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속닥속닥(3)
* * *
* * *
"…하."
바안은 마른세수를 했다.
그의 눈 밑이 퀭했다.
피곤함에 찌든 눈을 깊게 감았다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겼다.
상황이 갑자기 왜 더 복잡해진 건지.
무사히 장례식만 끝나면 나라에 뿌려질 벌레들을 소탕할 준비를 했는데, 갑자기 폭파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하."
바안은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손에 펜을 쥐었다.
어제 룬델이 찾아왔다.
―더는 티에라을 비울 수 없어 이렇게 전하를 찾아뵀습니다.
룬델은 자신을 보자마자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해했다.
왜 저 표정을 짓는지, 어째서 돌아가야 하는지.
무엇보다 라르웬과 넬시아, 그리고 하벨은 그대로 왕실에 둔 상태에서 룬델 혼자 가는 게 아닌가.
하지만 룬델이 간다는 사실에 마음이 좋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그가 있음으로써 여러 나라 대신들도 귀족들마저 살짝 억눌려 있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 전하께서는 그리 쉽게 흔들리실 분이 아닙니다.
룬델이 자신을 다독였지만, 걱정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술의 힘을 빌리고 싶은 충동도 들었다.
바안은 서류를 처리하다 말고 손아귀에 힘이 빠지자 괜히 책상에 얼굴을 기댔다.
피곤함이 몰려와 눈을 감았다가 뜨니 연락용 아이템이 보였다.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하벨의 말을 빌리자면 현재 코스모피안 왕국의 대신들이 주장하는.
'하벨 공.'
―이전 코스모피안 왕국 대신들은 가짜이며 이번 폭파 사건과 코스모피안 왕국은 전혀 관련이 없다는 그들의 말은 모두 진실입니다.
'왜 그리 복잡한 걸 주셨습니까?'
당연히 거짓이라 생각했던 일이 사실은 진실일 줄이야.
―어느 쪽을 선택하시든 저는 전하를 믿겠습니다.
룬델은 덤덤하게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떠나지 않았던가.
그가 말한 대로 이를 선택하는 건 결국 자신이었다.
'하벨 공한테…….'
딸랑딸랑.
저 멀리서 흔드는 방울 소리에 바안은 깜짝 놀라 허리를 세우고는 방으로 들어온 왕실 집사를 보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하벨 티에라 공이 전하를 뵙길 요청합니다."
"……?"
바안은 손에 쥔 펜을 다시 떨어트렸다.
서류에 잉크가 튀자 집사는 이를 빠르게 정리하며 수습했다.
"…지금 뭐라고 했나요?"
"하벨 티에라 공이 전하를 뵙길 요청한다 말씀드렸습니다."
"하, …하벨 공이요?"
바안은 너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틀 전에 보았을 때, 하벨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했던가.
"설마 걸어서 왔나요?"
"아닙니다. 휠체어를 타고 오셨습니다."
"…하."
바안은 그제야 미끄러지듯 자리에 앉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문득 드는 생각 하나에 눈을 크게 뜨며 깜박였다.
"아니, 하벨 공은 대체 왜 여기까지 오는 겁니까?"
바안의 물음에 집사는 조용히 생각했지만,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자신이 본 사람 중 하벨 티에라야말로 앞집에 놀러 오듯 제일 가벼운 마음으로 바안을 찾아왔으니.
"그럼, 공손히 돌려보내겠습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하벨 공이 그 몸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돌려보냅니까?"
바안은 미간을 꾹 눌렀다.
안 봐도 뻔했다.
주변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을 찾아왔겠지.
'분명 코스모피안 왕국의 대신 일로 하벨 공이 나를 찾아왔을 테지.'
바안은 자신이 직접 하벨을 배웅하러 걸어나갔다.
거절은 그렇고, 좋은 말로 돌려보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집무실로 오려면 들려야 할 여러 문이 바안의 걸음걸이에 맞춰 열렸다.
마지막 문이 열리자 하벨은 위를 쳐다보며 깜짝 놀랐다.
"…전하?"
바안은 눈동자를 움직였다.
지금 하벨의 휠체어를 미는 건 카샬이며 그 옆에 페트리오까지 보였다.
"에르티안 왕국의 가장 존엄하신 분을 뵙습니다."
카샬과 페트리오가 바안에게 고개를 숙였다.
"어서 들어오세요. 하벨 공의 집사도 들어와도 됩니다."
하벨의 휠체어를 쥐려던 페트리오가 바안의 말에 멈칫거렸다.
"카샬도 들어와도 됩니까?"
하벨이 놀라며 물었다.
"이번만입니다. 다들 이해해줄 겁니다."
바안은 싱긋 웃은 채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설마하니 이 일로 꼬투리를 잡는 이는 없을 겁니다. 그건 내가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요."
지금 주변 상황을 수습하느라 잠깐 늦어질 뿐이지, 하벨에게 어떤 보상을 내리는 게 좋을지 열심히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누구든 이번 일로 흙이라도 뿌리려고 한다면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바안은 그대로 돌아섰다.
"들어가자."
머뭇거리던 카샬은 하벨의 재촉에 휠체어를 밀었다.
―오늘은 바안 전하를 보러 갈 거야. 왠지 그러고 싶은 날이네.
하벨이 밥을 먹으며 툭 하고 던진 말에 난리가 났다.
하지만 하벨이 실실 웃으며 꺼낸 말에 순식간에 정리가 되어버려 카샬은 다시 떠올려도 분통했다.
―지금 바안 전하를 뵙고 '코스모피안 왕국과 협상해야 합니다'를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오늘도 침대에 얌전히 있을게.
자신이나 레디나, 하물며 칼리우스까지 입을 다물어버렸으니.
진짜 치사하게.
애초에 바안을 어떻게 대면할 수 있겠는가. 그럴 위치도 되지 않았다.
옆에 있는 페트리오가 입을 다물어버려 그게 가장 걸렸지만, 아무래도 자신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모종의 대화를 나눈 모양이었다.
"역시 아가씨와 둘째 도련님을 찾아갔어야 했나 싶네요."
카샬이 목소리를 죽이며 신경질이 섞인 목소리를 내자 하벨이 키득거렸다.
"누님을 찾아가지 않은 이유는 네가 더 잘 알 거고, 형님은 지금 바빠. 건들지 마."
라르웬이 지금 클로저 일로 정신이 없었고, 넬시아는 저번 회의 때나, 개인적으로 대화하면서 알아버렸다.
평소에는 아주 차분하지만, 특정한 무언가에 아주 쉽게 터지는 사람이라는 걸.
그 단어 중 하나가 바로 '가족'이었다.
원래도 가족은 건드리면 안 될 단어인 건 맞지만, 그녀는 더 예민했다.
그 이유를 얼마 전에 룬델을 통해 알아냈기에 하벨은 충분히 이해했다.
티에라 가족들은 일반 가족들보다 더 특별하게 뭉쳐 있으니.
"…그럼 역시 헤레스 씨를 찾아갔어야 했습니다."
카샬은 바안을 힐끔 바라보다 목소리를 조금 더 낮췄다.
바안이 옅지만, 웃음을 터트리고 있지 않은가.
"헤레스가 잠깐 자리를 비운 걸 확인하고 나왔는데?"
당당한 하벨의 말에 휠체어를 미는 카샬의 속도가 느려졌다.
칼리우스일까, 아라 님일까. 아니면 다른 정령님들?
요새는 짐작 가는 곳이 너무도 많았다.
"뒤는 감당하실… 아닙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카샬은 말을 아꼈다.
바로 앞에 왕이 있다는 걸 또 잊을 뻔했다.
페트리오의 숨소리가 잠깐 흐트러지자 카샬은 그가 자신을 비웃는다는 걸 알았지만,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편하게 말해도 됩니다. 하벨 공이 사고뭉치라는 건 이미 나도 압니다."
바안이 걸으며 고개를 살짝 뒤로 돌렸다.
문을 열고 반긴 하벨의 모습에 순간 깜짝 놀랐다.
겨우 이틀밖에 지나지 않아 크게 나아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음에도 충격이 고스란히 다가왔기에 내색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가.
바안은 그 감정을 떨구려 말을 걸었다.
"그런데 헤레스라면 공의 주치의가 아닙니까?"
"맞습니다, 전하."
"지금쯤 화가 많이 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설마 말없이 왔겠습니까? 제 시종한테 말을 전해뒀습니다."
하벨은 자신을 말리던 아라와 칼리우스가 어느새 심부름에 치중되어 힘껏 의지를 다지던 모습이 떠올라 속으로 낄낄거렸다.
참 놀려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하벨 공."
바안의 목소리가 갑자기 짙어지자 하벨은 어리둥절하며 대답했다.
"예, 전하."
"대체 그 몸으로 왜 날 찾아온 겁니까?"
바안은 아예 걸음을 멈췄고, 언성을 높였다.
덩달아 휠체어를 멈춘 카샬은 갑자기 바안을 향한 존경심이 샘솟았다.
'잘하고 계십니다, 전하. 힘내십시오.'
그 기분을 페트리오도 느끼고 있다는 게 무척 기분 나빴지만, 하벨이 당황하니 속이 후련했다.
"알면서 왜 물으십니까?"
당황한 것도 잠시, 하벨은 오히려 기가 찬 소리를 냈다.
분명 룬델에게 코스모피안 왕국의 대신들이 꺼낸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걸 들었을 테고, 밀려오는 답답함에 자신과 어떻게든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해 이렇게 찾아왔다.
물론 자신도 바안에게 할 말이 있었고.
"압니다. 그러니 내가 묻는 겁니다. 이번 사건으로 고민의 시간이 길겠지만, 내 선에서 해결 가능한 일입니다."
바안이 단호함을 내보였음에도 하벨은 전혀 주눅이 든 기색이 없었다.
"전하. 그건 저도 압니다. 하지만 숟가락 좀 얹으러 온 게 그렇게 큰 죄입니까?"
"…숟가락이요?"
"그러니까, 발 좀 디디러 왔습니다."
"공은 지금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지 않습니까?"
"누가 그럽니까?"
하벨이 낄낄 웃었다.
"말해보세요."
바안은 카샬을 쳐다보며 물었다.
카샬은 얼른 강한 의지를 다지며 대답했다.
"도련님의 주치의인 헤레스 씨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룬델 공에게 말했던 것처럼 공이 건네준 정보를 존중하겠습니다. 그러니 차를 마신 뒤에 빨리 돌아가면 좋겠습니다."
막연한 냉대가 아니었기에 하벨은 바안의 틈을 파고들 여지를 발견했다.
"전하. 제가 무슨 차를 좋아하는지 아시죠?"
"유자차가 아닙니까?"
"맞습니다."
바안의 뒤를 걷던 집사가 고개를 숙인 채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바안은 테이블에 먼저 앉았고, 카샬은 의자를 치우며 바안과 마주할 수 있는 자리에 휠체어를 세웠다.
"그런데 페트리오 경은 무슨 일입니까?"
바안은 페트리오를 쳐다보며 물었다.
하벨이 페트리오를 손에 넣을 생각을 하지 말라고 경고했고, 그가 어떤 존재인지 알기에 경계하는 수밖에.
페트리오는 위험했다.
아주 많이.
"이번 일을 위해 페트리오 경의 힘이 필요합니다. 하여 이 자리에 같이 참석할 수 있게 부탁드리겠습니다."
하벨이 고개를 숙이자 바안은 고민했다.
하벨과 페트리오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어떤 거래가 존재하는지 모르겠지만, 페트리오와 하벨의 접점은 생각보다 적었다.
당최 무슨 관계인지.
페트리오야말로 가장 모호하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귀족 중 하나였다.
"페트리오 경이 가진, 그 힘이 필요하다는 말이죠?"
바안이 묻자 하벨은 고민도 하지 않고 긍정했다.
"맞습니다, 전하. 이번에 제가 알려드린 그 정보를 페트리오 경이 가져왔으니까요."
"나는 하벨 공을 믿습니다."
바안은 페트리오를 지그시 보았고, 그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나라를 휘청거리게 한 원인 중 하나가 페트리오 자신이었으니 바안 앞에서 무슨 낯짝을 하겠는가.
"페트리오 경."
"예, 전하."
"아버지께서 그대를 용서했기에 나도 그대를 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다만, 그대가 이 왕국에 어떤 일을 했는지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이건 그대가 이해해주겠죠?"
페트리오를 경계하는 것과 적으로 바라보는 건 엄연히 달랐다.
그를 용서한 건 자신의 아버지였고, 자신은 아직 아니었다.
"물론입니다, 전하. 저는 이 에르티안 왕국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하여 오늘도 속죄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페트리오는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바안은 그제야 목소리에 깔린 뾰족함을 지워나갔다.
오늘 페트리오의 의도가 무엇이든 하벨과 같이 왔다는 것 자체로 마음이 조금은 가벼웠다.
"전하."
하벨이 입을 열며 한쪽 눈으로 바안을 바라보았다.
어떤 꿍꿍이가 있어 보이지 않아 바안은 하벨이 온 이유를 예상했음에도 괜히 긴장했다.
"제가 코스모피안 왕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말을 할지도 모른다는 건 예상했을 겁니다."
"물론입니다. 아주 찝찝한 소리가 아닙니까."
바안은 살짝 불편함을 드러냈다.
지금 폭파 사건에 다른 나라들이 개입된 와중에 범인이라고 알고 있는 코스모피안 왕국과 손을 잡으라는 말은 다른 나라들 전부를 적으로 돌리라는 말과 대체 뭐가 다를까.
하벨이 아니었다면 개소리하지 말라며 언성을 높였을지도 몰랐다.
"지금 코스모피안 왕국은 누구든 도움이 절실할 겁니다. 하여 겉이 아닌, 뒤에서 몰래 손을 잡으십시오."
"좀 더 자세히 말해보세요."
"대신들을 계속 감금하고, 조사 시간을 늘리면서 시간을 벌어보는 게 어떠십니까?"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이번에 에르티안 왕국에서 책임져야 하는 건 거의 없습니다. 애초에 안전을 위한 검사를 거부한 건 저들이에요."
바안은 손깍지를 꼈다.
저들이 소지품 검사를 거부했던 일이 에르티안 왕국에 호재로 돌아올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전하. 에르티안 왕국에는 동맹국이 필요합니다."
"그 동맹국이 꼭 코스모피안 왕국일 필요가 내 눈에는 전혀 보이질 않습니다."
바안은 하벨의 주장을 섣불리 받기가 어려웠다.
만약 동맹을 맺는다면 적어도 코스모피안 왕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여야만 했다.
"제가 이전에 말씀드렸지만, 코스모피안 왕국은 아닙니다."
하벨은 바안이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을 이야기를 꺼냈다.
"코스모피안 왕국이 에르티안 왕국에 했던 일과 별개로 선왕을 시해한 자들은 일단 아닙니다."
"……."
바안은 말을 아꼈다.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꺼낼지 몰랐다.
하벨은 잠깐 망설였다.
"이걸 가주님이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헤스트리아 왕국이 위험합니다, 전하."
"…네?"
바안은 당황했고, 카샬은 크게 놀랐다.
저건 섣불리 나와선 안 될 문제가 아닌가.
"그리고 지금 코스모피안 왕국 일로 모든 시선이 코스모피안 왕국 쪽에 쏠린 상태입니다. 아무도 헤스트리아 왕국에 관심을 주지 못할 상황이죠."
하벨이 히쭉 웃었다.
"되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런 우연이 다 있다니."
자신의 물음에 바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가자 하벨은 목소리를 낮추며 속닥속닥했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벌어지는 세계의 흐름에 우연은 없습니다, 전하. 조금 더 멀리 보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