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편안하게(3)
* * *
우쭐거림이 많이 섞인 하벨의 시선에 카샬은 못마땅했다.
이게 무슨 몸을 사리는 행동인지.
기어코 피를 보지 않았던가.
'애초에 사람들은 피를 보는 행동 자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카샬은 목구멍까지 치솟는 잔소리를 삼키느라 정말 힘겨웠다.
대체 용왕이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몰라도 몸뚱어리를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돌멩이로 보는 게 틀림없었다.
카샬은 앞머리를 이마 뒤로 넘겼다.
슬쩍 바라본 헤레스의 눈동자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아마 자신처럼 머리가 복잡한 모양이었다.
카샬은 주먹을 잠깐 꽉 쥐었다.
하벨이 대체 어디에서 왔는지는 몰라도 사고방식이 어딘가 엇나가 있었다.
'저걸 어쩌면 좋지.'
카샬의 고민이 깊어졌다.
주변에 소리가 잠잠해지자 정령이 말을 꺼냈다.
[끝났어. 이제 나와도 좋아.]
[나는 계속 보고 싶은데. 달팽이 같아서 귀엽잖아?]
뒤이어 다른 정령이 낄낄 웃었다.
그 말에 정령 기사들은 하벨을 보호하고자 세웠던 벽을 거뒀다.
"이제 괜찮습니다. 정리된 모양입니다."
기사가 말을 해서야 하벨은 난장판이 된 가게를 바라보았다.
순간, 새어 나올 것 같은 웃음에 기침하는 척 입가를 가렸다.
주방이라고 생각한 곳이 완전히 무너졌고, 자신이 있던 근방을 제외하면 전부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아주 잘 부숴버렸네.'
하벨은 위를 슬쩍 바라보았다.
뭘 했는지 몰라도 천장까지 구멍이 뚫려있어 다시금 웃음을 참아야 했다.
"도련님. 내려… 가시겠습니까?"
기사는 머뭇거리다 물었다.
원래는 말려야 하지만, 조금 전 하벨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약속하지 않았는가.
"그래. 먼저 내려가 있게. 잠깐 있다가 내려가겠네."
"알겠습니다. 천천히 내려오십시오. 부탁합니다, 카샬 씨."
기사는 하벨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카샬을 보았다.
그의 실력이 기사과 비교해 꿀리지 않는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기사들이 비밀 통로로 내려가자 카샬은 밖이 소란스러운 걸 느끼며 아직 멀쩡한 커튼을 닫아 창문을 가렸다.
어설프지만, 도움이 될 테지.
"어떻게 부서졌는지 직접 보지 못해서 아쉽네. 넌 제대로 봤어, 레디나?"
하벨은 아라를 쓰다듬으며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탁.
레디나가 주방이었던 곳에서 누군가를 던지며 걸어 나왔다.
"그럼요. 제대로 봤어요. 아주 놀랍고, 속이 시원하던데요?"
"저놈은 뭔데? 기사들이 확실히 마무리하지 않은 거야?"
하벨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레디나가 던진 놈을 바라보았다.
"그건 아니에요. 암살자들의 목숨이 얼마나 질긴지 몰라서 벌어진 일이죠. 보세요."
레디나는 손에 쥔 단검을 놈에게 던져 맞췄지만, 놈의 몸은 조금도 미동하지 않았다.
"죽은 거 같죠?"
레디나가 놈의 머리채를 잡고 끌어올리자 놈이 눈을 번쩍 뜨며 손을 움직였다.
레디나는 그대로 놈을 바닥으로 밀어버리며 등을 밟았다.
"짜잔. 사실 안 죽었어요."
손바닥을 내보인 레디나는 키득거리며 놈의 척추를 세차게 짓눌렀다.
우드득.
[으아아앗.]
눈을 가리던 아라가 그 소리에 귀까지 접었다.
"…레디나? 너 레디나지? 이 개 같은 게… 지금 우릴 배신해?"
놈이 더듬거리며 말을 꺼내자 레디나는 더 해맑게 웃었다.
"보세요. 이 상태라도 말을 한다니까요. 아마 밑에서 조금 당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긴 해요. 놈들을 확실히 죽이려면 목을 그어버려야 하죠."
태연하게 목에 검을 겨눈 레디나의 행동에 놈이 웃었다.
"그래. 어쩐지… 이상했어. 살려달라고 제 어미인 그 배신자의… 커, 커헉!"
콰드득.
레디나는 웃음기를 싹 지우며 놈의 목에 단검을 박아서 빙글빙글 휘저었다.
"죽을 거 알면서 왜 이렇게 혓바닥이 긴지 모르겠네."
레디나는 놈을 그대로 들어 올려 귓가에 속삭였다.
"조용히 갔으면 나도 건드릴 생각은 없었는데 마음이 바뀌었어. 네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동생 놈을 내가 어떻게 하는지 저기 위에 가서 보고 있어."
죽기 직전까지 청각은 살아 있기에 놈이 부르르 떨었다.
"그럼, 잘 가."
레디나는 놈의 목을 쥐어 단검을 뺀 뒤에 등 쪽에서 가슴팍으로 향하도록 찔러버렸다.
푹!
피가 튀자마자 레디나는 더러운 걸 쥐었다는 듯이 시체를 바닥에 던져버렸다.
"도련님. 저 먼저 조용히 내려갈게요. 괜찮죠?"
"레디나."
레디나의 눈빛이 가라앉아 있자 하벨은 그녀를 붙잡았다.
"먼저 가도 괜찮은데. 일단, 심호흡부터 해."
"…갑자기 심호흡을 왜 해요?"
"지금 머리가 복잡해 보이니까."
레디나는 잠깐 말을 하지 않았다.
곧 일그러진 얼굴로 웃었다.
"그런데 방금……."
레디나는 말을 꺼내길 한 차례 망설였다.
억지로 올린 입꼬리가 너무도 무거웠다.
"다들 들었죠?"
여기가 검은 달의 지부이기에 자신이 검은 달 내부에 어떤 존재였는지, 저 사실을 언급하는 놈이 있을 수 있다는 걸 고려했어야 했는데.
멍청아.
이 멍청아!
"레디나."
하벨이 자신을 부르자 레디나의 심장이 세게 뛰었다.
"대체 저게… 무슨 말인지 궁금하면 물어봐도 괜찮아요. 같이 이렇게 있으면 늦든 빠르든……."
"다른 생각은 하지도 말고 심호흡부터 해. 그게 먼저야."
하벨은 조금 전과 비슷한 말을 꺼냈다.
지금 레디나는 굉장히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예상치도 못한 일에 일어난 혼란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이 몸이 토닥거려줄게, 레디나.]
아라가 하벨의 품을 벗어나 레디나의 볼을 만져주었다.
'…아라 님.'
포근한 그 감각에 레디나는 비로소 하벨을 제대로 바라보았다.
"…제가 방금 예민했죠?"
레디나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하벨의 시선은 달라지지 않았다.
다른 이들의 시선까지 확인해서야 레디나는 평소처럼 웃을 수 있었다.
'방금 그 말이 뭐라고.'
자신이 너무 예민했다. 다른 사람들은 평소와 똑같은데.
오히려 자신을 걱정하는 시선도 엿보지 않던가.
밤에 혹여 습격당해 죽지 않을까, 음식에 독이 타 있는 건 아닐까, 지나가는 사람들 속에 검은 달 일원이 뒤섞여 자신을 죽이는 게 아닐까.
그런 걱정 없이 밤을 지새우는 곳에 머물고 있다는 걸 떠올리자 레디나는 힘이 났다.
"…후. …하."
레디나는 하벨 말대로 몇 번의 심호흡 끝에 심박 수가 줄어들고 있음을 느꼈다.
"그럼 먼저 갈게요, 도련님."
"그래."
그제야 하벨이 허락하자 레디나는 그를 빤히 보았다.
"왜 그렇게 봐?"
"아뇨. 역시 신도의 상태를 아는 건 제 신뿐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서요. 고마워요."
레디나는 하벨을 향해 웃다가 다른 이들을 쳐다보았다.
역시 그대로였다.
레디나는 헤레스에게 슬쩍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언니."
아라도 덩달아 귀를 기울였다.
"아까 도련님의 상태 이상한 거 보셨죠?"
[오, 맞아. 아까 대장이 이상했어.]
아라는 레디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도련님 옆에 있었거든요."
[이럴 수가. 이 몸 옆에 있었다구? 이 몸은 전혀 몰랐어!]
"그, 음, 뭔가를 보는 것 같았어요."
레디나가 꺼내는 말에 아라는 덩달아 귀를 쫑긋 세웠다.
"…혹시 환각 말이야?"
헤레스가 더듬거리며 묻자 레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에 헤레스의 안경이 주르륵 미끄러져 겨우 코끝에 걸치자 레디나는 힐끔 하벨을 바라보았다.
[…화, 환각?]
아라가 기겁하며 소리치는 그 말에 하벨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걸 레디나가 볼 줄이야.
"레디나. 안 가고 뭐 해? 나부터 간다?"
"갈게요. 나중에 뒤쫓아 오세요."
레디나는 그제야 손을 흔들며 먼저 비밀 통로를 향해 내려갔다.
"기사단이 내려갔으니 한, 5분 뒤에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카샬이 시계를 꺼내 말을 하자 칼리우스는 당장 의자를 가리켰다.
환각이라면 엄청 위험한 게 아닌가.
"어서 앉아, 도련님. 5분 동안 서 있는 것보다 앉아 있는 편이 훨씬 낫잖아."
"아니, 왜 5분 뒤에 가? 가려면 지금 가야지. 어차피 기사들이 먼저 갔으니 지금 출발한다고 뭐가 문제겠어? 굳이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지."
하벨이 여유롭게 걸어가자 카샬이 빠른 걸음으로 하벨의 앞을 가로질렀다.
"그럼 제가 먼저 움직이겠습니다. 뒤따라오셨으면 합니다."
"물론이지. 아까 봤지? 오늘은 나서는 일이 없다니까."
어쩜 저렇게 얄미울까.
카샬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럼 저하고 같이 가요, 도련님."
헤레스가 하벨 옆에 서자 그는 괜히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카샬이 먼저 비밀 통로로 들어가는 걸 확인해서야 하벨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아주 잠깐이었을 뿐이야."
"그래도 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괜찮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내 예전 기억을 봤어."
하벨은 머리카락을 만진 손 그대로 머리를 가리켰다.
"기억이… 온전하지가 않아."
[……?]
아라도 처음 듣는 이야기에 깜짝 놀라다 곧 하벨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엄청… 슬펐겠다, 대장.]
"빙의의… 후유증이군요."
헤레스의 손에 힘이 들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잃어버린 기억을 조금 특별한 형태로 보는 것뿐이지만, …음,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은 못 하겠네."
"이건 도련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특별한 경우이니, 나중에 저택으로 돌아가면 따로 드웰 아저씨께 물어보겠습니다."
'드웰'이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하벨은 심장이 멋대로 날뛰는 기분을 느꼈다.
잠잠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그에게서 들은, 이 몸을 하벨 티에라한테 줄 수 없다는 그 말이 가슴을 때리고 있었다.
하벨은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부탁할게."
"네. 저한테 맡기세요."
헤레스는 하벨과 나란히 발을 맞추려다 그를 쳐다보는 칼리우스의 시선에 먼저 비밀 통로 근처로 걸어갔다.
칼리우스는 하벨의 망토를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있지, 도련님."
"아까 하려던 말을 꺼내는 거 맞지?"
"응. 맞아."
칼리우스는 입술을 살짝 핥으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아까."
아라가 귀를 세우며 칼리우스에 다가갔다.
"도련님에게서 나는 영혼의 냄새가 더 약해졌어."
[…왜에?]
아라가 눈을 깜박거리자 칼리우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나도 몰라. 바로 도련님한테 말하려고 했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말하지 못했어."
"잘 참았어, 용용아."
하벨은 칼리우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헤레스를 향해 걸었다.
하벨을 따라오던 칼리우스가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있지, 도련님. 환각 때문에 영혼의 냄새가 약해진 거야? 아니면 영혼이 원래 약해서 환각을 보는 거야?"
"글쎄. 나도 어느 쪽인지 모르겠어."
환각을 보면 볼수록 자신의 영혼에 문제가 생기는 건지.
아니면 자신의 영혼에 문제가 생겼기에 환각을 본다는 건지.
루룸도 그렇고, 드웰까지 자신의 영혼에 상처가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어느 쪽이든…….'
하벨은 순간, 땅이 조금 전보다 가까이 보이자 당황했다.
탁.
칼리우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하벨을 붙잡았다.
갑자기 하벨의 의식이 한순간 꺼지는 듯하더니 앞으로 쓰러지지 않던가.
뒤늦게 의식이 돌아왔는지 손을 파닥거렸고.
"괜찮아, 도련님?"
[아, 아까 맛있는 물 때문이지? 이 몸이 맛있게 먹었는데. 그래서 그런 거지, 대장?]
아라가 울상을 지으며 물었다.
쿵쿵.
하벨은 거칠 게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칼리우스를 보았다.
"혹시… 의식이 끊어졌어?"
"…어떻게 알았어?"
칼리우스의 대답에 하벨은 드웰이 꺼냈던 또 다른 말이 생각났다.
―영혼이 부족하기에… 육체를 갉아 먹을 겁니다.
'시간제한이… 시작됐다는 말은 아니겠지?'
하벨은 어떤 조짐도 없이 의식이 사라진 일에 의심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괜찮으세요, 도련님?"
헤레스가 다시 하벨에게 달려오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 요새 피를 흘리는 일이 많아져서 그런가 봐. 어서 내려가자."
하벨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비밀 통로이자 지부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설령 시간제한이 시작됐어도 자신이 하려던 일은 변하지 않았으니.
* * *
콱!
계단을 내려가 처음 보이는 문을 열자마자 정령 기사가 검은 달 일월의 목을 베는 장면이 보였기에 하벨은 아라를 바라보았다.
[이, 이 몸은 눈을 가렸어!]
아라는 어느새 하벨의 등 뒤에 매달렸다.
촥.
낯선 발소리에 기사가 매서운 시선으로 고개를 돌리다 말고 카샬의 말에 멈췄다.
"도련님이십니다."
기사는 카샬에게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아니, 왜 벌써 오십니까?"
카샬의 타박에 하벨은 더 신나게 계단을 내려갔다.
"상황은 어떤가?"
하벨의 물음에 기사들은 자연스럽게 하벨을 호위하며 대답했다.
"현재 부상자를 제외하면 괜찮은 편입니다."
"오. 사망자가 없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기사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럼 적들의 실력은 어땠는가?"
"적들은 암살자로서 솔직히 저희의 예상을 뛰어넘었습니다. 저희가 만나본 암살자 중에서도 가장… 날카로웠고, 가장 조용했죠."
하벨이 혹여 시체를 밟을까, 다른 기사들이 더 빨리 움직여 시체를 발로 치우고, 피가 가득 묻은 문을 열었다.
[하벨이 왔어!]
[아라도 왔나?]
정령들의 소란에 단장은 무기를 살짝 내렸다.
"…도련님?"
정말로 하벨이 이런 곳에 내려왔다니.
내려오면서 마주한 시체가 몇이겠는가. 괜히 자신의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정령 기사들이 정말 강하구나.'
하벨은 이곳에 도달하면서 군데군데 보았던 여러 흔적에 감탄했다.
거의 일방적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기사들의 도륙 상황이 눈에 그려졌다.
왜 그렇게 귀족들과 다른 나라들이 티에라 가문을 탐내는지 알 수 있었다.
정령 기사들의 힘은 정령에게서 나왔고, 그 정령들이 룬델을 중심으로 뭉쳤기에 기사들은 자연스럽게 룬델에게 충성할 수밖에 없었다.
룬델을 꿇려야 저들을 가질 수 있으니 적들은 더더욱 룬델의 약점을 파고드는 상황이 벌어졌을 테고.
"만약에 저희가 아니라 다른 기사들이었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정도입니다."
기사는 잠깐 멈췄던 말을 이어 꺼냈다.
그들의 자랑스러움이 묻어났다.
'그렇지. 정령 기사들이기에 달랐지.'
정령 기사들에게는 기존 기사들과 달리 또 다른 눈이자 방어와 공격을 할 수 있는 정령들이 존재하니 기습은 얼마든지 막을 수 있을 테지.
하벨의 시선은 단장 근처에 있는 기사들에게 향했다.
기사들이 붙잡은 검은 달 일원들은 얼추 보아도 열 손가락 안이었다.
'…오.'
그중 돌에 짓눌려 움직임이 제한된 자가 보였는데 하벨은 그놈이 이 지부의 관리자라는 걸 한눈에 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