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그래서 제가……(2)
* * *
레디나가 움직이자 하벨은 다시 말을 꺼냈다.
"너도 그래, 레디나."
"하지만 저는 독에 내성이 있어요."
레디나가 말을 꺼내자 하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독에 내성이 있다고 해도 완전한 건 아니잖아? 이건 엄청 위험한데?"
[맞아. 대장이 사용한 독은 아주아주 위험하다구!]
아라가 재차 말을 꺼냈다.
저 독은 자신의 정령수로 만들었고, 하벨이 가진 순환의 길을 통해 나왔기에 안전했지만 다른 사람은 아니었다.
"…도, 도련님은 정말 괜찮으신 거 맞으세요?"
헤레스가 주먹을 꽉 쥐며 물었다.
저렇게 검은 바람은 처음이었다. 대체 얼마나 독이 강했으면.
"물론이지. 나는 내가 죽을 짓은 안 하는 주의라서 걱정하지 마."
하벨이 꺼내는 당당한 저 말에 카샬은 기가 찬 듯이 반응했다.
"누가요?"
"내가."
"이런 상황에서까지 장난치십니까?"
"장난 아니니까 진짜 천천히 따라와. 이거 극독이니까 설마 하며 오지 말고. 아직 아무도 보내고 싶지 않으니까."
하벨은 키득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자신이 손으로 찰흙 놀이하듯 만들었어도 위험한 건 위험했다.
하벨은 뒤따라올 이들을 생각해 바람이 자신의 뒤로 가지 않게 조절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금세 발소리 하나 붙자 하벨은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누가 벌써 눈치도 없이 따라온 건지.
입을 삐죽 내밀던 아라가 귀를 쫑긋 세워 덩달아 고개를 돌렸다.
"아까 진짜 엄청 예뻤어. 검은 바람이라니."
칼리우스가 해맑게 이야기하며 자신에게 손을 흔드는 아라에게 똑같이 흔들어주었다.
"…용용아. 이거 독이야."
하벨은 나풀거리는 검은 바람을 가리켰다.
"알아. 도련님이 말해줬잖아."
"아니, 독이라니까."
"응. 나는 독이 뭔지 알아. 그 정도는 알고 있어. 물론… 무슨 맛인지는 몰라."
[이 몸은 알아! 음… 아이스크림 맛이야. 에엑…….]
아라는 아이스크림을 떠올리다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난생처음 먹었던 아이스크림은 차갑기만 하고 맛이 이상했다.
"아이스크림은 맛있는 거고, 독은 죽음을 부르는 맛이야, 아라야."
하벨은 아라의 말을 정정하며 칼리우스에게 물었다.
"혹시 독에 내성이 있었어?"
"용은 원래 독 같은 거 안 통하는데? 도련님은… 음, 도련님도 곧 나처럼 될 수 있을 거야!"
칼리우스는 도중에 머뭇거리다 주먹 쥔 두 손을 가슴 앞에서 위아래로 흔들었다.
'용은 오염된 물도 안 통해, 독도 안 통해. 이미 엄청난데 대체 어떻게 용들이 사라진 거지?'
하벨은 잠깐 의구심을 품었다.
저렇게 만능에 가까운 용이 대체 왜 사라진 걸까.
"…커헉!"
하벨은 안쪽에서 무언가를 토하는 소리가 들리자 의구심을 접었다.
'효과는 확실하네.'
자신이 뿌린 독이 섞인 바람 이외에도 이미 안에서부터 퍼져가는 연기에 자연스럽게 뒤섞인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들어갈 통로를 지나자 공장이라고 할 만큼 드넓은 곳이 펼쳐졌다.
하벨은 슬쩍 아라의 눈을 가렸다. 검은 불꽃을 내뿜고 있던 랜턴이 덩달아 흔들렸다.
놀랍게도 밖에서부터 건물 안으로 햇살이 쏟아졌고, 건물 형태만 보아도 밖에서도 몇몇 보았던 작업장 중 하나 같았다.
무언가를 열심히 포장하고 있었는지 반쯤 탄 자루와 정화제로 보이는 가루가 널려 있었다.
'이렇게 당당하게 일을 저지르고 있었다니.'
하벨은 놀라웠다.
모름지기 찔리는 게 있으면 어떻게든 숨기 마련일 텐데.
"콜록, 콜록!"
그렇기 때문일까, 검은 피를 토하고, 자신의 목을 할퀴거나 붙잡으며 나뒹굴고 있는 마법사들을 보아도 가엽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이미 한 차례 일어난 소란의 흔적이 뒤이어 눈에 들어왔다.
사람을 잡아먹고, 가구를 삼키며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불이 나고 있는데?"
칼리우스는 고개를 슬쩍 내밀다 말고 깜짝 놀랐다.
[불?]
아라가 하벨의 손가락 틈으로 앞발을 쑤욱 내밀었다.
"아라야. 궁금하겠지만, 봐봤자 좋을 거 없어."
"맞아. 나는… 그래도 좀 봤는데, 아라 너는 보지 마."
나직하게 들려오는 하벨과 살짝 무게감 있는 칼리우스의 말에 아라는 다시 손을 집어넣으며 눈을 꼭 감았다.
[이 몸은 눈을 감았어!]
그제야 하벨은 안도하며 조금 더 자세히 주변 상황을 살폈다.
분명히 먼저 출발한 페트리오가 없었다.
'…그렇다는 건 여기는 그냥 보이는 것처럼 정화제나 담는 곳이라는 말인데.'
하벨은 밀려오는 아쉬움에 엄지를 가볍게 튕겼다.
'우선 제일 먼저 거슬리는 것부터. 살아남은 마법사들은 그다음.'
어차피 지금 퍼진 독을 막아내는 것만으로 힘겨워 아무것도 못 할 테니까.
"햇님아, 연기 좀 잡고 있어 줘."
"알았어!"
하벨은 칼리우스에게 지시를 내리며 자신의 피부를 곤두서게 하는 물체로 향했다.
작업용 선반 앞에서 하벨은 아공간 주머니를 열어 우산을 꺼냈다.
쾅!
힘껏 내리치자마자 작업용 선반이 쪼개지며 그 밑부분에 무언가 그려진 게 보였다.
뭘 그렸는지는 상관없었다.
'부정한 것들은 다 치워버려야지.'
하벨은 손에서 피워낸 불꽃을 던졌다.
[불이 저렇게 나는데 또 불을 내면 어떡해, 대장! 불장난은 나쁘다구!]
아라는 칼리우스가 마법으로 연기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게 막는 걸 보았기에 깜짝 놀랐다.
"이거 부정한 건데?"
[부정한 거였어?]
아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 그러면 이 몸이 눈 감아 줄 수 있어. 불장난은 나쁜데, 부정한 것들은 더 나빠!]
"눈 감았다며?"
[이 몸은 이제 다, 다시 감았어!]
아라가 움찔거리자 하벨은 키득거리며 마법사들에게 걸어갔다.
금방이라도 숨이 꼴딱꼴딱 넘어갈 것만 같았다.
"정화제가 진짜 많다. 이것만 강에 뿌려도 오염이 얼마나 사그라들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하벨은 여기저기 눈에 밟히는 정화제를 바라보았다.
이만한 정화제를 만들고자 정령들과 정령사가 얼마나 노력했겠는가.
하벨은 치솟는 짜증을 느끼며 퍼졌던 독 바람을 지워버렸다.
마법사들은 이미 충분할 정도로 독을 들이마셨고, 뒤에 올 이들을 생각하면 얼른 없애버려야만 했다.
하벨은 정령수를 이용해 물을 끌어오다 넌지시 말을 꺼냈다.
"혹시 도중에 슬쩍 했어? 아니면 그런 생각은 안 해본 걸까?"
"……."
땅을 기고 있던 마법사들이 갑자기 하벨을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쏟아냈다.
죽음을 앞두고 드러나는 표정이 저렇다니.
아직도 제 주인을 지키려는 똥개 같아 우스웠다.
대체 얼마나 세뇌를 당했으면 저럴까.
"그런 생각도 안 해봤구나."
하벨은 불을 향해 물을 뿌렸다.
치이익.
매캐한 연기가 다시 올라오자 칼리우스가 당황하며 연기를 추가로 잡았다.
언제까지 잡고 있어야 하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하벨이 내뿜는 분위기에 입이 열리지 않았다.
"…병신같이."
하벨은 마법사에게 다가가 놈의 머리를 밟았다.
"너 지금 죽어. 그런데 아직도 그런 표정을 지어?"
"…이, 이!"
마법사는 피를 쏟으면서도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하벨의 다리를 붙잡았다.
"이……!"
입안에 가득 고인 피와 침을 질질 쏟아내면서도 어떻게든 자신에게 생채기를 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꼴이 같잖았다.
"그렇게도 네 주인이 좋았어?"
하벨은 자신도 모르게 우산에 쥔 손에 힘을 줬다.
뭔가 저 모습을 보니 화가 났다.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
무언가 떠오를 듯 말 듯 한 기분에 불쾌함이 더욱 몰려왔다.
"그래서 대체… 네 주인이 너한테 뭘 해줬는데?"
살짝 올라간 하벨의 언성과 함께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왜 갑자기 혼자서 열을 올리고 계십니까?"
카샬의 목소리에 하벨은 자신이 우산에 힘을 꽉 주고 있음을 알아챘다.
카샬은 가면을 살짝 들어 숨을 들이마시다 뒤쪽을 향해 손짓했다.
독은 이제 괜찮았다.
카샬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매캐한 연기를 붙잡고 있는 칼리우스와 다 죽어가는 마법사에게 다리를 붙잡힌 하벨.
참 이상한 광경이었다.
영혼이 바뀌기 전이라면 몰라도 지금 하벨이 그렇게 쉽게 다리를 붙잡힐 사람이 아닌데.
"또 무슨 일입니까? 먼저 룰루랄라 가셨으면 신나게 뭐라도 하시고 계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벨은 어깨에 힘을 풀며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이게 무슨 짓이람.
하벨은 마법사를 내려보며 다른 발로 얼굴을 걷어찼다.
퍼억!
"진짜 비밀 통로가 있는 모양이야. 좀도둑은 그쪽으로 간 것 같고."
"찾아보겠습니다."
카샬은 온도계를 꺼낼까 말까 고민하다 자신의 바로 뒤편에서 꿈틀거리는 마법사의 머리에 검을 박아 넣었다.
푹!
귀찮게.
"…제가 거들게요."
헤레스는 하벨을 바라본 뒤 칼리우스에게 달려갔다.
왜 연기도, 손도 하늘 높이 들고 있는 걸까.
"헤… 아니, 비야! 도와주면 너무 고맙지."
칼리우스는 해맑게 말을 꺼냈다.
헤레스는 연기를 아래로 천천히 움직이다 마치 새로운 걸 알았다는 듯 마나의 흐름을 바꾸는 칼리우스의 행동에 그제야 몰랐던 사실을 알았다.
하벨이 자신에게 칼리우스를 소개해준 이유를.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두 손을 꼭 쥐며 기뻐하는 칼리우스의 반응에 헤레스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많은 걸… 보지 못하셨구나.'
헤레스는 그 사실이 안타까웠다.
처음부터 혼자였고, 계속 떠돌아다녔다고 말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달님."
마법사들의 목을 하나씩 그어주던 레디나가 하벨에게 다가가 그를 가볍게 쳤다.
하벨이 흠칫 놀라자 레디나 역시 덩달아 움찔거렸다.
"일부러 그러고 계신 거예요?"
"일부러… 라니?"
하벨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불쾌함에 말투부터 굳어 있었다.
레디나는 피가 묻은 단검을 가볍게 흔들며 손가락으로 하벨의 발밑을 가리켰다.
덩달아 호기심을 느낀 아라가 감았던 눈을 살짝 실눈 떴다.
[대장. 지금 저 사람이 대장을 잡고 있는데?]
아라의 말까지 듣고서야 하벨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조금 전 자신이 걷어찼던 그 마법사가 아닌가.
놈에게 다리를 붙잡힌 그 감각이 이제야 천천히 올라왔다.
깜박.
하벨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눈을 깜박거렸고.
피투성이가 된 누군가가 엉금엉금 기어 자신의 다리를 붙잡는 게 느껴졌다.
덥석!
순간, 하벨의 몸이 흔들렸고.
고개를 든 놈과 시선이 마주했다.
―네놈이… 이겼다고 생각했나?
수족이 자신에게 말했다.
―가엾어라, 용왕. 저놈들은 모든 걸 얻었지만, 너는 다 잃어버렸구나.
저주를 토하듯 놈이 입을 열었다.
―가엾은 널 위해 하나 말해주지. 곧… 그분이 오실 거다. 그분이 널 찾아갈 거다.
'그분이라니?'
지이이잉.
갑자기 지끈거리는 머리 통증과 함께 경고음이 울려왔다.
'이게… 이게 무슨 기억이지?'
처음 보는 기억이었다.
수족이 자신한테 저런 말을 했다니.
놈이 말하는 그분이 누구지.
어서 생각하라고 머리가 말하는 것만 같았기에 하벨은 숨을 멈추고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려야만 했다.
'…그러니까.'
―네놈이 가진 그 열쇠.
설마.
―그건 이제 내 것이 될 테니까.
설마.
자신이 죽었을 때, 자기만 알던 '열쇠'를 언급한 정체 모를 그놈을 말하는 걸까.
[대장……?]
아라의 작은 손짓에도 하벨은 기겁하다 말고 갑자기 다리가 풀려 비틀거렸다.
"…왜 그러세요? 아까 후유증이에요?"
레디나가 다급히 하벨을 붙잡았고, 그의 어깨가 가쁜 숨소리와 함께 들썩거렸다.
[이, 이 몸한테 맛있는 물을 줘서 그러는 거지?]
아라가 자신의 앞발을 보며 울먹거렸다.
"…아니야."
우르르 들려오는 발소리에 하벨은 갑자기 어지러운 정신을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진짜 그것 때문이 아니야."
하벨은 부들거리는 손에 힘을 주며 주먹 쥐었다.
기분 탓일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기억을 되찾는 순간이 점점 빨라지지 않는가.
못 보던 것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내가… 죽은 게. 단지 배신 때문이 아니었다면.'
하벨은 입술을 깨물었다.
'애초에 내가 가졌다던 그 열쇠라는 게 대체… 뭐지?'
끼이익.
갑자기 밖에서 무언가를 미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벨이 고갯짓하기 전에 카샬과 레디나가 이미 문으로 향했다.
"열어!"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아 좀! 약속 좀 제대로 지키자! 내가 이 시간에 한 번 왔냐, 두 번 왔냐?"
끼이익.
카샬과 레디나가 서로를 바라보며 동시에 문을 열었다.
"빌어먹을. 가위바위보 못한 내가……."
자기 키보다 무언가가 가득 쌓인 수레를 밀고 오던 남자가 어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남자는 한 번 더 멍청한 소리를 냈다.
"누구… 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