회와 은밀한 거래를 나눴고, 과거 거지 같던 대신들마저 떠올라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그 화살을 귀족들에게 겨눴다.

'그래서 피의 연회가 벌어지고, 많은 귀족이 죽어 나갔다.'

여기가 자신의 관점이라면 바안의 시점은 달랐다.

"선왕께서도 전하께서도 지금 모르는 게 하나 있지 않습니까."

"모르는 거요?"

바안은 의문을 드러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에르티안 왕국이 무너졌는지."

―나 역시 그때는 너무 어려 자세히는 모르지만, 적어도 '갑자기'는 아니었습니다. 서서히. 그리고 천천히 에르티안 왕국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바안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그 이유를 모르시잖습니까?"

―아버지께서 왕실의 힘이 사라졌다고 생각했을 무렵 이미 늦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왕정파 귀족들이 무너지고, 강했던 왕실의 권력마저 이전 세력들에게 잡아먹혔으니까요.

"피의 연회에 죽였던 세력이 성장한 것 역시 눈치채지 못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혹시 기억합니까?"

"…기억합니다."

바안은 반 박자 늦게 대답했다.

사실이긴 하나 여전히 찝찝한 사건이었다.

"혹 피의 연회 때 죽었던 귀족들을 조사해 무언가를 알아내셨습니까?"

하벨은 그 사건 이후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저건 더는 자신이 개입할 일이 아니었고, 마법사 협회를 어떻게 무너트려야 하는지, 검은 달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그걸 고민하고 있었으니.

이는 페트리오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자연히 시선이 바안에게 쏠렸다.

"피의 연회에 휘말렸던 귀족들에게 거액의 돈이 입금됐습니다. 하나도 빠짐없이요."

바안은 살짝 긴장하며 말을 꺼냈다.

갑자기 하벨이 꺼냈던 말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일단 계속 쫓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안이 말을 멈추자 하벨이 대신 대답해주었다.

"쉽게 잡히질 않고 있겠죠."

이는 당연했다.

돈이라는 건 퍼졌다가 다시 모여서 흘러 들어갈 수 있으니 그 물길을 쫓으러 들어갔다간 오히려 방향을 잃기 쉬웠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벨은 환하게 웃었다.

방금 바안이 머뭇거린 이유가 이게 아닐까 생각했다.

"코스모피안 왕국이 에르티안 왕국에 손을 뻗었다는 증거는 그 일에 비하면 아주 빠르고, 간단하게 나왔습니다. 물론, 제가 뒤지다가 우연히 사건이 이어진 것도 있지만, 코스모피안 왕국이 그 정도로 멍청한 왕국입니까?"

현재 제2의 왕국은 코스모피안 왕국이었다.

한때 이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강했던 왕국이기도 했다.

그런 왕국이었기에 에르티안 왕국에 뿌리를 깊게 박았다는 사실이 걸린 지금까지도 뻔뻔하게 어떤 말조차 꺼내지 않는 게 아니겠는가.

"…아닙니다."

바안이 불편함을 내비쳤지만, 하벨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이미 에르티안 왕국에 비호감으로 찍힌 상태에서 선왕께 비극이 찾아왔습니다."

선왕을 죽인 암살자가 코스모피안 왕국에서 사주를 받았음을 실토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페트리오를 통해 그가 코스모피안 왕국의 암살자인 척하고 있다는 게 밝혀지지 않았는가.

"…그리고 지금 폭파 사건이 터졌지요."

바안은 하벨이 천천히 짚어주는 이야기의 흐름에 사건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따로 떨어져서 본다면 코스모피안 왕국은 에르티안 왕국에게 있어 죽일 놈이지만, 멀리서 본다면 흐름이 너무도 이상했다.

그냥 거의 자폭한 게 아닌가.

바안은 그 이상함에 미간을 찌푸리며 손가락을 매만졌다.

"이래서 멀리 보라고 하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전하. 흐름이라는 게 참 재밌지 않습니까?"

똑똑.

분위기를 잠재울 겸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오, 유자차네요!"

하벨은 활짝 웃었다.

"카샬."

"예, 도련님."

"헤레스가 이거 먹어도 된다고 했지?"

"뭘 드셔도 되니, 움직이지만 말라고 했습니다."

"…유자차는 이쪽입니다."

하벨은 왕실 집사의 묘한 시선에 자신의 앞을 다급히 가리켰다.

"아하, 하벨 공의 주치의가 정말 그렇게 말했나요?"

바안은 집사가 먼저 자신의 앞에 내려놓은 찻잔을 보다 말고 카샬을 쳐다보았다.

"그렇습니다, 전하. 그 말에 단 하나의 거짓도 없습니다."

카샬이 성큼 대답하자 바안은 집사가 물러나길 천천히 기다렸다.

그 후에 찻잔을 쥐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넘어가기 전에 소소한 물음을 해도 되겠죠, 하벨 공?"

"소소하다는 게 어떤 의미입니까?"

"공은 마법사가 아닙니다."

"맞습니다."

"…아니, 그렇게 빨리 대답하면 어떡합니까?"

바안은 뒷말을 이으려다 말고 주춤거리자 하벨이 낄낄거렸다.

"아닌 걸 아니라고 말씀드렸을 뿐인데요?"

"아니 그럼 대체 공은 어떻게 마법사가 된 겁니까?"

"혹시 너무 궁금해서 잠이 오지 않으셨습니까?"

하벨이 히쭉 웃자 바안은 찻잔을 꽉 잡았다.

꼭 어린아이를 놀리는 주변 어른의 표정과 닮아 있었다.

아직 성년식도 못 한 하벨이 어떻게 저 표정을 아는지.

카샬은 흠칫 놀라며 조용히 하벨을 찔렀다.

그만하세요.

'…아니, 왜 이것도 못 하게 말려?'

하벨은 뒤쪽에 카샬이, 옆쪽에 페트리오가 슬쩍 찌른 손가락을 느끼며 콧바람을 내쉬었다.

정작 바안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데.

"맞습니다."

바안은 태연하게 대응했다.

어린아이의 장난에 맞장구쳐주는 건 어른의 몫이니까.

"전하."

"그래요, 하벨 공."

"죄송하지만, 이건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허락을 구해야 합니다."

용용이한테.

"허락이요?"

"예, 허락을 구해야 합니다."

기분이 나쁠 법하나, 바안은 오히려 확고히 대답하는 하벨의 반응에 더욱 궁금했다.

"벌써 기대가 되네요."

바안이 방긋 웃자 하벨은 유자차를 한 모금 마신 후에 같이 나온 갓 구운 쿠키도 입에 넣었다.

바사사사삭.

하벨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이 났다.

'이런 모습을 보면… 제 나이가 맞는 것 같은데.'

바안은 종잡을 수 없는 하벨의 모습에 추측하는 건 그냥 포기했다.

"이제 말해도 돼요."

"장례식이 열린다는 걸 아는 놈이 누구겠습니까?"

하벨이 손에 쿠키를 쥐며 말을 던졌다.

"…푸흡."

바안은 차를 마시다 말고 금세 사레가 들렸다.

세상에.

바안은 놀란 표정으로 카샬이 넘긴 손수건을 받았다.

"차가 뜨거우니 식혀 드세요. 그걸 말씀드리는 걸 잊었네요."

하벨은 황당함을 금치 못하는 바안을 보며 씩 웃었다.

바안은 기가 차 자꾸만 헛웃음이 손수건 속으로 흘러나왔다.

방금 하벨이 물은 질문의 정답은 간단했다.

장례식이 열릴 걸 알고 있는 자는 범인이었다.

"…그래서 코스모피안 왕국이 에르티안 왕국에 저지른 일이 짜증 나는 것과 별개로 범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코스모피안 왕국의 진짜 대신은 포탈의 오작동에 뱃길을 선택했지만, 몰아치는 해일로 불가피하게 늦어버렸다.

장례식장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유일하게 몰랐던 자들.

당연히 범인일 리가 없었다.

만약 코스모피안 왕국이 범인이라면 이는 멍청함을 넘어섰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공이… 코스모피안 왕국과 손을 잡으라는 말입니까?"

바안은 여전히 얼이 빠진 얼굴로 말을 꺼냈다.

"예, 전하. 제 등을 언제 찌를지 모를 놈과 그래도 언제 찌를지 아는 놈 중 누굴 선택하겠습니까?"

바안은 그 물음에 입가를 핥았다.

당연히 후자였다.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의 차이는 정말 컸으니.

그것이 제 목숨줄을 움켜쥐었다면 더더욱.

바안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차의 향기가 몸속까지 스며들었다.

멀리 보라는 하벨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며 그가 그린 그림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이 말을 꺼낸 겁니까?'

―이걸 가주님이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헤스트리아 왕국이 위험합니다, 전하.

자신에게 부담이 되기에 머뭇거린 건지, 아니면 말하는 걸 잊었는지 몰라도 룬델이 꺼내지 않은 말이었다.

"그럼… 공이 꺼낸 헤스트리아 왕국 일은."

바안은 말을 꺼냈고, 도중에 멈췄다.

다시 헤스트리아가 나오자 카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이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래서 저는 이번 일과 얽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이 말한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놈이 일으켰다는 말입니까?"

"저도 그놈이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놈이 세계의 흐름을 꽉 쥐고 있는 건 분명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까?"

바안의 몸이 살짝 앞으로 나오자 유자차를 한 모금 마시던 하벨이 그 모습에 낄낄 웃었다.

아까는 차갑게 자신을 보지 않았던가.

"갑자기 호기심이 도십니까?"

"공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그럽니다."

"전하께서도 이제 보이지 않습니까?"

"방금 이유만 안다면 더 잘 볼 수 있습니다."

바안은 어느새 주먹을 쥔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호기심과 궁금증이 가득한 눈에 하벨은 자신을 가리켰다.

"……?"

바안은 그 의미를 알기가 어려워 눈 사이를 좁혔다.

"마법사 협회에서 티에라 가문을 노렸습니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바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암살자 집단에서 절 죽이려 합니다."

하벨은 '검은 달'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찻잔을 잡은 바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니 대체……."

"피의 연회 전에 티에라 가문 근처에 있던 귀족들이 티에라 가문을 고립시켜 누르려고 했습니다."

바안은 하벨이 주문처럼 꺼내는 말에 입술만 움직이며 가만히 기다렸다.

"마법사 협회에서는 거대 정화 장치를 이용해 오염된 물을 검은 물로 바꿨고, 전 기상국장 웨인 톨이 가졌던 날씨를 맞히는 기술까지 응용해 이를 더 강화하려고 했습니다. 더불어 정화제 사건도 벌였습니다."

줄줄이 사건을 읊던 하벨은 깔끔하게 유자차로 입을 적시며 수수께끼를 내듯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 마법사 협회는 지금 무엇과 연결되어 있습니까?"

"오염된 물과 연결되어 있네요."

"그럼 저와 티에라 가문은 무엇과 연결되어 있습니까?"

"…오염된 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안의 표정이 굳었다.

"헤스트리아 왕국은 또 무엇과 연결되어 있습니까?"

또 묻는 하벨의 질문에 바안이 내쉬는 숨에 어깨가 흔들렸다.

오염된 물이었다.

모두 오염된 물하고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

바안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선왕을 죽음으로 내몬 그 암살자가 누구의 사주라고 말했는지 혹시 기억하십니까?"

하벨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질문했고, 바안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꺼냈다.

"코스모피안 왕국입니다."

"하여 전하께서는 무얼 일으키려고 했습니까?"

"……."

바안은 가슴을 찌르는 하벨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멍청한 자신은 전쟁을 일으키려고 했으니까.

"이번 폭파 사건으로 원래라면 누가 가장 곤란해지는지 짐작이 가십니까?"

하벨은 질문을 던지고 얄미울 정도로 평온하게 유자차를 마셨다.

바안은 흔들리는 눈으로 하벨을 쳐다보다 페트리오를 바라보았다.

만약에.

그 폭파 사건 전에 하벨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자가 거짓을 고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코스모피안 왕국의 대신들이 꺼낸 말이 진실이라는 정보를 페트리오가 가져오지 않았다면.

자신의 분노는 다른 이들과 똑같이 코스모피안 왕국에게 향했겠지.

'누군가… 내게 계속 전쟁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상황 자체가 자신을 조여오고 있자 그제야 바안은 하벨이 말한 누군가가 있다는 걸 확신했다.

"지금 마법사 협회를 주축으로 물의 오염을 가속화하고, 이때 왕국끼리 싸움이 벌어진다면. 이 모든 게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예상하시겠지요?"

하벨은 그제야 후련한 표정을 했다.

바안이 자신이 느낀 위화감을 느꼈으니.

"세상의… 멸망입니다."

바안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대답했다.

따로 떨어져서 본다면 이어지지 않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멀리 본다면 달랐다.

전쟁으로 물의 오염은 더욱 가속화될 테고, 지금보다 오염이 심각해진다면 남은 결말은 하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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