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손을 잡자(2)
* * *
"……."
카샬은 말문을 잃었다.
요즈음 저 사건 때문에 왕실이 발칵 뒤집혔다.
코스모피안 왕국의 대신들이 장례식에서 자폭하는 일이 발생했다.
하지만 장례식장에 집중적으로 공격받았을 뿐, 왕실 기사들이 머무는 병영까지 기습적으로 공격받지 않았던가.
테러라고 할 수 있는 이 일이 어제 찾아온 사람들 때문에 흔들리고 있었다.
"왜 아무 말이 없어? 혹시 아직도 어떻게 된 건지 몰라?"
하벨은 시선을 돌려 레디나를 보았다.
침대에 누워서 보는 터라 다들 높고 거대해 보였다.
"이번 폭파 사건에 가장 크게 휘말린 건 도련님이에요. 누가 봐도 도련님을 노린 일이라 저는 계속 곁을 지키고 있었어요."
레디나의 눈이 잠깐 가늘어졌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갈렸다.
[이 몸도 대장 옆에 꼭 붙어 있었어. 용용이도 그랬어. 그런데 용용이가 자꾸 울어서 카샬이 사탕을 쥐여 주고는 잠깐 헤레스한테 보냈어.]
하벨의 시선이 닿자마자 아라는 말을 꺼냈다.
그 모습에 하벨은 피식 웃었다.
이제 좀 진정이 된 모양이었다.
"도련님."
카샬이 입을 열었다.
"그래."
"제가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솔직히 말씀해주세요."
"…뭘?"
"자는 척하고 몰래 나갔다 오셨습니까?"
"……."
하벨은 저 물음이 너무도 기가 차 입을 살짝 벌렸다.
방금 깨어났는데 자는 척하고 몰래 나갔다 오다니.
"아무리 의심이 많아도 이건 너무하네. 나 방금 일어났어. 너도 봤잖아, 레디나?"
"지금 카샬이 잠이 부족해서 정신을 놓았네요. 방금 깨어나신 도련님이 이해해주셔야죠."
레디나는 손바닥을 뻗어 카샬 앞에 휘휘 저었다.
"보셨죠?"
카샬이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자 레디나는 손바닥으로 그를 가리켰다.
"…아. 실례했습니다."
카샬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숙였다.
"도련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무 정확해 그만 실언하고 말았습니다."
"어, 잠깐만요. 그럼 진짜 폭탄을 터트린 놈이 코스모피안 왕국 사람들이 아니라고요?"
키득거리고 있던 레디나가 문득 밀려오는 생각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몸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분명 그 나쁜, 아주 나쁜 사람이 '코스모피안 왕국을 위하여!'라고 말하는 걸 이 몸이 들었어.]
아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귀를 접었다.
[어, 어, 그러면 코스모피안 왕국의 사람도 아닌데 왜 그렇게 말했던 거야? 이 몸은… 잘 모르겠어.]
"맞아. 코스모피안 왕국 쪽에서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어."
"그게 뭐야. 당연히 그쪽 나라에서는 안 했다고 주장하겠지. 내가 묻는 건 그게 아니야, 카샬."
하벨은 카샬의 대답에 기가 찬 듯이 말을 꺼냈다.
"저 역시 도련님께서 물어본 걸 착실히 대답하고 있습니다. 지금 자신들을 코스모피안 왕국의 대신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이 뒤늦게 찾아왔습니다."
"뒤늦게 찾아오다니?"
"폭파 사건이 벌어진 뒤, 코스모피안 왕의 인장이 찍힌 임명장을 들고 대신이라 주장하는 여러 사람이 찾아와 내부가 더욱 시끄럽게 변했습니다."
"계속 말해 봐. 이건 좀 흥미롭네."
하벨이 실실 웃자 카샬은 불안한 표정으로 하벨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 그 뒤는 몰라서 그래?"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언제는 허락을 구하고 말했어?"
"이걸 말씀드리면 즐거운 거 하나 물었다고 움직이실 것 같습니다."
"좋아. 그럼 나도 하나 말할게."
하벨의 미소가 길어지고 아직도 떨리는 손을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내 꼴이 어떤지 아직 못 봤지만, 어떤 놈이 너희가 그렇게 기겁할 만큼 날 엄청난 꼴로 만들었어."
하벨이 아라, 레디나, 그리고 카샬이 말한 걸 고스란히 돌려주자 레디나는 기가 찬 표정으로 카샬을 쳐다보았다.
카샬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네가 말하지 않아도 나는 당연히 응징할 생각이야. 자, 이제 말할 생각이 들어?"
당연하게 내뱉은 저 말에 레디나가 턱밑을 쓰다듬으며 카샬에게 물었다.
"으음. 도련님을 묶어도 소용없겠죠?"
"당연히 소용없지. 그냥 며칠 더 밤을 새운다고 생각하면 편해.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설마하니 도련님께서 멋대로 움직이시겠어?"
은근한 카샬의 압박에 하벨은 말없이 그저 웃었다.
그거야 상황에 따라 다른 게 아니겠는가.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고인이 가는 길을 멋대로 방해하고, 자신에게 폭탄을 끼얹은 게 어떤 놈의 머릿속에서 나왔는지 몰라도 당연히 모가지를 꺾어야 하는 게 아니겠나.
카샬은 체온계를 쳐다보다 빠르게 포기하며 말을 꺼냈다.
애초에 말린다고 말려졌으면 자신의 머리가 지끈거릴 일도 없겠지.
"코스모피안 왕국의 대신들이 이곳 에르티안 왕국으로 오던 중 포탈이 갑자기 망가져 배로 이동하게 됐다고 합니다."
[배? 바다에 타는 거 말이야?]
아라가 눈을 반짝였고, 하벨은 살짝 놀라며 물었다.
"물이 다 오염됐다면서 바다에 가도 되는 거야? 거기야말로 진짜 끔찍한 곳일 텐데."
모든 물은 바다로 모여들기 마련.
오염이 가장 심각한 곳은 단연 바다가 아니겠는가.
"위험성이 굉장히 크지만, 놀랍게도 뱃길은 쓰이고 있습니다. 지금같이 각 나라로 향하는 포탈이 막혔든지, 포탈을 사용할 만큼 돈이 없는 경우에 주로 쓰이죠."
"그럼 나도……."
"아, 물론 도련님은 안 됩니다. 근처에만 가셔도 어떤 일이 벌어지시는 꼭 경험해 봐야 하겠습니까?"
"장비를 다 착용하고……."
"안 됩니다, 도련님. 정 그렇게 가고 싶으시다면 비가 오는 날 우산만 쓰시고 한 번 달려보시죠. 만약 괜찮다면 저도 더는 말리지 않겠습니다."
비만 오면 앓기 바쁘면서 바다로 나가다니.
카샬은 하벨이 입을 다물자 그제야 뒷말을 이었다.
"원래는 5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지만, 거센 파도 탓에 늦어졌다고 합니다. 이전에 에르티안 왕국에 온 코스모피안 왕국의 대신들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있고요."
"바안 전하가 이번에 제대로 이를 갈았을 텐데."
하벨은 천천히 눈동자를 굴렸다.
요컨대 기존에 있던 코스모피안 왕국의 대신들은 가짜고 지금이 진짜라는 가정 하나가 생긴 게 아닌가.
만약 저게 사실이라면 상황 자체가 너무도 이상했다.
왜 그렇게 코스모피안 왕국을 잡아먹으려 안달일까.
"예. 이전에 코스모피안 왕국의 대신, 아니, 그 개새끼들이 내보였던 왕의 도장이 찍힌 임명서 역시 진짜라고 합니다. 그러니 무척 열 받지 않습니까?"
카샬은 미간을 찌푸리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지금 결과적으로 하벨이 무사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물 마법사가 되는 날, 황천길로 갈 뻔하지 않았는가.
"와, 대체 누구인지는 몰라도 진짜 제대로 준비했구나."
"감탄하지 마세요. 이건 감탄할 일이 아니잖아요."
레디나는 하벨의 이마를 때리고 싶은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놀랍긴 하잖아? 그래서 지금 누가 진짜인지 확인하고 있겠네? 물론 대답은 뻔하지만."
하벨은 재미있다는 듯 카샬을 바라보았다.
"맞습니다. 코스모피안 왕국에서 나올 대답은 뻔합니다. 아니라고 잡아떼겠죠. 아니, 무조건 아니라고 해야 합니다. 이번 일에 얽힌 나라가 몇입니까? 이번 일을 수긍하는 순간 어떤 일이 닥칠지 너무 뻔하지 않습니까."
이번 일은 너무도 명확했다.
코스모피안 왕국의 대신들이 다른 나라 대신들이 있던 장례식장에서 자폭이라는 테러를 벌였다.
이유가 뭐가 되었든 간에 배상해야 할 나라가 몇이며 그 배상금은 물론 이번에 깨진 신뢰를 어떻게 회복하면 좋을지 생각하느라 잠도 못 자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래. 배상 문제하고 오명을 뒤집어썼는지 아닌지에 대한 사실을 접어둬도 이미 다른 나라들의 신뢰를 잃어버린 게 엄청 크지. 밖과 안이 난리가 났을 테니 참 볼만하겠다. 이런 건 직접 봐야 하는데. 아쉽네."
하벨은 아라의 꼬리를 만지작거리며 후련한 표정을 했다.
저런 미련한 짓을 막지 못한 것도, 설령 억울하게 휘말린 것 역시 뭐가 됐든 참 고소하다 싶었다.
'자, 그러면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싫어요."
레디나가 하벨의 시선과 마주하자마자 거절했다.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당분간은 안 돼요, 도련님. 지금 도련님은 안정을 취해야 해요. 언니가 쓰러지는 모습을 기어코 보셔야겠어요?"
"아니,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다니까."
하벨은 억울함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자신도 지금은 움직이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도련님 말씀대로 일단 지금 불러올 수 있는 사람들을 불러오겠습니다. 잘 보고 있어."
카샬은 레디나에게 당부하고는 하벨을 바라보았다.
내일 일어난 후에 다른 사람들을 봐도 되거늘, 하벨은 지금 억지로 잠을 버티고 있었다.
어떤 의미로 참 미련하다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모시고 있는 거겠지.
카샬은 숨을 깊게 내쉰 후에 하벨에게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하벨과 가장 가까이에 위치해 그를 무조건 지켜야 할 자신이 너무도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됐어. 어서 갔다 와. 진짜 졸리기 시작했으니까."
하벨이 예상했던 말을 꺼냈기에 카샬은 괜히 힘이 빠졌다.
"알겠습니다. 서둘러 움직이겠습니다."
카샬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때, 룬델과 레디나, 그리고 칼리우스가 반응했다.
하지만 자신은 그 거리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힘이 부족하다는 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아주 절실하게 느끼지 않았던가.
하벨을 안고 달려가는 순간, 그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피만큼 손아귀에 생명이 흐르는 느낌은 정말 끔찍했다.
어쩌면 그 무엇도 될 수 없는 자신의 한계가 여기까지가 아닐까 싶었다.
―억울하더냐? 아무것도 될 수 없는 상태가 그렇게 억울하다면 그럴 시간에 검이나 더 휘둘러. 넌 그래야 해. 한참이나 뒤에서 출발했으니까.
자신을 한심하게 쳐다보며 비난을 퍼붓던 스승님의 말씀이 옳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카샬은 자신이 검을 착용하는 왼쪽 허리춤을 잠깐 바라보았다.
'만약 내가 정령사였다면…….'
그랬다면 그때, 자신도 그 거리를 좁혀 하벨을 보호할 수 있었을까.
카샬은 앞으로 다시는 쳐다보지도 않고, 감히 닿을 생각도 하지 않겠다 다짐했던 그곳에 시선을 뒀다.
* * *
"…혹시 저 죽었는지 보러왔습니까?"
하벨은 누워서는 헤일리스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몇 번을 봐도 헤일리스가 맞았다.
설마하니 그녀가 자신을 찾아올 줄이야.
카샬이 말했을 때도, 헤일리스가 자신의 앞에 앉아 있었을 때도 믿지 않았다.
"농담이라면 그만두십시오."
헤일리스의 눈빛이 싸늘해지자 옆에 선 카샬이 날이 선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농담 하나에 나를 이렇게 잡아먹으려고 하니 무섭네요."
"그게 무서움을 드러내는 태도라니. 차분해지시지요. 공은 이제 물 마법사입니다."
"알아요. 내가 쟁취했는데요?"
"행동 가짐을 똑바르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나보다 당신이 더 잘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 팔은 당신 부하가 그랬잖아요. 뭐, 여기에 폭탄의 흔적까지 추가됐지만요."
하벨이 즐겁게 팔을 흔들자 헤일리스는 불쾌함을 드러냈다.
하지만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마법사 협회는 계속 조사를 받고 이미 신성 국가 시엘느의 신관인 엘라힘이 마법사 협회한테 칼리우스와 엮인 소란에 대한 배상을 공식적으로 청구했다는 소식을 카샬한테 들었으니까.
"아, 요새 바쁘셨죠? 제가 깜박했네요. 얼마를 달라고 합니까?"
"하벨 공…!"
헤일리스는 저 빈정거림을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뭐, 좋습니다. 나중에 결과로 듣죠. 그래서 무슨 일로 왔습니까?"
이미 부글부글 끓는 헤일리스를 보자 하벨은 씩 웃으며 물었다.
"…후."
헤일리스는 화를 참으러 애를 썼다.
하벨의 부상은 진짜였고, 그가 어서 나아야 계획에 차질이 없었다.
무엇보다 부상자에게까지 소리치고 싶지 않았다.
"이번 폭발 사건은 저희 쪽에서 벌인 일이 아닙니다. 그 말을 하러 왔습니다."
"실망이네요. 병문안이 아니라 변명을 위해 왔다니."
"당연히 병문안도 맞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저희를 의심하고 있을 것 같아 이렇게 직접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선을 그어요? 이제 우리잖아요."
하벨이 순진한 미소를 그리자 헤일리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분위기상 거짓이라는 걸 알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라는 말이 이질적이며 낯설어 괜히 멈칫하게 했다.
헤일리스는 뭐가 됐든 하벨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는 이 상황 자체를 일단 피하고 싶었다.
조금 전에 불가피하게 만났던 룬델 역시 얼마나 불편했는가.
―내 아들에게 손대지 말게.
주변에 퍼지는 냉기가 얼마나 차가웠던지.
―그 더러운 욕심도 내보이지 말게.
입에서 터트리는 그 말에 살갗이 베인 것처럼 따끔해 가슴마저 서늘해졌다.
"저는 더는 자리를 비울 수 없어 이만 갑니다. 빠른 쾌차 바랍니다."
"헤일리스 씨."
하벨이 입을 열자 자리에서 일어나던 헤일리스가 잠깐 멈췄다.
"짧지만, 병문안 와줘서 고맙습니다. 나중에 뵐게요."
하벨은 정말 반가운 듯이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헤일리스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고, 발소리가 사라진 후에 카샬이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이십니까, 도련님?"
"무슨 생각이냐니?"
"일부러 약 올리신 건 알지만,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습니까? 오히려 경계하게 하잖습니까."
"바로 그거야, 카샬. 나를 마음껏 경계해야 용용이한테 시선이 덜 갈 테니까. 왜 그런지 알잖아?"
하벨은 느긋한 미소로 배에 손을 올렸다.
마법사 협회는, 아니, 헤일리스는 자신이라는 독을 삼켰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질적으로 진짜 강한 독은 칼리우스였다.
한 명씩.
한 명씩.
칼리우스 밑에 들어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