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아주 작은 틈부터(2)
* * *
카샬은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여기서 무슨 소꿉놀이인지.
"왕실에 눈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실 텐데, 도련님을 말리지도 않고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둘째 도련님?"
카샬은 라르웬을 타박했다.
당연히 무슨 말을 꺼내 반박할 거라 생각했지만, 라르웬은 어쩐지 얌전했다.
카샬은 그 모습 자체가 너무도 수상했음에도 일단 자리를 옮기는 게 먼저란 생각에 짧게 말을 꺼내고 말았다.
여기는 적어도 하벨에게 배정된 방도, 라르웬에게 배정된 방도 아니었으니까.
"뭐가 됐든 오늘은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시끄러워서 알았죠."
하벨의 물음에 카샬은 기가 찬 듯이 반응했다.
그렇게 떠들어놓고 모를 거라 생각한 것부터 웃겼다.
다행히도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망정이지.
[난 이럴 줄 알았어. 카샬 귀가 보통 귀야?]
루룸은 카샬에게 다가가 그의 볼을 찔렀다.
순간, 카샬이 움찔거렸지만, 태연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분명 아라든 누구든 정령이 자신을 찔렀을 테니까.
"어쨌든 누가 오기 전에 움직입시다."
"카샬, 가기 전에 한 가지만 물어볼게."
하벨이 말을 꺼내자 카샬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대체 왜 자리를 비운 건데? 그것도 말도 없이 말이야."
"절… 찾으러 나오셨다고요?"
카샬은 곧바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도련님이요? 어… 도련님이요? 도련님이… 음."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카샬은 온도계를 꺼냈고, 하벨은 바로 질색했다.
"당장 그거 집어넣어."
"하지만……."
"업무 도중에 자리를 이탈한 건 네가 멍한 거랑 별개잖아. 이건 근무 태만이야. 알지?"
"그럼, 그럼. 경고를 먹여버려야지."
하벨이 말하고, 라르웬이 긍정한 그 꼴에 카샬은 입가를 핥았다.
멋대로 자리를 벗어난 건 사실이었으니까.
"제가… 음, 누군가를 봤는데. 아는 사람이랑 너무 똑같아서 저도 모르게 찾고 있었습니다."
"아는 사람? 네가?"
눈을 동그랗게 뜬 하벨의 반응이 불쾌했지만, 카샬은 일단 망설였다.
몇 번이나 생각하다 어차피 숨겨봤자 뭘 하겠는가 싶어 그냥 털어놓았다.
"그 사람은 제 스승님입니다."
* * *
"……?"
레디나는 하벨을 보자마자 자신의 눈을 비볐다.
아무리 봐도 하벨인데.
"도련님께서 왜 여기에 나오시는 거예요?"
"도련님이 왜 여기에서 나온다니……? 네가 눈감아 준 거 아니었어?"
레디나의 말에 카샬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평소라면 그랬죠. 그런데 오늘은 분명히 잘 보고 있었어요. 아까 확인도 했는걸요."
"…도련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카샬이 한숨이 섞인 말을 하자 아라가 꼬리에 얼굴을 파묻고 귀를 쫑긋 세웠다.
[이 몸이랑 같이 라르웬한테 이동했어. 화내지 마, 카샬.]
"보는 대로지."
하벨은 태연하게 대답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오래 기다렸지?"
초조한 채로 침대 근처를 돌아다니고 있던 페트리오가 하벨을 보자마자 멈춰서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하벨이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는 행동을 한다지만, 오늘은 진짜 피가 말렸다.
이곳은 왕실에다가 조금 전 일로 하벨을 탐내 할 자들이 얼마나 많던가.
그래서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정령 기사들이 평소보다 더 많았고.
안도감도 잠깐, 페트리오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이렇게 마음대로 나가실 수 있다면 이제는… 어쩌란 건지 모르겠네.'
분명 저건 정령사 중에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없다는 이동기였다.
하벨이 이동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졌으며 어쩌면 몰래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말을 내포하기도 했다.
"그렇게 심심했어?"
하벨이 장난스레 말을 걸자 페트리오는 잠깐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이건 심심한 거랑 다르지 않습니까!"
곧 페트리오는 울컥해 말을 꺼내다 말고 카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또 무슨 시비를 거나 쳐다보다 카샬의 미간도 덩달아 찌푸려졌다.
저놈이 자신을 측은하게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이건 굉장히 기분이 나빴다.
"그래. 그건 다르지. 너는 진짜, 자중 좀 해, 막내야."
딱!
라르웬은 하벨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멍하니 자신을 보는 하벨의 시선을 외면하며 라르웬은 카샬을 째려보았다.
"너는 한눈 좀 팔지 말고. 막내가 어떤지 알면서 뺀질거려?"
[나는 재미있는데. 가끔 이런 일도 있어야지.]
루룸이 실실거렸다.
"이번은…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카샬의 사과에 라르웬은 할 말을 삼키며 그대로 돌아섰다.
자신이 아무리 입이 아프게 말하면 뭐하겠는가. 정작 하벨이 가만히 있어야 가능한 일인 것을.
"벌써 가십니까?"
하벨이 묻자 라르웬은 클로저용 연락용 아이템을 꺼내 흔들었다.
"나도 보고해야지. 네가 가져온 정보가 아주 크잖아? 그리고 막내야."
"예?"
"나중에 그렇지 않아도 날뛸 시간이 있으니까 지금은 얌전히 있어."
하벨이 물 마법사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절차가 남아 있었다.
"뭐어, 상황 좀 보고요."
건성건성한 하벨의 대답에 라르웬은 다시금 카샬을 쳐다보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카샬."
하벨이 침대에 걸터앉다 말고 무언가 이상해 카샬을 불렸다.
"예, 도련님."
"용용이는 어디에 간 거야? 안 보이는데?"
[아까 이 몸이랑 놀았는데?]
아라가 꼬리 속에서 얼굴을 내밀며 눈을 크게 떴다.
"심부름 보냈습니다."
"……?"
툭 하고 던진 카샬의 말에 하벨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아라는 허둥지둥했다.
[호, 혼자 갔어? 용용이가 얼마나 겁이 많은데!]
"진짜 안전한지 아닌지는 일단 보내야 아는 거 아닙니까?"
카샬이 입꼬리를 올리자 페트리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진짜 지독하네."
"그 말을 진짜 지독한 놈한테 듣고 싶진 않은데."
하벨은 카샬과 페트리오가 벌이는 실랑이를 뒤로하며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왔던 방향으로 향했다.
카샬이 슬쩍 발을 옮겨 하벨을 막았다.
"도련님이 한 행동을 믿으시지요."
카샬은 오늘 일을 통해 하벨이 자신의 행동에 조금 더 신중했으면 했다.
"그건 당연히 믿는데, 용용이가 무슨 짓을 할지 예측하기 어려워서 말이야. 아무래도 가봐야겠어."
"…그 말씀을 도련님께서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페트리오가 정말 충격받은 얼굴을 했고, 카샬이 온도계를 꺼냈기에 하벨은 언짢았다.
"그래. 좀도둑은 모를 수 있는데 카샬 너는 내가 왜 용용이를 옆에 끼고 있는지 알면서 그래?"
"압니다. 칼리우스는 아직 감정을 조절하는 것도 여러 면에서도 서툴지 않습니까?"
"아주 잘 알고 있네? 만약에 누가 시비라도 걸어서 열 받은 용용이가 벽을 치기라도 한다면 그거 어떻게 할 거야?"
"제가 일을 시킨 동안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때는 혼자가 아니었고, 저택 내에서 내 욕을 할 사람이 없어서 그렇지. 여긴 다르잖아. 내가 아까 시비를 얼마나 걸고 다녔는데."
"자각은 하고 계셔서 참 다행입니다."
카샬은 이 와중에 얄미울 정도로 활짝 웃자 하벨은 기가 차 발을 움직였다.
"도련님."
"왜?"
하벨은 앞으로 나아가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칼리우스를 너무 어리게 보는 거 아닙니까? 사실 도련님보다 나이가 많습니다."
하벨은 저 말에 가다 말고 얼굴을 찌푸렸다.
[…어음, 그건 사실인데.]
아라까지 넌지시 말을 던지자 하벨의 미간에 주름이 살짝 깊어졌다.
"작은 심부름이었습니다. 도련님께서 이렇게까지 반응할 이유가 없는, '도련님 저녁 식사는 고기 위주로 해주십시오'라는 말을 요리장에게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몰라서 그래."
"뭘 모른다는 말씀입니까?"
[이 몸도 알고 싶은데?]
하벨은 아라의 물음에 애써 그 말을 꾹 참았다.
칼리우스가 세상을 멸망으로 이끌 원인이며 그게 마법사 협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어떻게 맨정신으로 할 수 있겠는가.
"그런 게 있어."
하벨은 대충 얼버무리며 빨리 밖으로 나갔다.
페트리오는 하벨을 따라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다 방을 벗어났다.
"도련님을 따라가려고요?"
레디나가 뒤따라오며 물었다.
시녀로서 따라오긴 했지만, 자신은 그렇게 돌아다니지 않는 편이 나았다.
"아뇨. 다음을 준비해야죠."
페트리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오지 않았던가.
놈들이 단순히 장례식 때문에 왔을 수도 있지만, 일단 알아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절단 전부가 왕실로 온 건 아닐 테니까.'
하벨이 따로 말하지 않았지만, 이미 가면단들을 움직여 새로운 얼굴들을 조사하라고 일렀다.
"갈 땐 가더라도 저한테도 말해주고 가요."
레디나가 페트리오를 붙잡았다.
"검은 달의 정보."
레디나는 그게 너무도 탐이 났다.
* * *
"저 혼자 와도 될 텐데 굳이 따라오신 이유가 뭡니까?"
카샬은 가다 말고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늘 예정에 없던 물 마법사 사실 여부를 가리기 위해 저녁 시간이 반 토막이 난 터라 빠듯하지 않던가.
그렇지 않아도 요새 하벨이 쓰러진 일이 많아 잘 먹어야 하는 참에.
[용용이가 걱정이 되니까.]
아라는 혹시 몰라 카샬에게 달라붙어 조곤조곤 말을 꺼냈다.
"당연히 내가 가야 하니까. 폭주한 용용이를 나보다 더 빠르고, 간단하게 멈출 수 있다면 계속 말려도 돼."
"도련님."
"왜?"
"놀랍겠지만, 저는 얌전히 있는 걸 좋아했습니다. 그게 얼마나 행복한 일이었는지 나중에 알게 됐고요. 왜 자꾸 후회할……."
카샬을 말을 하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왕실이 넓은 만큼 주방으로 향하는 길은 여러 개였다.
그나마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로 왔지만, 오늘 일이 워낙 커 하벨에게 꼬리가 붙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카샬은 남자를 바라보다 곧 고개를 숙였다.
복장이 에르티안 귀족은 아닌 듯했다.
아라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는 말조심해야 한다고 루룸이랑 세렌이 말해주지 않았던가.
"안녕하세요."
남자는 갑자기 쏠리는 시선에 하벨을 향해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음, 그냥 조용히 지나가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만난 건 진짜 우연입니다. 지금 자유시간 같은 거잖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하벨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어쩌다 마주친 건 사실인 듯하나, 자신을 노리러 달려들지 않는 태도가 참 이상하다 싶었다.
자신이 방안에만 있어 이렇게 독대하듯 말을 나눌 기회는 몇 안 될 텐데.
"그… 혹시 저 기억하십니까? 아까 정말 물 마법사가 맞냐고 물었잖습니까."
남자는 지나가려다 말고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20대 중반은 됐을까, 목까지 오는 검은 머리카락에 앞머리를 이마 너머까지 올려 부스스함과 단정함 그 모호한 경계에 있었다.
어색한 웃음마저 어쩐지 능글맞게 보였다.
"모르겠습니다. 그런 질문은 정말 많이 받아서 말입니다."
그럼 그렇지.
하벨은 남자를 주목했다.
저런 질문을 많이 들었다고 말했지만, 하벨은 사실 저 남자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에르티안 귀족들도 아니고 다른 나라에서 온 대신들인데 그걸 기억하지 못하면 되겠는가.
―그런데 정말 물 마법사가 맞는 겁니까?
남들이 하던 똑같은 질문을 되게 가볍게 물어본 사람이자 레놀드 왕국의 대신 중 하나였다.
대신 중 제일 어린 나이였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하긴, 제 앞에서부터 엄청 많이 묻긴 했죠."
남자는 턱을 쓰다듬다 곧 무언가를 떠올린 듯이 말을 꺼냈다.
"아, 몸은 어떠신가요? 아까 비틀거리시는 걸 봤습니다."
"걸어 다닐 만합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예. 나중에… 으음, 그런데 그쪽에는 없습니다."
발목을 붙잡는 남자의 말에 하벨은 고개를 돌렸다.
"혹시 보셨습니까?"
"물론이죠. 갑자기 나타난, 음, 예비 물 마법사이신데 지켜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다 여기 집사도, 시종이랑 시녀도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시종이 어디로 갔는지 방향만 알려주시죠."
"시종에게 무슨 일인지 벌어졌는지 묻지 않으시네요."
남자는 신기한 듯이 반응하자 하벨은 대수롭지도 않게 말했다.
"이렇게 느긋하게 반응하는 걸 보면 급한 일은 아닌 모양이죠."
"……음."
남자는 잠깐 골똘히 생각했다.
"솔직히 뒷모습이랑 옆모습만 잠깐 봤습니다.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종은 왼쪽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오른쪽이요!"
"안내를 해주시지 않는 겁니까?"
하벨이 눈가를 살짝 좁히며 물었다.
보통이라면 안내를 더불어 말을 나누고 싶어 몸이 근질거릴 텐데.
"벌써 견제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도 반가운 마음 반, 떠나고 싶은 마음 반입니다."
남자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고, 하벨은 조금 다른 식견을 가진 남자를 주목했다.
'역시… 레놀드에서 그냥 보낸 건 아닌 모양이지?'
현재 제1 왕국은 레놀드였기에 경계할 필요는 있었다.
"그럼, 진짜 나중에 뵙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당신이 물 마법사가 됐으면 합니다."
남자는 눈동자를 왼쪽으로 굴리다 볼을 살짝 긁적였다.
"음, 이건 자국의 이익과는 별개로 세상을 위해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존재는 언제나 필요하다고 매번 생각해서 꺼낸 말입니다. 물론, 그런 존재가 저였으면 하지만, 그게 쉽지는 않죠. 그러니 당신이 됐으면 합니다."
뭘 말하고자 하는지는 몰라도 남자의 자신감만큼은 아주 가득하다는 걸 확실히 알았다.
"싫습니다."
하벨은 싱긋 웃으며 딱 잘라 거절했다.
자신이 왜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이미 용왕일 때, 할 만큼 했고, 더는 그런 존재가 될 마음은 없었다.
이건 마법사 협회를 부서트리기 위한 계략일 뿐 휘둘릴 생각 역시 없었고.
"…싫으십니까?"
"예. 싫습니다. 제가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하십시오. 어쨌든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하벨은 더는 저 남자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나중에 물 마법사를 확인하는 자리에서 보게 될 테니.
하벨이 스치듯이 남자를 지나가자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반가웠습니다. 저는 샬룸이라고 합니다."
하벨은 그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일 뿐이었다.
* * *
쾅!
하벨은 거친 소리에 시선을 내렸다.
바닥에 부딪히는 거로도 모자라 자신의 앞으로 한 남자가 쭈르륵 밀려왔다.
하벨이 다시 시선을 올렸을 때 누군가를 밀친 모습 그대로 기겁하는 칼리우스가 보였다.
"…하."
하벨은 기가 찬 소리를 내며 카샬을 바라보았다.
"카샬. 용용이가 뭐라고? 얌전히 뭐? 더 말해보지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