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동생(3)
* * *
"왜 그렇게 놀랍니까? 처음부터 하벨이 아니라고 말했잖아요."
하벨은 덤덤하게 말을 꺼냈다.
처음 하벨 티에라로 빙의 됐을 때부터 자신은 단 한 번도 자신이 하벨 티에라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그건 넬시아를 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벨이 아니라니? 네가 하벨이 아니라고?"
넬시아가 되묻자 하벨은 가볍게 웃었다.
"방금 나한테 물었잖아요. 누구냐고요."
"그건 그러니까……."
넬시아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자신이 모르는 얼굴로 하벨이 웃고 있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표정을 지으며, 행동하는데 어떻게 의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
"…네가 너무 달라서, 네가 정령을 본다는 사실에 놀라서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왔어. 만약에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사과할게. 그러니까 너도 이제 그만 장난을 멈춰."
하지만 어딜 보아도 자신의 동생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기에 넬시아는 일단 한발 물러섰다.
그만큼 자신이 하벨에게 잘못한 것도 많았고.
"혼란스러운 건 이해하지만, 방금 느끼셨잖습니까? 무언가 다르다고요."
하벨은 여전히 웃고 있었고, 넬시아의 표정이 점점 가라앉았다.
"하벨. 네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고, 나한테 화가 난 게 많다는 것도 이해하지만, 오늘은 이러지 말아줘. …오랜만에 집에 왔잖아?"
넬시아가 아무리 현실을 부정하고 자신을 설득하려고 해도 하벨은 멈추지 않았다.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속일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라르웬…!"
지금까지 조곤조곤히 말을 이어나가던 넬시아가 기어코 언성을 높였다.
도와달라는 눈빛으로 라르웬을 바라보았다.
"얘, 왜 이러는 거야? 헤레스는 뭐라고 해?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누님."
라르웬은 숨을 짧게 내쉬었다.
넬시아에게 날벼락 같은 일이겠지만, 차라리 하벨이 말한 것처럼 자신보다 나을지도 몰랐다.
"진정하기 어렵다는 건 알아. 하지만 하벨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아. 누님도 하벨을 보면 알잖아?"
"…하. 하하."
넬시아는 라르웬까지 이어지는 저 말에 웃음이 튀어나왔다.
라르웬이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그 누구보다 자신이 알고 있었다.
가끔 껄렁한 말을 내뱉어도 늘상 진지한 게 바로 라르웬이었으니까.
넬시아는 하벨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네가… 네가 하벨이 아니라면 우리 하벨은 어디로 갔는데?"
말을 하는 동안 넬시아는 일그러진 얼굴을 막을 수가 없었다.
저 말이 다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럼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누구이며 하벨은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지.
하벨은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릿속을 가리키려다 말았다.
하벨 티에라를 만난 건 겨우 한 번이었다.
이전처럼 녹화된 영상은 아니었지만, 그것만으로 하벨 티에라가 실제로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모릅니다."
그렇기에 하벨은 저 말을 꺼냈다.
"모른다고? 왜 모르는 거야? 네가… 우리 하벨을 밀쳐내고 그곳에……."
"누님!"
라르웬은 다급히 넬시아를 불렀다.
혼란스러운 건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하벨에게 상처를 줘도 괜찮다는 건 아니었다.
"잘못한 건 지금 하벨이 아니라, 누님이 말한 하벨이야!"
"그게 무슨 말이니?"
넬시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산에 올랐던 그 날 이후로 지금 하벨이 이 몸으로 들어왔어."
아무리 생각해도 하벨이 달라진 건 그 산 사건 이후였다.
라르웬은 주먹을 꽉 쥐었다.
"하벨은 처음부터 자신이 하벨 티에라가 아니라고 말했고."
[맞아! 이, 이 몸이 알고 있다구! 대장은 이 몸한테도 계속 용왕이라고 말해줬어!]
아라가 아직 잠에 덜 깬 모습으로 소리쳤다.
뭔가 잠결에 말을 듣다 하벨을 비난하는 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
[대장은 잘못한 거 없어! 대장은 처음부터 다 말했어! 룬델한테도, 라르웬한테도, 세렌이랑, 루룸한테도 다!]
아라는 반쯤 눈을 감아서는 하벨한테 날아왔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미워! 아무것도 모르면 물어봐야지 왜 대장한테 그렇게 사납게 말하는 거야?]
얼굴을 잔뜩 찌푸린 아라는 하벨을 꼭 안아주었다.
저 작은 정령의 말에 넬시아는 흘러내리는 마음을 다잡을 수 없어 자신의 입을 가렸다.
정령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었다.
그건 자신이 정령사가 되고 나서 한 번도 변하지 않은 사실이었다.
"…하, 하벨이 왜? 하벨이 왜 널 불러온 거야? 대체 왜……?"
넬시아는 진실을 바라는 눈으로 하벨을 바라보았다.
"자세한 건 모릅니다. 그저 눈을 떠 보니 하벨 티에라가 되어 있었죠. 그건 미안합니다. 하지만 지금도 계속 돌아갈 방법을 찾고 있으니까 기다려주세요."
하벨이 고개를 숙이려 하자 라르웬이 이를 막았다.
"사과할 필요 없어, 막내야."
왜 자꾸 아무 죄도 없는 하벨이 사과해야 하는가.
"라르웬. 왜… 저 사람을 막내라고 부르는 거야……?"
넬시아는 뒤로 물러나다 저 거슬리는 말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말투는 다시 차분해졌지만, 바짝 오른 날이 느껴졌다.
"막내가 맞으니까."
라르웬은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고, 하벨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내 동생이니까."
다시금 힘을 준 그 말에 하벨은 순간 울컥해 자신의 옷자락을 꽉 쥐고 있는 아라를 품에 안았다.
'…아니. 가주님도 그러더니.'
누가 부자 아니랄까 봐, 하는 게 똑같았다.
그때 자신을 다정히 바라보던 룬델이 떠올라 마음이 다시금 아려왔다.
"지금 무슨…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막내가 맞다니? 동생이라니? …라르웬."
라르웬을 부른 뒤 넬시아는 잠깐 숨을 돌렸다.
"지금 하벨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데, 눈앞에 있는 존재를 동생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을 하는 거니? 정말?"
"누님. 이게 힘들다는 건 알아. 하지만……."
"기다려봐, 라르웬. 이건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해."
넬시아는 라르웬의 말을 멈추고 손을 들어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그러니까. 우리 하벨이 산에 올라서 저 사람을 자신의 몸으로 불러들였다는 거잖아? 이유는… 모르겠고."
하벨을 보는 넬시아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렇게 바라보아도 모르는 건 사실입니다."
"그래. 이건… 저 정령과 라르웬 너를 믿고 그렇다고 해도 갑자기, 어떻게 쟤가 갑자기 우리 가족이 되는 건데? 어떻게 네 동생이 될 수 있는 건데?"
"그게 왜 안 되는 건데?"
라르웬은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넬시아를 바라보았다.
"애초에 우리 가족은……."
"잠깐만 기다려봐, 라르웬."
넬시아는 다시금 라르웬의 말을 멈췄다.
어떤 말이 뒤에 이어질지 예상됐기에 그를 말렸다.
이건 룬델이 먼저 언급해야 할 문제였으니까.
"그래. 그건 내가 잘못 말했어. 좋아. 가능하다고 해. 그래도 아직 하벨이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빨리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게 나는 그걸 이해할 수 없어. 이건……."
넬시아는 뒷말을 꺼내려다 멈췄다.
아무리 그래도 하벨을 버린 것 같다는 그 말을 어떻게 꺼낼 수 있는가.
"형님은 하벨 티에라를 버린 게 아닙니다."
하지만 마치 속마음을 읽은 듯한 하벨의 말에 넬시아는 눈을 크게 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 거야?"
넬시아의 반응에 라르웬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내가 뭐라고 생각해? 여기서 내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건데? 널 이해하려고 해도 이게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게 잘 안 돼."
넬시아는 라르웬이 상처받지 않게, 자신의 감정이 치솟지 않게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건 사실이 아니야, 누님. 내가 잊을 리가 있겠어? 절대로… 잊을 수가 없지. 내 동생이야. 하벨은 누가 뭐라고 해도 내 동생이라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꺼낸 라르웬은 하벨을 가리켰다.
"하지만 얘도 내 동생이야, 누님."
그 손가락에 넬시아는 가슴이 답답해 왔다.
"아버지도… 그렇게 말씀하셔?"
"그래. 아마 그럴 거야."
"아니, 라르웬 너 말고."
넬시아는 고개를 가로젓고 하벨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께서 널 받아들이셨어? 대답해줬으면 좋겠어."
"일단 오해부터 풀어야겠네요."
하벨이 던진 말에 넬시아는 바로 반응했다.
"오해라니?"
"가주님도 형님도 내가 빙의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건 최근입니다. 도중에 서로의 상황을 오해할만한 일이 있었죠."
하벨은 헤레스의 이름은 물론, 오진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건 정말로 사소한 오해였으니까.
[맞아. 최근에 다 풀었어.]
아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넬시아의 시선이 잠깐 움직였다.
"나는 하벨 티에라를 흉내 낸 적이 없습니다."
"그래. 이것도 맞아. 막내는 하벨을 흉내 낸 적이 없어. 멋대로 오해한 건 나나 아버지였고, 잘못한 건 하벨이야. 막내가 하벨이 벌인 일 때문에 질타받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라르웬이 하벨의 말을 뒷받침하며 목소리에 더욱 힘을 주었다.
넬시아는 침착해지려 어깨가 흔들릴 정도로 숨을 몰아쉬지만, 혼란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 동생 하벨은 지금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고, 지금 저 사람은 동생이 저지른 잘못에 휘말렸다는 말이네?"
넬시아는 살짝 울먹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찼다.
"예. 제대로 된 요약이 맞습니다. 나는 하벨 티에라에게 휘말렸습니다."
하벨은 웃음기를 지우고 지금껏 자신이 느꼈을 혼란과 분노를 섞어 말했다.
동생과 다른 얼굴로 바라보는 그 모습에 넬시아는 눈 밑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럼 원망조차 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닌가.
"물론, 나한테 화를 내는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가주님과 저 사이에 벌어진 일은 별로 말하고 싶진 않네요. 정 궁금하면 가주님께 물어보세요."
이제 됐냐는 듯한 하벨의 태도에 넬시아는 하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또 묻고 싶은 게 있습니까?"
"있어."
"말하세요."
"내 동생은… 돌아올 수 있어?"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빙의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 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돌려줄 테니까요."
넬시아는 늘 듣던 자신의 동생 목소리마저 그제야 다르게 들려왔다.
처음, 아니, 두 번째로 느껴보는 강한 의지가 목소리에 묻어 있어 넬시아는 문득 그 말이 떠올랐다.
―누님께서는… 제가 아직도 그렇게 원망스럽습니까?
몇 달 전, 자신이 다시 헤스트리아로 떠나기 전에 동생이 힘차게 달려와 숨이 뒤섞인 채로 말을 꺼냈다.
그 물음이 무엇이든 간에 정말 기뻤다.
하벨이 자신에게 말을 걸다니.
마치 용서를 받은 듯한 착각을 잠깐이나마 하고 말았다.
―저는 누님과 잘 지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 아니었다.
하벨은 자신과 눈을 마주쳤고, 따스하게 바라봐주었다.
―정말로요.
힘껏 담은 그 강한 의지가 왜 이렇게 어여쁜지.
―제가 용기가 없어서 누님께 다가가지 못했지만, 저는 누님이 자랑스러웠습니다.
하벨이 내보인 환한 웃음이 그렇게 반짝거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늘 동생과 다른 식으로 만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보자마자 안아주었는데.
눈시울이 따가웠다.
가슴이 아려왔다.
너무도 세게.
'…그래서였구나, 라르웬.'
그제야 넬시아는 라르웬이 어째서 지금 하벨을 놓치지 못하는지를 이해했다.
만약에 동생이 돌아올 수 없다면 그 껍데기라도 손에 쥐고 싶지 않을까.
그 생각에 넬시아는 원망마저 빠르게 사라져가는 걸 느꼈다.
[어, 음. 이제 오해를 풀었으면 이 몸은 대장한테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해.]
아라는 하벨이 열심히 쓰다듬어줌에도 아직도 얼굴을 찌푸린 상태였다.
[아니, 넬시아는 몰랐어. 여기서 사과까지 하라고 말하면 넬시아한테 너무하잖아? 넬시아도 얼마나 괴롭겠어?]
하벨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톰톰이 저 말에 발끈했다.
지금 눈물이 넬시아의 목구멍 너머까지 차오른 게 보일 정도였다.
"아니야, 톰톰. 이성적이지 못했던 건 나야."
넬시아는 아려오는 마음으로 하벨을 바라보았다.
하벨이 눈앞에 있거늘, 자신의 동생이 아니라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저 길도 모르는 숲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럴 필요도 없고요."
하벨은 간신히 이성을 잡은 넬시아를 자극하지 않으려 그녀를 말렸다.
"…내가 염치없다는 건 아주 잘 알고 있지만."
넬시아의 시선이 힘없이 바닥을 향했다.
기어들어 가는 듯한 그 말에 하벨은 가만히 기다렸다.
"다음에 다시… 너하고 이야기를 나눠도 될까?"
"얼마든지요. 편할 때 찾아오세요. 언제든지 기다릴게요."
하벨의 미소가 길어졌다.
너무도 쉽게 허락이 떨어지자 넬시아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다시 하벨을 바라보았다.
"…널 뭐라고 부르면 될까?"
"하벨이라고 부르세요. 이건 가주님께서 허락한 이름입니다."
"그래, 하벨."
넬시아는 입안이 썼다.
늘 부르던 이름까지 다르게 느껴졌다.
"오늘 일은 정말 미안해."
넬시아의 목소리가 기어코 떨려왔다.
"…이만 갈게."
"나도 이제 그만 갈게, 막내야. 방금 일은 크게 생각하지 말고 푹 쉬어."
라르웬도 먼저 나가는 넬시아를 따라 밖으로 나가자 루룸은 하벨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라르웬 말 들었지? 깊이 생각하지 마, 하벨.]
"알아. 걱정해줘서 고마워."
[그래.]
루룸은 하벨의 머리를 다시금 쓰다듬어주고, 아라의 볼을 찌른 뒤 라르웬을 따라갔다.
방 밖으로 나온 라르웬은 카샬을 보며 방을 가리켰다.
"카샬. 막내가 침울한지 아닌지 살펴줘."
"알겠습니다. 잘 살펴보겠습니다."
무어라 묻기에는 두 사람의 표정이 어두웠기에 카샬은 고개를 숙인 뒤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힌 후에야 라르웬이 입을 열었다.
"…누님."
"널 원망하지 않아. 물론 아버지도. 그냥… 그냥 혼란스러울 뿐이야. 이건 이해해줘. 그래 줄 수 있겠지?"
"알아. 얼마나 혼란스러울지. 내가 모르겠어? 나도 그랬고, 지금 그래."
라르웬은 넬시아의 등을 토닥였다.
"하지만 그래도 나중에 홧김에 막내한테 돌아가라는 말만은 하지 말아줘."
"이유를 말해줘. 내가 이해할 수 있게."
넬시아는 힘이 빠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막내는 이제 돌아갈 곳이 없어. 어쩌면… 막내의 원래 몸은 이미 없을지도 몰라."
"죽었다는… 말이야?"
넬시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동생이 저 사람의 영혼을 불러들였기에 그런 것일까.
"확실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일단 그렇게 보이더라."
라르웬은 다시금 화가 났다.
차라리 그 몸을 탐내서 뭐라도 했다면 지금보다 더 마음이 편했을 텐데.
"누님."
라르웬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하벨을 보던 넬시아의 눈빛이 달라졌기에 혹시나 싶어 이 말만큼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님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내가 말릴 수 없지만, 나는 지금 하벨을 내 동생 하벨을 대신해서 보는 게 아니야."
넬시아는 그 말에 잠깐 멈췄다.
"아니라고? 그… 껍데기만이라도 보고 싶은 게 아니었어? 그러면 너는 어떻게 보고 있는데?"
"내 동생."
라르웬은 이번에도 망설이지 않았다.
"라르웬…!"
"누님. 우리 동생이… 정말로 아무 생각도 없이 일을 저질렀을 거라고 생각해?"
원래 하벨도 영특한 아이였다.
"누님. 지금 하벨은 우리 동생이 남긴 씨앗이야. …어머니와 동생이 그랬듯이."
"또?"
넬시아의 언성이 올라갔다.
"또 그래야 한다고?"
"누님, 나는. 나는 이번 일이 어머니와 동생이 남긴 씨앗을 소중히 하지 않은 벌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지금도 그걸 느끼고 있고."
진지하게 꺼내는 저 말에 넬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진짜 싫다. 진짜 싫어."
넬시아의 눈시울이 점점 일렁거렸다.
"왜 다들 가버리는 거야? 씨앗이니 뭐니 그게 뭐야? 그냥 다 살아 있으라고. 누굴 대신하지도 말고, 그냥 살아 있으면 안 되는 거야?"
넬시아는 울음을 꾹 참으며 자신을 보는 라르웬을 안았다.
"너는 가버리면 안 돼. …제발, 라르웬."
"당연하지. 걱정하지 마."
라르웬은 '미안해, 하벨'을 중얼거리는 넬시아의 등을 다시금 토닥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