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177화 (177/415)

177화. 이제 됐죠?(3)

* * *

헤일리스는 하벨이 꺼낸 저 말에 일그러지는 얼굴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 사건을 이렇게 엮을 줄이야.

벼랑 끝에 내몰린 기분에 손가락 끝부터 힘이 들어갔다.

그제야 대신들마저 물 마법사라는 올가미에 걸려 빠져나올 수 없다는 걸 눈치챈 기색이었다.

'여기서 내 말을 부정하거나 이 사건에서 빠져나오려고 한다면 마법사 협회가 무서워 벌벌 떠는 걸 인정하는 셈이겠지.'

한 나라를 대표해 이곳에 찾아온 이상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하벨은 낄낄 웃을 수 없는 지금이 너무도 아쉬웠다.

'무척 아쉽구나.'

자신이 왕이 된 뒤로 누구를 흔들고, 움직이게 하든 명분이라는 놈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몇만 번, 아니 몇십만 번 이상 느끼곤 했다.

그 명분이 가짜로 만들어졌든 아니든 잘 꾸미면 그만이라는 것 역시 몸소 경험했고.

'대단합니다, 하벨 공.'

바안은 하벨이 벌인 일을 바라보며 속으로 깊은 감탄을 몇 번이나 내뱉었는지 몰랐다.

한 나라의 대표로서 찾아온 대신들 앞에서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으로 단번에 휘감아버리는 저 당당함이 너무도 눈부셔 보였다.

'나도… 공처럼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바안은 지금 하벨이 벌이는 행동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 애를 썼다.

저 과정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도 궁금했고.

"방금 일은 제… 식견이 짧아 꺼낸 말이니 없던 말로 해주십시오."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는지 조금 전, 칼리우스를 납치하려고 했던 마법사 협회 일과 물 마법사 검증 사건이 아무 상관 없다고 언급했던 코스모피안 왕국의 대신이 바로 꼬리를 말았다.

이곳에서 국격을 떨어트리는 행동을 한다면 본국으로 돌아가 어떤 처벌이 기다릴지도 모른다는 압박이 크게 작용했겠지.

하벨은 얼굴을 살짝 올려 헤일리스를 내려다보았다.

"왜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까?"

하벨의 재촉에 사람들의 시선이 단번에 헤일리스에게 쏠렸다.

그녀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겨우 누른 채로 입을 열었다.

"저도……."

"모른다고 말하기에는 현 대신들이 저렇게 쳐다보지 않습니까? 아니면 마법사 협회가 가진 힘이 모두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뛰어나거나요."

하벨이 가볍게 던진 그 말은 꽤 그럴듯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에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몇몇 보였다.

확실히 그게 아니라면 마법사 협회가 저렇게 설칠 수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하벨은 놀란 척 입을 살짝 벌렸다.

"아, 방금은 제 추측일 뿐이니 마음 쓰지 마십시오."

"아닙니다."

샬룸이 갑자기 목소리를 냈다.

레놀드 왕국 쪽의 발언이었기에 분위기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생각해보니 저도 몹시 궁금합니다. 정말로 우리 레놀드 왕국을 무시한 행동인지 아닌지, 레놀드 왕국의 대신으로서 정식으로 협회장에게 요청하겠습니다."

샬룸이 꺼내는 저 당당한 말에 헤일리스의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다.

'역시 샬룸이 레놀드 왕국 대신들의 책임자였다.'

하벨은 그때 샬룸이 내보였던 여유가 어디에서 나오나 싶었는데 바로 이곳에 나왔다는 걸 알았다.

아마 이곳에 있는 그 어떤 대신보다 뒷배가 든든할 테지.

현재 제1 왕국은 누가 뭐라고 하든 레놀드 왕국이 아닌가.

"갑자기 끼어들어 몹시 죄송하게 생각하나, 그건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을 모시는 자로서 어린아이가 처한 곤경을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습니다."

엘라힘이 꺼낸 부드럽되, 날카로운 말 역시 헤일리스를 조용히 찔렀다.

하벨의 시종은 어렸고, 신을 모시는 자로서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외면하겠는가.

이를 외면하는 일은 신관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짓이었다.

하나씩 쌓이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 언짢음을 너머 불쾌감까지 뒤섞여 있자 헤일리스는 점점 조여오는 압박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이런 이야기는 없었잖아, 시렌.'

헤일리스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조금 전과 달랐다. 빠져나갈 구멍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지금 하벨의 시종에게 엄청난 힘이 숨겨져 있었고, 마법사 협회는 그가 필요했다.

자신들이 쫓던 저 아이가 티에라 가문 마차에서 내렸다는 보고에 얼마나 놀랐는가.

얼마 전에 저 아이를 찾았다는 말을 듣고 이제 곧 손에 넣는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설마하니 하벨 티에라의 시종으로서 등장할 줄이야.

'재수 없는 티에라 가문 놈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거슬렸다.

당연하게 가져가 버린 물의 힘도, 대체할 수 없다는 중요도도, 정령에게 기대어 만들어낸 힘도.

전부 너무도 쉽게 손에 넣지 않았던가.

그중 지금 제일 거슬리는 건 한 놈이었다.

'…하벨 티에라.'

헤일리스는 침착하려 숨을 몰아쉬었고, 머리가 한층 차분해지자 이 모든 게 하벨 티에라와 얽혀 있다는 사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다.

'하벨 티에라 네놈이…….'

어떻게든 하벨 티에라를 손에 넣을 생각을 하던 와중에 조금 전 멍청한 마법사 몇 놈이 왕실에서 사고를 쳤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럴 리가.

하지만 손을 쓰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자신이 이곳에 없으면 누가 봐도 이상하지 않겠는가.

'네놈이 벌인 일인가!'

헤일리스는 속에서 부글부글 끓었다.

처음 장례식에서 보여준 하벨 티에라의 모습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보고로 받았던 내용과 똑같은 게 하나도 없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자신들의 존재를 알고 본성을 감춘 건지.

'…아니지.'

문득 떠오른 생각 하나에 헤일리스는 화를 빠르게 식혀 나갔다.

'하벨 티에라가 벌인 일과 별개로 놈이 물 마법사가 되어 마법사 협회에 들어온다면.'

그 가정 하나가 분노를 뒤덮을 만큼 미친 듯이 기쁨을 들끓게 했다.

그렇다면 이 정도쯤이야.

그저 어린아이가 저지른 실수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걸 위해서 지금 이 정도쯤은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하벨은 헤일리스를 보며 비웃음을 살짝 그렸다.

이번 일은 절대로 덮을 수 없었고, 곧 다른 나라에 퍼져 그곳에도 있는 마법사 협회까지 부정적인 여론에 휘말릴 테니 그 피해를 생각해서라도 어떤 이득이든 손에 넣고 싶은 건 당연했다.

사실상 이번 일로 마법사 협회를 해체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건 협회장이 더 알고 있으니 저리도 뻔뻔하게 이득부터 생각하는 게 아니겠나.

"죄송합니다."

헤일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속으로 욕을 하고 있을 텐데.'

하벨은 느긋하게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떤 변명이 나올지 무척 기대됐다.

"이번에 마법사들이 벌인 일은 어떤 말로도 담을 수 없을 만큼 큰일입니다. 바안 전하와 이번에 휘말린 하벨 공, 그리고 모든 대신께 다시금 사과드리겠습니다."

헤일리스는 오늘 몇 번이나 숙였는지 모를 고개를 또다시 숙였다.

"사과해봤자, 다친 저 팔이 낫는 건 아닌데 말이죠."

한껏 날이 선 넬시아의 목소리가 헤일리스의 귀를 때렸지만, 헤일리스는 말을 꿋꿋이 이어나갔다.

"마법사들이 벌인 행동은 어리숙하고 미숙한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진실만 말씀하게 해주십시오, 전하."

"허락합니다."

바안은 공정성을 위해 헤일리스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녀는 바안에게 감사를 표하며 깊이 생각했던 말 하나를 꺼냈다.

"저희가 벌인 일에 비해 너무도 우습지만, 저 시종은 등록되지 않은 마법사였습니다. 저흰 등록되지 않은 마법사를 처형하고, 교화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여 교화하는 과정에서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여론을 바꾸고자 헤일리스는 마법사 협회가 가지는 당연한 권한 중 하나를 언급하며 칼리우스가 가진 비밀 하나를 꺼내버렸다.

칼리우스는 저 말에 깜짝 놀랐지만, 카샬한테 배운 걸 다시금 떠올리며 시종으로서 흔들리지 않도록 마음을 꾹 참았다.

"…그러니까 저 시종이 마법사라는 말입니까?"

헤일리스의 발언에 코스모피안 왕국의 대신은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헤일리스가 강하게 대답하자 칼리우스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 살짝 바뀌었다.

그들의 시선에 대체 얼마나 대단한 마법사이기에 마법사 협회가 저렇게 나설까 싶은 생각이 가득 보여 하벨은 참 우습다 싶었다.

'이미 그 정도는 예상했다.'

하벨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아마도 칼리우스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점과 정령사 가문에 마법사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했기에 저런 말을 꺼낼 수 있었겠지.

헤일리스는 순식간에 바뀐 여론에 하벨을 가엾게 바라보았다.

'협회가 정당성을 손에 넣는 방법은 무척 간단하단다, 꼬맹아.'

아무리 날뛰어봤자 어린애는 어린애일 뿐.

이 정도는 가뿐히 짓누를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이 엿보였다.

하지만 하벨은 말 하나를 가볍게 던졌다.

어이가 없는 말투와 함께.

"그게 무슨 말입니까?"

"모르셨습니까?"

살짝 굳어진 하벨의 표정에 헤일리스의 입꼬리에 미소가 어렸다.

"모르는 게 아니라, 제 시종은 일반인입니다."

하벨이 단호히 말하자 칼리우스는 그제야 하벨이 조금 전에 꺼낸 질문의 요지를 이해했다.

'이래서 도련님이 나한테 마법사가 되고 싶은지, 마나를 조절할 수 있는지 그렇게 물어본 거였구나!'

칼리우스는 당장 자신이 가진 마나의 파동을 더 낮춰 미동도 없이 만들었다.

"설마하니… 마법사 협회에서 이런 실수를 할 줄은 몰랐습니다."

하벨이 고개를 가로젓자 헤일리스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정말 모르셨군요."

똑똑.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 멈춰주세요."

바안은 말을 끊고는 자신의 옆에 서 있던 기사에게 문을 가리켰다.

기사가 문을 열자 다른 왕실 기사가 허리를 숙인 뒤 조용히 바안에게 걸어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조사 결과입니다."

기사는 더욱 말을 낮춰 바안에게 속삭였고, 바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기사는 다시금 허리를 숙이며 밖으로 나갔다.

"계속하세요."

바안은 말을 꺼내며 서류를 살폈다.

"당신의 시종은 마법사입니다."

기사가 바안에게 무얼 전해줬는지 무척 신경 쓰였지만, 헤일리스는 잠깐 주춤했던 기세를 다시금 잡고자 했다.

"안타깝지만, 제 시종은 마법사가 아닙니다. 협회장은 좀 더 제대로 된 이유를 들어 설명해주시죠."

재차 꺼낸 하벨의 말이 달라지지 않자 헤일리스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전하. 자리에 어울리지 않으나 하벨 티에라 공의 마나를 검증하는 자리에 앞서 저 시종을 먼저 살펴보아도 되겠습니까?"

헤일리스의 제안에 하벨의 눈동자가 빛나자 바안은 하벨이 바랐던 순간이라는 걸 알아챘다.

"공들과 경들, 그리고 대신들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바안은 자연스럽게 귀족들과 다른 나라의 대신들에게 물었다.

"찬성합니다."

대부분 찬성하는 분위기였기에 바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의 넓은 마음씨에 탄복했습니다."

헤일리스는 허리를 숙였고, 하벨을 위해 가져왔던 마나를 측정하는 마법 아이템을 꺼냈다.

겉으로 보기에 일반 책 같이 생겼기에 하벨은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건 등록되지 않은 마법사를 알아보기 위해 가장 많이 쓰이는 도구입니다."

헤일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벨 앞으로 걸어왔고, 내밀었다.

"사용법은 무척 간단합니다. 그저 여기에 손을 올리면 됩니다."

가까이서 본 헤일리스의 눈동자는 어쩐지 탁해 보였다.

자신이 이제껏 보았던 마법사와 그 눈이 다르지 않았다.

'…으흠.'

미심쩍은 생각 하나가 머리를 치고 올라왔지만, 하벨은 일단 생각을 멈추고 칼리우스를 보았다.

"손 올려줘."

칼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하벨 옆으로 걸어와 숨을 짧게 내쉬었다.

마나의 움직임을 멈추고, 한 치의 흔들림도 허락하지 않은 상태로 마법 아이템에 손을 올렸다.

헤일리스와 그녀의 자리에 서 있던 마법사들의 낯빛이 환해졌다.

하지만 조용했다.

체감상 3분쯤 흘렀을까, 바안은 헤일리스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더 기다려야 합니까?"

칼리우스의 눈동자가 또르르 굴러갔고, 여전히 잠잠한 마법 아이템에 헤일리스는 다시금 일어나 다가왔다.

"잠깐만요. 고장이라도 난 모양……."

화르르르륵!

헤일리스가 마법 아이템에 손을 대자 푸른 불꽃이 거침없이 피어올랐다.

"고장은 나지 않았네요."

하벨의 눈이 휘었다.

"이 거짓말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안타깝습니다."

하벨이 헤일리스가 주춤거리는 사이 마법 아이템에 손을 댔다.

화르르륵!

헤일리스만큼 커다란 푸른 불꽃은 아니었지만, 마나가 반응을 했다.

"내가 앞으로 속할 곳인데 벌써 거짓말을 하시면 되겠습니까?"

"……?"

룬델의 눈이 커졌다.

"막내 너……."

라르웬은 목소리를 내다가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싶었는데 이렇게 정면으로 파고들 줄이야.

넬시아는 라르웬과 룬델을 쳐다보았다.

하벨은 정령사였다.

정령사는 정령수 이외에 아무것도 담을 수 없으며 순환의 길이 비어 있을수록 강해지기에 마나를 담는 건 불가능했다.

"지, 지, 진짜라고?"

"물 마법사라니. …세상에."

사람들은 왕국에 상관없이 놀라움과 경악, 그리고 열망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아니, 이건 물 마법사일 수밖에 없잖습니까."

"신께서 기적을 만들어내셨다!"

하벨은 소리에 소리가 겹쳐진 상황을 즐기며 물로 화살표를 만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이제 됐죠?"

천천히 움직이는 화살표와 함께 순진한 미소가 하벨의 얼굴에 퍼졌다.

"그럼 저 이제 물 마법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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