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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163화 (163/415)

163화. 동생

* * *

라르웬의 표정이 무섭도록 굳어지자 하벨은 입가를 핥았다.

"뭐가 그렇게 두렵기에 말리는 겁니까? 진실은 당연히 밝혀야 합니다. 지금 형님보다 더 쉽게 받아들일 테고요."

넬시아는 오늘 처음 시작된 관계가 아닌가.

애초에 처음이기에 더 단호하게 끊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야, 막내야."

라르웬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맞습니다, 도련님."

카샬까지 라르웬의 말에 옹호하자 하벨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왜 아니라는 겁니까?"

"누님께서는… 음."

라르웬은 망설였다.

말해도 되는 건지 아닌지 흔들렸다.

적어도 아직은, 눈앞에 있는 하벨이 진짜 하벨이라고 믿고 싶기에 고민의 시간은 길었다.

"저는 밖에 나가 있겠습니다."

카샬은 이미 자신이 아는 내용이라 짐작했지만, 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가 나올까 봐 밖으로 나갔다.

[뭐해, 라르웬?]

카샬이 나갔음에도 라르웬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를 참지 못한 루룸이 라르웬을 찰싹 때렸다.

[아니, 대체 언제까지 고민할 건데? 보는 내가 이젠 답답하단 말이야.]

"형님을 재촉하지 마, 루룸. 애초에 기다리기로 약속한 건 나야. 이건 고민이 길 수밖에 없는 문제고."

하벨은 루룸을 말렸다.

아마 라르웬은 진실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을 테지.

하지만 그 사실을 빠르게 받아들이는 룬델이 신기하고, 놀라운 것이지 라르웬이 잘못된 건 결단코 아니었다.

오히려 라르웬마저도 받아들이는 과정이 빨랐다.

[그래. 나도 그건 이해해. 인간이 가족에 얼마나 얽매여 있는지 알지. 나도 라르웬이 슬픈 건 싫어. 하지만 이건 너한테도 못 할 짓이잖아.]

루룸은 퉁명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뭐가 옳다는 건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룬델은 이미 지금의 하벨을 받아들였고, 대체 어디로 갔는지조차 모를 하벨 티에라의 영혼을 어디에서 찾을 텐가.

"…하."

라르웬은 한숨을 내쉬었다.

루룸이 왜 자신을 재촉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루룸 말대로 고민을 진짜 몇 번이나 했는지,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나는 지금 하벨이 진짜로 다른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아버지는 이미 받아들였지만, 자신은 어떤 게 맞는지조차 헷갈렸다.

하벨과 친하지 않았다고 어릴 때부터 같이 지내왔던 그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분명 중간중간 기뻤던 적도 있었을 테고.

"지우려 하지 마십시오."

하벨이 툭 하고 꺼낸 말에 라르웬은 당황했다.

"…뭐?"

"하벨 티에라를 억지로 지우려고 하지 말란 말입니다."

지금 라르웬에게 보이는 괴로움은 자신도 많이 본 표정이었다.

슬픔과 괴로움에 빠져 누군가를 지우려고 하는 표정.

하벨은 이래도 되는지 머뭇거렸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동생을 어떻게 지우겠습니까? 애초에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지우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제야 라르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자신이 너무 형편없어 저 말을 하벨이 직접 꺼내고 말았다.

"…미안하다."

"형님. 이건 애초에 사과할 일이 아닙니다. 초대받지 않는 손님은 바로……."

"그렇지 않아!"

라르웬은 입술을 깨물며 하벨이 꺼내는 저 말을 부정했다.

"나는 맹세코 한 번도 널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

하벨은 놀라며 라르웬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살짝 내린 라르웬은 아주 힘든 고백을 이어나갔다.

"내가…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라 생각했던 사람은 산에 오르기 전의 하벨이었어."

하벨은 저 말에 의문을 가졌다.

자신이 하벨 티에라의 기억을 보았고, 그간 남 이야기라 미뤄뒀던 의문 하나가 또 넘실거렸다.

'그러고 보면… 하벨 티에라가 약간 겉돌고 있는 기분이긴 했어.'

왜 그랬을까.

그 질문을 기껏 삼켰더니 라르웬이 지금 흔들고 있지 않은가.

"문제가 있었어."

라르웬은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처럼 문밖으로 자꾸 시선을 뒀다.

루룸이 깜짝 놀라며 라르웬의 머리카락을 당겼다.

[너… 그 말을 꺼낼 생각은 아니지? 분명 화를 낼 거야!]

루룸답지 않게 정말 놀라자 하벨은 찝찝했다.

누가.

룬델을 말하는 걸까.

"이거 진짜 말해도 되는 겁니까?"

굳은 얼굴로 하벨이 말을 꺼내자 라르웬은 일그러진 얼굴로 애써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 지금 말할 수 있는 것만 이야기할 거야. 그건 아버지가 먼저 꺼내야 할 말이니까."

[하…….]

루룸은 그제야 안도했다.

"막내야. 지금 내가 꺼낼 말이 뭐든 그냥 이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넘겨."

"그럼 그냥 말을 하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나도 그러고 싶은데 누님이 지금 집에 와 있잖아? 나는 얼굴에 철면피를 둘러서 너랑 이렇게 투덕거리는 건데 누님은 그게 아마 안 될걸?"

'철면피?'

그 말이 갑자기 왜 나오는 건지.

하벨은 자신이 추측할 수밖에 없는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갈 수도 없는 자신의 위치가 사실상 더 짜증 났다.

"누님께서 널 보며 두려워했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오해하지 말고 들어줘. 그러는 이유가 있어서 그래. 누님께서는……."

라르웬은 말을 꺼내다 말고 잠깐 멈췄다.

문득 그 기억을 원래 하벨은 기억하고 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라르웬의 미간 사이에 짙은 주름이 어렸다.

"누님께서는 너한테 죄책감이 깊어. 원망도 강하고."

"죄책감과 원망이라뇨?"

하벨은 의문을 담았다.

애초에 그 두 개가 공존할 수 있는 건가 싶었다.

"예전에… 누님께서 네 목을 충동적으로 조른 적이 있어. 가볍게 말고. 정말 진심으로."

"넬시아가 하벨 티에라를 죽이려고… 했단 말입니까?"

하벨이 유리를 손에 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묻자 라르웬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하벨이 남긴 씨앗이란다. 아버지로서 그 씨앗을 어떻게 내버리고, 미워하겠더냐.

다시 생각해보면 룬델은 이미 이런 일을 한 번 겪어본 듯한 말투였다.

넬시아가 하벨 티에라의 목을 조른 이유와 연결되어 있을까.

"실수였다고 말을 하기엔 엄청… 엄청 큰 사건이지. 그래서 누님께서는 널 두려워하고 있어. 아마 또 그런 일이 일어날까 봐 누님도 자신이 무섭겠지만."

라르웬은 자신의 목을 긁었다.

그냥 이대로 끝내기엔 너무도 찝찝했다.

"나도… 너한테 잘한 건 없어. 일부러 거리감을 뒀고, 눈에 보이면 말하고, 그 외에는 그냥 없는 사람처럼 취급했으니까. 없으니만도 못한… 그런 관심이었지."

말은 던져졌다.

쿵쿵쿵.

라르웬은 심장 소리가 귀에 걸릴 것처럼 크게 뛰는 게 들려왔다.

하벨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자신을 원망할까.

소리치기 전일까.

정말 큰마음을 먹고 쳐다본 하벨의 시선은 이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황당한지 눈을 깜박거렸다.

라르웬은 그 반응에 저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진짜로.'

그제야 하나씩 와닿았다.

'진짜로… 다른 사람이구나.'

천천히 바닥이 꺼져가는 기분이 들었다.

애써 아니라고 부정했던 마음마저 무너져내렸다.

"뭐, 좋습니다. 이건 가족 이야기이니 내가 끼어들기가 참 애매하네요."

태연하게 현재 상황을 판단하고 분석하는 하벨의 저 모습에 라르웬은 가슴이 아려왔다.

당장이라도 미안하다는 말이 목구멍에서 치밀어 오를 것만 같았다.

'…누구한테 미안한 건데?'

라르웬은 가슴에서 요동치는 파도를 잠재우기가 어려워 오히려 혼란스러웠다.

하벨은 그 모습에 한숨을 짧게 내쉬다 침대에서 내려와 양팔을 벌렸다.

"…뭐 하는 거야?"

라르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드웰이 왔을 때, 가주님하고 약속했습니다."

―아무 말 없이 널 안고 싶을 때가 있을 거란다. 그것만큼은… 그 사실만큼은 이해해줄 수 있겠더냐?

지금 생각해도 참 가슴이 아릴 만큼 슬픈 말이 아닐 수가 없었다.

"…말없이 날 안고 싶을 날이 있다고요. 형님도 딱 그때의 가주님과 전혀 다르지 않아서요. 내키진 않지만, 눈 질끈 감고 있겠습니다."

"됐어."

라르웬은 오만상을 쓰며 기분 나쁘게 뒷걸음질까지 쳤다.

"싫으면 하지 마십시오. 나야 좋죠."

하벨은 팔을 내렸다.

"지금 형님께서 앓으시는 혼란은 당연한 겁니다. 나는 어떤 결정도 강요할 생각이 없으니 더 천천히 생각해보세요."

어떻게 보면 참 의젓할 수 있는 모습이나, 라르웬은 하벨이 모든 걸 내려놓고 있는 것 같아 괜히 자신이 조급해졌다.

"하벨."

"왜요?"

"너, 돌아갈 때는 있어?"

"그건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지금은 다른 생각부터 하시죠."

"…없어?"

라르웬은 손끝이 꿈틀거렸다.

그러고 보면 왜 이 사실을 생각하지 않은 걸까.

만약에 진짜 하벨이 돌아오면 지금 하벨은 어떻게 되는 건지.

"돌아갈 곳이… 없는 거야?"

라르웬이 재촉하지만, 하벨은 입을 다물었다.

돌아갈 때가 없는데도 드웰이라는 마법사까지 불러 원래 몸으로 되돌리려고 노력했던 거라면, 이게 무슨 짓거리인지.

"그냥 여기 있어."

라르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화가 났다.

이런 부분을 생각하지도 못한 게 화가 났고, 천연덕스럽게 자신만 불행해질 방향을 고르는 하벨한테도 화가 났다.

"아직은 방법이 있을 겁니다."

머뭇거리며 꺼내는 하벨의 태도에 라르웬은 설마 하며 생각했다.

이번에 드웰을 부른 일이 실패한 게 아닌가 하는.

그렇다면 또 방법을 찾고 있는 게 아닐까.

뒤이은 생각에 라르웬은 머릿속마저 복잡해졌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너, 원망 안 해."

"몇 번이나 들었습니다. 더는 말 하지 않아도 다 외우겠네요."

하벨은 옷자락을 만지며 시선을 살짝 피했다.

"막내야."

라르웬이 한 걸음 다가가 하벨의 어깨를 잡았다.

"나는 널 진짜 원망하지 않는다고. 오히려 너는 나한테 기회를 줬어."

"그게 무슨 개소리입니까?"

"아마 네가 아니었다면 몰랐겠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는지, 마지막 말을 할 때 라르웬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자신이 이렇게 최악이라는 것과 그 어설픈 애정이 동생에게 얼마나 독이 됐을지 몰랐겠지.

"익숙함과 당연함에 묻혀서 지금보다 얼마나 더 후회했을까. …응?"

하벨의 어깨를 잡은 라르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고 싶은 말이 갑자기 차올랐다.

하지만 아직 자신의 마음도 다잡지 못했기에 꺼내면 안 될 말이었다.

라르웬은 하벨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여기 있는 동안 편안하게 있어. 다른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고, 그렇게 해도 돼."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그러고 있으니까요."

하벨은 평소처럼 미소를 그렸다.

"그래서 내가 뭘 조심하면 되는 겁니까?"

"뭘 조심이라기보다는 방금 내가 꺼낸 말을 기억해달라는 게 전부야."

라르웬 역시 그제야 손을 내리며 씩 웃었다.

"널 통제할 생각은… 물론, 네가 피를 칠칠 흘리며 돌아다니는 그런 비슷한 상황 말고는 통제할 생각은 없어."

"대체 나를 어떻게 보는 겁니까? 피를 왜 흘려요?"

하벨이 인상을 구기자 라르웬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제대로 잘 보고 있는데?"

"그래서요?"

"내가 뭐라고 해도 너는 네가 원하는 대로 할 거잖아?"

"이제야 나를 알았습니까? 좀 늦었네요."

하벨이 뿌듯함을 드러내자 루룸은 덩달아 흡족해하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는 갑자기 왜 그래?"

[아니. 계속하라고. 잘하고 있다는 의미였지.]

하벨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라르웬이 떠안고 있던 고민이 한 꺼풀 사라진 게 루룸 자신의 눈에 보였다.

[이제 밤마다 베개를 두드리는 소리는 듣지 않아서 다행이니까.]

"루룸…!"

[쉿. 너는 조용히 하는 것도 못 해? 지금 아라가 꿈틀거리는 거 안 봤어?]

루룸이 인상을 쓰자 라르웬은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그래서 넬시아한테 뭐라고 둘러대실 겁니까?"

하벨이 묻자 라르웬은 머리를 긁적였다.

"솔직히 너무 놀라서 바로 네 방에 왔어. 아버지께서 누님을 잘 달래주시길 빌어야지. 음, 넌 뭐라고 할 건데?"

"뭘 뭐라고 하겠어요? 그냥 사실대로 털어놓아야죠. 온 김에 용기를 조금만 더 내서 같이 들으실래요?"

라르웬은 하벨의 물음에 의자 두 개를 가져와 옆에 앉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뭘 더 망설이겠는가.

"그래. 누님이 오시면 같이 들을게. 아마 곧 오실 거야."

* * *

넬시아는 라르웬이 나갔던 방을 잠깐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라르웬이 말한 저 소리가 무슨 말인지 아세요? 하벨이 하벨이 아니라뇨?"

하벨 문제 때문에 라르웬이 급하게 자리를 비웠다는 걸 알지만, 넬시아는 다시금 떠올려도 이상한 소리라 생각했다.

"일단 네가 여기까지 온 이유부터 들어보자꾸나."

룬델은 일단 시선을 돌렸다.

"아."

넬시아는 찻잔을 다시 만지작거렸다.

"아버지께서 이미 제 편지 통해 아셨겠지만, 헤스트리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넬시아가 주춤거리자 세렌이 의문을 느끼며 물었다.

[거기에 터질 문제가 있어? 거기 문 닫은 지 오래잖아? 그쪽 정령들도 좀 고지식하고.]

정령사들로만 이루어진 왕국, 헤스트리아는 이미 오랫동안 쇄국 정책을 펼치고 있어 외부에서 터질 문제가 무엇인지 전혀 떠올릴 수 없었다.

"하지만 좀 커다란 문제가 터졌어, 세렌."

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정화제 문제더냐?"

룬델이 천천히 꺼낸 물음에 넬시아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헤스트리아가 강한 쇄국 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세상을 위해 정화제만큼은 공급해주었다.

그 관리를 넬시아 자신이 맡고 있었고.

"예. 아버지 생각이 맞습니다."

넬시아가 쥔 찻잔이 살짝 떨렸다.

"헤스트리아에서 저희 쪽으로 매달 보내던 정화제의 양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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