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그래서 제가…….
* * *
'저게… 정화제였어?'
칼리우스는 하벨이 꺼낸 말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물이 오염된 세상에서 오염된 물을 정화할 수 있는 수단이 정화제였다.
정화제는 아주 소중했고, 모두에게 돌아가야만 한 물건이었다.
그런 정화제를 누군가에게 뺏겨 사람들한테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세상의 멸망에 가까워질지도 몰랐다.
'…그러면 안 돼.'
칼리우스는 옷자락을 꽉 쥐었다.
못된 짓을 한 것처럼 심장이 쾅쾅 울렸지만, 하벨에게도 자신에게도 이유가 있었다.
'티에라 가문은 정화제를 만들어. 나는… 세상의 수호자로서 멸망을 막아야 해.'
칼리우스는 하벨이 저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이해했다.
만약에 자기 앞에 세상을 멸망시킬 사람이 존재한다면 자신은 정말 그 사람을 죽이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그제야 세게 날뛰던 가슴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하벨은 티에라 가문의 사람으로서 정화제를 관리해야 해. …정화제를 건드리는 저들이 나쁜 거야.'
생각과 별개로 칼리우스는 어쩐지 가슴이 아팠다.
"못 알아들었어?"
헤레스의 마법에 비명 한 번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표정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마법사를 바라보던 하벨은 다시 말을 꺼냈다.
콸콸 쏟아지던 놈의 피가 어느 순간 뚝 하고 멈췄다.
"진짜 아직도 못 알아들은 거야?"
하벨이 정령수를 이용해 놈의 피를 잠깐 막자 겨우 정신을 차린 놈은 가쁜 숨을 내쉬고, 몸을 덜덜 떨며 눈동자를 돌렸다.
미친놈들.
미친놈들!
진짜로, 정말 자신의 손목을 자를 줄이야!
"다시 말해줄까?"
저 가벼운 목소리에 마법사는 속이 뒤집히는 기분에 휩싸였다.
식은땀이 온몸을 적시고.
"그래야겠네."
소름이 돋아나며.
"잘 들어봐. 정화제… 어디에서 만들어지고 있어?"
두려움이 꿀렁거려 휩쓸리고, 또 휩쓸렸다.
이럴 때 그 말을 떠올려야 하는데.
아니.
어떤 말이더라.
마법사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마법사 협회에서 장로가 자신의 어깨를 잡으며 무어라 말했던, 이 제분소에 자루에 담긴 정화제를 나르는, 한없이 지겨운 일을 버티게 해준 그 말이 생각이 나질 않았다.
뭐라고 말했더라.
아.
…아.
―…기억하거라. 마법사는 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자다. 마나와 지식이라는, 일반인들은 감히 꿈도 꿔보지 못할 거대한 선물을 안고 태어났으니.
기억이 났다.
"아니. 기회를 이렇게 줬는데도 입을 닫고 있어? 방금까지 들락날락했는데? 여기 정화제도 흘렸잖아?"
하지만 저 말이 이제 다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괴물이 저렇게 웃음기를 띠는데.
잡아 먹힐지도 몰랐다.
모든 게.
와장창.
머릿속에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마법사는 꿈틀거리는 이 두려움을 더는 이길 수 없었다.
아주 강하게 소리쳤다.
"…으으!"
살려달라고.
뭐든 다 말하겠다고.
"풀어줘."
하벨은 헤레스를 보며 말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마법사의 눈동자를 덮었던 얇은 막이 깨지는 듯 보였다.
저게 세뇌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다."
마법사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보였지만, 하벨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다… 알려드리겠습니다!"
마법사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꼭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만 같았다.
"잘했어."
하벨은 마법사를 칭찬했다.
세뇌가 풀려 허우적거리는 마법사에게 지금 필요한 건 기댈 곳일 테니까.
두려움으로 가득 찬 그의 눈동자에 혼란이 깃들더니 갑자기 활짝 웃었다.
'…미친 건가?'
카샬은 그 모습에 흠칫거렸다.
손목이 잘려나갔는데 웃다니.
"저… 저쪽에 두 명이 더 있습니다. 한 명은 머리가 곱슬하고, 다른 하… 한 명은 눈이 파랗습니다."
마법사는 칭찬을 받으려는 개처럼 하벨에게 아부하며 말했다.
"잘했어."
다시금 꺼내는 하벨의 칭찬에 마법사는 입꼬리를 부르르 떨며 올렸다.
"두 명부터 처리해야겠네?"
하벨은 레디나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평소처럼 금방 갔다 올게요."
* * *
화르르륵!
하벨이 마법사가 알려줬던 통로로 들어가자마자 랜턴에 검은 불꽃이 타오르는 게 보였다.
'정화제가 걸렸으니 멸망과 관련된 건 당연하겠지.'
이번에는 다른 경우와 달리 랜턴이 타오르는 이유를 이해했다.
그렇다고 찝찝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자신이 하려는 행동과 멸망이 관련이 있다는 전제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회귀자로서 시간을 역행한 하벨 티에라의 행동과 이를 원래대로 잡으려는 시간의 움직임이 동시에 작용해 이런 사태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열이 받았다.
'…설마 이것도 예상했는가, 하벨 티에라?'
하벨은 비틀거리며 앞서 걷는 마법사를 바라보다 발소리만 들려오는 이 조용한 분위기에 이상하게 가슴이 조여오는 기분을 느꼈다.
원래는 생각했어야 했던, 하지만 생각하지 않았던 의문이 천천히 머릿속에 스며들었다.
고작 인간인 하벨 티에라가 어떻게 회귀자가 될 수 있는가. 누가 하벨 티에라를 도왔다는 건가.
하벨은 기껏 막아두고, 가슴 속에 간직만 했던 수많은 생각이 파도처럼 몰려오는 걸 느끼며 마른 침을 삼켰다.
'휩쓸리지 마라.'
휩쓸리면 위험했다.
류아의 일까지 생각이 나 자신을 덮칠지도 몰랐다.
쏘오옵.
자신이 만든 물을 먹는 아라의 소리에 하벨은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코 밑이 또 뜨거워지며 무언가 흘러내렸다.
[…하.]
아라가 짧게 숨을 내쉬며 앞발을 움직였다.
망토에서 쪼르르 나와 하벨의 목을 꽉 안았다.
[고마워, 대장. 이 몸은 이제 조금 힘이 나.]
헤헤.
아라는 하벨을 향해 웃어주고는 자신을 바라보는 칼리우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계속 자신을 걱정해주었다.
[이 몸은 괜찮아, 용용아. 대장이 준 물을 먹으니까 진짜 힘이 나!]
칼리우스는 슬쩍 하벨에게 다가가 목소리를 낮췄다.
"정말 괜찮아?"
[그러엄. 이 몸은 거짓말 안 해.]
"진짜 신기하다. 아까 나는 네가 죽어가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데."
속닥거리는 칼리우스의 말에 하벨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부정한 것들이 있는 순간, 아라가 평소와 다른 모습이 되어버리니 이건 충분히 놀랄 만했다.
'…아.'
하벨은 뒤늦게 생각이 떠올랐다.
생각에 묻혀 왜 이걸 까먹고 있었던가.
하벨이 용왕의 힘을 끌어와 물로 아라를 살포시 덮었다.
눈을 깜박거리던 아라는 깜짝 놀랐다.
[대, 대장?]
"미안, 아라야."
하벨은 손가락을 들어 아라를 살짝 찔렀다.
지금은 통로를 걷고 있을 뿐이었다.
잠깐이라도 아라를 편안하게 해줬어야 했는데.
[이러면 안 돼, 대장! 방금도 아까도 조금 전에도 막 힘을 썼잖아!]
자신을 압박하던 힘이 깔끔하게 사라졌지만, 아라는 울상을 지었다.
지금까지 하벨이 맛있는 물을 과도하게 끌어오면 어떤 일이 벌어졌던가.
"……?"
하벨 뒤를 따라가던 레디나는 갑자기 허공에 생기는 물방울에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찔렀다.
푹신.
'…아라 님이다.'
레디나는 자신의 손가락을 꼭 쥐며 기쁨을 속으로 참았다.
다시금 조심스레 손을 내밀자 아라가 자신의 손가락을 꽉 쥐여주었다.
'지금 죽어도 좋아!'
하벨은 레디나를 힐끔 바라보다 아공간 주머니를 열어 연락용 아이템을 꺼냈다.
페트리오에게 연락을 걸고, 바로 끊었다.
아마 페트리오는 자신의 신호를 알아챌 테지.
자신이 비밀 장소에 왔노라고.
아공간 주머니에 연락용 아이템을 집어넣으려던 순간, 갑자기 고개를 돌린 카샬과 시선이 마주했다.
하벨은 흠칫 놀랐다.
미치셨습니까.
그 소리가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듯했다.
하벨은 카샬이 말을 꺼내기 전에 신경 끄라며 손을 휘휘 저었다.
"여기 앞… 입니다."
마법사는 정신을 살짝 놓은 듯한 목소리를 앞을 가리켰다.
레디나가 소란을 막기 위해 위에 마법사 두 명을 죽이고 놈들이 맞냐며 머리 두 개를 가져왔을 때부터 이미 정신을 놓은 상태였다.
그게 죄책감이든 뭐든 상관없었다.
알아서 숨겨진 스위치를 조작하는 마법사의 모습에 하벨은 가만히 뒀다.
덜커덩.
무언가 움직이고 '투투투'하는 소리가 이어지면서 벽이 열렸다.
"…여기에 많이 있어."
벽이 움직이자마자 칼리우스가 하벨의 망토를 가볍게 흔들었다.
마법사들이 많았다.
킁킁.
뒷말을 이으려던 칼리우스는 피 냄새에 하벨을 올려다보았다.
'왜 하벨한테서 피… 냄새가 나는 거지?'
하아.
앞에서 카샬이 꺼내는 한숨 소리가 뒤를 이었다.
"몇 명이 있어?"
하벨이 말을 꺼내고는 가면을 살짝 들어 옷으로 입가를 쓱 닦았다.
검정 옷을 입었지만, 무언가 묻어난 게 슬쩍 보였다.
[이것 봐! 대장 피나잖아! 그만해! 이 몸은 이제 괜찮아!]
칼리우스는 아라가 꺼내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혹시 아파?"
"아니. 그래서 몇 명이 있어?"
"…음. 24명 정도 있어."
칼리우스는 그 대답에 어쩐지 가슴이 살짝 갑갑했다.
왜 카샬이 하벨을 그렇게 닦달하는지 알 것 같기도 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용인 자신도 사람이 휘두르는 검에 몇 번이나 베여서야 피를 흘린 적이 있었는데 너무 아파서 얼마나 엉엉 울었는지 몰랐다.
하벨은 자신보다 더 약한 용이니까 껍질이 튼튼할 리는 없었다.
아파도 참는 거라면 하나밖에 없질 않은가.
"있잖아, 달님. 혹시 아픈 게 즐거워?"
푸흡.
레디나의 웃음이 바로 터졌다.
억지로 입을 막고 참아보나, 무척 힘겨워 보였다.
"……?"
하벨은 칼리우스가 꺼내는 순진한 저 물음에 당황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뭐 때문에 저런 질문을 했는지 이해해도 도무지 받아줄 수 없었다.
[어, 어, 대장은… 대장은 그러지 않… 나?]
열심히 해명하려던 아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벨이 고통을 잘 참는 건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아요."
헤레스가 차분히 칼리우스에게 변명했으나, 그 모습이 하벨은 더 기가 찼다.
세상에 아픈 걸 즐기는 사람도 있겠다만은 적어도 자신은 아니었다.
"보셨습니까? 다 이유 없이 나오는 말이 아닙니다. 이래서 평소 행실이 중요한 겁니다."
의기양양한 카샬의 말이 제일 화가 났다.
"…집중하자."
하벨은 벽이 열리는 걸 보며 목소리를 깔았다.
이제부터 다시 긴장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제가!"
벽이 완전히 열리자 마법사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하벨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돕겠습니다!"
목소리가 갈려졌고, 핏줄이 곤두선 눈동자에 어떤 의지가 보였다.
하벨은 그 의지가 무엇인지 알아챘다.
'…동반 자살하겠다는 거네?'
하지만 하벨은 말리지 않고 차분히 앞을 가리켰다.
어차피 죽이려 했고, 도움이 되겠다는데 뭘 망설이겠는가.
마법사는 그제야 고삐가 풀린 망아지처럼 돌진했다.
"안 말리십니까?"
카샬이 묻자 하벨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굳이 왜? 어차피 소란을 일으키려고 왔는데. 이럴 때일수록 허를 찔러야지."
퍼엉!
마법사가 무얼 했는지 요란한 소리가 안쪽에서 들려왔다.
폭탄 하나가 던져지고.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움이 넘쳐 흐르는 지금이야말로 가장 숨을 다급히 내쉴 때가 아닌가.
"자. 다들 잠깐만 뒤로 가 있어."
하벨은 모두를 뒤로 물렸다.
"뭘 하시려고 그럽니까?"
카샬이 날을 세우며 묻자 하벨은 장난기를 가득 담아 물었다.
"습격의 꽃이 뭔지 알아?"
"그게 또 무슨 말씀입니까?"
카샬은 기가 찬 듯이 반응하고 아라가 앞발을 들었다.
[그건 모르겠어. 이 몸은 연회의 꽃은 알고 있는데.]
"응?"
칼리우스가 되묻자 아라는 자신만만하며 말했다.
[연회의 꽃은 피야. 그런데… 습격의 꽃은 뭔지 모르는데.]
아라는 곰곰이 생각하다 앞발을 흔들었다.
[정답, 단검!]
"정답, 독!"
아라와 레디나의 목소리가 겹쳤다.
"맞아. 독이야."
금세 아라의 입이 삐죽 튀어나오자 하벨은 키득거렸다.
습격에 독만큼 위험한 게 어디 있을까.
딱.
하벨이 손가락을 튕기자 아라는 삐죽 내민 입으로 하벨의 어깨에 기댔다.
정령수가 몰려오자 하벨은 가면을 가리켰다.
"조심해. 나도 처음이라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하벨은 왼손에 바람. 오른손에 독을 꺼냈다.
바람을 최대한 억눌러 천천히 움직이도록 한 뒤 바람결을 따라 독을 집어넣었다.
[오오!]
아라가 입을 벌렸다.
검게 변한 바람이 하벨의 장갑을 두르며 나풀거리자 그가 쓴 달 무늬가 들어간 가면하고 그렇게 어울릴 수가 없었다.
'방금 소리가 그렇게 깊지 않았다.'
하벨은 조금 전 상황을 떠올렸다.
처음 마법사가 들어간 뒤로 얼마 되지 않아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는 건 이 앞에 바로 적들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하벨은 독을 품은 바람을 최대한 억눌러 물로 감쌌다.
새롭게 부른 물로 작은 활로 모습을 바꾼 뒤 바람을 감싼 물을 다른 물과 연결해 화살처럼 만들었다.
시위를 당기고 그대로 쏘았다.
슈우욱!
하벨은 날아가는 물 화살을 느끼며 독바람을 감싼 물을 지워나갔다.
파아아아.
압축된 바람이 퍼지는 소리가 들리며 입구까지 독을 품은 바람이 아른거렸다.
하벨은 바람을 조절하며 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검은 바람에 감싸진 그 모습은 영락없는 악당처럼 보였다.
"천천히 따라와. 안 그러면 죽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