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넬시아가 왔다
* * *
'저놈을 잡았구나.'
하벨은 한때 책상이었던 조각난 가구나, 바닥이 갈리듯 파인 흔적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저놈을 잡느라 가장 애를 쓴 게 보이니 왜 관리자가 아닐까.
"도련님."
단장이 하벨에게 말을 걸어왔다.
"말해보게."
"외람되오나, 예사롭지 않은 곳입니다. 조사를 할 수 있게 허락해주십시오."
"나도 이곳을 흘릴 수 없다고 생각했네. 듣자 하니 이곳이 암살자들… 의 소굴이라고 하던데."
하벨은 일부로 '암살자'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적어도 기사들은 하벨 티에라가 암살자에 얼마나 예민한지 알고 있었다.
"…맞습니다, 도련님."
아니나 다를까, 단장은 굳은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하벨은 본격적으로 말을 꺼내기 전에 기가 찬 웃음소리부터 내뱉었다.
"내가 저택에 돌아가기 전에 잠깐 들렸던 이 마을에, 그것도 밥을 먹으러 들어갔던 그 식당이 평범한 식당이 아니라 암살들의 소굴이었다?"
[그거…….]
아라는 '사실인데'라는 말을 하려다 급하게 자신의 입을 가렸다.
하벨이 저렇게 사실을 다 털어놓아도 되는 걸까.
아라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이다 칼리우스를 보았다.
그 역시 자신처럼 실수로 말을 꺼낼까 봐 입술을 꽉 다물고 있었다.
헤헤.
아라는 자신하고 비슷한 칼리우스를 보며 방긋 웃었다.
"아니, 이게…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마치 내가 자발적으로 죽음의 늪에 걸어갔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하벨은 더욱 언성을 높였다.
'당연히 말이 되는 소리지.'
목소리에 비통함이 섞인 것과 달리 하벨은 머릿속에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다 알면서 벌인 일들이었기에 이 말도 안 되는 부자연스러움은 방금 자신이 꺼낸 말로 오히려 다른 신빙성 하나를 떠올리게 했다.
원래 적들이 처음부터 하벨을 노렸고, 가게에서 보였던 그 이상한 행동들은 우연히 찾아온 하벨의 등장에 당황해 내보인 행동이라는 걸.
"또……."
하벨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비통함은 얼마든지 알고 있었다.
바다를 붉게 물든 어인들의 죽음을 떠올렸다.
"또 이렇게 나를 노리려 이런 곳까지 준비했다는 건가?"
카샬은 저게 연기라는 걸 알지만, 저토록 생생한 비통함에 순간 하벨이 겹쳐 보였다.
―카샬. 내가 뭘… 뭘 그렇게 잘못한 걸까? 대체 언제. 언제쯤 이 지긋지긋한 반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지! 제발, 제발 좀 그만해줬으면 좋겠어! 그냥… 그냥 숨만 쉬어도 답답해 죽겠는데, 왜 자꾸 나를… 건드리는 건데?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였을까.
하벨이 부쩍 예민해진 시기가 있었다.
평소에 거의 쳐다보지도 않던 거울을 보기 시작하고, 외출도 잦아들며 방에 틀어박히지 않았던가.
그때도, 지금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저 점점 늘어나는 습격에 불안함이 가증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던 걸까.'
카샬은 무언가 자신이 놓친 게 있다는 사실을 알자 차분해지려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진정하십시오, 도련님."
단장은 보다못해 하벨을 말렸다.
이 이상 흥분해봤자 그의 상태만 안 좋아질 뿐이었다.
"부탁이네. 나와 이곳이 관련되어 있는지 조사해주게."
"도련님. 부탁하지 마시고, 제게 명령만 해주시면 됩니다."
단장은 고개를 숙였다.
주인을 모시는 자로서 훌륭한 태도에 하벨은 만족스러워하며 말을 바꿨다.
이미 룬델도 검은 달이 자신을 노린다는 건 처음 레디나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저들은 달랐다.
검은 달이 어떤 곳이며 무얼 하는지 알아야 했다.
"그럼 명령하겠네."
"예, 도련님.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지금 두 조로 나뉘어 한 조는 이곳을 추가 조사해 숨은 적들을 소탕하고 혹여나 도망친 적들의 흔적을 쫓게. 다른 조는 이곳이 어디이며 나와 관련된 자료가 있는지 조사해주게나."
"예. 알겠습니다, 도련님."
단장은 하벨의 빠른 결단력에 허리를 숙인 뒤 바로 조를 나뉘었다.
"이놈은 내가 따로 말을 나누겠네."
하벨이 가리킨 사람은 이곳 지부의 관리자였다.
단장은 눈을 크게 떴다.
저놈을 잡느라 발생한 부상자가 몇인가.
"이놈은 위험합니다, 도련님."
단장의 언성이 살짝 올라가자 하벨은 자연스럽게 카샬을 가리켰다.
"실력을 믿지 못하는가?"
"…그건 아닙니다."
단장이 주춤거리자 하벨은 여기까지 오면서 보았던 방 중 하나를 가리켰다.
"저기에 데려가 주게."
"하지만……."
"잠깐이면 되네. 내가 저놈에게 무얼 할 수 있겠는가?"
하벨은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하듯 금화를 빼앗겼을 때 아라를 떠올리며 비슷하게 흉내라도 내보았다.
'제대로 먹혔으면 하는…….'
"저, 절대로 도련님을 의심해서 드린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단장은 하벨의 표정에 갑자기 당황했다.
기대했던 반응보다 훨씬 크자 하벨은 당장 거울을 보고 싶었다.
대체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길래.
[대장. 그게 그렇게 슬펐어? 이 몸이 설득해 볼게. 단장은 이 몸의 말이 들리니까!]
아라는 한껏 가슴을 부풀리며 단장에게 다가갔다.
[왜 우리 대장 울리고 그래? 이 몸은 대장이 우는 건 한 번도 못 봤어. 그런데 얼마나 슬펐으면 대장이 저러겠어?]
주변을 돌아다니던 정령들마저 아라의 말에 멈춰 하벨을 쳐다보다 당장 언성을 높이며 단장에게 따졌다.
[그러게 말이야. 하벨이 얼마나 서러웠으면 저래?]
[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하벨이 저러는 거야?]
"그게 아니라, 그저 저놈이 너무도 거칠고, 강하기에 도련님께서 혹여 큰일이라도 날까 싶어 드리는 걱정이었습니다."
단장은 정령들이 내보이는 반응에 더욱 당황했다.
당장 무릎이라도 꿇어야 할 것 같았다.
"고맙네. 그대가 나를 이리도 생각해줄 줄은 몰랐네."
하벨이 고마움을 담아 미소를 짓자 그제야 단장은 숨을 돌렸다.
"믿겠습니다, 카샬 씨."
"…예. 그거야 뭐, 어렵지 않습니다."
카샬은 떨떠름한 말투로 대답했다.
이게 대체 뭐라고 갑자기 저렇게 하벨이 울상을 짓는지.
수프를 먹지 못했을 때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럼, 도련님.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단장은 지부의 관리자에게 다가가 부하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들은 당장 관리자의 양팔을 뒤로 살짝 꺾은 채로 유지했다.
"읍!"
입에 재갈이 물린 놈은 반항해보지만, 이미 단장의 발이 움직였다.
빠각!
어깻죽지를 걷어차 뼈를 부서트려버렸다.
"으으읍!"
어차피 이 정도에 기절하지 않는다는 걸 몸소 경험했기에 단장은 다른 쪽 어깻죽지마저 부러트리고 다리도 부서트리려다 멈췄다.
"나머지는 제가 거슬리면 부서트리든 죽이든 할 테니 더는 건들지 마셨으면 합니다."
자연스럽게 끼어든 카샬의 행동에 단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하들에게 하벨이 가리켰던 방으로 손짓했다.
"주변을 물려주게."
"알겠습니다. 이 주변에 누구도 얼씬하지 못하도록 지시를 내리겠습니다."
하벨의 말에 단장은 고개를 꾸벅 숙인 채로 그곳을 벗어났다.
[하벨. 주변 걱정이라면 하지 마. 우리가 보고 있을 테니까.]
정령이 하벨을 보며 작게 속삭였다.
[이 암살자가 널 노리고 있던 놈들이라며? 그럼 우리도 용서할 수 없어.]
[맞아. 하벨 너는 네가 하고 싶은 마음껏 해.]
다른 정령이 뒤이어 맞장구쳤다.
하벨이 자신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해주었던가.
그가 지나왔던 발자취를 생각해보아도 이 정도는 충분히 해줄 수 있었다.
하벨을 지켜야 할 이유가 점점 더 생겨났다.
그가 하는 일이 결국, 자신들을 돕는 일이며 룬델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하벨은 아직도 낯설기만 한 그들의 말에 눈을 깜빡거렸다.
기사들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정령들은 그제야 참았던 말을 터트렸다.
[네가 이번에 우리를 구해줬다며?]
[그래. 그 땅에 우리가 쉴 수 있게 보금자리를 만들어줬다며?]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하벨의 눈빛에 정령들이 꺄르르 웃었다.
분명 마법사 협회가 벌인 정화제 사건과 이번 지부 사건의 동선이 겹치지 않았을 텐데.
정령 기사들과 합류한 건 정화제 사건 이후였다.
[당연히 들었지.]
하벨의 시선이 슬쩍 아라를 향하자 칼리우스가 딸꾹질을 내뱉었다.
'…너였어, 용용아?'
하벨은 상대적으로 아라보다 벽이 낮은 칼리우스를 택한 정령들의 지혜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안해……."
칼리우스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자 정령이 살포시 손을 잡아주었다.
[하벨. 오해하지 말고 들어 이건 우리가 물어본 거야. 룬델이야 원래 입이 무겁지만, 아라마저 말도 안 해준단 말이야.]
[이런 걸 말해주는 건 너밖에 없어, 용용아.]
정령들이 칼리우스를 꽉 안자 그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하벨의 눈썹이 덩달아 움직였다.
칼리우스가 뭐에 넘어갔는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미리 말하는데, 화내지 마. 용용이한테도, 우리한테도.]
[그래. 우린 룬델이랑 한 약속은 죽어도 지킬 거야.]
[그냥… 우리는 알고 싶을 뿐이라고. 네 소식을 들으려 기사들 곁을 떠나고 저택을 벗어날 순 없잖아?]
"딱히 자랑하려고 한 일은 아니었어. 내 입으로 말하기가 좀 그렇잖아?"
하벨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대자앙.]
아라가 말꼬리를 늘이며 눈을 깜박거렸다.
[이 몸도 말해도 되는 거야?]
"그래. 저들의 입이 무거운 건 알고 있으니까. 너도 인상 펴, 용용아."
하벨은 칼리우스의 이마에 딱밤을 주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칼리우스와 아라가 기뻐하는 소리가 들렸다.
칼리우스가 반쯤 뛰다시피 들어오려고 하자 하벨은 그를 말렸다.
"너는 아라랑 같이 여기에 있어, 용용아."
칼리우스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하다 곧 아라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라는 아직 어리니까, 나쁜 장면을 볼 수는 없었다.
"응! 여기서 아라랑 같이 기다릴게."
하벨은 칼리우스의 씩씩한 대답에 웃어주다 그가 쪼르르 달려오는 소리에 뒤를 돌았다.
"왜 그래?"
"있잖아. 소리가 기사들에게 닿지 않게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 정도는 할 수 있어."
자신감이 가득한 칼리우스의 눈동자에 하벨은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그럼 부탁할게."
"응."
또 씩씩하게 들려오는 대답을 들으며 하벨은 방으로 들어왔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시기에 들어오지도 않으셨습니까?"
카샬이 놈의 등뼈를 밟으며 통제하다 말고 말을 던졌다.
"그런 게 있어. 왜? 짓누르기가 어려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카샬은 대답하며 다리에 힘을 더 주었다.
콱.
하벨은 흥얼거리며 놈의 앞에서 쭈그려 앉았다.
놈이 내는 짙은 살기에 피부가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가까이 가면 물립니다."
"괜찮아. 놈은 날 물 수 없으니까."
하벨은 자신감에 찬 목소리를 내며 놈을 바라보았다.
히쭉.
하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표적이 눈앞에 아른거리고 있는데 기분이 어때? 재갈이 답답하면 풀어줄게. 고개를 끄덕여봐."
"읍읍읍읍!"
놈이 무어라 지껄이자 하벨은 키득거렸다.
꼭 개가 짖는 것 같았다.
"제가 벗겨도 될까요?"
레디나가 연기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읍! 읍읍읍!"
레디나를 보자마자 관리자는 두 눈을 부릅뜨며 몸부림쳤다.
"반가워, 음, 칼름?"
레디나는 칼름을 보며 활짝 웃었다.
"이 이름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계속 틀릴 생각이라 그냥 쓸게."
레디나는 하벨처럼 쪼그려 앉아 칼름의 입을 막은 재갈을 풀었다.
"이 개같은……."
짜악!
레디나는 칼름의 얼굴을 후려쳤다.
"떽. 그런 말은 좋지 않아. 도련님이 이런 거 배우면 어떡할 거야?"
"이… 이 쳐죽일 새끼가 지금 우릴 배신해?"
"워워, 진정해. 아무리 아프더라고 말은 똑바로 해야지. 배신자는 너야. 아니, 검은 달이 세상을 배신했잖아?"
"검은 달이… 푸핫. 검은 달이 세상을 배신했다고? 푸하핫!"
칼름은 한참이나 웃다가 눈에 핏대가 가득 세웠다.
"그래. 네놈이나 네놈의 어미가 계속 주장했지. 검은 달이 망가지고 있다고. 병신같은 것들! 세상이 우리를 배신했다! 세상이 우릴 버렸다고!"
퉷!
놈은 침을 내뱉었고, 레디나는 슬쩍 피했다.
"망가진 건 네놈들이야. 네놈들이 우리의 시선을 가려버렸다. 세상에서 우리를 고립시켜버렸다고…!"
으득.
칼름은 이를 갈았다.
"우리가 세상을 위해 일해봤자 뭐가 남았지? 그 같잖은 명예? 지들끼리만 아는 평화로움? 사라진 전쟁?"
"그게 검은 달이 존재하는 이유야."
"그래서? 그래서 누가 우릴 기억해주지? 우리가 안은 이 슬픔은 누가 기억해주냐고?"
"우리가. 우리가 기억하잖아."
"…하. 역시 네놈들은 미쳤어! 잠깐이나마 네놈의 어미를 공경한 내가 미친놈이지. 내가 아둔했다! 세상은 이렇게 더러운데, 그 더러움을 치우고자……."
"푸하하핫! 공경했다고? 엄마를? 우리 엄마 말이야?"
레디나는 저 소리에 웃음을 더는 참지 못했다.
"진짜 개처럼 엎드려 있다고 개가 된 모양이야. 이것 참, 너무 이상하네? 내 귀가 이상했나? 다 죽이라고 그러던데."
칼름의 머리카락을 단숨에 쥔 레디나는 그대로 바닥에 처박았다.
빡!
코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레디나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름의 머리카락을 여전히 잡은 채로 하벨을 보았다.
"살려야 하나요?"
"아니. 난 좀도둑한테 줄 피만 있으면 돼. 애초에 이 방에 들어온 이유도 별거 없어."
하벨의 시선이 레디나를 향했다.
지부를 점령하고자 그토록 바랐던 사람은 다름 아닌 레디나였으니.
"…역시 제 신이시네요."
레디나는 환하게 웃었다.
경험만큼 값진 게 없었다. 지부가 어떤 곳인지 제 눈으로 보았다.
정령 기사들이 지부를 공격하지 않았다면 아마 자신이 가진 힘으로 어림도 없었을 테지.
이번 기회로 자신의 꿈이 얼마나 큰지 알아버렸다.
"고마워요, 도련님."
그래서 이런 기회를 준 하벨이 진심으로 고마웠다.
레디나는 단검을 들었다.
칼름이 무어라 지껄이든 말든 자신의 목적은 처음에도 그리고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현 검은 달의 파멸.
"피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더 뽑아 드릴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새로운 검은 달의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