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하나 더
* * *
헤레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생각으로 해서는 안 되는 연구를 했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의 자신은 자신이 아니라고 말해도 어차피 변명일 뿐이었다.
이미 일은 벌어졌으니.
놈들이 물체를 넘어 바람마저 잡을 수 있는 자신의 힘을 이용하는 줄도 모르고.
쏟아지는 칭찬에 우쭐했고, 자신을 자랑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에 마법사 협회에 깊은 소속감을 느끼며 세상을 더 아름답고 위대하게 바꿀 수 있을 거라는 착각 속에 살았다.
'…하지만.'
그 사실이 깨지던 순간.
헤레스는 다시금 입술을 깨물었다.
그토록 참담한 순간이 없었다.
자신을 잡으려는 마법사 협회의 손길을 다 뿌리치고 달려 나왔다.
이룬 것도, 하물며 가족이라 생각했던 이들이 모두 매섭게 돌아서 버렸다.
언제나 바라보던 달을 쳐다보며 얼마나 울었던가.
"헤레스."
하벨이 말을 꺼내자 헤레스는 참고 참았지만, 기어코 눈앞이 뿌옇게 변하고 말았다.
'저를… 그렇게 다정히 부르지 마세요.'
헤레스 자신이 시선을 돌린 쪽이 물의 저주였다.
오염된 물이 사람한테 영향을 끼쳐 나타나는 병이 바로 물의 저주였으니.
자신이 뿌린 잘못의 씨앗을 거두기 위해서라도 이쪽을 파고들어야 했다.
―하벨이 저렇게 다치게 된 건… 검은 물 때문이라네.
날마다 후회하고, 또 후회하다 룬델에게 끔찍한 결과를 들었을 때,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잘못이 기어코 하벨에게 닿지 않았는가.
저 가여운 하벨이 대체 뭘 잘못했는가.
물의 내성이 없이 태어난 걸 누구에게 탓하지도 못한 채, 쭈그려 앉아 울고 또 울던 저 안쓰러운 소년이 대체 왜 고통받아야 하는가.
헤레스는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았다.
"죄송… 아니, 이 앞에 펼쳐질 모든 건 제 책임입니다."
"헤레스."
하벨의 부름에 헤레스는 이미 숙인 고개가 더욱 내려갔다.
'…제발, 도련님. 저는 이름으로 불릴 자격조차 없답니다.'
"나랑 목표가 같을 줄은 몰랐네."
하벨은 가면을 살짝 올려 방긋 웃는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헤레스의 시선이 살짝 올라갔다.
하벨이 웃는다고.
왜?
헤레스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있잖아. 네가 저지른 일에 수많은 사람이 죽었을 것 같잖아?"
하벨은 앞으로 천천히 걸었다.
헤레스는 무언가에 홀린 듯 하벨을 따라 계단을 하나씩 내려갔다.
"사실 그렇지 않아."
단호하지만, 부드러운 그 목소리에 헤레스는 조용히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물론, 네가 뼈대를 세운 정도는 될 테고, 영향이 없다는 것도 아니지만, 진짜 잘못한 사람은 뻔뻔스럽게 이런 공간을 만드는데 너만 고개를 숙이는 게……."
하벨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비틀거렸고, 헤레스가 다급히 잡았다.
"…도련님!"
하벨을 잡은 헤레스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긴 계단에서 넘어졌으면 어쩔 뻔했는가.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대장! 역시 이 몸 때문에 그런 거 맞지?]
아라도 하벨의 옷자락을 필사적으로 잡으며 울상을 지었다.
하벨은 벽을 짚은 후에야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벨 티에라의 몸으로 용왕의 힘을 이렇게 오래 유지해본 적이 없기에 그런지 몰라도 무언가 천천히 자신을 갉아 먹는 기분을 느꼈다.
통증도 통증이지만, 하나씩 몸이 망가지는 듯했다.
방금 눈앞이 갑자기 일그러지지 않았는가.
"…네 탓이 아니야."
아라한테 말했지만, 자신을 잡은 헤레스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니까, 헤레스."
하벨은 아직도 부들부들 떠는 헤레스를 위해 조금 전 뒷말을 다시 이었다.
"이런 짓거리를 벌인 놈을 잡은 후에 고개를 숙이든지 해. 그게 아니면 날 낫게 하면 되는 거잖아?"
변종 물의 저주를 극복한다면 기존 물의 저주 따위는 쉽게 이길 수 있겠지.
저 미안함을 뛰어넘어 과거의 자신에게 엿 먹일 기회이기도 했다.
"지금은 내려가자, 헤레스. 미안함은 잠깐 미뤄두고 말이야."
"…이렇게 쉽게 넘어가신다고요?"
헤레스는 주저하며 물었다.
"정 미안하면 네가 가진, 마법사 협회와 관련된 지식을 써주면 되는 거야."
"정말 그걸로 되는 게… 이상하잖아요."
"뭐가 이상한데?"
하벨은 활활 타오르는 랜턴의 검은 빛을 바라보았다.
저것보다 더 이상한 게 있을까.
아니.
"영혼이 바뀐 것보다 더 이상하다면 말해도 돼."
하벨은 잠깐 기다려주었다.
한 3초.
"없지? 그럼 가자."
"……."
헤레스는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저것보다 더 이상한 사실이 있을 수 있을까.
하벨은 그제야 실실 웃으며 경쾌한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왔다.
[이 몸도… 대장의 영혼이 바뀐 것보다 더 이상한 건 모르겠는데.]
아라의 귀가 잠깐 쳐졌다.
하벨의 뒤를 따라 내려가던 헤레스가 당황함을 드러내며 말했다.
"…도련님. 오염된 물이 검은 물로 바뀌면서 어떻게 됐는지 들으셨잖아요."
"들은 게 아니라 직접 봤어. 아주 선명하게."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잖아요."
"내가 하는 일에 힘을 보태면 되는 거잖아? 아주 간단해."
"사직서는……."
"물의 저주를 치료하고 싶다는 말은 거짓말이었어?"
"아뇨! 거짓말이 아니었어요!"
"그럼 끝."
하벨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지금 헤레스보다 자신을 더 잘 아는 의사가 있을까 싶었다.
[착하다, 대장.]
아라가 하벨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뭔지는 잘 몰라도 하벨이 헤레스를 용서해준 건 틀림 없었다.
[이 몸이 들었는데, 용서는 진짜 어려운 거래.]
"그럼, 엄청 어렵지."
하벨은 손을 들어 아라를 쿡 찔렀다.
헤헤.
아라의 발이 동동거리는 게 느껴졌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하벨은 뒤쪽에서 침묵을 유지하는 헤레스를 신경 쓰며 앞을 바라보았다.
'아니, 먼저 가라고 말은 했는데… 대체 어디까지 내려간 거야?'
눈이 어둠에 적응했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어두웠다.
할 수만 있다면 불을 켜고 싶을 정도였다.
"…저어, 고맙습니다, 도련님."
어색함이 가득 담긴, 아주 작은 목소리에 하벨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
[어! 다들 저기에 있어! 이 몸 눈에 보여.]
아라가 손으로 가리키자 하벨의 발걸음 속도가 빨라졌다.
'진짜 멀리도 갔…….'
흠칫
문 앞에 서 있는 그들을 보자마자 하벨은 갑자기 소름이 돋아났다.
아니.
하벨은 곧 자신의 시선이 문 너머를 향한다는 걸 느꼈다.
'저 너머에… 뭔가가 있다.'
이미 예상했지만, 자신의 상상을 아득히 벗어난 일이 펼쳐질 것만 같았다.
그만큼 예감이 좋지 않았다.
"사람이… 갇혀있어."
칼리우스가 꺼내는 말에 하벨은 가슴이 무겁게 가라앉는 기분을 느꼈다.
용이기에 저 너머가 보이는 걸까.
화르륵.
갑자기 랜턴의 불꽃이 일렁거리기까지 했다.
칼리우스가 문에 마나를 감싸 소리 없이 열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일렁거리는 불꽃 두 개가 하벨에게 보였다.
마법사일까.
탁.
"내가 왼쪽."
카샬은 불꽃을 보자마자 달려들었고, 연기에 휩싸인 레디나를 향해 말했다.
카샬이 적에게 도착했을 무렵 레디나는 모습을 드러냈다.
콰드드득.
그대로 적의 가슴팍을 꽉 쥐어 목을 뜯듯 단검을 그어냈다.
"짠. 제가 오른쪽이에요."
태연한 레디나의 목소리에 바로 반대편에 있던 적이 꿈틀거렸다.
"누구……."
푹!
카샬의 검이 일직선으로 다가와 마법사의 목을 꿰뚫었다.
"…커, 커, 컥!"
그대로 적을 쓰러트리고는 배를 밟아 검을 빼냈다.
"불이 있으면 딱 좋겠는데요."
검에 묻은 피를 털던 카샬은 어쩐지 으스스한 느낌에 입가를 핥았다.
공간 자체는 넓어 보였는데, 보초가 겨우 두 명이질 않은가.
그런데 이 짙은 피 냄새는 또 무엇이고, 수상한 침묵 속에 뒤섞인 꽃향기라니.
"내가 불을 뿜을게!"
"아니야, 용용아. 잠깐만."
하벨은 칼리우스를 말렸다.
어떻게 회복한 마나인데. 이 정도는 아끼는 게 좋았다.
화르르륵.
하벨은 아라한테 정령수를 받아 자신이 낼 수 있을 만큼 불꽃을 퍼트렸다.
어딘가에 불이 붙자 하벨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따라갔다.
천천히 위를 향했다.
"이……."
하벨은 단번에 이를 악물며 아라의 눈을 가렸다.
아라가 부르르 떠는 게 느껴졌다.
사람의 몸에 동물의 머리를 단, 자연에서 절대로 있을 수 없는 부정한 것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이곳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아니, 점점 깊숙이 들어가면서 머리카락이 삐죽 서는 그 느낌이 전신을 핥고 갔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이… 개새끼들이!"
하벨은 천장을 보며 소리치며 다른 손으로 남은 정령수를 모조리 쥐어짜내 불꽃을 퍼트렸다.
'다. 모조리 타버려!'
"…미친 새끼들."
카샬은 자신이 본 광경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었다.
"……하."
레디나는 숨을 들이켜며 단검이 쥔 손을 내렸다.
자신이 보는 게 과연 맞을까.
"…눈 감아."
불이 옮겨붙어 횃불이 켜진 것처럼 점점 시야가 넓어지자 하벨은 온몸을 핥으며 지나가는 섬뜩함에 말을 다시금 내뱉었다.
"당장 눈 감아, 칼리우스!"
이건 자신의 예상을 벗어난 참혹 사태가 아닌가.
자신이 목격한 게 끝이 아니었다.
쿵.
하벨은 그 소리에 깜짝 놀라며 몸을 돌렸다.
헤레스가 엉덩방아를 찧은 상태로 부들거리는 손가락을 들어 천장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이… 게. 이게……."
그럴 만했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헤레스가 말했던 그 죄책감이 한 번에 올라왔을 테니까.
"레디나. 미안하지만, 헤레스 데리고 잠깐만 위로 올라가 있어 줘."
이렇게 천장에 불이 붙었음에도 지원군이 오지 않았다는 건 여러 가지 가능성을 의미했다.
지금 이 장소에 이런 방들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곳이며 이미 페트리오가 이곳을 습격했다는 걸.
하벨은 입술을 깨물며 천장에 달린, 부정한 것 이외에 자신이 본 것을 다시금 눈에 담았다.
감옥 같아 보이는 곳에 팔과 다리가 잘려 마네킹처럼 천장에 묶여 있는 건 사람이었다.
몇 번을 봐도 사람이었다.
'…어느 곳에도. 이런 비정상적인 일은 사라지지 않다니.'
코를 찌르는 악취에도 하벨이 천천히 걸어갔다.
구석진 곳에 그림자라 생각했던 게 움직였다.
'……?'
하벨은 자신의 눈이 커지는 걸 느꼈다.
'설마…….'
조금 더 다가가 살펴보았다.
그제야 하벨은 자신이 그림자라고 생각했던 무언가가 정령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가슴이 콱 막혀왔다.
극도의 공포에 질려 생기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정말 인형같이 굳어버린 저 가엾은 정령들의 모습에 하벨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면을 벗었다.
'…미안하구나.'
하벨은 죄책감이 들었다.
아직 버리지 못한 제 습관일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음지에 처박혀 한없이 공포에 떨었을 그들이 걱정스러웠다.
[…….]
정령들은 가만히 하벨을 바라보았다.
[…대장.]
아라가 입을 열자 정령들의 눈동자에 비소로 생기가 어렸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듯, 한 줌의 희망을 담아 그들은 입을 열었다.
[…살려줘.]
기본으로 깔린 오만함조차 벗어버릴 만큼 처절한 외침이었다.
하벨이 정령들에게 다가갔다.
"그래. …도와줄게."
하벨의 대답에도 정령들은 머뭇거렸다.
하벨이 한 발 더 다가가자 정령들은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동시에 외쳤다.
[도망쳐!]
[여기서 얼른 도망쳐, 아이야! 오지 마!]
지금 겁에 질리고 공포에 허우적거리고 있는 건 정령들일 테지만, 그들은 자신을 걱정했다.
[여, 여기에 오면 안 돼! 여기에 오고 다… 전부 다 이상해졌어.]
[저들이 정령사들의 팔이랑 다리를 자르고… 흑, 널 정화제를 위한 도구로 만들어버릴 거라고!]
[이젠 싫어! 우리를 안 구해줘도 되니까, 아무도 오지 마! 가! 어서 가라고, 바보야!]
정령들이 토해내는 말이 하벨의 가슴을 찔러왔다.
저들은 저렇게 구석에 붙어 모든 걸 다 보았겠지.
무얼 해야 저들이 진정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지금 저들의 마음을 다독일 수 있을까.
하벨의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찰랑.
용왕의 힘으로 허공에서 만들어진 물의 등장에 정령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아주 그리운 물의 냄새를 풍겼다.
[…으으.]
정령들은 그 물을 보자마자 울먹거렸다.
하벨은 물을 작게 쪼개 하나하나 정령들에게 주었다.
물방울을 손에 쥔 정령들은 그보다 더 굵은 눈물을 떨어트렸다.
[무서웠어. …너무너무 무서워서 이게 다 꿈이었으면 했는데. 꿈이… 아니었어. 이게 현실이라니.]
[저 아이를 구하고 싶었는데… 부정한 것 때문에 힘을 제대로 쓸 수 없었어. 미안해! 미안해에…!]
"내가 너희를 도와줄게."
하벨은 더 강한 의지를 담아 입을 열었다.
주륵.
또 코피가 흘러내렸다.
또 자신을 갉아 먹는 듯한 힘이 거세졌지만, 하벨은 후회하지 않았다.
[아니야. 아, 아무것도 하지 마. 더는 우리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말고 어서 도망가. …제발.]
정령들은 오히려 하벨을 말렸다.
너무 무서웠다.
또 정령사가 저렇게 사지를 잃어 도구가 될까 봐 무서웠고, 그들과 강제로 정화제를 만들면서 정령사가 품는 그 거대한 원망 덩어리를 다시 또 느껴야 할까 봐.
그 모든 게 소름 끼칠 만큼 두려웠다.
[괜찮아!]
아라가 더는 참지 못하고 하벨의 손에서 벗어나 소리쳤다.
하벨은 바로 아라를 감싼 물에 물보라를 일으켰지만, 아라는 몸을 떨었다.
형태만으로도 뭔가 섬뜩하게 느껴져 아라는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하지만 의지를 굳건하게 세웠다.
그 소리에 정령들은 아라를 바라보았다.
아주 작긴 했지만, 정령이었다.
[…어떻게 여길 온 거야?]
[네가 저 정령을 데려온 거야? 여기가… 여기가 어딘지 알면서?]
하벨을 보는 정령들의 눈빛에 분노가 일렁거렸다.
하벨은 저들의 분노를 이해했다.
지속적인 공포에 지금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조차 없는 상태일 테니.
[아니야! 이 몸이 따라왔어!]
아라는 눈을 꼭 감고는 다시 소리쳤다.
[대장은 저기 위에 있는 정령들의 부탁을 받아서 여기까지 왔어! 너희를 구하러 왔다구!]
아라는 일순간 망설이다 조금 전보다 훨씬 조용히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대장을 무서워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우릴… 구해……?]
아라가 꺼내는 간절한 말에 정령들의 눈에 깃든 분노가 차차 가라앉았다.
[응.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아라는 눈을 살며시 뜨고 정령들에게 다가갔다.
정령들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이미 저 작은 정령의 존재만으로 따사로웠다.
[이 몸이 약속할게. 이제 곧 밝은 하늘을 볼 수 있을 거야.]
아라가 그들을 위해 배시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