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185화 (185/415)

185화. 속닥속닥(2)

* * *

"잠깐만 하벨아."

룬델은 우선 하벨을 말렸다.

"네가 생각이 깊은 건 안단다. 하지만 코스모피안 왕국은 이곳 에르티안 왕국을 삼키려고 했던 자들 중 가장 깊은 뿌리를 박은 놈들이라는 걸 잊었더냐?"

"알고 있습니다."

"공동의 적을 두었을 때 적도 아군이 된다는 걸 나 역시 알고 있단다."

룬델이 말을 꺼낸 후에 입술을 꽉 다물자 하벨이 치고 들어왔다.

"지금 딱 맞는 사실이 아닙니까?"

"하지만 저들은 애초에 아군이 될 수 없단다."

"에르티안 왕국을 삼키려 했기 때문입니까?"

"그래. 만약 공동의 적이 사라진다면 지금 에르티안 왕국이 가진 정확한 힘과 상황을 파악한 더 큰 적이 등장할 수도 있다는 걸 알지 않더냐? 위험이 너무도 뻔히 보이는구나."

"당연히 그것도 생각했습니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하벨을 보자 룬델은 잠깐 숨을 들이켰다.

"네가… 섣불리 판단하지 않았겠지. 그 이유를 말해주겠더냐."

"혹시 기억하십니까? 전 기상국장 웨인 톨을 말입니다."

"기억한단다."

"놈이 가진 날씨를 맞히는 기술은 현재 왕실에 귀속된 상황입니다. 하지만 웨인 톨은 한때 저 기술을 팔아넘기려고 했고, 이를 두고 저울질했던 건 마법사 협회와 바로 코스모피안 왕국입니다."

하벨은 목소리에 힘을 조금 주었다.

"결국, 놈이 선택한 건 마법사 협회였죠?"

"……."

룬델은 잠깐 말을 멈춰 눈동자를 살며시 굴렸다.

"그러니까 네가 하고 싶은 말은 코스모피안 왕국과 마법사 협회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말이더냐?"

"맞습니다. 일단 그것만으로도 안심이지 않습니까?"

룬델은 아라를 쓰다듬으며 잠깐 생각했다.

마법사 협회가 생각 외로 깊게 뻗어 있었다.

파면 팔수록 경악하지 않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확실히 그렇구나. 지금으로서 그 가능성이 더 진실하다니. 그게 참 안타깝구나."

[왜에? 지금 이 몸만 모르는 거야?]

아라의 고개가 룬델과 하벨을 번갈아 바라보며 흔들렸다.

"웨인 톨의 사건을 봤을 때, 코스모피안 왕국과 마법사 협회는 최근까지도 협력하지 않은 관계로 보기에 좋지. 오히려 이번 일로 틀어질 가능성이 꽤 크고. 마법사 협회 입장에서는 코스모피안 왕국 때문에 괜한 불똥이 튀었고, 가뜩이나 용용이와 얽힌 일로 시끄러운 참에 신경질이 날 수밖에 없지."

하벨은 키득거렸다.

마법사 협회가 여기에도 또 저기에도 치이는 모습이 너무 기분 좋았다.

"무엇보다 코스모피안 왕국은 원래 제1 왕국이라 불릴 정도로 강대했단다."

[오오, 이 몸도 카샬이 대장한테 알려줘서 들었어!]

아라는 룬델의 말에 콧바람을 살짝 내쉬었다.

그 모습이 웃겨 룬델은 미소를 그렸다.

[코스모피안 왕국은 원래 제1 왕국이었는데 레놀드 왕국한테 다 뺏겨서 레놀드 왕국을 엄청, 엄청 싫어한다고 들었어.]

"그래. 정답이란다, 아라야. 두 나라의 사이가 나빠 레놀드 왕국하고 코스모피안 왕국하고 손을 잡을 가능성은 무척 낮지. 앞서 했던 말까지 포함한다면 어떻게 되겠더냐?"

마법사 협회는 물론, 레놀드 왕국도 제외한 상태였다.

물론 작은 나라들은 자동으로 빼둬 언급도 하지 않았다.

룬델은 아라의 대답을 기다렸다.

정령답지 않게 외부에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게 너무 신기하면서도 대견했기에 무슨 대답을 할지 기대가 됐다.

[어어, 그럼 시엘느는? 시엘느도 남았는데?]

"그곳은 예외로 둬야 한단다."

룬델은 잠깐 움찔한 하벨의 반응에 괜히 자신의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음, 하벨아. 혹시, 혹시 말이다. …시엘느를 잊어버렸더냐?"

"잊은 건 아니고요."

하벨은 시선을 살짝 흘렸다.

"…그냥, 음, 뭔가, 음, 두 나라랑 다르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서요. 신을 믿는 곳이니까 아무래도 신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래. 내가 아는 시엘느도 그런 곳이란다. 이건 내 생각이지만, 이번에 찾아온 이유도 선왕을 해치지 않았다는 결백 때문이 아닐까 싶구나."

"그건 모르는 거죠. 왜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까?"

"폭파 사건 때, 부상자를 옮기고 치료했던 이들도, 폭파된 그 일대를 솔선수범해서 치워준 곳도 바로 시엘느의 신관들이었단다."

"시엘느의 신관들이요?"

하벨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경험에 비추자면 저런 놈들은 으레 구린 게 숨어 있기 마련이었으니까.

"하지만 경계는 해두는 편이 좋겠구나. 영원한 편도, 영원한 적도 없을 테니."

룬델은 자연스럽게 무언가를 생각하는 하벨의 깊은 눈동자에 너무도 당연하게 폭탄을 터트리는 적을 막고자 뛰어가던 그때의 모습이 비쳤다.

자신은 묵직하면서도 애절한 하벨의 걸음에서 무언가를 보았다.

―저는 용왕입니다.

제일 처음 하벨이 자신을 소개했을 때 그 이름에 붙었던 '왕'의 모습을.

"마침 전하께 찾아가려던 참이었으니 네 말을 전하마."

하지만 룬델은 용왕이 대체 무엇인지 물어보지 못했다.

자신 역시 하벨에게 말하지 못한 것들이 가득했으니까.

"하지만 이 부분을 바안 전하께서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나도 모르……."

"저한테 궁금한 게 있으면 눈치 보지 말고 물어보세요."

하벨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꺼낸 말에 룬델은 잠깐 말을 아꼈다.

이걸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지 괜히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하릴없이 아라의 꼬리를 만지작거렸다.

"너에게 묻고 싶은 건 많단다."

룬델은 뒤늦게 얇은 유리를 만지듯 조심스레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너도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상황에 나만 편해지자고 물어볼 수 없지 않더냐?"

짧은 숨을 내쉰 룬델은 말을 이어나갔다.

"…하벨아. 지금 네가 얼마나 힘든지 안단다."

왜 힘들지 않을까.

지금 하는 일도, 하려는 일도 죄다 버거운 일인 것을.

때때로 반짝거리는 하벨의 눈동자를 보면 말리고 싶은 마음이 빠르게 꺾여나갔다.

마치 저 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하는 것 같으니.

"나는 더 기다릴 수 있으니 마음이 내킬 때 물어보렴."

그 말에 하벨은 괜히 시선을 흘렸다.

자신도 룬델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

하지만 이걸 꺼내도 될지 말지 여전히 입이 떨어지지 않아 하벨은 그냥 대수롭지 않게 미소를 방패 삼아 가볍게 말을 꺼냈다.

"그럴게요. 저도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

"다. 네가 원한다면 전부 다 물어봐도 되니 어려워하지 말렴."

룬델은 눈꼬리를 살짝 아래로 내리며 미소를 지었다.

"뭐든 최선을 다해 대답하마. 약속할 수 있단다."

성큼 다가오는 룬델의 목소리에 하벨은 방패로 삼았던 미소가 빠르게 떨어져 나가는 걸 느꼈다.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만약에요."

하벨은 아주 작은 소리로 말을 꺼냈다.

헤일리스를 만나면서 하나 느낀 게 있었다.

그건 절망감이었다.

"정말 만약에 말입니다."

하벨은 부르르 떨리는 제 손으로 옷자락을 꽉 쥐었다.

아픔보다 덜컥 몰려오는 두려움이 더 컸다.

"걱정하지 마렴. 나는 널 원망하지 않는단다."

하벨의 눈시울이 잠깐 일렁거렸다.

또.

또 원망하지 않는다니.

하벨은 흔들리는 눈동자를 돌려 룬델을 바라보았다.

"몇 번을 물어도 내 대답은 똑같았겠지만, 네가 불안해질 때마다 말해줄 테니 불안하거나, 두려워지면 그냥 이렇게 내 옷자락만 잡아도 된단다."

룬델은 자신의 옷자락을 잡는 흉내를 냈다.

"나는 너를 계속 이해할 테니."

활짝 핀 룬델의 미소만큼이나 목소리 역시 포근한 이불처럼 다가왔다.

하지만 그 다정함이 또 자신의 숨통을 쥐었다.

헤일리스를 만났을 때 하벨은 알아챘다.

그녀가 드웰처럼 영혼을 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만약 그랬으면 자신이 하벨 티에라가 아니라는 걸 알아보든지, 영혼에 문제가 생긴 걸 알아봐 어떻게든 이를 이용하려고 할 텐데.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 그게 제가… 마법사 협회에 쫓기는 이유입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헤일리스는 협회장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좀 더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드웰처럼 영혼은 볼 수 없었다.

그때, 생각 하나가 밀려왔다.

어쩌면 마법사 협회를 무너트린 후에도 이 몸을 하벨 티에라에게 돌려줄 방법을 찾지 못하는 게 아닐까.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당신이 사라진 이 육체는 죽습니다.

드웰이 확신하며 꺼냈던 말이 뒤이어 거센 파도처럼 몰려왔기에 그 감정을 아무에게도 티 내지 않게 막아야 했다.

그때 중요한 건 자신이 물 마법사가 되는 일이었으니까.

하벨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때도 그랬지만, 진짜 이상합니다. 이건 애초에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저는 당신의 그 부분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네가 달려나갔을 때, 나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단다."

룬델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어떻게 단 한 번도 망설이지 않는지. 나는 네 뒷모습을 보며 이해할 수 없었단다."

―…많이 죽었습니까?

하벨이 자신을 보자마자 처음으로 꺼낸 질문이었다.

사람들을 구했음에도 더 구하지 못했다는 슬픔이 담겨 있지 않았던가.

왜 아프다는 말이 먼저 나오지 않는지.

왜 무서웠다는 말도 꺼내지 않는지.

"그러니까 나는 너는 이해한단다."

룬델은 그 모습에 하벨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저게 지금의 하벨이었다.

저게 하벨이었다.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단다."

하벨이 저 말에 놀라며 상체를 일으키자 아라가 얼른 하벨에게 다가가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안 돼, 대장. 누워 있어야 해.]

아라가 말렸음에도 하벨은 부들거리는 팔로 자신의 몸을 지탱했다.

짐작만 하고 있던 생각 하나가 다시금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룬델과 눈을 마주한 순간, 그 말은 나오지 않았다.

룬델은 하벨을 부축해 앉히고는 손을 들어 하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잠깐 말없이 하벨을 바라보기만 하던 룬델이 조용히 말을 꺼냈다.

"전에도 짐작했겠지만, 나는 이번 일이 처음이 아니란다."

"……."

하벨의 입술이 여전히 떨리기만 했다.

"그래."

이미 정답을 알고 있는 하벨의 모습에 룬델이 웃었다.

여기서 뭘 더 숨기겠는가.

저 아이가 가진 죄책감을 덜 수만 있다면야 얼마든지 대답해줄 수 있었다.

"네 짐작이 맞단다, 하벨아."

"…아니라고요?"

하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정말… 아니라고요?"

이어 목소리마저 갈라졌다.

"그래."

룬델은 쓰게 웃었다.

영원히 밝히는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꺼내게 될 줄이야.

하지만 룬델은 이어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이보다 더 확고할 수 없는 의지였다.

"하지만 그 아이는 내 아이란다. 누가 뭐라고 하든 내 아들이야."

―너는 하벨이 남긴 씨앗이란다. 아버지로서 그 씨앗을 어떻게 내버리고, 미워하겠더냐.

'그래서…….'

하벨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래서 씨앗이라는 말을 썼을 줄이야.

하벨은 숨이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룬델의 심정이 어떨지 전혀 상상할 수가 없었다.

하벨 티에라야말로 정말로 마음으로 키운 아이가 아닌가.

룬델은 붕대가 두껍게 감긴 하벨의 손을 살포시 쥐자 안대를 착용하지 않은 하벨의 한쪽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괜찮단다."

룬델은 소리도 없이 슬픔을 표현하는 하벨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괜찮을 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괜찮으니 울지 마렴."

차분히 자신을 토닥이는 저 목소리에 하벨은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천천히, 부드럽게 손등을 쓰다듬어주는 그 손길에 여러 감정이 묻어나 있었다.

걱정.

안쓰러움.

그리고 두려움.

'…룬델이 강한 게 아니었다.'

자신이 착각하고 있었다.

'하물며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쓰러지고, 부러지려는 룬델의 마음을 자신이 겨우 지탱하고 있을 줄이야.

밀려오는 슬픔을 또 다른 만남으로 묻고 있기에 룬델은 지금 버틸 수 있었다.

하벨 티에라 이전에도 덮친 슬픔이 있다고 했다.

그렇기에 하벨 티에라가 너무도 소중했겠지.

'대체… 얼마나 슬픔을 꾹 참았던가.'

가슴이 미어졌다.

하벨은 숨을 토하며 눈을 감자 눈물 한 방울이 다시금 흘러내렸다.

천천히 손을 들었다.

살포시 룬델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올리자 룬델의 손끝이 떨렸다.

하벨은 이게 진짜 룬델의 마음이라는 걸 느꼈다.

참고, 참았지만, 진짜로 숨길 수 없는 두려움.

"약속해요."

하벨은 속삭이며 눈을 떴다.

그렇기에 이게 자신이 룬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것이며 그가 바라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룬델이 가장 무서워 존재는 바로 이것일 테니.

"죽지 않을게요."

하벨은 강한 의지를 담았다.

룬델의 속눈썹부터 부르르 떨려왔다.

그의 표정이 덩달아 일그러졌다.

다른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며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벌써 몇 번의 죽음을 봐왔던가.

가장 소중한, 가장 애틋한 자들의 죽음을.

잠잠했던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일렁거려 가슴이 너무도 아팠다.

"약속해요."

가슴을 찌르는 저 말에 룬델은 자신의 얼굴을 가린 손을 내리고 하벨을 바라보았다.

하벨이 손을 뻗자 룬델은 혹시나 하벨이 부서질까, 조심스레 그를 안았다.

가슴팍에서 전해지는 저 온기가 얼마나 그리웠던가.

"…고맙구나."

룬델은 저 말을 믿고 싶었다.

너무도 간절히.

"하벨아."

다시는 잃고 싶지 않았으니.

품에서 느껴지는 이 온기도.

그 누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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