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속닥속닥
* * *
"하벨."
발걸음을 떼기 전에 넬시아가 입을 열었다.
"예, 누님."
"가만히 있어야 해. 지금 상처가 벌어지기 쉬울 때라고 들었거든. 알겠지?"
분명 웃음기를 띠고 있지만, 넬시아의 시선이 어딘가 싸늘했다.
아무래도 라르웬에게 많은 걸 들은 모양이었다.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 우르르 몰려왔으니.
"그건 압니다."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해주니 안심이네. 이젠 정말 갈게. 좋은 꿈 꿔."
넬시아가 등을 돌리자 하벨은 왜인지 한숨을 절로 나왔다.
[넬시아의 눈빛이 좀 무서웠어. 이 몸만 그렇게 본 거야?]
"아니. 나도 좀 그랬어. 헤레스랑 비슷하더라."
아라가 속삭였고, 하벨은 긍정하며 아공간 주머니를 열었다.
[대장. 이건 왜 여는 거야?]
아라가 빤히 보자 하벨은 씩 웃으며 연락용 아이템을 꺼냈다.
"좀도둑한테 연락하려고."
―전부 알아내겠습니다. 저 배가 정박한 곳 주변이든, 이번 폭탄 사건에 살아남은 범인이든, 누구든 말입니다. 그동안 푹 쉬셔야 합니다, 도련님.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페트리오가 살벌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고, 살기마저 뿌리며 나가지 않았던가.
저렇게 열이 받은 건 처음 봤기에 그를 붙잡지도 못했다.
'지금은 음, 머리가 좀 식었겠지? 결과도 궁금하고.'
[대장 설마 나가려는 거 아니지? 이 몸은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또 내일도, 또 내일도 물의 길을 열지 않을 거라구.]
아라가 고개를 휙 돌렸다.
"오늘은 안 나가, 아라야."
하벨은 아라의 부풀어진 볼을 꾹 눌렀다.
[정말?]
다시 하벨을 바라보는 아라의 눈동자가 너무도 반짝거렸다.
"그래."
하벨은 대답하며 연락용 아이템을 사용했다.
평소와 달리 수신음만 길게 이어지자 하벨은 눈동자를 빙그르르 돌렸다.
연락용 아이템에 귀를 대고 있던 아라가 무엇이 기쁜지 모르겠지만, 방긋 웃었다.
[와아! 좀도둑이 바쁜가 봐!]
"좀도둑이 연락을 받지 않는 게 그렇게나 기뻐, 아라야?"
[응응! 좀도둑이 연락을 받으면 대장은 또 나갈 준비를 할 테고, 이 몸은 엄청 속상할 거라구.]
아라가 하벨의 손을 잡고는 더욱 활짝 웃었다.
'어차피 나중에라도 연락할 텐데.'
아라가 저렇게 기뻐하니 어쩌겠는가. 하벨이 연락용 아이템을 내려놓았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나중에……."
<늦었습니다, 도련님. 죄송합니다.>
손등이 침대에 닿는 순간, 페트리오가 말을 꺼냈다.
아라가 힐끔 하벨을 바라보자 그는 아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시 내렸던 손을 올렸다.
"아니야. 네가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는데, 내가 기다리는 게 맞지."
<안타깝게도 현재 왕실 감옥에 있는 폭파범에게는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경계가 워낙 심하고, 틈이 도저히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 나랑 같이 가면 되니까."
바안을 설득해 뜯어낼 자신감은 가득했다.
<자신감을 내보이실 때가… 아닙니다. 어쨌든, 도련님께서 지시를 내리신 적은 없지만, 다른 나라 대신들 일행을 계속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왕실에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이잖습니까?>
"그래. 전하께서 일부러 숫자를 줄여 받았으니 어쩌겠어?"
그 부분에서 다른 나라들의 불만이 터져 나올 수 있으나, 에르티안 왕국의 입장에서는 무척 현명한 조치라 할 수 있었다.
피의 연회 이후 이전 귀족들이 벌인 일을 수습해 겨우 왕권을 다잡고 있던 와중에 갑작스럽게 선왕이 세상을 떠나고 왕국 자체가 휘청거리고 있지 않은가.
'나라에 망조가 들면 쉽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여러 번 일어난다지만, 다시 생각해도 참 기구한 일이다.'
하벨은 측은함이 몰려왔다.
이를 해결해야 하는 건 바안이 아닌가.
"전하께서 큰마음을 먹은 거지. 이번 장례식은 어떻게 본다면 도박이라 할 수 있었어."
장례식에 참석한다는 목적으로 다른 나라들이 에르티안 왕국에 와 무엇을 할지 아무도 몰랐기에 원래라면 장례식 전에 흔들리는 왕권과 외부 치안을 다 다져놓은 뒤에 열렸어야 했다.
하지만 시간은 없었고, 바안은 그 상황을 인지하고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선왕 사건의 용의자로 몰리기 싫으면 에르티안 왕국에 올 수밖에 없는 그 점을 이용해 사전에 왕실로 오는 인원에 제한을 걸었고, 만약 제한된 인원을 넘었을 경우 나머지 대신들 일행에게 호위라는 이름의 감시를 한다고 전달하지 않았던가.
<그 도박을 하도록 전하를 설득한 게 도련님이 아닙니까? 그 덕에 감시를 벗어나 설쳐대는 이들을 제가 조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웬만한 놈들은 뒷세계의 시선을 피할 수 없으니까요.>
페트리오의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았다.
아직도 분이 안 풀린 모양이었다.
<…아. 그것보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이걸 먼저 물었어야 했는데요.>
"어제보다 괜찮아. 걷는 게 좀 불편하긴……."
<아직 걸으시면 안 됩니다. 절대로요. 상처가 터지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페트리오는 자신의 말을 끊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말하는 게 진짜 카샬이랑……."
<죄송합니다. 마음이 앞섰습니다.>
페트리오가 말을 바꾸자 하벨은 낄낄 웃었다.
"뭐 좋은 거라도 알아냈어?"
<전하께서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모르겠지만, 뒤늦게 찾아온 코스모피안 왕국의 대신 놈이 지껄이는 말은 사실입니다.>
"뭐? 그게 사실이라고?"
하벨은 드러난 진실에 손가락으로 턱밑을 간질이며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라의 귀가 살짝 접혔다.
[이 몸은 이제 대장이 그렇게 웃으면 불안하다구.]
하벨을 쭉 봐온 결과 그는 생각보다 표정에 티가 많이 났다.
지금 하벨은 분명 저 다음 일을 꾸미고 있겠지.
"에이, 아라야. 그냥 웃었어. 설마 했는데 진짜라는 게 우스워서."
<도련님. 지금은 제발, 가만히 있으실 때입니다.>
"알아. 그냥 웃었다니까."
<도련님께서 웃으셨다는 건…….>
"조만간 찾아갈 거니까, 반드시 장로 한 명을 더 잡으라고 크라마한테 전해줘."
지금 그 누구보다 장로를 잘 이용할 수 있는 자는 칼리우스였다.
반드시 찾아가야지.
<조만간이라뇨? 설마 내, 내일은 아니겠죠?>
"설마 내일이겠어?"
<믿… 겠습니다, 도련님. 그런데… 음, 제가 믿지 않는 게 아니라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물어보는 겁니다. 정말 아니시죠?>
슬쩍 똑같은 질문을 꺼내는 페트리오의 모습에 하벨은 기가 찼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는 건지.
"아니라니까. 요새 사기라도 당했어?"
<사기는 아니고, 속았던 적이 몇 번… 아니,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사기를 치지 당하진 않습니다.>
"쓸데없는 말은 됐고, 이 말도 꼭 크라마한테 전해줘."
하벨은 크라마를 이름을 재차 언급하니 이가 살짝 맞물렸다.
"꼭."
현재 크라마는 자신의 땅을 관리하는 관리자이자 효율적인 연락망이 되어주고 있었다.
마법사 협회가 그 땅을 노리지 않게 보호하는 대가로 크라마가 이끄는 마법사들을 그 땅에 거주해주기로 약속했다.
<크라마… 그 자식이 또 뭐 사고 쳤습니까?>
페트리오는 익숙하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자연스럽게 '또'를 언급할 정도로 자신에게 보고하지 않았던 잦은 사건이 많은 모양이었다.
"술값만큼은 앞으로 절대로 내지 않겠다고 말해줘."
크라마가 틈틈이 땅에 무얼 지었으며 얼마가 들었고,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에 대한 보고를 새를 통해 전달하곤 했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의 눈을 의심하게 하는 액수가 바로 술값이었다.
"이거 원, 내가 마법사를 들인 건지, 술고래들을 들인 건지 모르겠네. 너도 알지?"
<압니다.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저놈들은 술에 든 알코올을 분해하는 마법 아이템까지 사용해서 마시고, 또 마시니까요. 아주 미친놈들이죠.>
하.
페트리오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간의 고충이 밀려오는 듯했다.
"조금만 참아 봐. 저택 완공까지 이제 곧이니까."
<알겠습니다. 좀 참아보겠습니다. 요새 솔직히 크라마가 잘 때 죽일까, 말까, 잠깐 고민한 적이…….>
끄아악.
연락용 아이템 너머로 비명이 들려왔다.
<아, 실례했습니다. 지금 제 뒤를 캐려는 쥐새끼들이 있어 타냐가 처리하고 있습니다.>
페트리오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을 꺼냈다.
"어디 쪽인데?"
<레놀드 왕국 쪽입니다. 제가 뒤를 쫓았다는 사실을 알아챈 모양이라서요. 잘됐지 않습니까? 이참에 몇 가지 알아내 보겠습니다. 혹시 원하시는 게 있으십니까?>
하벨은 잠깐 생각하다 말을 꺼냈다.
"샬룸이 누구인지 알아봐 줘."
<알겠습니다. 저 역시 눈여겨보던 자였습니다.>
"시엘느는?"
<그쪽은 지금까지 특별한 모습을 보이진 않았습니다. 이곳에 도착한 뒤로 저택 근처를 산책하거나, 기도, 식사. 이것 외에 벗어난 게 없습니다.>
"그래도 계속 지켜봐 줘. 저게 다 수작일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서둘러 왕실로 돌아가겠습니다.>
"천천히 와도 돼.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하벨은 연락을 끊고 아공간 주머니에 연락용 아이템을 집어넣으며 생각했다.
제1 왕국 레놀드.
신성 국가 시엘느.
정령 왕국 헤스트리아.
뭔가가 막 얽혀 있는 기분이 들었기에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생각에 빠지다 노크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킁킁.
냄새를 맡던 아라가 눈을 번쩍 떴다.
[룬델이다! 이렇게 물 냄새가 가득 나는 건 룬델이야!]
아라의 꼬리가 벌써 흔들려서는 문 쪽으로 날아갔다.
"잘 잤더냐, 아라야?"
룬델은 자신에게 양팔을 뻗는 아라를 따스하게 안아주며 걸어왔다.
[응응! 이 몸은 잘 잤어! 대장이 어서 자야 하는데, 좀도둑하고 연락하고 있었어. 좀도둑이랑 말하다가 대장이 막 수상하게 웃었구! 이 몸은 대장이 지금 뭔가, 뭔가를 하려는 것 같아!]
술술 나오는 저 말에 하벨은 놀란 눈을 하며 배신감까지 느꼈다.
"…아라야?"
"페트리오하고… 연락했더냐?"
룬델이 머뭇거리며 묻자 하벨은 어차피 말하려고 했던 사실이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연락할 일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건 부정하지는 않으마. 하지만 하벨아, 지금은 너만 생각했으면 좋겠단다."
룬델은 지금 하벨의 모습을 볼 때마다 그렇게나 가슴이 미어질 수가 없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지금 열이 좀 받아서 그렇게 쉽게는 안 되겠습니다."
하벨은 룬델의 말을 부정했다.
저 폭파 사건 때문에 계획이 도중에 흔들릴 뻔했고, 죽지 말았어야 할 생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건 랜턴마저 몰랐던 일이었으며 자신은 물론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도 분했다.
"…바안 전하는."
하벨은 입가를 핥았다.
자신이 잠이 들 때 바안이 찾아왔다는 말은 이미 들었다.
어떤 얼굴을 했는지 자신이 봤어야 했는데.
"바안 전하는… 어떠십니까? 장례식은 다시 제대로 치러졌습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거라. 지금 비난의 화살이 일방적으로 코스모피안 왕국으로 향해 있으니."
룬델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이번 사건은 너무도 노골적으로 코스모피안 왕국이 개입되어 있었다.
"처음 소지품이나 마법 아이템 검사 때도 인원 감축을 들먹여 이를 부정한 건 코스모피안 왕국이었다는 걸 기억하더냐?"
"기억합니다. 그렇게 시끄러웠는데 왜 기억을 못 하겠습니까?"
바안이 대신들과 그 호위 기사들을 상대로 검사 하려고 하자 맨 처음 반발한 건 코스모피안 왕국이었다.
뒤이어 레놀드까지 반발하는 터라 자연스럽게 무산되어 간단한 검사로 끝나고 말았다.
"이게 마법사 협회까지 불똥이 튀었더구나."
룬델은 가볍게 웃자 하벨은 다급히 말을 꺼냈다.
"그때 일어난 소란은 사실 폭파 사건을 위한 포석이라고 말입니까?"
"그래. 네 말이 맞단다. 시기가 절묘했고, 칼리우스 님 역시 일반인이라고 제 입으로 밝히지 않았더냐? 이유가 또렷하지 않던 차에 폭파 사건이 벌어져 그 이유로 주목이 되었단다."
하벨은 그 말에 실소를 뿜었다.
"어쩐지 그 뻔뻔한 고개로 왜 날 찾아왔나 싶었는데, 불똥이 더 커지기 전에 진압하러 찾아왔을 줄은 몰랐네요."
"간악한 자들이 아니더냐. 이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지."
룬델은 아라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분노를 드러냈다.
이번 사건과 마법사 협회가 정말 관련이 없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하벨과 정령, 그리고 정령사에게 한 행동만 생각해도 이가 갈렸다.
"가주님."
"그래, 하벨아."
"놀랍게도 코스모피안 왕국의 대신이 주장하는 게 맞습니다."
"…주장이 맞다고 하였더냐?"
"예. 맞습니다."
하벨은 다시 긍정하고, 룬델의 얼굴에 깊은 의문이 번져갔다.
그들이 주장이 맞다니.
"자, 이렇게 공동의 적을 지닌 자들을 무어라 부르는지 아십니까?"
하벨은 룬델을 살살 긁었다.
현 코스모피안 왕국의 대신들이 주장하는 게 맞다면 자신도, 에르티안 왕국도, 그리고 지금 모든 이들의 시선을 받는 코스모피안 왕국까지도 억울한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공동의 적이 생겼다고 할 수 있었다.
"바로 공동의 적을 둔 임시 아군이죠."
하벨은 속삭이듯 말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