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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167화 (167/415)

167화. 하얀 꽃송이(2)

* * *

* * *

[그런데 있잖아, 아까 그 말 진짜야? 하벨 나이가 38일 됐다는 거?]

마차로 얼마나 달렸을까, 중간에 점심도 먹고, 다시 마차 안에 조잘거리는 소리가 이어지던 참에 톰톰이 물었다.

순간 그 말에 루룸과 세렌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세렌은 어디선가 익숙한 날짜에 잠깐 멈칫거리다 하벨을 바라보았다.

[…잠깐만. 아라랑 너랑 태어난 날짜가 똑같잖아?]

[응. 헤헤, 대장하고 이 몸하고 같아.]

아라가 꼬리를 흔들며 웃자 하벨을 바라보는 세렌의 눈빛이 살짝 날카로워졌다.

'아니. 부러워할 게 없어서 이런 걸 부러워…….'

하벨은 실실 웃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톰톰이 그런 세렌을 슬픈 눈동자로 보고 있지 않은가.

힐끔힐끔 쳐다보는 시선 안에 아라가 있었고.

'이것 참, 되게 복잡한 관계네.'

하벨은 재미있는 이 관계에 루룸만 없자 반짝이는 눈빛으로 루룸을 바라보았다.

[하벨. 제발, 거기서 난 빼줘. 나는 아무도 엮이고 싶지 않으니까.]

루룸이 언짢아하며 라르웬의 머리로 올라갔다.

"왜? 우리 아라가 어때서?"

하벨의 재촉에 루룸이 인상을 썼다.

[세렌이나 톰톰이나 너희가 느끼는 그런 감정이 아니야, 바보야! 오히려 친밀감에 가깝지!]

기어코 루룸이 소리를 지르자 숨죽여 웃던 룬델이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버지, 이런 거 좋아하셨어요?"

하벨과 같이 낄낄거리며 바라보던 라르웬은 잠깐 웃음을 멈추며 룬델을 보았다.

그간 몰랐던 룬델의 모습이 아닌가.

"그럼. 이게 얼마나 재밌더냐? 관계가 아주 복잡하구나."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알잖아, 멍청아! 아라는… 아라는 좀, 아니 많이 달라! 너는 이런 거 모르겠지!]

세렌이 부리로 룬델의 수염을 당기자 그의 웃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지금까지 한 번도 꺼지지 않고, 오히려 점점 번져가는 웃음소리에 넬시아는 계속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한 번씩 '그땐 왜 이렇게 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아 대체 어디에서부터 꼬여온 실타래인지 넬시아는 알고 싶어졌다.

"…하벨?"

넬시아가 조심스럽고, 또 어색하게 그를 부르자 라르웬과 룬델은 잠깐 말을 멈추고 넬시아를 바라보았다.

왜인지 모르게 긴장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하벨은 태연하게 말을 꺼냈다.

"그, 사과라면 됐습니다. 사과받을 이유도 없고 너무 많이 들었잖습니까. 아까 점심 먹을 때도 말했고요."

"이건 달라. 그러니까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어떻게 안 들리니 욕하는 거 빼고는 말해보세요."

"당분간 널 지켜봐도 되겠어?"

"당분간이요? 일이 생겨 티에라 가문으로 온 거 아닙니까?"

정령사들로만 이루어진 왕국, 헤스트리아에 문제가 생겼기에 티에라 가문으로 왔다고 들었다.

ㅂ로 칼리우스한테.

대체 얼마나 정령들에게 이쁨을 가득 받는지 새도 아니고 자꾸 어디서 정보를 주워다 자신한테 쪼르르 달려왔다.

―…넬시아 아마 정화제 문제로 온 것 같다고 했어. 얼마 전에 도련님도 티에라 가문이 만들어내는 정화제가 줄어들었다는 말을 했잖아? 또 마법사 협회에서 무슨 일을 저지른 게 아닐까?

하벨은 그 말을 듣고 무조건 확실했다.

티에라 가문도, 헤스트리아 왕국도 정화제가 줄어들고 있다고.

마법사 협회가 정령사들과 정령들을 가둬 강제로 정화제를 만드는 상황을 알게 된 뒤로 누군가 정화제를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역시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았던가.

'개인적으로 헤스트리아에서 벌어지는 사건 역시 마법사 협회에서 관여한 거라면 좋을 텐데.'

헤스트리아 왕국에서 벌어지는 일이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라면 룬델에게 그 어떤 것보다 끔찍한 일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 문제라면 바로 쉽게 해결이 될 것 같지 않아서. 당분간 해결책을 생각하며 머무르려고."

넬시아는 자연스럽게 헤스트리아에서 어떤 일이 생겼는지를 덮었다.

저번 달보다 더 줄어들기는 했지만, 이미 정화제를 받고 온 뒤였고, 아직 자신은 지금 하벨을 신뢰하지 않았으니.

"그렇다면야 원하는 만큼 지켜보세요."

하벨은 잘됐다 싶었다.

자신을 보면 더 잘 알게 되겠지. 자신과 하벨 티에라가 다르다는 사실을.

"고마워."

넬시아는 덤덤한 말을 꺼내며 하벨을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 억지로 꾸민 다정함은 사라지고, 사냥감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사냥꾼의 눈이 되어 있었다.

그제야 하벨은 넬시아가 어색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녀를 뒤덮던 가면이 사라지고 본래의 모습이 드러난 게 아닐까 싶었다.

"막내야."

넬시아의 대화가 끝나자마자 라르웬이 입을 열었다.

조금 전보다 하벨의 안색이 나빠 보였다.

"예."

"뭔가 이상하면 꼭 말해야 해. 바로 마차를 멈추고 헤레스한테 달려갈 테니까."

―둘째 도련님. 막내 도련님이 얼마 전에 쓰러지셨다는 이야기를 들으셨지요? 뭐든 괜찮다고 하시는데, 사실 하나도 안 괜찮습니다. 도련님 몸에 있는 푸른 돌이 다시 움직였다고요. 그러니까 이상한 증상이 조금만 보여도 저한테 바로 말씀해주세요. 아시겠죠?

헤레스가 자신을 붙들고 하벨의 상태를 제대로 봐 달라고 그렇게 사정하지 않았던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그랬을 테고, 이미 그러고 있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낫다고 해도 내 말은 하나도 안 믿으시겠죠. 그럴 줄 알았습니다."

하벨은 자문자답해서는 바로 툴툴거렸다.

지금 룬델도 있지 않은가. 굳이 거짓말로 뒤덮을 생각은 없었다.

"아니. 믿고 있었는데?"

라르웬이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하자 하벨이 기가 찬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웃기지 마세요. 안 믿잖아요."

"와, 진짜 섭섭하다. 막내야, 오늘은 엄청 섭섭해."

"아니……."

"혹시."

넬시아가 본의 아니게 하벨의 말을 자르자 그녀는 멈칫거렸다.

"말씀하세요."

하벨은 넬시아에게 발언권을 넘겼다.

자신을 놀릴 생각에 벌써 즐거워하는 라르웬보다 차라리 다른 주제로 넘어가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혹시 하벨이 앓던 병을 그대로 앓고 있는 거야?"

넬시아가 꺼낸 병이라는 말에 하벨은 아주 징글맞다는 듯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그냥 앓기만 하겠습니까?"

"그래. 거기서 끝나면 내가 막내를 업고 다녔겠지? 얼마 전에 몇 번이나 쓰러졌는지 알아?"

라르웬이 꺼낸 말에 아라도 덩달아 미간을 찌푸렸다.

[맞아! 대장이 엄청 많이 쓰러졌어! 이 몸은 그때만 생각하면 너무 슬퍼!]

"쓰러졌다고? 아니, 왜? 이전에는 그런 일은 거의 없었잖아."

넬시아가 의문을 담아 물었다.

동생이 물의 저주로 고생했지만, 쓰러지는 일은 많지 않았다.

대체 뭘 어떻게 했길래 쓰러지는 건지.

하벨은 넬시아의 시야가 왠지 따갑게 느껴지자 바로 말을 돌렸다.

"아 참, 형님."

라르웬은 대답해줄까 말까 하다 한 번 봐줬다며 씩 웃었다.

"왜?"

"오늘이 특별한 날이라는 걸 알지만, 클로저 일을 내팽개치고 와도 되는 겁니까? 경고받았다면서요."

"경고야 뭐어……. 어쨌든, 클로저들이 대거 이쪽으로 넘어왔어. 아마 당분간 머무를 거야. 그래서 부지런히 일만 한 나는 며칠간 휴가도 받았지. 진짜 휴가 말이야."

말을 하면 할수록 라르웬의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할 만큼 올라갔다.

'저번에 말했던 틈의 세계 이상 현상을 조사하러 온 건가?'

틈의 세계가 열리는 시간이 점점 빨라진다고 라르웬이 말하지 않았던가.

"이런 적은 없었죠?"

"그럼. 이전에도 없던 일이야."

라르웬의 대답에 하벨은 찝찝함을 느꼈다.

클로저가 온다는 사실을 또 누군가 알고 있을까.

문득 페트리오가 검은 달의 일원에게 얻었다는 그 정보가 궁금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연락용 아이템이나 쓸 걸 그랬네. 아니면 이번에 더 튼튼해진 아라의 이동기로 좀도둑을 찾아갔어야 했는데.'

어젯밤 카샬이 자신의 방을 나간 뒤 몰래 이동기 써서 밖으로 나갔다.

티에라 가문 저택 근처 산이었다.

―우와아아! 대장! 달이 엄청 커! 엄청 동그래!

산꼭대기에 앉아 달을 감상하던 차 아라가 행복함을 소리치자 정령들이 달려들지 않았던가.

오늘 일은 다른 정령들이나 룬델한테 말하지 말라고 일일이 부탁하느라 애를 먹었다.

'분명히 정령들이 없는 걸 확인했는데. 대체 어디에서 왔는지.'

하벨은 그때를 떠올리며 살짝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보고서에서 벗어나는 게 그렇게 기쁘더냐?"

룬델은 아직도 어린애 같은 라르웬의 모습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예! 엄청 기쁩니다! 보고서를 탈출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최고예요!"

라르웬이 주먹을 꽉 쥐다 잠깐 하벨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하벨 근처에서 틈의 세계가 열린 걸 보았다.

이번에도 그럴까 싶어 휴가 내내 따라붙을 생각이었다.

가뜩이나 클로저들이 대거 넘어왔으니 들키지 않게 조심해야지.

"갑자기 왜 날 보는 겁니까?"

하벨은 라르웬의 시선이 미묘해 아라의 꼬리를 만지다 말고 물었다.

뭔가 예사롭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무언가를 숨기는 라르웬이 수상해 하벨의 시선이 살짝 날카로워졌다.

'뭘까. 클로저 일인가?'

"하벨. 있잖아, 혹시 장례식 절차는 알고 있어?"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넬시아가 당연한 질문을 꺼냈다.

지금 동생의 몸에 다른 영혼이 있다면 알고 있는 지식 역시 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뇨. 모르는데요?"

너무도 당연한 대답에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룬델이 눈을 깜박거렸다.

"카샬이… 알려주지 않았더냐?"

"예. 뭔가 넋이 나가 있었습니다."

하벨은 허공을 멍하게 바라보던 카샬을 잠깐 떠올렸다.

검에 깃든 족제비 정령 문제는 아닌 것 같았는데, 어쩐지 집중을 못 하고 있었다.

"카샬이 그럴 애가 아닌데."

룬델은 의구심을 가지며 라르웬과 넬시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혹시 카샬하고 무슨 말을 나눴더냐?"

"저는 하벨을 돌봐달라고 말한 게 전부입니다."

라르웬이 어깨를 으쓱거리자 룬델의 시선이 넬시아에게 향했다.

"헤스트리아에 문제가 생겼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대답해준 것밖에 없습니다. 그 외에는 가벼운 잡담뿐이었고요."

넬시아 역시 도리어 알고 싶다는 표정을 했지만, 룬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하벨."

"예, 가주님."

하벨은 그런 룬델의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내가 알려주마."

"감사합니다."

하벨은 싱긋 웃으며 생각했다.

카샬과 헤스트리아 왕국 사이에 무언가가 있다는 걸.

* * *

왕국에 벌어진 그 충격적인 일에 오는 곳곳에 에르티안 왕국을 나타내는 용 문장이 박힌 검은 깃발이 수없이 걸려있었다.

사람들은 걷잡을 수 없이 번진 혼란과 충격, 그리고 슬픔에 빠져 흐느끼는 소리가 마차를 뚫고 들어올 정도였다.

왕국 입구부터 검은 천이 걸려있었다.

룬델은 그 모습에 웃음마저 멈추고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슬픔을 위로하듯 마차 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세렌마저 계속 룬델의 목덜미에 머리를 비비며 그를 위로해주었다.

아직 장례식이 열리기 전임에도 미리 차례를 기다리는 마차들이 보였다.

티에라 가문의 문장을 단 마차를 보자 왕실 기사들은 다른 길을 안내하며 왕실 앞에서 마차가 멈췄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제가 큰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마차에서 룬델, 넬시아, 라르웬이 차례대로 내리고 하벨까지 내리자마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카샬이 고개를 숙였다.

왕실 기사들과 먼저 초대받은 고위 귀족들이 보는 와중임에도 숙인 카샬의 고개가 좀처럼 올라오지 않았다.

"됐어, 카샬. 이미 숙지했으니까."

"제가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얼마든지 혼내셔도 됩니다."

"아니, 진짜 괜찮다니까.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당분간 넋을 놓을 것 같으면 나한테 미리 말해."

카샬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신경 쓰이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 알았어."

하벨의 시선은 칼리우스와 레디나를 향했다.

칼리우스야 카샬의 시종으로서 쫓아왔다고 한다면 레디나는 임무 도중에 갈고 닦았던 위장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여 이번에 대표 시녀로 뽑혔다.

"들었지?"

하벨의 물음에 레디나는 다가오며 치맛자락을 살짝 잡았다.

"예. 제대로 잘 들었어요, 도련님. 이번에는 카샬 대신 저랑 칼리우스가 힘 좀 내볼게요."

"나는… 아직 견습인데?"

칼리우스의 목소리가 뒤로 기어가자 레디나가 그의 등을 살짝 쳤다.

착!

"이럴 때는 머릿속에 기억한 지침서 있잖아요. 그거대로 하면 되는 거예요."

"정말?"

"물론이에요. 아니면 저만 믿으세요."

레디나가 씩 웃자 칼리우스 역시 미소를 활짝 피워냈다.

"응. 엄청 든든해."

칼리우스는 그대로 하벨에게 한 발자국 다가왔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하벨은 가만히 기다렸다.

"나, 진짜 얼굴을 가리지 않아도 괜찮아? 정말로?"

"그럼."

"마법사가… 쫓아오면 어떡해?"

"이제 네가 쫓길 이유는 내가 없애줄 거야."

하벨은 왕실을 바라보았다.

오늘 에르티안 왕국에 헤스트리아 왕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가 모이는 날이었다.

그중에 에르티안 왕을 죽이라 시킨 나라도 있을 테고.

당장 범인을 찾는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건 확실하지.'

오늘 에르티안 왕국을 포함한 모든 나라에 있는 마법사 협회가 자신의 눈치를 보게 될 날이 된다는 걸.

감히 칼리우스마저 건드릴 수 없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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