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150화 (150/415)

150화. 하나 더(3)

* * *

* * *

"…하."

페트리오는 연락용 아이템을 바라보았다.

지금쯤 하벨이 얼마나 참담할까.

'아라 님은 괜찮으시려나.'

페트리오는 시야 안에서 벌레처럼 날아다니는 적들의 마법들이 참 거슬렸다.

"아니, 그냥 다 죽이면 안 됩니까?"

페트리오의 호위인 타냐가 공중에서 터지는 불꽃을 베어버리며 물었다.

짜증이 났다.

조금 전, 뒷길을 통해 적들의 비밀 장소에 호기롭게 쳐들어가는 것까지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이대로 쓸어버리면 되지 않을까 싶을 때, 페트리오가 갑자기 농성해야 한다며 비상시에 쓸 거라 아껴뒀던 마법 물품을 사용해 돌벽을 쌓아 올렸다.

―지원이 오면 절대 안 돼.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테니까. 도련님께서도 원하시지 않을 테고.

그 결과 돌벽과 천장을 잇는 그 작은 틈만 놔둔 채 적들과 소모전이 이어졌다.

이게 싸움인지 뭔지 헷갈렸지만, 놀랍게도 그 틈 사이로도 부상자가 나왔고 돌벽에 나온 균열이 점점 커지며 밀리고 있는 상태였다.

"솔직히 소모전으로는 우리가 불리하잖습니까."

"안 돼. 기다리라고 하셨으니 기다려야지."

페트리오는 또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체 얼마나요? 슬슬 부상자가 나오고 있는 거 안 보여요?"

타냐 자신의 눈에는 진열마저 무너지는 게 보였다.

가뜩이나 크라마의 부하인 게론 일행이 마법사라는 사실을 숨기고자 마법 물품을 낭비하고 있는 모습도 우습거늘.

"타냐. 초조해지지 마. 마법 물품보다 사람 목숨이 더 값비싼 법이니."

페트리오의 잔잔한 목소리에 타냐는 기가 찼다.

"진짜 엄청 변하셨네요. 사람 목숨을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보다 하찮게 보셨던 분이."

"네가 소모전이라고 비아냥거리지만, 애초에 저것들이 다 어디에서 나왔는지 잊었어?"

페트리오의 손가락이 허공을 떠돌다 타냐의 검으로 향했다.

지금 날아가고 있는 폭탄도, 마법을 잠깐 유지해주는 마법 물품들도, 그리고 타냐가 가진 검마저도 죄다 하벨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아. 그럼 기다려야죠."

타냐는 바로 긍정하며 초조함을 버렸다.

그녀가 방실방실 웃다가 눈동자를 위로 올렸다.

"문득 생각해봤는데요."

"뭘?"

"제 월급도 그분 주머니에서 나오는 거 아닙니까?"

"…설마 아니지, 타냐?"

다음 수를 생각하던 페트리오가 고개를 들었다.

"뭐, 비슷하긴 합니다. 그나마 제 의리가 깊어서 다행인 줄 아십시오."

타냐는 낄낄거리려다 말고 눈을 크게 떴다.

털이 곤두섰다.

"…뭐가 오는데요?"

불쾌하다기보다는 웅장하고 거대하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

페트리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었다.

"저, 저게 뭐야!"

벽 안쪽으로 거침없이 쏘아내던 마법이 일제히 멈추며 적들이 소리쳤다.

당황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여기서… 파도가 몰려온다고? 파도가?"

"지원! 지원을 불러야 해! 망할!"

적들이 꺼내는 말에 귀를 기울인 타냐가 깜짝 놀라며 페트리오를 보았다.

"지금 들으셨어요?"

"아니. 지원밖에 못 들었는데?"

"귀 열고 제대로 들어보세요. 파도가 몰려온대요."

"…이, 쓰레기 같은 카샬."

페트리오가 갑자기 이를 갈자 타냐는 눈을 크게 떴다.

평소에 카샬을 싫어하는 줄은 알고 있는데 저걸 보고 그의 이름을 꺼낼 줄은 몰랐다.

"그렇게도 카샬 씨가 싫어요?"

"그래. 생각만으로 이가 갈리네."

파도라는 말을 듣자마자 단번에 떠오르는 사람은 하벨뿐이었다.

'도련님께서 지금 힘을 사용하고 계시잖아. 뭐? 제대로 말릴 수 있다고? 개소리하고 있네.'

페트리오는 신경질을 담아 소리쳤다.

"전부 뒤로 물러나!"

"뒤로, 뒤로."

게론은 페트리오의 지시에 자연스럽게 자신의 동료들을 물렸다.

이렇게 적과 소모전으로 대치하기 전, 페트리오는 뒷길에 몰래 숨어들자마자 곧바로 두 조로 나누길 요청했다.

오늘 만났기에 당연히 지휘체계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상태라는 건 인정하지만, 게론은 황당했다.

당연히 반대했고, 목소리에 힘을 주려던 차 페트리오는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크라마한테 받은 임시 권리 위임장을 내밀었다.

―이런 멍청한 크라마.

당장 그 말이 튀어나왔지만, 게론 자신은 페트리오가 꺼내는 말에 점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된 건지 적을 한 명 붙잡아 심문한 것치고 이 비밀 통로도, 이 장소의 구조마저도 다 파악하고 있었다.

뭐 어쩌겠는가. 일단 페트리오에게 맡겼다.

그때부터 페트리오는 날개를 단 듯 움직였다.

한 조가 적들의 동태를 살필 동안 다른 조들은 현재 상황을 기록, 미리 준비한 사진기를 넘겨 살피도록 하지 않았던가.

심지어 자료들을 바꿔치기할 만큼 치밀함에 게론은 페트리오를 이 순간만큼은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예사롭지 않았다. 땅의 진동에서부터 요란함을 느꼈다.

"뭐가 오는 겁니까?"

게론이 묻자, 페트리오는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파도. 파도가 오고 있어."

"파도요……?"

게론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하벨 옆에서 그를 계속 지켜보던 페트리오는 한 가지 마음먹은 게 있었다.

'도련님, 제발.'

하벨이 하려는 그 어떤 행동도 함부로 예측하지 말자고.

'적당히 좀 하십시오…!'

콰콰콰콱!

거대한 게 다가오고 있다는 본능적인 압박감과 더불어 전체를 휩쓰는 소리가 들려왔다.

적들의 비명도, 요란하게 울리던 소리마저 잡아먹힌 와중에 침묵이 흘렀다.

꿀꺽.

페트리오는 하벨이 저지른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른침이 저절로 삼켜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쩍.

쩌억.

굳건했던 벽에 균열이 빠르게 일어나며 허망할 정도로 와르르 무너졌다.

"……!"

페트리오의 눈이 커졌다.

찰랑.

가볍게 몸을 흔들며 벽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건 물이었다.

평화로워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내부에서는 회오리가 강하게 돌고 있었다.

페트리오와 게론의 사람들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미… 쳤다."

천장까지 닿아 벽을 막고, 적들을 가둘 정도로 거대한 물이라니.

이토록 많은 물은 정령사도 못 뽑아낼 텐데.

이게 가능하다니.

"…하악! 콜록, 콜록!"

필사적으로 물살을 뚫고 바닥으로 떨어진 마법사는 물을 쏟아내며 기침하기 바빴다.

조금 전보다 더 깊은 침묵이 내려앉자 물에서 빠져나온, 적들이 내뱉는 숨소리와 거친 기침만 들려왔다.

"뭐 하는데?"

누군가 침묵을 깨부쉈다.

"이 병신아."

스겅.

페트리오는 이어지는 말에 정신을 차렸다.

카샬이었다.

재수 없는 카샬, 저 물 너머에서 말하고 있었다.

"병신은 너고."

페트리오는 그제야 무방비 상태가 된 적을 향해 다가가 등에 쑤셔 박았다.

푹!

선명한 소리와 함께 페트리오는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외쳤다.

"죽여라……!"

하벨이 만든 기회였다. 오로지 자신만 희생한 힘이 아닌가.

'…잠깐만.'

페트리오는 순간 멈칫거렸다.

하벨에게 이만한 물을 만들 힘은 없을 텐데.

가장 중요한 걸 놓쳤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타냐."

그 생각과 함께 페트리오 자신을 급습한 두려움에 다급히 타냐를 불렀다.

지금 하벨 꼴이 얼마나 엉망일지.

"잠깐만 길 좀 뚫어줘."

"저… 물을요?"

타냐가 어리둥절하며 물을 가리켰다.

물은 아주 깨끗하며 신선했지만, 저기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게 보이지 않는가.

"…제정신이세요?"

자신에게 항상 검술 실력을 50%만 내보이라고 말한 사람은 페트리오가 아닌가.

"아니. 그러니까 베어내."

페트리오는 다시금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제정신이 아닌 건 알고 있다니 다행이네요. 못할 건 없지만, 뒷수습은 알아서 하세요."

타냐는 검 끝을 허리춤 뒤에 놓은 뒤에 당장이라도 몸이 튀어나갈 기세로 움츠렸다.

그녀의 눈빛에 빛이 어릴 때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좀도둑."

물이 순간 반으로 갈라지며 하벨이 유유히 걸어나왔다.

"…와."

타냐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이렇게 하벨을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곧 실망감이 어렸다.

달무늬가 가득 박힌 저 가면은 대체 뭐람.

가슴에서 크게 요동치는 실망감은 어쩔 수 없었다.

'실물이 보고 싶은데.'

쉬익!

곧 검을 휘두르는 소리에 타냐의 시선이 꽃무늬 가면을 쓴 한 남자에게 쏠렸다.

매끄러운 검의 궤적을 따라 하벨이 걸어가는 그 길에 적들의 핏방울이 뿌려졌다.

'…하지만 피가 하벨에게 하나도 닿지 않아.'

"워어!"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타냐의 검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그 소리가 페트리오와 가까웠다.

대체 누가.

까앙!

타냐의 검과 누군가의 단검이 부딪쳤다.

"어라? 이런 환영은 좀 반가운데요?"

누군가가 행복해하며 말했다.

"웬 놈이냐."

"에이, 이러면 섭섭한데요."

구름 문양을 한 여성이 웃는다고 생각한 순간, 단검에서 일어난 바람에 단숨에 힘이 밀려 타냐 자신이 쥔 검날이 자신의 목을 노렸다.

"…헛."

타냐가 허파에 바람을 집어넣는 사이, 가면을 쓴 여성은 단검을 집어넣었다.

"나예요, 나."

"……."

타냐는 갑자기 손을 내미는 모습에 빤히 바라보았다.

"레디나잖아요. 우리 살짝 스치듯 봤는데요."

레디나가 속삭이자 그제야 타냐는 검을 넣었다.

"멋졌습니다."

"뭘요. 저도 재미있었는데요? 역시 목숨을 내놓아야 짜릿하지 않나요?"

타냐의 칭찬에 레디나는 배시시 웃다 고개를 돌렸다.

하벨을 바라보며 슬쩍 페트리오에게 하소연하듯 말을 꺼냈다.

"무슨 상황인지 감이 오죠?"

"…예. 감이 오네요."

최악의 상황보다 더 최악을 가져온 하벨의 저 당당한 모습에 페트리오는 잠깐 얼이 빠졌다.

"좀도둑. 왜 아직도 얼이 빠져 있어?"

하벨의 목소리가 들리자 페트리오는 그 말을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그럼. 괜찮고말고."

하벨은 살짝 고양된 듯 자신감에 넘치는 말과 함께 검지를 들었다.

불순물이 차오르려고 할 때쯤, 정령들에게 차례대로 받아낸 정령수가 불순물을 녹아내렸기에 잠깐잠깐 통증만 올라올 뿐이었다.

"이 개새끼들아. 네놈들이 죽는 이유는 하나다."

하벨이 꺼내는 무거운 말에 물살마저 소리를 죽이듯 그의 목소리만 선명하게 들려왔다.

"사람으로서 사람의 도리를 저버렸기 때문이지."

자신이 제일 싫어하는 행동.

저들의 모든 것이 거슬렸다.

"…달님. 진짜 괜찮습니까?"

페트리오가 다시 물어보았기에 하벨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는 괜찮다.

한 번에 찌르는 고통이 아니었기에 정말로 참을 만했다.

순환의 길에 생긴 4개의 완전한 막과 아직은 얇은 실 덕에 여유도 있었고.

하벨은 이 상황과 별개로 신기함을 느꼈다.

지금까지 정화제를 만들 때만 정령들의 힘을 받아봤지 이렇게 공격을 하고자 받아본 건 처음이었다.

여러 개의 정령수가 섞일수록 더 많은 힘을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서 다행이다 싶었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뻔했네.'

하벨은 씩 웃었다.

빙글 돌아가는 하벨의 손가락을 따라 물을 더 빨리 회전했다.

거센 물살 소리에 하벨은 손가락을 아래로 움직였다.

그대로 물이 맨 위에서부터 바닥으로 고개를 처박았다.

드드드득!

거친 수압과 함께 바닥이 파여버렸고, 하벨은 물만 가져와 다시금 놈들의 위에 쏟아버렸다.

하벨이 외부로 물이 흐르지 않게 막았기에 벽에 부딪힌 듯 자연스럽게 거친 물살이 일어났다.

'이 맛이지.'

하벨은 자신과 연결되어 있지 않지만, 모처럼 시원한 물살에 즐거웠다.

용왕의 힘도 저렇게 다룰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면 좋을 텐데.

[대장, 대장! 이제 안 돼! 어서 없애!]

하벨이 손가락을 또 까닥거리자 아라가 하벨의 가면으로 쭈우욱 내려와 가볍게 두드렸다.

[지금 정화 장치에 빛이 나고 있어!]

'…벌써?'

하벨은 살짝 당황하며 물을 지웠다.

[이제 물보라는 끝이야? 한 번 더 해줬으면 했는데.]

정령들이 아쉬움을 드러내며 정령수를 멈추려고 하자 아라가 다급히 앞발을 흔들었다.

[잠깐만, 대장한테 정령수를 넣는 걸 멈추지 말아줘. 지금 멈추면 큰일 난단 말이야.]

[크, 큰일이 난다고?]

[그럼 안 되지. 안 멈출게. 약속해.]

"…달님께서 괜찮을 리가 있겠습니까?"

뒤에서 들리는 헤레스의 목소리에 하벨은 흠칫거렸다.

"괜찮지 않습니다. 절대로 괜찮지 않으니 속지 마세요."

헤레스는 말을 끝내자마자 함께 숨을 참았다.

하벨이 반사적으로 놀라고 있다는 건 상태가 좋지 않다는 신호와 같았다.

'…어서 빨리 끝내야 해.'

헤레스는 미리 준비해온 수십 개의 칼을 움직여 바닥에 납작 붙은 놈들의 등에 동시에 꽂아버렸다.

푸우욱!

신체를 꿰뚫는 그 소리는 마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와 비슷하게 들려와 게론과 그 일행들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허."

저토록 많은 검을 동시에 다룬다는 것 자체가 마법사로서 대단한 일이었다.

쨍!

"으어억!"

마법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들리자 게론 일행은 기겁했다.

이 거대한 마나 파장은 대체 누구의 것인지.

그제야 하벨의 뒤에 선, 햇님 문양이 박힌 가면을 쓴 사람이 보였다.

"왜 가만히 있는데? 구경 왔어?"

카샬이 비명을 지르는 마법사의 목을 위에서 아래로 꿰뚫어버리며 게론 일행과 페트리오의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뒤처리 안 하고 뭐 하냐?"

"…예!"

살벌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멈춰 있던 그들이 그제야 움직였다.

하벨이 페트리오에게 걸어오자 페트리오는 아예 뛰어 하벨에게 다가갔다.

"제가 가겠습니다."

이제 곧 후유증이 찾아올 때가 아닌가.

"괜… 아니, 타냐."

"…갈게요."

자리를 물리라는 거겠지.

오늘에서야 하벨 티에라의 얼굴을 제대로 보나 싶었는데.

타냐는 혀를 차며 부하들을 향해 검을 까닥거렸다.

"죽이러 가자."

"예, 누님!"

타냐가 움직이자 하벨이 입을 열었다.

"좀도둑."

"말씀하지 마십시오."

페트리오가 주변을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헤레스가 하벨에게 다가오자 그제야 안도했다.

"오면서 눈에 보이는 건 다 처리했어. 그런데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까 어서 처리해야겠는데."

하벨은 헤레스의 따가운 눈초리에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직은 정령수가 멈추질 않았으니 살 만했다.

"알겠습니다, 알겠으니 말씀을 멈춰주십시오. 방금 타냐를 보낸 거 보셨잖습니까."

페트리오는 하벨을 달래다 뒤늦게 걸어오는 카샬을 보며 살기를 드러냈다.

저 망할 놈.

얼굴을 보니 한 대 갈기고 싶을 정도였다.

"자료는 찾았어?"

하벨이 또 입을 열었다.

설마 정화제가 바로 마법사 협회의 자금줄일지는 몰랐다.

마법 물품이야 왕실과 협약이라는 제약이 걸려 손을 쓰되 그 수치가 턱없이 낮겠지만, 정화제는 아니었다.

정화제를 관리하는 건 티에라 가문이었다.

어디에서 구멍이 뚫렸는지 알아야 했다.

페트리오는 자신의 이마를 손으로 붙잡았다.

"…일단, 치료부터 받으시죠. 아니, 자리를 옮기는 게 먼저일까요?"

"자리를 옮기는 게 먼저입니다."

헤레스가 꺼내는 말에 페트리오는 하벨을 향해 입을 열었다.

"걸으실 수 있습니까?"

"걸을 수 있는데 자료는 찾았어? 나한테 지금 이게 더 중요해."

하벨은 지금 밀려드는 답답함을 해결하는 게 먼저였다.

이런 시설이 하나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는가.

"일단 다행스럽게도 여기뿐입니다."

페트리오는 굽히지 않는 하벨의 고집에 일단 진압부터 했다.

"그럼 여기를 파괴하기 전에 자료를 찾는 게 먼저네."

"자료는 이미 찾았습니다. 그러니 이제 자리를 옮기시죠."

후.

우습게도 페트리오가 꺼낸 저 말에 랜턴의 불빛이 꺼졌다.

정말이라고, 사실이라고 그렇게 주장하는 걸까.

적어도 지금까지 저 결과에 거짓은 없었으니 하벨은 살짝 안도하며 다른 걸 언급했다.

"아직 정령들이 있을지도 몰라."

"…이봐, 좀도둑. 그냥 양쪽에서 포박하자. 어때?"

여전히 고집을 부리는 하벨을 보자 카샬이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페트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처럼 좋은 생각이네."

"제가 묶을까요?"

헤레스까지 껴들었다.

"좀도둑."

하벨이 불만을 담아 페트리오에게 한 발자국 다가가다 말고 그대로 멈췄다.

갑자기 정령수가 뚝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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