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하나 더(2)
* * *
[…밝은 하늘?]
정령들은 다시금 울먹거렸다.
하늘도.
바람도.
자연의 모든 것들이 그리웠다.
[정말… 갈 수 있어?]
정령들은 말을 꺼냈다.
저 작은 존재에게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응응. 이 몸이 약속할게.]
아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정령들에게 다가가 하나씩 쓰다듬어주었다.
[…으흑.]
정령들은 그 다정하고 말랑한 손길에 또 울음을 터트렸다.
[응.]
[으응! 보고 싶어! 하늘이 너무 보고 싶어어…!]
펑펑 쏟아내는 눈물을 따라 하벨은 다시금 천장을 바라보았다.
불길을 따라 부서지는 부정한 것들을 보며 아공간 주머니에서 연락용 아이템을 꺼냈다.
"도련님."
카샬이 하벨을 불렀다.
"정령사는 어떻게 할까요?"
"죽여주는 게 맞겠지."
하벨은 말을 꺼냈다.
정령사들은 이미 가망이 없었다.
저들의 눈동자는 죽어버렸고, 겨우 목숨만 유지한 채로 숨만 쉬는 게 전부였다.
이미 자신을 놓아버렸기에 이대로 보내주는 게 최선이었다.
"일단… 몇 놈만 보내주겠습니다. 좀도둑이 정령사를 데려갔는지 아닌지 모르니까요."
카샬은 찝찝함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도 저들을 죽여야 한다는 건 알지만, 정령사들은 아직 어떤 목소리도 내지 못했다.
적어도 살려달라고 울부짖었으면 훨씬 나았을 텐데.
무슨 마법이나 약물을 사용한 건지.
카샬은 검을 뽑고 휘둘렀다.
샥.
검이 정령사를 삶을 거둬주었다.
저렇게 모든 걸 놓았다고 해도 분명 아픔을 느꼈을 테지만, 정령사의 입꼬리가 어쩐지 올라간 것처럼 보였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찝찝한 순간이 아닐까 싶었다.
"페트리오."
하벨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페트리오의 이름을 불렀다.
이름이 불렸기 때문일까, 페트리오는 긴장하고 있었다.
<혹시… 지금 도착하셨습니까?>
"그래."
<보셨습니까……?>
페트리오의 목소리에 이미 미안함이 섞여 있었다.
한창 전투가 벌어지는지 연락용 아이템 너머로 요란스러운 소리도 같이 들려왔다.
"못 봤을 리가 없지."
<달님께서 도착하기 전까지 어떻게든 끝내려고 했는데, 마법사들의 저항이 제법 거셌습니다. 죄송합니다.>
"지금 뒷길에 모여 있는 거야?"
화륵!
하벨은 한 번 더 정령수로 불꽃을 내뿜었다.
저 부정한 것들이 매달려 있는 이상 정령들은 움직일 수 없을 테지.
<맞습니다. 아마 처음에 입구 쪽도 경계했겠지만, 제가 일부러 뒷길 쪽으로 몰리도록 입구는 아예 건드리지도 않았고, 혹시 몰라 게론 일행에게도 마법이 아닌 마법 물품을 사용하는 척 꾸미도록 지시했습니다.>
"잘했어. 입구 쪽으로 들어오려면 마나가 필요하다고 하더라고. 마법사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했겠지. 그래도 지원을 요청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네."
<그렇습니다. 심리적인 우위를 놈들이 느끼도록 했지만, 저도 정확한 건 모르겠습니다.>
"그럼 우리가 뒤쪽으로 치고 갈 테니까 계속 시선을 끌고 있어."
<알겠습니다. 지금 달님께서 계시는 곳은 입구입니다. 뒷길에 사람이 몰린 만큼 중심부로 갈수록 마법사들이 포진해 있을 겁니다.>
"페트리오."
<예.>
"천장에 달린 부정한 것들부터 치워."
<…설마 했는데 그 꺼림칙한 게 실험체가 아니라 부정한 것일 줄이야. 으음.>
페트리오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몇 번이나 침음을 흘리다 겨우 말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네가 왜? 네가 그런 것도 아닌데."
<그냥 죄송합니다. 어쨌든, 이미 없앴으니 안심하십시오.>
"그래. 고마워."
하벨은 그대로 연락을 끊고 연락용 아이템을 잠깐 세게 쥐었다.
다시금 속이 쓰라렸다.
하지만 하벨은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귀가 좋으니까 들었겠지?"
"들었습니다. 진짜 역겹네요."
카샬은 목소리에 제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말했다.
"나도 들었어. 이건……. 이건."
칼리우스는 더는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찬찬히 들어오는 이곳의 풍경은 몇 번이나 눈을 깜박거려도 바뀌질 않았다.
사람이 어떻게 사람한테 저렇게 잔인해질 수 있을까.
이게 현실인 걸까.
자신이 지금까지 보았던 현실이 너무도 좁다는 게 느껴졌다.
"괜찮겠어, 칼리우스?"
하벨은 칼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자신이야 온갖 역겨운 일들을 다 봤다고 하지만, 칼리우스와 아라는 아니었다.
하벨은 일부러 아라의 시야를 물보라로 막고 있지 않은가.
"버틸 수 없으면 나가도 돼. 괜찮아. 너한테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하벨은 칼리우스를 다독였다.
"울고 싶은데. 그런데 이것도……."
칼리우스는 손으로 가면을 가렸다가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이것도 내가 감당해야 하는 거잖아? 세상의 수호자로서."
"아직은 안 그래도 돼."
하벨은 억지로 어른의 단계를 밟아가려는 칼리우스를 말렸다.
왜 벌써 그래야 하는가.
"안 그래도 되는 거라고……?"
칼리우스는 의문을 드러냈다.
가면에 가려져 있어도 하벨은 얼빠진 칼리우스의 표정이 금세 떠올랐다.
"당연하지. 누가 억지로 그러래? 그럴 필요 없어."
"그래. 너는 아직 실습 단계니까, 뒤에서 보고 있어야지."
카샬까지 거들자 칼리우스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뒤에서… 따라가도 돼?"
"따라오고 싶어?"
하벨은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응. 따라가고 싶어."
"그래. 그러면 따라와. 내 뒤에 말이야."
하벨은 다시 가면을 착용했다.
하벨이 한 걸음 내디디자 카샬이 그의 앞에 섰다.
"잠시만요, 도련님. 제가 앞장섭니다. 그건 알아두십시오."
"…저도 갑니다."
헤레스의 목소리가 들리자 하벨은 바로 발걸음을 멈춰 몸을 돌렸다.
"헤레스, 너 방금 기절하기 직전이었잖아?"
"그러니까요. 이 언니도 고집이 장난 아니에요."
레디나는 헤레스 뒤에서 걸어오며 고개를 살짝 절레절레 흔들었다.
"기절은 하지 않습니다. 지금 저보다 도련님께서 더 위험한 것 같고요. 어쨌든 죄송하지만, 한 번만 다시 말씀해주세요."
헤레스는 가면을 벗고 자신의 눈을 드러냈다.
의지가 강하게 묻어 있자 하벨은 레디나를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대체 그 짧은 시간에 뭘 했길래 그래?"
"저는, 그, 음, 위로 같은 거 해본 적이 없어서. 그냥, 어, 언니의 등을 토닥여주고, 이렇게 울 바에야 그냥 다 죽여버리자고 말했죠."
놀람이 가득한 하벨의 눈빛에 레디나는 어색한 몸짓을 했다.
누가 봐도 레디나다운 말인데.
"아뇨. 마침 저한테 딱 맞는 말이었어요. 울면 뭐하겠어요. 여기서 질질 짜봤자 달라지는 건 없어요. 이미 행동하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요."
헤레스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크라마는 자신보다 이미 한참 전부터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도 그랬어야 했는데.
"고민을 해봤자, 복잡하게 생각해봤자 시간 죽이기밖에 더 되겠어요? 더는 아무것도 못 하게 놈들을 죽여버리면 되는 거였어요."
헤레스의 눈꼬리가 날카로워지자 하벨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헤레스는 마법으로 하벨의 망토를 걷었다.
"…그러니까 도련님."
보글보글.
소리를 죽인 정화 장치에서 거품이 거세게 올라왔다.
"도련님도 말씀을 해주셔야죠. 불이 들어오기 직전이네요."
"그러니까……."
"놀라지 않으셔도 돼요. 이것도 제가 죄송한 일입니다. 진작 알아봤어야 했는데 정신을 다른 곳에 두고 있었어요."
헤레스는 하벨에게 주사를 놓았다.
"제가 도련님께 말씀드린 건 전부 다 기억해주셨으면 해요. 저도 도련님께서 제게 해주신 말씀을 다 기억하고 있어요."
"어깨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갔는데?"
"좀 그래 보이나요?"
"많이. 눈빛도 매섭고. 그러다가 금방 지칠 텐데. 좀 길게 달려야 하잖아."
"눈빛은 지금 제가 안경을 벗어서 그래요.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죠."
헤레스가 웃음을 가볍게 터트리자 하벨 역시 덩달아 웃었다.
"제게 기회를 주세요. 지치지 않게 달릴게요."
목소리에 힘을 가득 준 헤레스는 하벨을 빤히 바라보았다.
"따라오겠다는 사람은 안 말려. 책임은 알아서 지는 건 잊지 말고."
하벨은 말과 달리 저들의 목숨만은 어떻게든 안고 갈 생각이었다.
이곳에 따라온 건 저들의 선택이었으나, 그 선택에 꼭 의지만이 뒤섞이지 않았을 테니까.
타탓.
위에서 튄 불꽃이 아래로 내려왔다.
부정한 것들이 타버린 만큼 방의 불길도 가라앉고 있었다.
"너희도 같이 갈래?"
하벨은 정령들에게 제안했다.
아마 지금쯤 훨씬 자유로울 테지.
[우리도?]
정령들은 천천히 움직였다.
"그래. 하늘을 보고 싶다며?"
하벨이 천천히 손을 내밀자 정령들은 다가오다 말고 멈칫거렸다.
[대장 손은 더럽지 않아. 이 몸이 잘 알고 있어!]
아라가 하벨에게 다가가 그의 손에 제 몸을 비볐다.
헤헤.
아라는 하벨의 다정한 손길에 행복함을 드러냈다.
정령들이 망설이던 사이 그중 한 정령이 다가가 하벨의 손가락에 조심스레 앞발을 내밀었다.
아라의 행복한 모습은 마법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 즐거워 보여 용기가 났다.
찌르르.
금세 교감이 느껴지자 정령의 눈이 커졌다.
[…있잖아.]
정령이 입을 열었다.
"그래."
[정령수를… 한 번만 넣어봐도 돼.]
정령은 여전히 하벨을 경계하며 그의 진심을 알기 위한 마지막 방법을 사용하고자 했다.
"한 번이 아니라 다음에 또 넣어봐도 되는데?"
장난이 어린 하벨의 말에 정령은 움찔거리다 아주 조심스레 정령수를 넣었다.
갇혀 있었기 때문인지, 공포에 질린 일이 많아서인지 몰라도 정령수의 양이 일정하게 들어오지 않았고, 정령수를 넣는 것마저 괴로워 보였다.
[…너, 이상해.]
정령은 얼른 정령수를 끊어버리며 기겁했다.
[왜, 왜 그래? 우릴 속인 거야?]
그 반응에 뒤에서 빤히 바라보고 있던 정령들이 숙덕거렸다.
[아니. 속인 적 없어. 우리를… 우리를 속이지 않았어!]
정령은 그렇게 소리치자마자 하벨에게 달려들었다.
[으헝헝!]
안도감인지 몰라도 정령은 하벨의 품에서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진짜, 끅, 우리를 도우려고 와줬어! 정말로…!]
끝없는 두려움 속에 누군가 자신을 다정히 바라보는 건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고마웠다.
사실은 누가 자신을 구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왜 없었겠는가.
한 번 터진 울음의 바다가 정령들에게 퍼지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다들 하벨에게 매달렸고, 아라는 하벨의 머리로 밀려났다.
"…도련님 근처에 정령님들이 있는 겁니까?"
카샬은 점점 하벨 근처에 짙어진 꽃향기에 긴가민가하며 물었다.
"맞아. 이제 가자."
하벨은 정령들이 매달린 자신의 모습을 보며 앞으로 나아갔다.
"안 무거워?"
칼리우스가 망토처럼 정령들을 매단 하벨을 보며 물었다.
"전혀."
오히려 하벨은 너무도 서럽게 울부짖는 정령들의 모습이 가여웠고, 이렇게 자신을 믿어주어 고마울 뿐이었다.
"도련님. 그럼 그냥 보이는 족족 다 죽이면 되는 거죠?"
하벨을 바라보고 있던 레디나가 단검을 빙그르르 돌리며 물었다.
"그래. 네가 제일 잘하는 걸 하면 돼."
"네. 그럼 먼저 움직일게요. 딱 뒤통수치기 좋아서요."
레디나는 연기에 휩싸였다.
하벨 앞으로 카샬이, 카샬 옆에 헤레스가 섰다.
"제 뒤에 서세요, 도련님. 도련님께서 힘을 쓸수록 부작용이 뒤따르는 걸 봤어요. 여기서 몇 번 더 쓰시면 진짜 쓰러지십니다."
헤레스는 걱정을 담아 경고했다.
"그리고… 제 마법이 아군을 가리지 않아 좀 그래요. 아직 미숙합니다."
"좋아. 나는 상관없으니까."
하벨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뒤로 섰다.
어차피 자신이 사용하는 힘은 원거리도 가능했으니.
자신의 뒤에 칼리우스가 천천히 따라왔다.
통로로 보이는 곳 너머를 걸어가자 여기저기 가득 켠 빛이 보여 환했다.
"…빌어먹을. 지금이라도 지원을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아직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하잖아."
"아니, 아무리 마법사들이 없다는 판단을 내려도 그렇지 입구를 안 지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야?"
"곧 없앨 수 있으니 소란 떨지 말고 뒷길이나 막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는데 어쩌라는 건데. 그렇게 꼬우면 네가 가서 말하든지."
"너희 둘, 입 좀 닥쳐. 그래서 저쪽에 우리 중에서 뛰어난 놈들로 보냈잖아. 그놈들이 수상한 게 있으면 신호도 안 보내겠어? 애초에 입구에 깔아 놓은 마법 함정이 몇 개인데? 그걸 푸려면 우리가 해도 반나절은 걸려, 병신들아."
"병신이라니. 병신은 너……."
마법사들이 떠드는 소리가 잠깐 멈췄다.
툭.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르르.
곧 물건 하나가 땅을 굴렀다.
"이런, 시불. 간 떨어지게. 누가 물건 관리 저따위로 했어?"
실컷 떠드는 세 명의 마법사를 보던 다른 마법사가 화를 내며 걸어왔다.
툭.
또다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에 마법사는 뭔가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안녕."
레디나가 시체가 된 마법사를 던지며 확인하러 온 마법사에게 인사했다.
"…어?"
얼떨결에 시체를 받은 마법사는 그대로 멍청한 표정을 했다.
적이 나타났다고 말해야 하지만, 이상하게 입이 움직이질 않았다.
"안녕."
처음과 다른 의미로 쓰이는 저 말에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이미 강렬한 통증이 가슴을 꿰뚫었다.
털썩!
누군가 쓰러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자 마법사들이 그제야 수상함을 눈치채 경계했다.
"뭔가 있다……."
하지만 헤레스는 이미 움직였다.
스겅.
마법사들이 어설프게나마 사용하기 위해 허리춤에 찬 검들이 갑자기 허공을 날았다.
"적……."
푸욱!
동시에 움직인 검이 놈들의 목을 꿰뚫어버려 입을 막아버렸다.
탁.
타탁!
카샬이 헤레스와 레디나를 스치며 제일 끝쪽에 서 있던 두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
통로로 달려가던 두 사람의 다리가 날카로운 날붙이 잘리고, 앞으로 꼬꾸라졌다.
넘어지는 소리도 나지 않았고, 놈들은 소리를 지르지 못했다.
"……!"
카샬이 기겁하며 당장 하벨을 바라보았다.
몽글몽글.
마치 예상했다는 듯 두 사람 밑에 잔디가 자라 있었고, 얼굴을 감싼 물 때문에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오고 있었다.
"쉿."
하벨은 가볍게 손가락을 올리며 다른 손으로 천장에 매달린 시체들을 고정하는 밧줄을 바람으로 잘라버렸다.
푹.
자신의 근처에 자라난 잔디에 살포시 떨어진 부정한 것들을 향해 불꽃마저 던졌다.
[아이참! 대장은 지금 그러면 안 된다구!]
아라가 답답함에 하벨의 머리카락을 살짝 당겼다.
"맞아.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어."
칼리우스마저 하벨의 망토를 살짝 잡아당겼다.
"나도 알아."
하벨은 정령들을 향해 다가갔다.
이 정도는 칼리우스가 할 수 있다는 걸 알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 장소에 있는 정령들의 경계심을 풀기 어려웠다.
콰직!
칼리우스가 문을 비틀어 감옥 문을 열자 하벨이 안으로 들어가 정령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
정령들은 구석에 몰려 하벨을 경계하면서도 그의 몸에 매달린 정령들을 바라보았다.
이상했다.
왜 모르는 걸까. 저 남자에게 이다지도 불쾌한 냄새까지 풍기는데.
[…너희들.]
[걱정하지 마. 하벨이 구해줬어! 우리랑 같이 가자.]
하벨에게 매달린 정령들까지 그에게 떨어져 손을 내밀자 구석에 몰려 있던 정령들이 찬찬히 두려움을 걷으며 눈앞에 놓인 상황만을 바라보았다.
이전에도 자신들을 구해주러 온 정령사들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같이 이곳에 갇혀있던 정령들이 이렇게도 환하게 웃었던 적이 있을까.
[응! 같이 갈래!]
[같이 가고 싶어!]
구석에 몰려 있던 정령들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얼굴로 달려왔다.
그들이 서로 얼싸안는 모습을 보던 하벨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정령들을 살살 긁었다.
"있잖아. 생각해보면 되게 억울하잖아."
"도련님, 하지 마십시오."
카샬은 하벨을 자중시켰지만, 그의 입은 여전히 나불거렸다.
"이참에 나랑 같이 아주 거센 물보라를 일으킬래? 어때?"
[물… 보라?]
정령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자 하벨은 해맑게 대답했다.
"응. 물보라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