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진상(2)
* * *
'…아니, 갑자기? 대체 어떤 이유로?'
하벨은 아라가 진화한다는 이유와 별개로 대체 왜 진화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자신의 성장과 같이 자라는 게 아니었는가.
저번과 달리 이번에 자신이 정령들의 도움으로 단계를 건너뛰었을 때도 아라는 진화하지 않았다.
실제로 용왕의 힘으로 만든 물을 통해 아라가 조금씩 성장했기에 이번에는 아라가 진화하는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놀라지 마, 용용아!]
아라가 즐겁게 소리쳤고, 아라를 바라보던 정령들의 눈이 커졌다.
[왜… 아라 몸에서 빛이 나는 거야?]
아라를 처음 봤을 때부터 조금 특별한 정령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특이할 줄이야.
아라의 몸집이 손가락 한 마디만큼 커지더니 빛이 아라 머리 위에 맴돌다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끈처럼 길게 팔락거리는 그 모습은 금세 호기심을 자극했다.
대체 저게 뭘까.
빛은 아라의 목에 살포시 감겼다.
찬찬히 빛이 내려앉자 아라의 목에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파란 리본.
하벨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빛이 리본이 되었다고?'
[우와아아!]
아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목에 달린 리본을 보며 방긋 웃었다.
파란 리본이 아라랑 너무 잘 어울렸기에 하벨은 곧 웃음이 터졌다.
그렇지 않아도 귀여웠던 아라의 매력이 한층 더 빛을 발하는 기분이었다.
아라의 귀가 팔랑거렸다.
"리본이 생겼어? 진짜 귀여워, 아라야."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뼉을 치던 칼리우스는 문득 드는 생각에 다른 정령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목 어디에서도 리본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아라 너만 리본이 있는 거야?"
칼리우스의 물음에 정령들도, 하벨도 그제야 당연한 그 사실을 눈치챘다.
[그건… 우리도 모르겠는데?]
정령들은 괜히 자신의 목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존재하지도 않을 게 새롭게 만들어질 리는 없었다.
[이 몸도 그 이유는 모르는데.]
아라는 리본을 만지작거리며 눈동자를 휙휙 굴렸다.
[으음. 아라가 귀여우니까 충분하지 않을까.]
정령들은 나름의 기준을 세우려 머리를 굴렸다.
[…있지.]
정령 중 한 명이 손을 흔들었다.
[왕께서도 머리에 왕관을 올려놓으셨잖아.]
[하지만 아라는 리본인걸. 왕관과 리본은 달라.]
[그래. 왕관하고 리본은 다르다고. 우리가 찾지 못할 뿐, 왕께서는 아직 살아계시잖아? 왕께서 내린 명령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고.]
정령왕이 자신들에게 내린, '인간들을 죽이지 마라'는 명령이 아니었다면 그곳에 갇히는 일도 없고, 억지로 정화제를 만드는 일도 없었을 테지.
하지만 정령들은 왕을 원망하진 않았다.
[…왕께서는 어딜 가신 걸까.]
[보고 싶다.]
[그리워.]
정령들의 입과 입을 통해 퍼진 정령왕의 언급에 저마다 다 침울해져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혹시 너희의 왕은 갑자기 사라진 거야?"
하벨이 슬쩍 말을 던졌다.
[맞아. 갑자기 사라지셨어. 왕께서 계셨으면 오염이 이 정도로 심각해지지 않았을 거야.]
[그럼, 그럼. 왕께서는 엄청 대단하셔!]
"어떻게 생겼는지 알려줄래? 혹시나 내가 만날 수도 있잖아."
[왕께서는 머리에 왕관을 착용하고 계셔!]
[엄청 멋진 분이야!]
[맞아, 덩치가 엄청 크셔! 우리를 많이많이 합친 것만큼!]
마치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정령들은 정령왕에 대해 하나씩 털어놓았다.
하지만 귀를 기울여도 막상 생김새를 털어놓는 정령들이 없기에 하벨은 다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거 말고. 생김새 말이야. 아라는 북극여우처럼 생겼고, 너는 너구리를 닮았잖아?"
[…어.]
정령들은 그제야 멈칫거렸다.
서로를 바라보더니 민망한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모르겠어. 정말 농담이 아니라 뒤가 빛으로 반짝거리셨거든.]
[맞아. 감히 가까이 갈 수도 없었고, 그래서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본 적이 없어.]
[우리가 본 거라고는 반짝거리는 왕관뿐이야.]
"반짝이는 왕관이라. 알겠어. 혹시나, 정말 만약에 내가 정령왕을 보게 된다면 너희의 이야기를 해줄게."
[정말?]
"그럼. 물론이지."
하벨은 간단하게 대답한 뒤 용왕의 힘으로 물을 만들어냈다.
찰랑.
그 청아한 소리에 정령들은 '오' 하며 감탄했다.
[진짜 소리가 엄청 좋아.]
정령들은 하벨이 만들어낸 물을 향해 몰려들었다.
[이, 이건 지금 먹으면 안 돼!]
아라가 팔을 쭉 벌리며 마른 침을 삼키자 하벨은 키득거렸다.
누가 누구한테 할 소리인지.
하벨은 나무를 향해 물을 뿌렸다.
순식간에 물을 머금은 나무가 조금 더 자라나며 잎사귀가 갑자기 반짝거렸다.
[와아아아! 나무가 진짜, 엄청 튼튼해졌어! 고마워, 하벨.]
하벨이 만들어낸 물은 정말 몇 번을 봐도 특별했다.
정령들은 또 하벨에게 달려들었다.
하벨이 잠깐 휘청거렸다.
"지금은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갈게. 혹시 다음에도 내가 정령들을 데려오면 말 좀 잘해줘."
[알겠어, 하벨! 당연히 널 엄청 칭찬할 거야!]
[응! 우리가 엄청, 엄청 칭찬할게.]
[조심해서 가! 또 쓰러지지 말고!]
[안녕, 아라! 안녕, 칼리우스! 안녕, 카샬!]
이어 정령들은 나머지 사람에게도 손을 흔들었다.
[안녕! 이 몸이 또 올게!]
"이렇게 반겨줘서 고마워! 안녕!"
아라와 칼리우스가 손을 흔들었고, 카샬은 여전히 반짝거리는 나무를 바라보았다.
"히히. 도련님은 어디서든 쓰러지지 말라는 소리를 듣네. 그런데 내가 봐도 도련님은 너무 자주 쓰러져. 충분히 들을 만하다고 생각해."
칼리우스의 경쾌한 웃음에 하벨은 잠깐 멈칫거렸다.
"자주까지는 아니야. 어쨌든 지금은 괜찮은가 봐?"
"…어. 어?"
그제야 칼리우스는 자신의 상태가 괜찮다는 걸 눈치챘다.
"괜찮아! 엄청 신기해. 이게 다 정령들 덕분인 것 같아."
"다음에는 다른 곳을 산책하듯 돌아도 괜찮겠다, 그렇지?"
"응! 맞아!"
칼리우스는 눈웃음을 지었다.
[아, 맞다.]
정령 중 하나가 카샬을 바라보더니 그에게 다가가 검을 건드렸다.
톡.
정령의 손끝에서 바람이 일어났다.
[너, 이 인간을 괴롭히지 마. 정령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는데 보지 못하는 게 얼마나 괴로운 줄 알아?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그건 아니야.]
곧 카샬의 검에서 족제비를 닮은 정령이 모습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시끄러워! 네가 카샬에 대해 뭘 알아? 아무것도 모르면서. 왜 잘난 척이냐고?]
카샬은 갑자기 몰려오는 바람과 함께 일어나는 꽃향기에 잠깐 멈춰서 뒤를 돌았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무 주변에 흐릿하게나마 자신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무언가가 보였다.
또 정령일까.
알록달록한 색을 띤 그들의 모습에 마치 봄이 찾아온 듯했다.
그 아름다운 광경에 금방이라도 넋을 잃을 것만 같았다.
[흥!]
누군가 콧방귀를 끼는 소리가 들리자 다시금 정령들이 한 번에 사라져버렸다.
'…아.'
카샬은 목구멍까지 치솟는 감정을 느껴야 했다.
"왜 그래?"
하벨의 목소리가 들리자 카샬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도련님."
자신은 절대로 정령을 볼 수 없다는 말에 이미 오래전에 미련을 버리지 않았나.
그런데 그 미련이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발목을 붙잡았다.
만약에 저번도, 이번도 우연이라면.
그렇다면 또 정령을 볼 수 없다는 그 소리와 함께 일어나는 좌절감에서 헤어나올 수 있을까 싶었다.
카샬은 검을 꽉 쥐었다.
* * *
[헤헤.]
아라는 창문에 비치는 자신을 보더니 리본을 자꾸만 만지작거렸다.
"그렇게도 좋아?"
하벨이 묻자 아라는 눈웃음을 한껏 지었다.
[헤헤. 응! 이 몸은 리본이 정말 마음에 들었어! 너무 예뻐!]
"이렇게 장식을 좋아하는 줄 알았으면 진작 사줄 걸 그랬네."
하벨이 미안함을 드러내자 아라는 다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대장! 리본은 금화처럼 꼬리에 숨겨 다니고 싶지 않아! 아, 잠깐만 손 좀 내밀어 줘, 대장.]
아라가 꼬리를 주섬주섬 뒤지자 하벨은 두 손을 내밀었다.
제일 처음 하벨 티에라 방에서 가져왔던 금화 하나, 자신이 사줬던 금화 중 제일 마음에 드는 두 개를 하나씩 떨어트리더니 방긋 웃었다.
[금화다! 헤헤.]
아라가 하벨의 손에 놓인 금화에 뛰어들어서는 뒹굴었다.
"그럼 있잖아, 아라야. 지금도 리본만 둥둥 떠다니는 게 아닐까?"
하벨은 넌지시 카샬을 바라보았다.
금화 위를 뒹굴던 아라도 그대로 멈춰 눈동자를 위로 올려 카샬을 향했다.
"…아뇨. 아쉽게도 리본은 보이질 않습니다."
잠깐 멍하니 있던 카샬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오, 진짜? 이 리본이 안 보이는 거야?]
아라는 두 발로 서서는 다시금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함을 드러냈다.
"…신기하네."
하벨이 슬쩍 아라의 리본을 건드려보자 깜짝 놀랐다.
촉감이 아라의 털과 비슷하지 않은가.
'아라의 털로… 만들어졌다는 건 아니겠지?'
"카샬, 아니 선배님 혹시 무슨 일이 있었어? 아까 정령이 너, 아니 선배님한테 오는 걸 확인했는데?"
칼리우스가 막대 사탕을 문 채로 물었다.
"아무 일도 없으니까, 한가하면 찻잔마다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부터 외워."
카샬이 아공간 주머니에서 두꺼워 보이는 자료를 꺼내자 칼리우스는 곧바로 울상을 지었다.
"그렇지만, 헤레스랑 하는 마법 이야기가 더 재미있는데."
"티에라 가문에 계속 머무르고 싶다며. 그럼 더 열심히 익혀야 할 텐데."
"나, 나 외우는 거 잘해! 엄청 잘해! 오늘 다 외울 수 있어!"
칼리우스는 다급히 자료를 낚아채 열심히 바라보았다.
"카샬."
하벨은 완전히 위아래가 고정된 모습에 카샬을 불렀다.
"예, 도련님."
"너 그러다 나중에 후회한다? 내가 용용이라고 부르지만, 진짜 용이라는 거 잊었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을 누리지 못하면 나중에 후회할 겁니다. 그때 왜 이러지 않았냐고 말입니다."
"그럼 방금 네가 멍하니 생각했던 것도 후회도 하지 않게 잘 판단해. 사실 한 발 내딛는 게 가장 어렵기는 하지."
하벨이 넌지시 꺼내는 말에 카샬은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
"…진짜 독심술 익히시는 거 아닙니까?"
"그게 어떤 건지 나도 궁금하긴 한데? 만약 익힐 수 있다면 배워봐야지."
하벨은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로 다시 자신의 손바닥 위를 뒹구는 아라를 바라보았다.
* * *
"…도련님."
레디나가 하벨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마차에 내려 기지개를 켜고 있던 하벨이 그녀를 보더니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뭘 그렇게 둘둘 말았어? 그게 더 이상한데?"
[맞아. 이 몸이 멀리서 봐도 레디나라는 걸 바로 알겠는데?]
"여기부터는 검은 달의 지역이라 조심해야 해요. 어디에서 쳐다보고 있을지 모른단 말이에요."
레디나는 마을 쪽을 경계했다.
이전부터 티에라 가문 근처에 있는 지부 말고 다른 지부의 위치를 알고 있어도 함부로 덤빌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해야 했기에 간부의 꼬리를 파악하는 게 먼저였지만, 같은 암살자였기에 동선 자체를 알아내는 것부터 일이었다.
"…솔직히 이렇게 갑작스럽게 올 줄은 몰랐어요."
레디나는 조금 전보다 더 목소리를 낮췄다.
왕실에서 자신이 잡은 검은 달 일원의 피를 통해 페트리오에게 지부의 위치와 간부의 동선을 얼추 알아냈기에 모두가 잠이 든 밤에 정확한 동선을 찾으러 돌아다니지 않았는가.
그런데 오늘 이렇게 딱 지부가 있는 마을로 오게 되니 굉장히 기분이 이상했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었다.
하벨이 정령 기사들까지 왕창 끌고 오지 않았는가.
"걱정하지 마. 아직은 우리를 지켜보는 눈은 없으니까."
하벨이 딱 잘라 말하자 레디나는 의아함을 드러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세요?"
"그거야 감이지."
자신감에 찬 하벨의 말에 카샬은 태연하게 온도계를 꺼냈다.
삑.
삐비빅.
"아니, 농담한 거잖아. 지금 정령 기사들과 정령들이 주변에 있는데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놈들이 이곳으로 올 리가 없잖아?"
하벨은 기가 찼다.
마법사 협회에 가려고 도중에 헤어졌던 정령 기사들과 정령들과 합류했다.
"37.7도. 역시, 마차에서 헛소리하실 때부터 알아봤습니다."
카샬의 태연한 목소리에 레디나는 가볍게 웃었고, 주변을 살피고 있던 헤레스가 깜짝 놀랐다.
생각보다 하벨의 열이 높았다.
지금 하벨의 상태는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불안할 정도였다.
"저, 정말요? 마차를 같이 타셨을 때 어떤 이상 증상을 보이셨나요? 아니, 해열제는 드셨어요?"
칼리우스가 그 땅에 강한 트라우마가 있다는 하벨의 말에 자리를 비켜줬지만, 역시 자신이 같이 하벨하고 마차를 탔어야 했는데.
"……."
카샬은 황급히 놀라며 잠깐 침묵을 유지했다.
자신이 마차에서 뭘 했더라.
하벨에게 해열제를 주긴 했던가.
"죄… 송합니다. 제가 해열제를 드렸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큰 실수를 하다니.
카샬은 하벨에게도 헤레스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 사람이 실수도 할 수 있지."
말과 달리 하벨의 한쪽 입꼬리가 가득 올라가 있었다.
"그렇죠. 사람이 어떻게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도련님의 목숨이 달린 일에도 말입니다."
페트리오가 걸어오면서 말했다.
그의 시선이 카샬에게 향해 있었다.
멍청한 놈.
대놓고 비아냥거려도 자신의 실수가 분명했기에 카샬은 이번만큼은 화도 낼 수 없었다.
"방금 네 수장에게 연락해뒀습니다. 저는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페트리오는 티에라 가문 근처를 둘러싼 네 영토에서 복종을 받아낸 네 수장에게 연락하고 오던 참이었다.
"알겠어."
하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련님 혹시 지부가… 많이 큰가요? 만약 크지 않으면 마차에서 쉬시죠."
헤레스는 안경을 올리며 물었다.
그 땅에서 온 뒤에 한 차례 마차를 바꿔탔다.
마차에 티에라 가문을 상징하는 문양, 마름모 속 활짝 핀 꽃무늬를 달고 있었기에 이미 사람들의 눈에 띄고 있었다.
"그것까지는 나도 모르겠는데 적어도 몸은 괜찮아."
하벨은 카샬이 건넨 해열제를 먹고는 활짝 웃었다.
"도련님. 나는 도련님이 지금 뭘 하려고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지금 도련님은 얼굴을 다 드러냈잖아. 엄청 위험한 거 아니야?"
일부로 후드로 눌러 쓴 칼리우스가 하벨의 얼굴을 빤히 보며 물었다.
매번 뭘 할 때마다 달 무늬가 들어간 가면을 쓰지 않았는가.
"아니야. 오늘은 인사 같은 거야. 얼추 처음 만나는 건데 어떤지는 확인해 봐야지 않겠어?"
"확인한다고?"
"그래. 시비를 제대로 걸려면 이 얼굴이 필요하니까."
하벨은 장난스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