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말해줘
* * *
"그리고… 레디나랑 카샬이랑 페트리오랑 헤레스도 날 위해 와줘서 엄청 기뻤어!"
칼리우스는 숨을 한 번 내쉰 뒤에야 자신을 바라보는 한 명 한 명에게 고마움을 가득 담아 말을 꺼냈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을 향한 시선이 더 따뜻해지자 칼리우스는 이 기쁨을 숨길 수가 없었다.
오늘 처음으로 세상에서 동떨어진 자신이 어딘가에 속한 것 같았다.
그래서 신기했다.
하벨에게 말한 것처럼 자신에게 몰려드는 마법사들도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이 넓어진 기분이었다.
한 걸음이 아니라 둘, 아니, 세 걸음 이상이나 커졌기에 다른 게 보였다.
칼리우스는 하벨을 바라보았다.
'하벨은 나를… 세상의 수호자로서 보지 않아.'
-지식은 지식일 뿐, 알 게 뭐야. 행동하는 건 너잖아. 끌려다닐 필요 없다고.
그 말을 들었을 때 이상하게 가슴이 후련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칼리우스는 다시금 해맑게 웃었다.
'내가 세상의 수호자니까 지켜줘야지.'
일단 한 걸음부터.
"그……."
도중에 걸어오던 페트리오는 당장 꽃이라도 뿌려질 분위기에 흠칫했지만, 일단 말부터 꺼냈다.
"…도련님."
"눈치도 없긴."
"왜 또 시비인데?"
페트리오는 난데없는 자신에게 핀잔을 퍼붓는 카샬의 말을 바로 맞받아쳤다.
하여튼 말만 꺼내면 시비라니.
"뭐 좋은 거 알아냈어?"
하벨이 방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수많은 시선이 쏟아졌다.
특히 헤레스의 시선이 날카로웠다.
"정화제는 만능이 아닙니다, 도련님."
"당연히 아니죠."
카샬이 덥석 받았고, 레디나는 지그시 하벨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는데요, 도련님?"
"계속해봐, 좀도둑."
하벨은 그들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흘리며 페트리오를 재촉했다.
자신이 이런 시선을 얼마나 오래 받았던가.
방금 맞은 정화제 덕에 울렁거리던 속도 어느 정도 가라앉았기에 이 정도면 움직일 만했다.
페트리오는 주변의 시선을 살피다 입을 열었다.
"그게, 음, 어디에서 자금줄이 흘러나왔는지 알아냈습니다."
"거기가 어딘데?"
하벨이 활짝 웃었다.
"제분소입니다."
[잠깐만. 제분소라고?]
정령들은 '제분소'라는 말에 발끈했다.
방앗간 같은 곳에 저렇게 반응하는 걸 봐서는 정령들이 꺼낸, '정령사 사냥'과 관련된 게 아닐까 싶었다.
"이미 알고 있었어?"
하벨이 묻자 정령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알다마다. 부정한 것들이 얼마나 널려 있는데.]
[맞아! 거기에서 정령사들이 사라졌어!]
[그 위치라면 우리가 알고 있어. 안내해줄 수 있어.]
정령들이 앞다투어 말했지만, 하벨은 그들을 진정시켰다.
"일단 자리부터 옮겨야겠어. 너무 소란스러웠잖아?"
이렇게 요란스러웠는데 경비병들이 출동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경비병들에게 붙잡히면 조용히 후드를 눌러쓴 보람이 없질 않은가.
* * *
"…대장한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크라마의 사람 중 '게렌'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입을 열었다.
아까 '취업' 어쩌고 하는 말을 내뱉은 사람이었다.
"반가워요."
하벨이 손을 내밀자 게렌은 멈칫거리며 악수했다.
"그, 달님… 이시라고요?"
"맞습니다."
하벨은 '달님'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크라마의 재치에 흡족해하며 말을 꺼냈다.
자신이 잡은 목줄은 크라마일 뿐, 그의 밑에서 일하는 사람까지는 아니었다.
혹시나 크라마가 자신의 정체를 밝혀도 상관없었다.
레디나가 이미 저들을 기억했으니까.
"직접 만나니 뭔가 다릅니까?"
하벨이 묻자 게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넌지시 페트리오를 보았다.
"뭔 짓을 했으면 미리 고백해."
카샬이 슬쩍 찌르자 페트리오는 단번에 인상을 썼다.
"너나 고백해. 난 아무것도 안 했으니까, 꽃님아."
"…풉."
갑자기 훅치고 들어 오는 말에 레디나는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페트리오야 어차피 크라마와 같은 곳에 있기에 시원하게 얼굴을 공개할 수 있지만, 하벨과 자신들은 아니었다.
잃을 게 많았다.
긴급하게 이뤄진 짧은 회의에 가면단의 이름을 빌리기로 했고, 오랜만에 나온 카샬의 꽃무늬 가면에 한참을 웃느라 배가 너무 아팠다.
"…빌어먹을."
카샬은 이를 악물었다.
가면단 놀이는 페트리오에게 넘기면서 이제 끝난 게 아니었나.
이러다 영원히 꽃무늬 가면과 함께 하는 건 아닌지 불안하기까지 했다.
불쑥 하벨의 시선이 느껴지자 카샬의 가슴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 그게 아닙니다. 그냥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페트리오 씨의 표정을 살핀 겁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흐르자 게렌은 호들갑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뭐가 됐든, 티에라 가문에 땅을 팔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게렌이 고개를 숙이자 하벨은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크라마가 어떻게 설명했는지 모르겠지만, 티에라 가문과 가면단은 별개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밖에서 봤을 때, 그렇게 인식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지금도 페트리오가 '가면단'이라는 이름을 사용해 뒷세계에서 세력을 넓힌다는 걸 알고 있으니.
"그렇게 고마우면 이번 일을 열심히 도와주세요."
하벨은 넌지시 말을 꺼냈다.
"물론입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마법사 협회 일이잖습니까."
순간, 게렌의 눈빛이 변했다.
강렬한 증오에 하벨은 그제야 믿고 맡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되도록이면 부정한 것들도 같이 없애주셨으면 합니다. 혹시 그게 뭔지 아십니까?"
"모를 수가 없습니다. 일부러 자연의 흐름을 역행한 것들을 배치해 정령님들을 괴롭히잖습니까?"
[맞아! 진짜 싫어! 왕께서 계셨다면 다 없애주셨을 텐데.]
정령이 소리치다 시무룩함을 드러냈다.
'…정령왕은 다르다는 건가?'
하벨은 그 말을 그냥 흘리기가 어려웠다.
"그렇지 않아도 준비는 하고 있던 참입니다. 정령님들이 보이지 않아도 알면서 모른 척할 수 없잖습니까? 그럼, 먼저 가서 부정한 것들을 없애면서 오시기 편하게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게렌은 뒷덜미를 문지르다 다시금 고개를 숙이고는 가게에서 벗어났다.
정령들이 하벨을 향해 입을 열려던 차 레디나와 페트리오가 동시에 하벨을 불렀다.
"도련님."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불러?"
"제가 따라갈까요?"
레디나가 슬쩍 물었고, 페트리오는 뒤이어 입을 열었다.
"이번 일에 얽힌 자들은 크라마 몰래 차근차근 조사해두겠습니다."
당연하게 들려오는 말에 헤레스는 어깨를 들썩거렸다.
"…따라가고, 조사요?"
"별거 아니니까 놀랄 필요 없어."
태연한 하벨의 목소리에 헤레스는 더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헤레스 씨를 조사한 적은 없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괜한 불똥이 튈까 페트리오는 말을 꺼냈다.
"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말씀하지 않으셔도 알고 있어요."
헤레스는 살며시 웃었다.
만약 하벨이 알았다면 지금 자신하고 맨정신으로 볼 수 없을 테지.
하벨의 손에 감긴 붕대를 갈던 헤레스는 또 망설였다.
벌써 심장이 뛰었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하벨의 말에 헤레스는 흠칫거렸다.
하지만 하벨은 자신이 아닌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이제 말해도 되는 거야?]
정령은 아라를 껴안으며 물었다.
[조금 더 기다릴 수 있어. 아라가 진짜 부드러워. 말랑말랑하고.]
[그래, 그래. 아라도 아라지만, 세상에, 용이라니.]
[이름이 칼리우스라고?]
정령 중 일부는 칼리우스한테 이름을 알려주거나 머리카락을 만지거나 쿡쿡 찔러보며 신기함을 감추지 못했다.
강아지를 닮은 정령이 문득 하벨에게 다가왔다.
[있지, 하벨.]
"그래."
[아까도 말했지만, 최근에 정령사들이 사라지고 있어. 그건 정령도 마찬가지고.]
"정령과 정령사들이 사라진 곳이 바로 좀도둑이 말한 '제분소'라는 거야?"
[우린 그렇게 생각해. 거기만 부정한 것들이 둘려 있으니까.]
"사라지는 이유는 모르고?"
[나도 알고 싶어. 하지만 다가갈 수 없으니까 너무 속상해.]
정령의 귀가 축 처지며 시무룩함을 드러냈다.
부정한 것들을 없애 달라고 부탁했던 정령사도 사라지던 와중에 어떻게 재차 부탁하겠는가.
정령사가 보이면 도망가라고 말하는 게 전부였다.
"걱정하지 마. 어차피 그곳을 박살 내려고 했어."
하벨이 손가락을 들어 정령의 볼을 가볍게 찌르자 정령은 눈을 크게 떴다.
곧이어 정령들의 시선이 하벨에게 향했다.
하벨은 흠칫거렸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너한테 주지 않은 게 있어.]
정령이 꺼낸 말에 아라는 눈을 크게 떴다.
[…아! 이 몸은 그게 뭔지 알겠어!]
[그래. 네가 생각한 게 맞아, 아라야.]
오래간만에 맛본 승리에.
사라졌던 용이 나타났다는 소식에.
너무 즐거워 잊고 있었다.
[하벨!]
정령들이 하벨을 불렀다.
하벨이 자신들을 도와주었다.
설령 의도한 게 아니든 고마운 건 고마운 일이었기에 보답해야 했다.
정령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실실 웃다 누가 먼저 할 것 없이 하벨에게 우르르 달려들었다.
하벨이 조금처럼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해결해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이미 충분히 받았으니.
[우리가 축복을 내려줄게!]
"……?"
하벨은 깜짝 놀랐다.
이 일로 교감을 해준다니.
대체 얼마나 마법사들이 싫었던 걸까.
[시작한다?]
정령들은 배시시 웃으며 교감을 시작했다.
간질거리는 힘이 하벨의 몸 구석구석에 퍼져나갔다.
아라가 하벨에게 찰싹 달라붙자 간질거리는 힘이 보드랍게 변하며 정화제를 맞았음에도 자신을 괴롭히던 불순물을 빠르게 녹여 내렸다.
'숨쉬기가 한결 편해지네.'
또다시 하벨의 귓가에 그리운 파도 소리가 퍼져갔다.
쏴아아아.
―…왕께서는 어디로 가신 걸까?
슬픔에 찬 정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정령들의 기억인가.'
하벨은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저들의 기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혹시 왕께서 우릴 버린 걸까?
―그럴 리가 없어! 왕께서 우릴 버릴 리가 없다고.
―그러면 왕께서는 어딜 가신 건데? 바다는 죽어버리고, 물이 오염된 지금까지 왜 나타나지 않으신 건데?
정령이 꺼내는 원망이 목소리에 가득 묻어났다.
―…설마 왕께서 돌아가신 게 아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인간들을 죽이지 말라는 왕의 명령은 아직 유지되고 있다고! 왕께서 돌아가실 리가 없어. 분명… 분명 어딘가에 계실 거야. 우리가 찾자.
―응. 우리가 찾는 거야! 이번에는 우리가 왕을 돕자.
눈 앞에 펼쳐진 기억이 사라지고, 자신을 바라보는 정령들의 행복한 시선이 쏟아졌다.
[어때?]
[몸은 가벼워졌어? 힘이 막 생겼어?]
'저들은 지금 정령왕을 찾고 있는 건가.'
정령들의 행복한 시선을 일그러트리고 싶지 않았기에 하벨은 그 말을 묻지 않았다.
머릿속에 힘 하나가 생겨나고, 다섯 번째 막으로 향하는 얇은 실이 만들어졌다.
'…이 정도로는 다섯 번째 막까지는 만들어지지 않는 건가?'
하벨은 조금 아쉬움을 느꼈지만, 원치 않게 얻은 보상에 기뻤다.
"고마워."
[고마워할 필요 없어. 네가 먼저 우리를 위해 움직여 줬잖아? 축복은 누구한테나 균등해야지.]
정령은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아까 보니까 네 순환의 길에 신기한 게 많던데.]
[아니야. 대장이 가진 순환의 길에는 나쁜 것들 투성이인데?]
정령이 꺼낸 말에 아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하벨한테 이상한 얇은 막도 있고, 불순물도 진짜 많고, 불순물이 녹는가 싶더니 그 이상한 막까지 차오르고. 내가 보기엔 좀 신기한데?]
"원래 이런 거 아니었어?"
하벨이 묻자 정령들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 적어도 나는 이런 순환의 길을 본 적이 없어.]
[하벨, 우리 말에 심각해질 필요 없어. 우리라고 모든 정령사에게 정령수를 준 적은 없으니까. 정령사마다 순환의 길이 다르잖아?]
정령들은 가볍게 훌훌 털었다.
자신들이 모든 것에 기준이 될 수 없을 테니까.
"하긴 그렇지. 덕분에 몸이 한결 가벼워졌어."
[이 몸은 지금 기분이 엄청 좋아! 뭔가 손에 넣을 듯 아닐 듯한 감각이 들어!]
아라는 앞발을 흔들며 대답했다.
"…도련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혹시 교감을 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몸이 가벼워졌다는 말에 헤레스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방금 끝낸 참이야."
"괜찮으시다면… 제가 잠깐 도련님의 상태를 확인해 봐도 될까요?"
헤레스는 마른 침을 삼켰다.
정령과의 교감과 물의 저주 사이에 관계를 알고 싶었지만, 정령사는 상대적으로 물의 내성이 뛰어난 편이었다.
물론, 이 내용과 관련된 논문이 있다고 해도 헤레스는 지금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벨이 앓는 물의 저주는 변종이지 않은가.
"얼마든지 확인해도 괜찮아. 나도 궁금하던 참이니까."
일단 반영구 정화제로 물의 저주 증상 중 하나인 불순물, 즉 '푸른 돌'을 녹일 수 있다는 건 확인했었다.
교감까지 그렇다면야 치료제가 근처에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물의 저주라는 말에 하품하던 카샬이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런 일이라면 망설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헤레스 씨. 저는 더 기다릴 수 있습니다."
정령들은 보이지 않으니 관찰할 수도, 연구할 수도 없지만 이건 아니었다.
헤레스는 호흡을 참기 전에 갑자기 시선이 쏠리자 살짝 머뭇거렸다.
'집중하자.'
헤레스는 입가를 핥다 숨을 참았다.
하벨이 제 몸을 진찰할 수 있게 허락했기에 마나로 푸른 돌이 모인 곳을 더듬거려 나갔다.
위치를 파악한 후에 푸른 돌 자체를 매개체로 삼아 천천히 흔들었다.
서로 부딪힐 때 나는 소리가 방금 진찰했을 때와 달랐다.
'푸른 돌들이 녹아내렸…….'
헤레스의 눈동자에 기쁨이 어리던 차, 갑자기 몸을 부풀려 나가는 몇몇 푸른 돌들이 마나를 타고 느껴졌다.
'잠깐만. 이, 이렇게 빨리 푸른 돌들이 증가한다고?'
헤레스는 벌어지는 입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방금 정령과의 교감으로 줄어든 푸른 돌이 어떻게 저렇게 빨리 증가한단 말인가.
하벨은 지금까지 정령사가 아니었기에 발견하지 못한 증상이었다.
반영구 정화제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대체… 도련님은 뭘 앓고 계신 거야?'
헤레스는 하벨이 앓는 물의 저주를 다른 방향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