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손을 잡자(3)
* * *
그제야 꼬리만 꽉 쥐고 있던 아라가 하벨에게 매달려 발을 동동 굴렀다.
[헤헤. 이 몸은 가만히 있었어! 대장은 마법사들 앞에서 정령사가 되면 안 되는 거잖아?]
"그럼. 아주 착하다, 아라야."
하벨이 신이 난 아라의 턱밑을 긁어주자 아라는 눈을 감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헤헤.
"도련님."
시계를 확인한 카샬은 조용히 하벨을 불렀다.
"왜?"
"이제 주무십시오."
하벨의 눈이 몇 번이고 깜박거렸다.
"…아니, 해가 지금 저렇게 쨍쨍한데?"
"아쉽게도 도련님의 몸이 쨍쨍하지 못합니다."
"지금 말장난할 때가 아니잖아."
"저도 말장난 아닙니다. 뭐, 좋습니다. 그럼 도련님께서 잠을 자야 하는지 아닌지는 헤레스 씨를 불러와 물어보겠습니다."
"자, 잠깐만 카샬."
"찔리신다면 얼른 주무시지요."
"그게 아니라, 가주님을 불러줘."
하벨이 꺼낸 말이 너무도 의외라 카샬은 자신이 낀 장갑을 슬쩍 당겼다.
"헤레스 씨를 잘못 말한 게 아니고요?"
"가주님이라고 했어."
"도련님께서 가주님을 피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카샬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어제도 하벨과 룬델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돌지 않았는가.
어색함을 드러낸 쪽은 놀랍게도 하벨이었고.
"지금 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하벨은 말을 멈췄다.
[용용이야?]
아라가 고개를 돌려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제 칼리우스가 하벨을 보자마자 펑펑 울지 않았던가.
자신은 하벨을 지켜냈던 칼리우스가 너무너무 부러웠는데.
"아가씨인 모양입니다."
카샬이 꺼낸 말에 하벨은 마음이 살짝 무거워졌다.
어제 넬시아는 오지 않았다.
―누님은… 네가 깨어나서 다행이라는 말을 전해달라고 했어. 섭섭해하지 마. 어제, 아니 이틀 전에 살아남은 범인마저 죽이려고 해서 아버지께서 말리시느라 난리가 났으니까.
대신 라르웬이 넬시아의 말을 전했다.
―뭐가 됐든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다, 막내야.
붉어 있던 라르웬의 눈시울이 이어 떠올랐다.
"…왜?"
하벨은 생각을 접고 물었다.
밤새 넬시아가 무언가를 고민했고,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걸까.
아니면 드디어 자신에게 욕지거리를 퍼부으러 왔는지.
'어제도 가주님을 보니 숨이 턱 막혔는데.'
하벨은 한숨을 가볍게 내쉬었다.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직접 만나보시죠."
덤덤하게 말을 내뱉던 카샬은 굳어진 하벨의 표정에 곤란한 듯 아직 넣지 못한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넬시아를 만나는 게 왜 어렵지 않을까.
그녀는 티에라라는 성을 가진 사람 중 가장 마지막에 만났고, 첫 단추부터 좋지 않았으니.
"정 난감하시면 제가 물리겠습니다. 핑곗거리야 많으니까요."
"아니야. 밖에서 잠깐만 기다려줘."
"알겠습니다. 아가씨께서 방을 나가시면 바로 가주님을 부르러 가겠습니다."
카샬은 허리를 숙인 뒤 밖으로 나가려다 잠깐 하벨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왜 그래?"
"아가씨께서는 서툴 뿐입니다. 물론, 어렵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 긴장하지 마십시오."
"으음……."
하벨은 말꼬리를 늘어트렸다.
정작 자신을 어려워하는 건 넬시아였다.
오죽했으면 이곳 왕실에 와서 그녀를 마주한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일까.
수시로 찾아와 잘 있는지 확인하러 온 라르웬과 너무도 달랐으니.
"긴장되네. 가주님도, 형님도, 그리고 태연한 너도 내 눈에는 다 신기해."
하벨은 아라를 쓰다듬다 괜히 털 모양을 바꿔보았다.
"신기할 필요 없습니다. 정이 들 만큼 시간이 있었으니까요. 부탁도 받았고요."
카샬이 던진 말에 하벨은 랜턴을 바라보았다.
"하벨 티에라가……?"
하벨 티에라가 이랬던 적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참 아니꼬웠다.
"예. 물론, 보고 아니다 싶으면 도망가라고 했는데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잖습니까. 저도 눈이 달려 있고요."
"눈꺼풀에 가려 있는 네 눈 말이지?"
"잘 뜨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길."
카샬은 그제야 허리를 숙이며 미련도 없이 밖으로 나갔다.
평소의 하벨이었으니.
"…후."
하벨이 긴 숨을 몇 번이나 내쉬었을까, 뒤늦게 넬시아가 들어왔다.
방 크기를 생각해도 이 정도 걸릴 시간은 아니라고 생각하던 차 그녀는 자신과 시선을 마주하지 않으려 애를 쓰며 다가왔다.
'뭐하는 거지?'
하벨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가만히 바라보았다.
[안녕, 넬시아!]
아라가 손을 흔들자 자리에 앉던 넬시아가 아라를 보며 그제야 미소를 보였다.
"안녕, 아라야."
[톰톰은?]
"혹시… 싫어할까 봐."
넬시아가 힐끔 하벨을 쳐다보았다.
"거꾸로잖아요. 톰톰이 나를 싫어 하는 거겠죠."
하벨은 말을 정정했다.
사실 넬시아보다 자신을 더 많이 피한 존재가 바로 톰톰이었다.
저번에 멋대로 입을 자꾸만 놀리는 게 언짢아 살짝 혼냈을 뿐이었는데.
"아마 비슷할 거야. 그것보다 몸은 괜찮… 아니, 괜찮을 리가 없지."
넬시아는 물어보려다 하벨을 바라본 순간, 눈썹 바깥쪽이 아래를 향했다.
"움직이면 통증이 있는 거 빼고는 괜찮습니다."
"그게 뭐야. 하나도 안 괜찮은 거잖아."
"말도 하고, 밥도 먹고, 일단 걸을 수 있으면 괜찮은 거죠."
[대장이 아까 걷다가 붕대에 피가 새어 나왔는데? 그게 왜 괜찮은 거야?]
아라가 황당한 얼굴로 하벨의 뺨을 잡았다.
"뭐어, 그 정도야."
"…그때, 내가 너랑 가까이 있었어."
"자책이라면 집어치우세요."
하벨은 어제 일이 반복되는 것 같아 속으로 한숨을 참았다.
어제 정말 후회했다.
무슨 정신으로 그 새벽에 보자고 다 불렀는지.
저쪽에는 화내고, 저쪽에는 울고, 또 다른 쪽에서는 자책으로 파고들고.
아주 난리도 아니라서 다시는 한 번에 모으지 말아야지 결심하지 않았는가.
하벨은 얼굴에 묻은 머리카락을 후 불며 말을 꺼냈다.
"잘 들으세요. 내가 달려갔습니다."
하벨은 어제처럼 말을 딱 잘랐다.
"폭탄이 터지는 걸 알면서도 그 후에 펼쳐질 꼴이 싫어서 그냥 달려갔으니 자책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아라를 포함해 자신을 본 모든 사람이 다 한 번씩 자책하고 있으니 기가 찼다.
애초에 왜 저들 탓인가.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자책은 너무 멀리 간 게 아닐까 싶었다.
"카샬이 달려나갔어."
넬시아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봤습니다. 아라도 달려왔죠."
하벨이 아라를 쓰다듬자 아라는 시무룩하며 하벨의 손에 기댔다.
넬시아는 입술을 꽉 깨물다 하벨의 시선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하지만 나는 달려가지 않았어."
"괜찮습니다. 그런 걸로 원망하지 않아요."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네가 누나로서 동생에게 얼마든지 달려와도 된다고 말했잖아. 그런데 나는 가지 않았어."
"이번에는 달려오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하벨의 눈이 살짝 감기자 하벨 손에 기대고 있던 아라가 귀를 쫑긋 세웠다.
또 그 표정이었다.
진심으로 안도하는 표정.
아라는 아랫입술을 위로 꽉 올렸다.
넬시아의 미간 역시 주름이 잡혔지만, 그녀는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오히려 라르웬이 너한테 가지 못하게 말렸어. 그리고 톰톰이 준 정령수로 폭발에 휘말리지 않게 다급히 벽을 쳤어."
넬시아는 룬델도, 라르웬도, 그리고 카샬까지 전해주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는 진실을 꺼냈다.
그때는 판단해야만 했다.
무엇이 먼저였는지.
"정말 잘하셨어요. 그래서 그 일대의 피해가 적었네요."
하벨은 저 말에 안도했다.
분명 자신이 가진 힘으로는 일부의 사람을 지키는 게 고작일 텐데 피해가 적었다.
그 이유가 바로 넬시아였다니.
"제대로 들어, 하벨. 나는 너를 버린 거야."
또.
넬시아는 눈 밑에 힘을 주었다.
"아니, 그게 왜 버린 겁니까? 애초에 뛰어든 건 나라니까요?"
하벨은 오히려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넬시아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을 구하는 게 먼저가 맞습니다. 폭발이 터지고 그 여파가 퍼지지 않게 누군가는 막아야 했습니다. 내가… 막았던 그 폭탄 말고도 다른 폭탄이 또 터진 상황이 아닙니까?"
카샬이 뒤늦게 말해주었다.
폭탄 하나가 터지고, 자신이 그곳에 휘말렸을 때 다른 쪽에도 폭탄이 터졌다는 걸.
그래서 자신을 구하러 오는 게 늦어버렸다는 사실 역시.
"그래. 당시 상황은… 그랬어. 최악으로 흘러갔지."
입가가 바짝 말라가는지 넬시아는 입술을 오므리다 열기를 반복했다.
"그러니까요. 그래서 잘한 겁니다."
하벨은 아라는 물론 넬시아를 다독였다.
"내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당장 터지는 폭탄과 사람들을 무시하고 날 찾으러 다녀요? 그건 바보 같은 짓입니다."
"하벨."
"정말 자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건 가주님께도 분명히 말했어요."
룬델도 넬시아와 비슷한 선택을 했다.
자신이 아닌 바안을 택했다.
―…미안하구나, 하벨아. 내가, 내 선택이 널 아프게 한 게 아닌지 모르겠구나.
어제 룬델이 자신의 손을 꼭 잡으며 미안해하고, 또 미안해하며 몇 번이나 사과했는지 몰랐다.
섭섭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룬델은 바로 옆에 있던 바안을 보호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미안해."
넬시아는 어제 하벨을 찾아오지 않고, 오늘에서야 찾아온 이유를 꺼냈다.
차마 하벨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지금 하벨이 자신의 동생이 아니라고 해도 저 몸은 동생의 몸이었을 텐데.
―놀라지 마십시오.
밖에서 카샬을 만났을 때, 경고와도 같은 말을 꺼냈다.
왜 놀라지 말라고 했는지 하벨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나마 멀쩡한 구석이 얼굴뿐이지 않은가.
앉지도 못해서 누워 있고.
마음이 아팠다.
"나도 너에게 달려갔어야 했어."
넬시아는 피바다에 갇힌 것처럼 붉게 물든 하벨을 보며 룬델과 라르웬이 무너져내릴 때 더는 그들이 받아들인 사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이미 그들에게 하벨은 가족이었다.
그들이 얼굴로 표현하는 그 절망감은 너무도 깊었으니.
"그러니까 그건……."
"하벨."
"…예."
하벨이 주춤거리며 대답했다.
"너를 원망한 적은 분명히 있어. 네가 어렵고, 낯설고, 이상해서 너를 피했어. 그 마음은 지금도 그래."
사실 자신도 카샬에게 안겨 들려가는 하벨을 본 순간,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저 하벨이 자신의 동생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저렇게 만든 놈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겨우 며칠.
무척 적은 시간이었음에도 가슴 속에 들끓는 살의를 느낀 순간 알아버렸다.
하벨이 설령 가짜라고 해도 이미 자신의 울타리 안에 있었다.
"…미안해."
이 감정이 무엇이라고 말하기엔 아직 이르지만, 적어도 하벨을 또 외면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 결과, 과거의 후회를 또 반복하지 않았던가.
"많이 아팠니……?"
넬시아는 자신의 손가락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다 하벨이 내미는 손을 보며 멈칫거렸다.
하벨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붕대가 감긴 그 모습에 넬시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뇨. 괜찮아요."
"손… 잡아도 될까?"
"허락받지 않아도 돼요. 이건 당신의 동생 손이니까요."
넬시아는 너무도 오랜만에 동생의 손을 잡았다.
붕대 너머로 전해지는 여전히 따뜻한 체온에 넬시아는 일그러진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천천히 고개를 숙여 자신의 이마에 그 손을 닿게 했다.
온갖 마음이 맴돌았다.
넬시아는 입술을 찢어놓을 듯 세차게 깨물다 말을 토했다.
"하벨."
"예."
"다음에는 달려갈게. 정말, 약속해."
이렇게 다치지 않게.
이런 붕대를 매는 일은 없게.
―…누나, 안녕?
어색함을 가득 담았던 동생의 목소리와 표정이 맴돌았다.
'나는… 너를 잊은 게 아니야. 정말로.'
넬시아의 입술이 잠깐 떨렸다.
"그, 약속까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벨은 간절함이 담긴 넬시아의 목소리에 참 이상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했길래 저렇게 변할까.
"이러면 안 되는 걸 아는데."
"됩니다."
"누나… 라고 불러줄래? 오늘로 41일 째잖아."
순간, 하벨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넬시아는 웃음이 살짝 새어 나왔다.
"…아니,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
고개를 든 넬시아는 웃음기가 섞인 표정으로 하벨을 바라보았다.
"미안. 그런데 좀 웃기긴 해. 41일이라니."
"예예. 알겠습니다, 누님."
"누나라고 불러달라니까."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빛이었지만, 하벨은 이상하게 따르고 싶지 않았다.
"그건 내면에서 허락하지 않네요."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이번이 아니면 다음에도 기회가 있는……."
"누나."
하벨이 입술을 깨물며 말을 꺼내자 넬시아는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어색하지 않은 다정함이 비소로 드러났다.
"고마워, 하벨. 저 말을 정말, 정말 꼭 들어보고 싶었어."
누나.
저 말은 하벨이 어릴 적에 자신이 거부했던 말이었다.
이게 뭐라고.
저 간단한 말을 허락하는 게 뭐였다고.
"이제 힘들면 '누님'이라고 불러도 괜찮아."
넬시아는 하벨의 손을 쓰다듬었다.
"범인은 내가 죽여줄 테니까."
"……?"
하벨은 순간 너무 자연스러워서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죽여요?"
"그래. 죽여야지. 그걸 왜 가만히 둬야 하는 거야?"
당연한 사실을 언급하는 것처럼 넬시아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마법사 협회는 네가 가져가기로 했다며? 아버지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 그럼 나도 최대한 덜 건드려보도록 노력하려고. 아까, 복도에서 헤일리스를 만났는데 죽일지 말지, 고민을 좀 했어. 지금 죽이면 다 해결되는 거잖아."
넬시아는 나긋나긋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잠깐 아버지께서 하던 말씀도 생각나고, 나도 그렇게 눈에 띌 처지가 아니라서 일단 참긴 했지."
"정령사 왕국 문제 때문에요?"
"맞아. 귀족이든 대신이든 내가 헤스트리아 왕국과 중간 다리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야. 지금 주목을 받을 순 없지."
넬시아는 하벨의 손을 조심스레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갑니까?"
하벨이 묻자 넬시아는 볼을 긁적였다.
"카샬이 네가 자야 할 시간이라고 하던데? 짧게 이야기하고 끝내달라고 부탁해서 음, 지금 가는 게 맞는 것 같아서."
[카샬 말이 맞아. 대장은 계속, 계속 휴식해야 한다고 헤레스가 말했어.]
아라가 목소리에 힘을 주며 강조하자 넬시아는 살짝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
"아닙니다."
"그럼, 다행이다."
"혹시 괜찮다면 나중에 헤스트리아 왕국이 어떤 상황인지 제대로 말해줄래요?"
"음."
"강요는 아닙니다."
"방금은 농담이야. 좋아. 알려줄게."
넬시아는 이전과 달리 거리낌 없이 대답하며 활짝 웃었다.
하벨이 먼저 손을 내밀었으니, 이제 자신이 한 발자국 걸어가야 할 때가 아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