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그래서 제가……(3)
* * *
퍼억!
카샬은 대답하지 않고 바로 달려와 놈의 얼굴을 후려쳤다.
"…어억!"
그대로 뒤로 나자빠진 남자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이제 놓아도 돼."
어딘가 장난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매캐한 연기가 하늘에 올라왔다.
대체 언제 불이 났단 말인가.
저 수레를 밀고 왔을 때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는데.
불쑥 들어오는 검 하나에 남자는 그제야 현실을 보며 흠칫거렸다.
"이 정화제가 어디에서 오는 거야?"
카샬이 묻자 남자는 당황했다.
저게 무엇인지 묻는 것도 아닌 바로 정화제라는 말을 하다니.
남자의 눈에 다시금 하늘로 번져가는 매캐한 연기가 눈에 들어왔다.
저놈들에게 자신들의 작업장이 공격당하다니.
"햇님아."
하벨이 칼리우스를 불렀다.
"이번에는 어디를 잘라야 마법을 못 쓰게 할 수 있을까?"
칼리우스는 그 말에 흠칫거렸다.
약점을 알려주면 바로 잘라버릴 거잖아.
그렇게 말이 나와버릴 뻔했다.
뭔가 가슴이 아팠다.
"그러니까……."
하지만 칼리우스는 마음을 굳건히 먹고 천천히 걸어갔다.
자신이 본 게 전부라고 할 수 없지만, 지금 누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보았다.
아무리 몰라도 이 건물에서 저들이 자루에 담던 건 정화제였다.
칼리우스는 여전히 따끔거리는 가슴팍을 느끼며 자신이 보았던 진실에 조금 더 중점을 잡았다.
"바로 여기야."
칼리우스는 남자의 손가락을 가리켰다.
"자를까요?"
레디나가 곧바로 단검을 흔들며 신이 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야 하지 않을까? 이미 상황도 다 끝난 마당에 아직도 입이 무겁다는 건 대화할 마음이 없다거나, 대화할 준비가 되지 않았던 거니까. 어느 쪽도 마음에 들지 않네."
"자, 자, 잠… 끄아아악!"
남자는 갑자기 밀려오는 격한 통증에 비명을 지르다 시선을 옮겼다.
손가락들이 잘려있었다.
정말로.
정말.
"대화라는 건 흐름이 잘 맞아야지. 네 입이 무겁다고 해서 널 차분히 어르고 달랠 거라고 생각했어?"
하벨은 남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저놈이 말해줬으면 편하겠지만, 몰라도 상관없었다.
아라가 있었으니까.
'…아. 화가 났다?'
갑자기 피부에 닿는 공기가 달라지자 하벨은 시선을 옮겨 마법사의 잘린 손가락을 향했다.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지.'
하벨은 우스웠다.
이미 레디나와 카샬이 단검과 검을 꽉 쥐었기에 저 마법사의 목은 이미 떨어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하벨은 조용히 손을 흔들어 카샬과 레디나에게 신호를 줬다.
잠깐만 기다려봐.
하벨의 시선이 칼리우스에게 옮겨졌다.
발밑에서 진동이 느껴지고, 무언가가 올라올 것 같은 분위기보다 칼리우스에게서 풍기는 짙은 살기가 더 위험하지 않은가.
"…그건 허락 못 해."
칼리우스의 시선에 오로지 마법사만 보였다.
그때, 마나가 가득한 땅에 있을 때처럼 머릿속이 뜨거웠다.
마법사들이 번개로 하벨을 공격했을 때 가만히 바라보는 게 전부였지만, 지금은 그럴 이유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칼리우스의 머리카락이 살며시 흩날렸다.
적이 일으키려는 마법이 느껴졌고, 그 마법을 유지하는 마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칼리우스는 적의 마나가 퍼진 그 중심으로 자신의 마나로 못을 박듯 짓눌렀다.
쨍!
마법이 단숨에 깨지자 마법사는 잘린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고통과는 다른 숨 막힘에 다리를 움직여 바닥을 긁었다.
"커… 커헉!"
마법사는 기어코 피를 토했다.
"지, 진정하시고 호흡하세요."
거대한 힘을 느낀 헤레스가 당황하며 칼리우스를 말렸다.
가면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무언가 위험한 냄새를 풍겼다.
하지만 칼리우스는 멈추질 않았다.
칼리우스의 시선이 매개체가 되는 마법사의 손가락을 향하자 바로 뭉개졌다.
찍!
살덩이가 된 손가락의 모습에 칼리우스는 고개를 돌려 하벨을 바라보았다.
'또… 살기에 짓눌렸나?'
칼리우스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보이지 않았기에 하벨은 그의 이름을 부를까 말까, 잠깐 고민했다.
"…하벨."
칼리우스의 손끝이 부르르 떨렸다.
하벨을 향해 공격하는 저 사람이 싫다는 생각이 밀려오자 머리가 단숨에 뜨거워졌다.
하지만 꾹 참았다.
매번 저 뜨거움에 몸을 맡기면 안 될 것 같다는 불안함이 계속 있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무서웠다.
자신이 가진 이 힘이 두려울 때가 많았다.
―음……. 사람이 언제 죽는지 어떻게 아냐면, 이것도 많이 해보면 감이 오긴 하는데. 일단 '커헉'이나 '허억'이나 숨소리가 들리면 멈춰. 그리고 유심히 바라봐. 일단 이것부터 살피면 될 거야.
하벨이 말하지 않았던가.
숨소리가 들리면 멈추라고.
"나, 안 죽였어."
칼리우스는 울먹이며 말을 꺼냈다.
이러면 되는 거냐고.
그렇게 필사적으로 묻자 하벨은 칼리우스에게 다가갔다.
하벨은 부들부들 떠는 칼리우스의 어깨에 손을 올려 가볍게 두드렸다.
"잘했어, 칼리우스."
칭찬과 함께 이름이 불리자 칼리우스는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해냈다니.
"…정말?"
"그래. 너는 죽이지 않았어. 힘 조절에 성공했네."
하벨이 가면을 벗고 칼리우스를 바라보았다.
하벨은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정말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칼리우스의 두 손이 절로 꼭 쥐어졌다.
사람을 죽이지 않고 제압했다.
기뻤다.
엄청 기뻤다.
* * *
[…이쪽이야!]
아라가 앞발을 내밀었다.
작업장 같은 곳을 지나 뒷길 같은 곳을 걷고 잠깐 골목 사이를 지났다.
작업장에서 치솟던 연기는 금세 가라앉았다.
아마 잠깐 일어난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생각할 정도로 금방이었다.
"그래서 잘 부탁드립니다, 형님."
하벨은 가면을 살짝 들어 올린 상태로 라르웬에게 말했다.
터진 사건이 워낙 중대해 보고를 늦출 수는 없었다.
자신도 있는데 카샬이 보고할 수도 없고.
<…아니.>
라르웬은 다시금 한숨을 내뱉었다.
<나는… 너한테 연락이 와서 간이 철렁했는데. 그… 뭐라고? 누가 뭐, 정화제? 정화제를 빼돌려?>
당혹감과 황당함이 뒤섞여 라르웬은 평소보다 말을 더듬었다.
"아직 그렇다고 단언할 정도는 아니지만, 확실함을 기다리기에는 티에라 쪽의 대응이 늦어질 것 같아 먼저 연락을 드리는 겁니다. 여기 마을에는 가문 내 정령 기사들이 없습니까?"
<당연히 있지. 그런데 나한테 연락하는 것보다 카샬한테 묻는 게 빨랐을 텐데? …아. 걔가 순순히 알려줄 리가 없지.>
라르웬이 코웃음을 치자 하벨은 당장 카샬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 보십니까?"
"여기에 정령 기사들이 있는 거 알고 있었어?"
"예. 제가 좀 특별한 집사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말을 안 했는데? 널 시킬까 봐?"
"안 물어보셨잖습니까."
"……."
하벨은 뻔뻔스러운 카샬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응. 나도 옆에서 들었는데 달님은 꽃님이한테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
칼리우스마저 입을 열자 레디나 역시 이 재미있는 일에 가담해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건 맞아요. 안 물어보셨는데 꽃님이가 어떻게 대답해요?"
"그리고 도련님. 설령 지금 시킨다고 하셔도 전 갈 수 없습니다."
카샬은 지원군을 등에 업고 당당함을 드러냈다.
"그건 또 왜? 나는 정령 기사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치지만, 넌 아니잖아."
"저라도 없으면 도련님께서 얼마나 날뛰실지 상상이 가질 않습니다. 게다가 지금 둘째 도련님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알아서 하실 겁니다."
"그러니까……."
<왜? 카샬 말이 맞는데. 나중에 다 보고로 올라올 테니까 넌 딱밤 맞을 준비나 해라.>
라르웬은 키득거리자 덩달아 하벨의 입술이 반달을 그렸다.
"아뇨. 딱밤 맞을 일은 없습니다. 무슨 이유로요?"
<이미 집에 바로 안 오고 딴 곳으로 샜잖아. 막내야, 넌 이미 딱밤 행이야.>
"잠깐 다른 곳 좀 들렸다고 그러십니까? 아직 하루도 안 지났습니다."
<그냥 다른 곳이 아니니까 그렇지. 어쨌든, 일단 아버지께 보고할게. 지금 정령 기사가 아니라 아버지의 의견이 필요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막내야.>
"예?"
<딱밤이랑 별개로 적당히 좀 해. 너 지금 상태가 안 좋은 건 알고 있지? 인지는 하고 있어?>
"당연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아, 내 옆에 헤레스가 있습니다."
하벨이 당당하게 말하자 이름이 불린 헤레스도, 라르웬도 거의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막내야. 잔소리가 아직 한참 남았지만, 더는 시간 끌지 않고 끊을게.>
뚝.
하벨이 연락용 아이템을 집어넣자 헤레스는 성큼 그에게 다가왔다.
"왜… 그래?"
하벨은 본능적으로 흠칫거렸다.
"지금 저는 적응 중일 뿐입니다. 제가 아무 말씀도 안 드린다고 해서 괜찮다는 게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알려드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헤레스는 고개를 꾸벅 숙인 뒤에 다시 칼리우스 옆으로 향했다.
[헤헤. 대장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진짜 많아.]
하벨의 머리맡에 누워 다리를 흔들던 아라가 앞발로 상체를 들어서는 눈을 크게 떴다.
땅이 또 자신한테 알려줬다.
[저쪽이야, 대장! 엄청 가까워!]
아라는 다시금 골목을 가리켰다.
골목을 벗어나자 평범한 주거지들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하벨 일행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여러 가지가 어려 있었다.
놀람.
의심.
경시.
카샬은 주변을 살폈다.
레디나는 어느새 치사하게 모습을 감췄고, 헤레스는 어쩐지 주눅 들어 보였다.
칼리우스야 그렇다고 치지만, 저 시선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는 하벨은 대체 뭔지.
자신은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자리를 박찰 텐데.
유독 자신에게 더 시선이 쏠려 있어 미칠 지경이었다.
"…제발, 가면 좀 벗으면 안 됩니까?"
"안 돼. 엄청 수상하잖아."
"지금 가면 때문에 더 수상하잖습니까!"
"쉿. 지금 잠복하고 있는데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되겠어?"
하벨이 손가락을 가면 위에 올리자 카샬은 기어코 분을 참지 못해 지나가다 보이는 나무를 걷어찼다.
"봤지. 저러면 안 되는 거야, 아라야. 햇님이 너도."
웃음을 꾹 누르며 하벨이 손가락으로 카샬을 가리켰다.
[응! 이 몸은 나무를 함부로 걷어차는 일은 하지 않아!]
"이런 건 따라 하면 안 되는구나. 기억할게."
아라가 앞발을 까닥거렸고, 카샬을 빤히 바라보던 칼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하벨의 뒤를 쫓아갔다.
주춤거리던 헤레스가 카샬의 등을 두드렸다.
"…고생이, 음, 많으셨네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주인을 모시는 건 상당히 고역이 아닐까 싶었다.
* * *
똑똑.
하벨은 평범해 보이는 집 문을 두드렸다.
잠깐 기다렸음에도 안에서 어떤 기척도 없자 당장 카샬을 보았다.
"부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제가 가르쳐 드렸던 것들은… 젠장, 다 소용없어졌네요."
카샬은 가면을 쓸어내렸다.
영혼이 바뀌었으니 사람도 바뀌었고, 자신이 열심히 알려주었던 것들이 죄다 휴짓조각이 되어 날아갔다는 게 느껴졌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인 게 아닌가.
갑자기 열이 확 받았다.
"집 문은 함부로 부수는 게 아닙니다. 아라 님이랑 칼리우스가 보잖습니까."
"당연히 안 되지. 문을 왜 부숴? 말을 참 이상하게 하네."
하벨은 아공간 주머니를 열어 무언가를 꺼냈다.
"조용히 따야지."
"예……?"
"네가 반대할까 봐 슬쩍 봤어. 따는 거라면 괜찮지?"
처음 티에라 가문을 둘러싼 네 지역을 굴복시킬 때 카샬이 문따기 기술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때 유심히 관찰했고, 카샬 모르게 몇 번 연습하기도 했다.
"…진심이십니까?"
카샬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물었다.
"그럼. 문을 부수는 건 정말 바보 같은 짓이야. 시끄럽고, 안에서 내가 갈 테니 미리 준비해두라는 말과 대체 무슨 차이가 있겠어?"
하벨은 벌써 신이 나 무릎을 꿇고 문고리에 귀를 가져다 대며 도구를 이리저리 사용했다.
용왕일 때는 체면 때문에 해보지 못했지만, 이렇게 할 수 있게 되니 왜 기쁘지 않을까.
천천히 손끝에 느껴지는 감각을 이용해 열쇠 속 실린더를 건드렸다.
"…오."
어느새 나타난 레디나가 칼리우스와 같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살폈다.
딸깍.
열쇠가 열리는 소리에 레디나는 소리 없이 손뼉을 마주쳤다.
"…아주 미치겠네요."
"들어가자."
카샬이 얼굴을 쓸어내리자 하벨은 자랑스러워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잠깐만!"
칼리우스가 다급히 하벨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하벨의 다리가 허공에 몇 번 휘적이다 내려왔다.
'조그만 것들이 다들 힘만 좋네.'
"함정 같은 게 있어."
"그건 나도 알아. 여기랑 저기에 있잖아."
"…아!"
칼리우스는 하벨이 마법을 볼 수 있다는 걸 뒤늦게 떠올리며 하벨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으로 살금살금 걸어가 작은 조각상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탕!
작은 바람이 일어나 칼리우스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쨍!
마법이 깨지는 소리에 칼리우스는 만족했다.
"이제 됐다. 이쪽으로 가면 될 것 같아."
칼리우스는 납작 엎드려 벽지 밑부분에 마나를 담아 꾹 눌렀다.
[오오, 저기가 맞아!]
아라는 땅이 알려준 기억에 눈을 크게 떴다.
[방금 이 몸이 막 누군가에게 끌려가는 사람들을 봤어.]
그 사람들이 정령사일까.
아라는 갑자기 가슴이 콩닥거려 하벨에게 꼭 매달렸다.
"마나가… 없으면 작동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놨나 봐요."
헤레스는 조용히 사라지는 벽면을 보며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내가 앞장설게. 그래도 돼?"
조금은 당당하게 말을 꺼낸 칼리우스가 하벨을 바라보았다.
"그럼."
그 대답에 칼리우스는 활짝 웃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이번에는 맨 뒤쪽에서 오십시오. 어두우니 천천히 내려오시면 됩니다."
하벨이 움직이려 하자 카샬이 그를 말리고 레디나를 먼저 보냈다.
마지막으로 헤레스를 바라보고는 카샬은 내려갔다.
"너는 안 가? 아니면 나부터 가?"
하벨은 우두커니 서 있는 헤레스를 재촉했다.
"아뇨, 가요."
헤레스는 살짝 넋을 잃은 듯 대답했다.
앞서 걷다 말고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을 보자 무언가 울렁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벌써 두 번이나 비밀 통로를 지나가고 있지 않은가.
마법사 협회가 이렇게까지 준비하는 거라면 보통 일이 아닌 게 틀림없었다.
'정화제가… 개입되어 있었어.'
몇 번을 보아도 마법사가 자루에 담고 있던 건 정화제였다.
마법사 협회의 자금줄을 알아보려고 이곳에 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정화제가 보였다.
마법사 협회의 자금줄이 정화제라는 뜻이 아니고 뭐겠는가.
탁.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던 헤레스는 자신이 마법사 협회에서 나오기 전 협회장이 꺼냈던 말이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네가 여길 나간다고 바뀌는 건 없다. 고맙게도 네가 기본 틀을 전부 다 마련해주었으니.
'그래. 내가…….'
헤레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그녀의 손이 떨리고 뒤쪽에서 느껴지는 하벨의 발소리에 쫓기듯 심장이 욱신거렸다.
칼리우스가 뜯은 창살이 보이자 헤레스는 흠칫거렸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나타나는 여러 개에 창살에 헤레스는 몸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도망가지 못하게… 세워진 철장이 벌써…….'
코를 찌르는 악취에 헤레스의 두 손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설마, 아니길 빌어보지만, 마법사 협회가 어떤 곳인지 알기에 이제 곧 드러날 상황을 더는 부정하기 어려웠다.
"왜 그러십니까?"
뒤쪽에서 발소리가 늦어지자 카샬은 고개를 돌려 물었다.
하벨은 손을 휘휘 저었다.
먼저 가.
하벨은 끄덕이는 카샬의 고갯짓을 본 뒤에 헤레스의 상태를 살폈다.
"왜 그래, 헤레스?"
그 말에 헤레스는 기어코 걸음을 멈췄다.
"도련님. 제가요……."
헤레스가 벌벌 떨며 말을 꺼냈다.
더는 멈출 수가 없었다.
"…제가요."
"네가 왜?"
"어쩌면 제가… 이 사태를 만들었을지도 몰라요."
헤레스의 목소리가 너무도 불안하게 들렸기에 하벨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제가 마법사 협회를 위해 했던 연구가… 기어코 이 사태를 만들었어요."
가슴팍까지 차오르는 이 죄책감에 헤레스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도련님께서 말씀하셨던 검은 물… 말이에요."
헤레스는 천천히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었다.
[검은 물이 왜?]
아라마저 유심히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정령인 자신에게 있어 검은 물은 아주아주 무서운 존재였으니.
"…그 물이 움직일 수 있게 된 건 제 연구 때문이에요. 제가……."
울음이 뒤섞인 말을 내뱉은 헤레스는 하염없이 고개를 숙었다.
마법이든 뭐든 움직일 수 있는 마법, 자신이 가진 그 마법을 응용한 연구였다.
"제 멍청함이 어떤 결과를 불렀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어요."
움직여서는 안 될 오염된 물이 자신의 앞에서 괴물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역겹고도, 끔찍한.
"견딜 수가 없어서, 그래서 제가 마법사 협회를 나왔습니다."
이 세계를 갉아먹고.
수많은 사람을 죽였던 그 오염된 물이.
"그래서 제가… 앞으로 펼쳐질 사태를 만든 겁니다."
헤레스는 힘없이 사실을 고백했다.
온몸의 피가 바짝 말라가고 억눌러왔던 죄책감이 자신을 갉아먹는 것만 같았다.
"…바로 제가요."
정화제.
사라진 정령사.
이 두 가지가 무얼 의미하는지 왜 모르겠는가.
이곳은 정령사를 이용해 강제로 정화제를 만드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