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편안하게(2)
* * *
'찾았다.'
하벨은 아라가 전해준 소식에 활짝 웃는 얼굴로 손바닥을 보았다.
아직 붕대가 감겨 장갑이 조금 두껍게 보였지만, 잘 아물고 있기에 자연스럽게 손가락을 문질렀다.
헤레스의 눈빛이 달라졌고, 카샬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의미를 드러냈다.
"이제 곧 식사가 나올 것 같습니다, 도련님."
카샬이 주방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게."
"여기 마을을 좀 둘러보신 후에 저택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그러려고. 밥만 먹고 가기엔 좀 아쉽잖아?"
"그럼 저는 잠깐 저택에 연락… 좀 하고 오겠습니다."
카샬이 살짝 떨떠름하게 말을 꺼냈다.
그가 연락하고자 한 사람은 룬델이 아닌 페트리오라는 걸 알기에 하벨은 기꺼이 손까지 흔들었다.
"그래. 어서 갔다 와."
이미 자신들보다 더 빨리 마을로 진입한 페트리오가 현재 상황을 알려면 누군가는 연락해야 했다.
진짜, 꼭, 반드시 제가 해야 하는 겁니까.
카샬은 눈까지 떠 간절함을 담아 물어봤지만, 하벨은 계속 흔들던 손을 멈추질 않았다.
그렇다고 자신이 자리를 비울 수 없지 않은가.
'좀도둑은 이제 외부에서 포위망을 치겠지.'
애초에 페트리오가 네 수장에게 연락한 이유는 그들에게서 병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뒷세계든, 암살자든 똑같이 음지에서 살아가지만, 애초에 목적이 달랐다.
암살자가 사람의 목숨에 붙어 기생하는 자들이라면 뒷세계는 양지에 붙어 기생하는 자들이었다.
그 누구보다 양지에서 음지로 파고드는 걸 가장 잘하는 게 뒷세계이기에 검은 달이 자신이라는 표적에 눈길을 줄 동안 가면단들은 놈들이 도망갈 경로를 전부 차단하고 있겠지.
'솔직히 좀도둑이 가면단을 이렇게까지 활용할 줄은 몰랐는데. 아주 잘 키워놨다.'
하벨이 흡족했다.
[있지, 대장. 이 몸이 그 작은 통로로 들어갔다?]
카샬이 자리를 떠나자 아라는 여전히 작은 목소리로 쫑알거렸다.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어두워서 이 몸이 불을 켜야 하나 싶었는데 거기에 있는 바람이 이 몸이 어딜 가야 하는지 알려줬어.]
'땅 다음에 바람이 알려준 건가?'
하벨은 조금 전보다 더 바쁜 주방의 모습에 손깍지를 껴서는 느긋하게 아라의 말을 들었다.
[방이 엄청 많았어. 그런데 그중에 진짜 공간은 하나였어. 이 몸은 표식을 남기고 왔어!]
'표식이라니?'
하벨은 슬쩍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아라가 앞발을 들어 탁자를 가볍게 쳤다.
아라의 앞발을 따라 얇은 줄기가 탁자의 기둥에 휘감겨 자라났다.
[이렇게 말이야! 헤헤.]
아라는 함박웃음을 짓고 말고 다급히 식물을 지워나갔다.
[이 몸이, 에헴, 다른 정령들한테도 여길 따라가라고 말해뒀으니까 대장은 아무 걱정하지 마.]
가슴팍을 내밀며 우쭐거리는 아라의 그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해 하벨은 진심으로 아쉬웠다.
'그런데 정말 아라가 제대로 일을 처리했다니.'
아라가 혼자서 무언가를 처리한 건 이번이 두 번째이질 않은가.
첫 번째는 쫓겨났던 왕정 귀족파 뒤에 전 대법관인 피나토 웬이 있다는 걸 알기 위해 아라가 정령들에게 가서 부탁했고.
그리고 오늘.
'…뭔가 감격스럽다.'
가슴에 찡한 감정이 올라왔기에 하벨은 표정을 관리하느라 애를 써야만 했다.
"…오!"
기사들의 환호 소리가 들려오자 하벨이 고개를 돌렸다.
"도련님."
주변이 소란스럽자 내내 기회를 노려온 칼리우스가 하벨에게 다가와 손을 내보였다.
0.
엄지와 검지를 말며 결계는 없다는 걸 알렸다.
'결계가 없다?'
하벨은 조용히 입가를 가렸다.
마법 결계가 없다는 건 다르게 보자면 검은 달이 마법사를 경계하는 셈이 아닌가.
'검은 달이 정상일 때, 마법사 협회 장로를 죽였다는 사실을 들었지만, 이 사건을 검은 달에서 계속 의식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
어쩌면 마법사 협회에서 검은 달이 장로를 죽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건 좀 흥미로운데?'
하벨은 헤레스를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도련님. 이번에도 제대로 확인할 테니까요."
어차피 저들이 음식에 더는 수작을 부리지 않을 거라는 걸 알지만, 확인은 제대로 해봐야 하는 법.
"그래. 믿고 있어."
하벨이 가볍게 던진 저 말에 헤레스는 어쩐지 가슴이 따끔거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헤레스는 조금 전처럼 독 검사를 위해 남는 테이블 근처에 섰다.
지금 하벨이 하벨 티에라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자신이 그의 곁에 남아 있는 이유는 그렇게 큰 게 아니었다.
―…정말, 헤레스? 정말 날 치료해줄 거야?
지금보다 하벨 티에라가 더 어렸을 때, 그가 환하게 짓던 그 웃음이 눈에 밟혔고.
―약속한 거다? 응?
수줍게 꺼내며 새끼손가락으로 엮었던 그 약속이 발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헤레스는 하벨을 바라보자 그는 가볍게 웃어주었다.
'왠지 내버려 둘 수 없으니까.'
물론 하벨에게 고마운 것도 무척 컸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하벨이 위태로워 보였다.
하고 싶은 걸 한다는데 과연 그 하고 싶은 게 사라지면, 아니, 갑자기 목표를 잃으면 하벨은 어떻게 되는 걸까.
솔직히 그가 했던 그 모든 일이 하나 같이 무겁고, 힘겨운 일이었다.
빙의된 것도, 마법사 협회 일도, 거대 정화 장치 일도, 그 모든 게 전부.
툭.
헤레스는 직원들이 음식을 내려놓은 소리에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문지르고는 숨을 짧게 내쉬었다.
지금은 독 검사를 할 차례였다.
"도련님."
하벨은 말없이 창문을 바라보다 헤레스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없습니다."
"그래. 고생했어."
하벨은 헤레스가 앉고, 카샬이 돌아오는 걸 보았다.
자신이 앉은 식탁에도 음식이 들어오자 하벨은 이제 슬슬 계획의 시작을 알려야 할 순간이 찾아오는 걸 느꼈다.
"뭐 하는가? 다들 날 신경 쓰지 말고. 어서 먹게."
하벨은 아무도 음식에 손을 대지 않자 어서 입을 열었다.
아라가 비밀 통로를 찾았고, 그 위치를 정령들이 알고 있으며 기사들은 무언가 수상함을 느끼되, 자신의 명령에 경계만 하는 상황이었다.
하벨은 모든 상황을 확인하며 태연하게 음식의 기본을 알 수 있다는 수프에 입을 댔다.
하벨의 눈이 잠깐 커졌다.
'…어?'
하벨은 자신도 모르게 두 숟가락 째 입에 넣었다.
'이거 왜 이래? 생각보다 맛있는데?'
카샬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맛있습니까?"
지금 밥이 넘어가냐는 물음에 하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맛있는데?"
하벨의 진심을 담아 말을 꺼내자 카샬은 입을 꾹 다물었다.
"먹고 싶으면 너도 여기 앉아 먹어."
입맛을 다시는 칼리우스를 모습에 하벨은 실실 웃으며 남은 자리를 가리켰다.
"카샬 너도. 좋은 기회잖아?"
검은 달이 만든 음식을 언제 먹어보겠어?
"…진짜 맛있는데요?"
헤레스가 안경을 올리며 꺼낸 말에 어디선가 '꿀꺽'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레디나인 게 분명했다.
칼리우스는 자리에 앉아 카샬의 눈치를 살폈고, 카샬이 말없이 자리에 앉자 칼리우스는 빵을 뜯어 수프에 적셔 먹었다.
칼리우스의 광대가 바로 올라갔다.
"맛있어!"
"그렇지? 내가 보는 안목이 있다니까."
하벨은 자랑스러움을 담아 활짝 웃었다.
[이 몸도 보고 싶은데. …아니야. 이 몸은 참을 수 있어.]
하벨이 정령사라는 걸 안 들키려면 최대한 하벨 근처에 있으면 안 된다고 정령들이 말하지 않았는가.
아라가 하벨의 다리에 매달려 울상을 짓고 있는 것과 별개로 분위기는 점점 달아올랐다.
예상하지도 못한 맛 좋은 음식 덕에 기사들 역시 즐거웠다.
한창 분위기가 고조됐을 때, 검은 달 일원들이 공격을 포기하고 제발 꺼지라는 눈빛을 했을 때, 하벨은 아라를 위해 용왕의 힘을 사용해 물을 만들어냈다.
찰랑.
그 은은한 소리와 아름다운 빛깔에 아라의 눈동자가 별보다 더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아라는 어떤 고민도 없이 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쪼오오옵.
하벨이 만들어주는 물을 허겁지겁 먹다 말고 아라는 꼬리를 바짝 세웠다.
[대장. 맛있는 물이 좀… 많은데? 이 몸한테 이렇게 많이 주지 않아도 참을 수 있는데.]
아라가 눈동자를 위로 올렸다.
뚝.
무언가 떨어졌다.
붉은색을 띠는 아주 작은 물방울이.
그제야 아라의 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대장! 이 바보야!]
아라가 소리치다가 자신의 입을 가렸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놀라지 마, 아라야.
하벨이 이전에 다 말해주지 않았던가. 놀라지 말라고.
'이걸 말하는 거였다니. 이, 이 몸은 몰랐는데.'
아라가 조심스레 둥둥 떠 테이블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자마자 하벨이 포크를 떨어트렸다.
쨍그랑.
그 소리에 헤레스가 제일 먼저 소리쳤다.
"도련님!"
겨우 세 글자에 가게 안에 침묵이 찾아왔다.
끼이익!
"괜찮으십니까?"
카샬이 다급히 일어나 의자가 넘어지면서 시선이 동시에 하벨에게 쏠렸다.
하벨이 코피를 뚝뚝 흘렸다.
그 모습이 기사들의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
왜 하벨이 저런 상태가 되었는가.
아.
기사들은 떠올렸다.
이전에 하벨이 독에 당하지 않았던가.
무려 저택 안이었고 분명히 지금처럼 확실하게 독을 검사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벌어졌다.
하벨은 기사들의 눈빛이 달라졌음을 확인하고는 칼리우스를 바라보았다.
내가 너한테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하고 있지?
그렇게 묻는 것 같았기에 칼리우스는 치미는 분노를 꾹 참아내며 하벨을 불렀다.
"도련니임…!"
살짝 울먹거리는 소리에 맞춰 하벨은 몸을 옆으로 기우뚱 뉘었다.
'이런.'
하벨이 쓰러지는 타이밍이 조금 빠르자 카샬의 걸음도 빨라졌다.
카샬이 하벨을 붙잡았고, 동시에 기사들이 일어났다.
분명히 수상하다는 말을 하벨에게 꺼냈는데.
그 역시 경계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던가.
"자, 자,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정령 기사들이 내뿜는 지독한 살기에 검은 달 일원들은 당황했다.
독은 넣지 않았다.
의사가 있음에도 독을 넣을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게다가 무려 두 번이나 독 검사를 하지 않았던가.
"뭔가 오해가 있습니다. 방금 독 검사를 하지 않았습니까?"
콰아앙!
정령들은 비밀 통로 안에 열심히 넣어두었던 바람을 가게 쪽으로 터트렸다.
―있지. 대장이 그러는데 소란이 일어날 거래. 기사들한테 알리지 말고, 막 실수한 것처럼 그렇게 꾸며 달랬어.
지금이 아라가 말했던 그 소란이 일어날 순간이 아니겠는가.
갑작스럽게 벌어진 사태에 검은 달 일원들도 정령 기사들도 덩달아 당황했다.
정령들이 빠르게 연기를 잠재우자 어딘가로 향하는 비밀 통로가 보였다.
"…이 새끼들이!"
그제야 정령 기사들은 빠르게 인지했다.
이곳은 수상한 게 아니라, 이미 수상한 곳이었다는 걸.
저들이 왜 하벨을 노렸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평범한 가게에 비밀 통로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스겅.
기사들은 일제히 검을 뽑았고, 정령들은 그들에게 정령수를 넣어주었다.
착.
단장의 검에 불이 휘감기자 기사들은 말없이 똑같이 검에 불을 감았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기사들 모두 불꽃을 머금은 전사의 표정을 하며 명령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공격."
간결하고, 굵직한 그 말과 함께 단장은 바람을 다리에 감아 튀어나갔다.
콰앙!
그대로 돌진하자 주방을 부서지고, 내리찍은 검 너머로 불꽃이 퍼졌다.
파아아아!
겨우 한 명의 등장에 주방이 초토화되는 상황을 보며 하벨은 솔직히 놀랐다.
'…와.'
살짝 불만 붙였는데 기사들이 이토록 날카로워질 줄은 몰랐고, 갑자기 검은 달이 왜 이렇게 작아 보이는지.
정령 기사 중 일부는 자연스럽게 하벨 앞에 서서 돌로 된 벽을 세웠다.
두두두!
"도련님은 어떠십니까?"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기사의 물음에 헤레스가 대답했다.
"일단 마차로 모시겠습니다."
기사는 다시 말을 꺼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하벨의 안전이었다.
하지만 하벨은 손을 들었다. 그의 손끝이 부들거렸기에 기사의 표정이 굳었다.
"…아니."
"도련님. 지금은 도련님의 안전을 생각할 때입니다."
"비밀 통로가 나온 걸 보았네."
하벨이 흘러내리는 코피를 닦자 장갑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챙!
검과 검끼리 맞부딪히는 소리가 벽 너머에서 들려왔다.
"들리는가? 여기는 예사롭지 못한 곳이네. 내 그 사실을 아는데 어떻게 이곳을 떠날 수 있겠나?"
하벨은 기사의 손을 잡았다.
"부탁이네. 내 말 좀 들어줄 수 있겠나?"
기사는 그 간곡한 하벨의 부탁에 흔들렸다.
"도련님께서는 저희에게 뭐든 명령하셔도 되는 분입니다."
"그대도 알다시피 나는 언제나 누가 날 노리는 줄도 모르는, 이런 불합리한 상황에서 매일 도망쳤다네. 이번에는 그대들이 있음에도 또 도망쳐야 하는가?"
어쩐지 애잔함이 섞인 저 말에 벽 안쪽에 있는 기사들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니 날 마차로 내쫓지 말아 주겠나."
무슨 일이 벌어지든 기사들에게 있어 주인의 안전이 첫 번째였다.
그걸 알지만, 저렇게 간절히 말을 꺼내는데 어떻게 외면하겠는가.
"그런… 일은 없습니다. 저희는 무조건 도련님을 지키겠습니다."
기사의 굳건한 다짐에 하벨도 그제야 편안하게 웃었다.
저들의 의지에 불꽃을 붙였으니, 이제 구경하는 일만 남았다.
하벨은 의자에 편안하게 기대 방금 수프 맛을 되새기다 슬쩍 카샬과 헤레스를 쳐다보았다.
'보거라. 내 이번에는 나서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약속은 확실히 지켰다.
하벨은 흡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