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동생(2)
* * *
또 정화제가 줄었다는 말에 룬델은 가슴이 무거워졌다.
세계의 정화제 공급을 맡은 두 곳에서 지금 정화제가 줄어드는 상황이 벌어지다니.
정말 끔찍한 소리였다.
"헤스트리아와 이야기가 통하지 않은 것이더냐?"
"헤스트리아에서 절 만나주지 않더군요."
찻잔을 쥔 넬시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고, 룬델은 이상함을 느꼈다.
"지금까지 이런 적은 없지 않더냐?"
헤스트리아에서 정화제를 자신들에게 맡긴 이유는 간단했다.
정령들이 자신들을 믿기 때문이었다.
"네. 이런 적은 없었죠. 한 번도요."
[네가 잘못한 건 없어. 거기서 만나주지 않는 걸 어떻게 해?]
톰톰이 시무룩한 넬시아의 뺨을 어루만졌다.
[정령들이라도 나왔으면 나라도 대화했겠지만, 하나도 나오지 않았어. 시간도 마음대로 바꾸고. 넬시아가 얼마나 곤란했는데. 망할 놈들.]
그때가 생각이 났는지 톰톰은 이를 딱딱거렸다.
"아버지도 아시다시피 지금까지 정화제를 넘기는 그 경로에서 헤스트리아 사람들과 여러 가지를 대화를 섞었어요. 내부에서 벌어진 작고 소소한 일들, 그곳에서 계절을 어떻게 보내는지, 열린 축제는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이에요. 그렇게 그 사람들과 하나씩 쌓아 올렸다고 생각했는데."
넬시아는 치밀어 오르는 답답함에 점점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헤스트리아 왕국 사람들의 따뜻함이 좋았다.
감기 들지 말라고 넌지시 전해주던 따뜻한 차 맛도 그리웠고, 많이 구웠다며 갓 구운 빵을 건넨 그 수줍은 손길도 그리웠다.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지만, 무슨 일이든 저는 돕고 싶었어요. 그래서 대화를 시도해봤지만, 막힌 문은 열리지 않았어요. 나중에는 정화제를 주는 경로까지 바꾸고 후에 통보하는 식이라 뭘 더 할 수 없었어요."
[넬시아가 헤스트리아 왕국 입구와 정화제를 받는 장소, 바뀐 장소 등 몇 날 며칠 밤을 지새웠는데, 그 망할 놈들은 아예 나오지도 않더라? 나나 우리가 말려서 넬시아가 자러 간 그 틈에 정화제를 툭 던지고. 진짜 기분 나빴어.]
이어지는 톰톰의 말에 룬델은 넬시아가 느꼈을 참담함에 가슴이 아팠다.
"왜 네가… 이렇게 올 수밖에 없었는지 알겠구나. 이런 이야기는 편지로 함부로 꺼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니."
정화제가 줄어든 와중에 넬시아에게까지 등을 돌리다니.
룬델의 손끝에 일어나는 떨림을 느끼자 세렌은 부리로 콕콕 찔렀다.
"예, 맞습니다. 이건 쉽게 새어나가면 안 될 말입니다. 엄청난… 혼란이 올 겁니다."
"넬시아. 헤스트리아 왕국 일이 아니더라도 혼란은 곧 찾아올 거란다."
"혼란이 찾아온다는 게 무슨 말씀인가요?"
"전하께서 승하하셨단다."
"……."
넬시아는 입을 살짝 벌린 채로 룬델을 바라보았다.
"장례식이 곧 열릴 거고."
"누, 누가 그런 거죠?"
넬시아는 덜컥 밀려드는 두려움에 목소리가 떨렸다.
왕이 죽었다.
그 충격적인 사실보다 티에라 가문에 다가올 충격이 무서웠다.
왕이 죽었다면 정말로 티에라 가문을 보호해주는 마지막 벽마저 무너진 게 아닌가.
그럼 룬델은 어떻게 되는 건가.
"아니, 아니."
넬시아의 눈동자가 덩달아 흔들리고 말이 빨라졌다.
"누가 그랬는지보다 저는 아버지가 걱정입니다. 분명 위험해지실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처럼 아무것도……."
잠깐 말을 멈춘 넬시아는 간절히 룬델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안 하실 거죠?"
넬시아는 티에라 가문이 웅크리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보다 더 숨죽인 채로.
그렇다면 빠르게 변화는 흐름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넬시아."
"그렇다고 말씀해주세요, 아버지. 지금처럼 아무것도 하시지 않을 거라고 말씀해주세요."
넬시아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간곡히 빌 듯 말을 꺼냈다.
룬델이 움직인다면 지금까지 티에라 가문을 노리려는 자들이 더 날뛸 테고, 룬델에게 위험한 일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더는 누굴 잃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아직도 이렇게나 아픈데.
"위험한 건 어느 때든 마찬가지였단다. 이제 흐름이 달라졌으니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 그건 너도 알지 않더냐?"
룬델은 괜스레 웃음이 났다.
자신도 모르게 지금 하벨이 꺼냈던 말을 자신이 하고 있지 않은가.
―가주님. 이제 세상의 흐름이 달라질 겁니다.
아마 하벨이 언급했을 때보다 더 뒤틀린 흐름은 이제 점점 커져 거센 물살을 몰고 오겠지.
"넬시아. 나는 바안 전하를 지키기로 생각했단다. 그게 이 티에라 가문과 정령들을 지키는 방법이라 생각했지."
넬시아는 이어지는 룬델의 말에 자신의 두 손을 꽉 잡았다.
아버지가 기어코, 움직인다니.
힘없이 쓰러지는 두 형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룬델은 점점 더 떨리는 넬시아의 손을 보자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안아주었다.
"진정하거라, 넬시아. 이 말이 너를 무섭게 할 줄은 몰랐구나. 미안하단다."
몇 번이나 숨을 몰아쉬던 넬시아가 룬델을 꽉 안았다.
"…아니에요, 아버지. 방금은… 실수였어요. 괜찮아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직도 이렇게 한 번씩 튀어나와서 그래요. 그러니 조금 전 제가 한 말은 잊어주세요."
가족이 위험에 처한다는 생각에 눈앞에서 쓰러지던 어머니와 동생이 다시금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져 덜컥 목까지 치솟는 두려움에 정신이 반쯤 나가버렸다.
넬시아는 룬델을 살짝 밀며 애써 웃었다.
'분명히… 이제는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집에 와서 그럴까.
아니면 하벨이 조금 전 자신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세렌."
룬델은 여전히 멍하니 있는 넬시아를 보더니 세렌을 불렀다.
[너도 아직 장난꾸러기네.]
세렌은 키득거리며 정령수를 넘겼고, 룬델은 찻잔에 묻은 물을 넬시아에게 튕겼다.
"…아버지?"
물을 맞은 넬시아는 당황함을 드러냈고, 룬델은 그제야 가볍게 웃었다.
"그 고민은 접어두렴. 네가 아직 무서워하는 건 당연하고, 너무 억지로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으면 한단다."
'아버지께서는… 어떻게 그 날을 극복하셨나요.'
오늘도 그 말을 꺼내지 못한 넬시아는 그저 룬델을 바라보았다.
"밥은 잘 먹고 다니더냐?"
갑작스러운 물음에 넬시아가 잠깐 웃었다.
"네. 잘 챙겨 먹어요. 제가 뭘 먹는지 매일 통화하잖아요."
"널 이렇게 직접 보는 거랑 통화는 너무 다르구나."
"어떤데요?"
"훨씬 좋구나. 네 얼굴도 밝아 보이고."
"저도 그래 보여요, 아버지. 아주 밝아지셨어요."
"기분은 괜찮더냐? 아직도 집이 어려운지 모르겠구나."
룬델이 조심스레 꺼낸 '집'이라는 말에 넬시아는 살짝 긴장했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사실 저보다 하벨이 눈에 밟히잖아요?"
넬시아는 하벨을 쓰다듬었던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다 기어코 다시 바라보았다.
"아버지. 오염된 물 때문에 하벨에게… 문제가 생겼나요? 이게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겠는데요. 하벨이요, 제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어요."
떨떠름하면서도 낯설었다.
이 기분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지 몰라 넬시아는 룬델의 대답을 기다렸다.
"음……."
룬델의 말꼬리가 살짝 늘어지자 넬시아의 눈에 의구심이 어렸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토록 망설이는지.
"이건 내가 말할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직접 보렴. 그리고 성급한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한단다."
[…으음. 이건 나도 모르겠다. 정말로.]
룬델이 곤란해 보여 세렌은 자신이 나설까 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하벨이 진짜 하벨이 아니라는 말을 넬시아가 믿을지도 모르겠고, 그녀가 어떻게 나올지도 예상하기 어려웠다.
"그럼 아버지. 저 잠깐 하벨에게 갔다 오겠습니다."
넬시아는 룬델과 세렌이 보이는 행동에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하벨한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직접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렴."
룬델은 미안함이 깃든 눈으로 넬시아를 바라보았다.
* * *
"아가씨……?"
문 앞에 서 있는 카샬이 넬시아를 보며 놀랐다.
"아까부터 왜 그렇게 놀라, 카샬? 내가 못 올 곳을 온 것처럼 구는데, 참 이상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 저택은 언제든 아가씨를 반기고 있습니다."
카샬이 문을 열자 넬시아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카샬을 빤히 보았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하벨한테 무슨 일이 생겼어? 너는 웬만한 건 다 알고 있잖아."
"직접… 도련님에게 물어보시죠."
한 발 빠지는 카샬의 모습에 넬시아는 혼자 겉돌고 있는 기분을 느꼈다.
룬델과 라르웬, 그리고 카샬이 아는 무언가가 대체 뭘까.
넬시아가 한 걸음 떼자 카샬이 그녀를 불렀다.
"아가씨."
"응, 그래."
"혹시… 헤스트리아에 무슨 문제가 생겼습니까?"
"맞아. 좀 큰 문제가 생겼어."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이고 다시 올린 카샬의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흔들렸다.
* * *
"뭐야. 너 여기로 온 거였어, 라르웬?"
방으로 들어가자 이미 올 걸 예상한 듯 의자에 앉아 있는 라르웬을 보며 넬시아가 조곤조곤 물었다.
"그래. 막내랑 잠깐 이야기 좀 하고 있었지."
[…뭐야, 저 조그만 정령은? 아까도 있었는데?]
톰톰은 아라를 보자마자 눈을 깜빡거렸다.
하벨 옆에 꼭 붙어서 자고 있지 않은가.
[아니, 넬시아. 저게 말이 돼? 쟤를 좋아하는 정령이 있다고? 푸핫. 말도 안 돼. 쟤 몸에서 나는 그 냄새를 버틴다고? 진짜 이상하다.]
"그만 지껄여라, 톰톰."
라르웬이 언짢음을 가득 담자 톰톰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뭐가 어때서? 어차피 쟤는 안 들…….]
톰톰은 낄낄 웃다 말고 그대로 멈췄다.
"톰톰. 내가 화를 내야 멈추겠어? 조금 전에도, 지금도 왜 그렇게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하는 거야?"
톰톰을 바라보는 넬시아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넬시아, 너까지 화내지 마. 그래도 사실이잖아. 내가 없는 말을 지어낸 것도 아닌… 데?]
톰톰은 말하다 말고 말꼬리를 늘어트렸다.
하벨이 시선이 노골적으로 자신을 향하지 않는가.
[쟤가 나를 본 거야? 에이, 설마.]
하벨이 아라를 조심스레 토닥이며 침대에서 일어나자 의자에 앉아 있던 라르웬은 하벨이 벌일 사고에 벌써 노심초사하며 다리를 떨었다.
[와아.]
아라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루룸은 하벨의 발소리에 맞춰 점점 눈을 반짝거렸다.
하벨은 당당히 톰톰에게 걸어왔고, 그 모습에 톰톰의 입이 살짝 벌어져 두꺼운 이빨이 보였다.
[넬시아. 내 기분 탓이 아니지? 지금 나한테 오는 거 맞지?]
"……?"
톰톰을 혼내던 넬시아마저 하벨의 행보에 어리둥절함을 담아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하벨은 정령을 볼 수 없었다.
절대로.
혹시 톰톰이 아니라 자신에게 오는 게 아닐까.
'하벨이… 나한테? 어째서?'
넬시아는 어쩐지 겁이 났다.
자신이 하벨의 목을 졸랐던 그 날 이후로 자신을 늘 피하던 하벨이?
'내가 이전에 집에 왔을 때, 나한테 해줬던 말이 진짜라는 걸까.'
두려움과 묘한 기대감이 뒤섞였던 넬시아의 눈빛이 짙어지던 차 그녀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꾸욱.
하지만 하벨이 찌른 건 톰톰이었다.
[…어?]
톰톰은 당황했다.
당연히 넬시아한테, 아니, 넬시아한테 다가가는 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나, 날 찔렀어? 쟤가 지금 나를 찔렀다고?]
"그냥 보고 찌르기만 했겠어? 네가 지껄이는 것도 아주 잘 들었지. 이 재수 없는 다람쥐야."
하벨은 비웃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하… 벨?"
넬시아는 손가락에 힘을 가득 주었던 만큼 긴장감이 풀어지자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지금 보고 있는 게 사실인지부터가 너무 이상했다.
"넌 내가 본 정령 중에 가장 유치하고 최악이네. 다른 정령들이야 내가 그들을 보는 걸 알고서 당당하게 말을 꺼내는 거라지만, 너는 아니잖아?"
하벨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대놓고 하는 비난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들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그러나 애초에 저놈은 경우가 달랐다.
처음부터 듣지 못하는 걸 알고 입을 나불거렸고, 아라를 건드렸다.
"더 지껄여봐. 들어줄게."
하벨은 자신이 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말할 수 있는지, 그게 궁금해졌다.
몇 분이 흘렀을까, 톰톰은 여전히 굳어진 얼굴로 하벨을 멍하니 볼 뿐이었다.
"말, 못 하네?"
살짝 기울어진 하벨의 고개와 함께 달라진 분위기에 톰톰이 떨었다.
하벨이 화를 낸다는 걸 알지만, 뭔가 달랐다.
거대한 무언가가 눈앞에 있는 기분이었다.
마치, 에르티안 왕실로 발을 디디기 전에 느꼈던 그 감각과 비슷했다.
"재수 없는 다람쥐야. 너는 내가 못 알아듣는다는 걸 알고 낄낄거리는 전형적인 비겁한 겁쟁이가 맞았네?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바로 알아챘네, 하벨? 톰톰은 겁쟁이야. 그것도 아주 많이.]
루룸이 손뼉을 마주치며 키득거렸다.
[…미, 미, 미안해.]
톰톰은 마치 도토리를 잃어버린 다람쥐처럼 허망한 표정으로 하벨을 바라보았다.
"나중에 아라한테도 사과해. 아라가 날 좋아해 준다는 이유만으로 비난받아야 할 건 아니니까."
[…으응.]
그제야 하벨은 방긋 웃으며 톰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왜 그렇게 겁에 질렸는지, 손끝에서 진동이 오는 것 같았다.
"그래. 사과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하지만 방금 내가 꺼낸 말을 취소할 생각은 없어. 저런 말을 그간 얼마나 많이 했겠어? 가끔은 너도 들어야지."
하벨은 여전히 톰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넬시아를 바라보았다.
"혹시 기분 나쁘셨습니까?"
"나는, 어……."
넬시아는 말을 더듬었다.
"아니면 됐습니다. 그럼 무슨 일로 왔습니까?"
"아까 다시 너를 보러 온다고 말도 했고, 너한테 문제가 생겼나 걱정도 됐고. 그리고……."
넬시아는 조곤조곤 말을 이어나가다 다시 멈췄다.
아무리 받아들이려고 해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게 존재했다.
"정말… 정령이 보이니?"
"보셨잖습니까. 한 번 더 이 다람쥐를 찔러줘요?"
하벨이 장난스럽게 묻자 톰톰은 기겁했고, 넬시아의 미간이 그대로 찌푸려졌다.
"너… 누구야?"
자신이 아는 하벨은 이러지 않았다.
하벨과 똑같이 웃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었다.
그는 하벨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