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쥐었다(3)
* * *
하벨이 물로서 줄줄이 엮은 마법사들은 꼭 낚싯줄에 걸린 활어처럼 움직였다.
"으아아아…!"
콰콰콰콰!
한 마법사가 뭉치고 있던 여러 철 조각들이 떨어지면서 마법으로 균형을 잡고 있던 폐가까지 무너져내렸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는 오직 도망쳤던 마법사들이 끌려오는 모습만 눈에 들어왔다.
하벨의 뒤에 서 있던 페트리오가 검을 뽑아 달려갔다.
하벨이 만든 소중한 기회를 날릴 수야 없지.
"…와. 이거 월척인데요?"
레디나가 연기에 휘감겨 나타났다.
이렇게 떠먹여 주다니.
자신의 발밑에서 꿈틀거리는 마법사들을 보자 저절로 웃음꽃이 피어났다.
"도련님께서는 손에 피를 묻히지 마세요. 제가 갑니다."
하벨이 한 번 더 움직이기 전에 헤레스가 그에게 따끔하게 경고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들은 소리인데.'
하벨은 레디나와 페트리오가 꺼냈던 말을 떠올리다 시선을 올렸다.
주변에 나뒹군 건물 자재들이 헤레스를 따라 움직였다.
"다들 물러나세요."
헤레스는 레디나를 포함, 저 마법사들을 죽이러 오는 이들에게 단호하게 말하며 한 번 더 숨을 참았다.
'죽여도 내가 저놈들을 죽이는 게 맞아.'
건물 자재들을 올렸다.
"자, 잠깐만!"
그들이 무어라 말해도 헤레스는 정확히 마법사들 머리 위로 건물 자재를 떨어트렸다.
콰직!
머리가 으깨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한 놈은 살려뒀습니다, 도련님."
헤레스는 뒤를 돌았다.
툭.
마지막에 떨어진 건물 자재는 마법사 바로 옆에 떨어졌다.
마법사가 공포심에 부르르 떨다 기우뚱하며 쓰러지는 자재에 깔렸다.
"…으흡."
마법사는 묵직한 무게에 숨을 토했다.
"아……. 아쉬워라."
레디나는 손에 쥔 단검을 소매 속에 숨기며 시체를 툭 건드렸다.
레디나가 꺼낸 말에 헤레스는 안경을 올리며 눈을 크게 떴다.
"에이, 그냥 해본 말이에요. 피는 안 묻히는 게 좋잖아요, 언니?"
"어… 언니요?"
"계속 볼 사이라면서요. 딱딱하게 레디나 씨 붙이면 뭐 해요. 레디나라고 불러줘요."
"하지만 다들 서로 말을 높이던데요?"
헤레스는 '카샬만 빼고'라는 말을 삼켰다.
"아, 저는 반말하면 너무 건방지게 들릴 수 있어서 자제하려고 그러는 거예요. 그리고 카샬 봐요. 제일 편안하잖아요?"
레디나는 신경질을 얼굴에 가득 담은 채로 걸어오는 카샬을 가리켰다.
"…도련님."
이를 악문 카샬의 목소리에도 하벨은 대응하지 않았다.
아니, 대응할 수 없었다.
땅이 울렁거릴 정도로 어지러움이 몰려와 천천히 발을 뒤로 움직이다 기어코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지만, 정령들이 자신을 붙잡았다.
[너 진짜 허약하잖아? 하지만 멋졌어! 개미처럼 약삭빠르게 도망치는 저놈들을 네가 잡았을 때 내 속이 다 후련했다니까?]
[물의 힘을 그렇게 끌어올릴 줄이야. 룬델 이외에는 못 봤는데.]
[룬델? …잠깐만.]
정령들이 긴가민가하다 하벨의 후드를 살짝 젖혔다.
정령들이 하벨을 보더니 눈을 깜박거렸다.
[하벨… 티에라?]
[하벨 티에라라면 룬델 아들?]
[뭐야, 너 우릴 못 본다며? 난 그렇게 들었는데.]
[나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이럴 줄 알았습니다! 가만히 계시면 어디가 덧납니까? 지금 도련님께서 꼭 움직여야 할 상황이 아니잖습니까."
갑자기 쏟아지는 정령들의 질문과 카샬의 잔소리에 하벨은 정신이 없었다.
속도 울렁거리는 게 무언가 토해버릴 것만 같았다.
네 번째 막이 생긴 상태라 널널할 테고, 아직 정령수로 힘을 몇 번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검은 물의 후유증이 이렇게 큰가 싶었다.
"…미안하지만, 한 명씩… 말해줄래?"
하벨은 숨소리를 섞으며 말했다.
[아니. 지금은 이게 더 필요하겠다 싶어.]
정령들은 하벨을 향해 씩 웃었다.
[잘했어, 하벨!]
하벨이 마법사를 물리쳐주지 않았던가.
저 못된 마법사들이 정령사를 사냥하기 시작하면서 얼마나 곤욕을 치렀는지 아무도 모르겠지.
자신들은 일반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으니까.
[네가 우릴 도왔어!]
정령들은 다시 힘껏 하벨에게 말했다.
정령사가 무조건 좋고, 사랑스러운 건 아니지만, 그들이 없으면 자신들도 존재하기 어려웠다.
그런 세상과의 유일한 소통구인 정령사가 저 마법사들 때문에 사라지고 있었다.
그냥 다 같이 사이좋게 지내면 왜 안 되는 건지.
마법사들이 미웠다.
놈들을 죽이고 싶었지만, 머릿속에 정령왕께서 남긴 명령이 자신들을 붙잡았다.
―인간들을 죽이지 말거라.
그 터무니없는 명령에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숨죽이는 것뿐이었다.
자신들이 반격하면 그 일대가 모조리 부정한 것들로 채워져 다시는 갈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 약점을 퍼트린 건 우습게도 정령사들이었지만, 일부만 보고 전체를 매도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정령들은 하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마워.]
이렇게 자신을 위해 움직이는 정령사들을 보면 가슴이 뭉클해질 때가 많으니까.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천만에."
하벨은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는 정령들의 손길에 덩달아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정령들의 얼굴이 급히 굳어졌다.
[…피!]
[피 나잖아!]
하벨의 입가에 흘러내리는 건 피였다.
'어쩐지 속이 울렁거리더라니.'
하벨의 허리가 아래로 휘자 카샬이 다급히 손수건을 건넸다.
"…하. 내 이럴 줄 알았습니다."
페트리오가 카샬을 밀치며 물었다.
"괘, 괜찮으십니까, 도련님?"
입을 가린 하벨의 손수건이 붉게 물들었다.
"…노, 놀라지 마세요, 도련님."
헤레스의 표정이 얼어 있어 누가 봐도 놀란 건 그녀였지만, 필사적으로 하벨을 달랬다.
"오염된 물은… 도련님께 독이고, 그 독의 영향으로 순환의 길 말고도 불순물이 늘어난 상태라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놀라지 마세요. 일시적인 현상입니다. 오, 오히려 엄청난 겁니다. 이렇게 버티고 있다는 건 어쩌면 내성이 늘어났을 수 있다는 좋은 소식일 테니까요."
헤레스가 숨 한 번 쉬지 않자 하벨은 피식거렸다.
"…놀라지 않았으니까, 진정해 헤레스."
"전… 진정했어요, 도련님."
"숨 좀 들이켜고."
그 말에 헤레스가 숨을 들이켰다.
후.
하.
헤레스가 한층 차분해지자 하벨은 고개를 돌려 페트리오를 보았다.
"좀도둑, 이제… 다음 일을 해야지."
하벨의 목소리는 밝았다.
애초에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는 마법사 협회의 자금줄을 알아내기 위함이 아닌가.
"저놈의 목을 비틀어 어디에서 돈줄이 나오는지 물어야 하지 않겠어?"
하벨의 재촉에 페트리오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알겠습니다, 도련님. 알겠으니까, 그냥 앉아 계십시오. 제가 움직이겠습니다."
아마도 자신이 하지 않으면 하벨이 직접 움직일 테지.
"아니, 나도 같이 가."
하벨이 움직이자 정령들이 그의 팔을 당겼다.
[어딜 가?]
[그래. 인간은 피를 토하면 엄청, 엄청 상태가 안 좋은 거랬어.]
"잠깐만, 나는 진짜 괜찮으니까 이거 놔줘. 내가 저놈의 배라도 걷어차야 속이 후련하니까."
망할 마법사 협회 소속 마법사가 아닌가.
하벨은 휘청거리면서 앞으로 나아가려고 힘을 줬지만 조금도 나아가지 않았다.
'몸도 작으면서 힘은 왜 이렇게 강한 건데……?'
혹시 아라도 지금보다 더 크면 이렇게 될까.
'…아차. 아라.'
아라가 아직도 오지 않았다.
[폭력은 나쁜 거니까 얌전히 앉아 있어.]
갑자기 정령들이 자신에게 친절해진 건 나쁘지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말릴 줄은 몰랐다.
"잘하고 계십니다, 정령님들."
카샬은 하벨 근처에 피어난 꽃향기가 아니더라도 허공에 매달린 듯 하벨의 다리만 움직이는 저 모습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지금 저놈 움직이잖아."
하벨이 말을 꺼내자 카샬과 페트리오가 고개를 돌려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자제에 깔려 기절한 줄 알았더니 천천히 움직이질 않는가.
'마법을 사용하게 둘 수 없지.'
페트리오는 마법사의 호흡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저렇게 숨이 찬 채로 쉽게 마법을 사용할 수 없을 테지만, 뭐든 확실한 게 좋았다.
"알겠습니다. 확실히 기절시키죠."
카샬이 뒤를 돌자 페트리오는 검을 꺼내 곧바로 마법사를 향해 던져버렸다.
정확히 다리에 꽂히자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악!"
"자 이제 해결됐습니다. 그러니 도련님께서는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치료받으십시오. 제가 알아서 손 좀 보겠습니다."
꽤 묵직한 페트리오의 목소리에 하벨은 눈을 깜박거렸다.
언제나 꼬리를 흔들던 개가 갑자기 자신에게 이를 들이민 것 같은 기분이지 않은가.
페트리오는 하벨에게 고개를 가볍게 숙인 뒤 놈에게 걸어갔다.
"어떻습니까, 헤레스 씨?"
카샬이 입을 열었다.
괜히 멋진 척하는 페트리오가 꼴사나웠지만, 하벨이 잠잠해지니 시비를 걸 마음이 싹 사라졌다.
"잠시만요."
헤레스는 하벨의 망토를 젖혀 정화 장치를 살폈다.
페트리오를 살짝 멍하게 바라보던 하벨은 그제야 살짝 자유로워지자 고개를 돌리다 아라와 칼리우스하고 시선이 마주쳤다.
하벨의 시선에 한 걸음도 떼지 못한 칼리우스와 아라가 그제야 달려왔다.
[대장!]
"하… 아니, 도련님!"
그들의 외침에 하벨은 방긋 웃었다.
당연히 아라와 칼리우스가 무사할 거라 생각했지만, 하벨은 뒤늦은 안도감을 느꼈다.
아라와 칼리우스 뒤쪽에 크라마의 사람들이 주변을 살피며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도련님의 상태는 어때요? 저놈의 다리를 분지를까 생각하다가……."
레디나가 소리 없이 헤레스 옆에 걸어오자 헤레스는 기겁했고, 덩달아 하벨까지 놀랐다.
"지, 진정해요, 언니. 나예요. 나."
덩달아 놀란 레디나는 헤레스를 달랬다.
하벨은 살짝 놀라는 정도라 재미있었는데 헤레스는 자신이 심장을 떨어트렸나 싶을 정도로 놀라기에 식은땀이 살짝 났다.
"…미안해요. 지금 좀 긴장해서요."
헤레스는 자신을 달래며 말했다.
"그래 보이네요. 진정해요. 혹시 전투는 처음이에요?"
레디나는 헤레스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아뇨. 전투라면 익숙해요. 단지, 도련님의 상태를 이렇게 눈앞에서 목격하니까 뭐라고 해야 하나. 그냥 긴장돼서 그래요."
"하긴 저도 그랬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레디나는 무언가에게 잡힌 듯한 하벨의 모습에 실실 웃었다.
아마도 정령들이 붙잡고 있을 테지.
"그런 것치고 되게 즐거워 보이는데?"
하벨이 의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자 레디나는 억울한 표정을 한껏 지었다.
"저 마법사의 다리를 부러트리려다가 도련님이 걱정돼서 그냥 이쪽으로 왔잖아요?"
"좀도둑이 저쪽으로 갔기 때문이 아니라?"
하벨이 정곡을 찌르자 레디나는 슬쩍 눈길을 돌렸다.
"일단 앉아주세요, 도련님."
헤레스의 말에 하벨은 점점 다가오는 아라와 칼리우스를 보며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헤레스는 마법을 사용해 하벨을 진찰했다.
[대자아앙!]
아라가 달려들자 하벨의 몸이 살짝 흔들렸다.
하벨을 바치고 있던 정령들이 아라를 보자 눈을 크게 떴다.
분명 처음 보는데 왜 이렇게 친숙한지 몰랐다.
[뭐야, 정령인데 되게 작네?]
[귀여워!]
정령들은 즐거워하며 아라를 살포시 찔렀다.
하지만 아라는 정령들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하벨을 꽉 안았다.
[이 몸은 대장하고 떨어져서 엄청 무서웠어. 어헝.]
"엄청… 신기했어."
칼리우스는 하벨을 빤히 보며 아직도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라를 토닥거리던 하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기하다니?"
하벨이 묻자 칼리우스는 하벨의 눈높이에 맞춰 자리에 앉았다.
"도련님. 잠깐이라도 입 좀 다무시면 안 됩니까?"
가만히 하벨을 보던 카샬이 답답함을 호소했다.
저 입은 기절하는 것 외에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괜찮아."
하벨은 카샬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듣고 따끔한 주삿바늘이 피부에 들어왔음에도 칼리우스에게 질문했다.
입을 나불거리지 못할 정도로 몸 상태가 안 좋은 건 아니었으니.
"아라랑 함께 시장을 뛰었어."
칼리우스는 눈을 반짝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 엄청 빠르더라. 쫓아가는데, 와, 이거 안 되겠다 싶던데?"
하벨은 달려도 달려도 칼리우스와 멀어지기만 하던 상황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건……."
"쉿."
카샬이 끼어들려고 하자 하벨은 그의 입을 막았다.
지금 칼리우스가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눈치 없긴.
"되게 재미있었어. 하나도 안 무서웠어!"
칼리우스가 키득거렸다.
무섭다는 생각을 했을 때, 레디나가 짠하고 나타났다.
"가슴 속에서 따뜻한 게 막 꿈틀거렸다? 내가 왜 이럴까 생각했는데, 오늘은 혼자가 아니었어."
레디나를 이어 카샬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칼리우스는 가슴 속에서 꿈틀거리는 게 커진 걸 느꼈다.
평소와 달리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 따뜻한 게 분노는 아니지? 아까 보니까, 폭발하려 하던데. 형님이 땅을 샀을 때랑 다른 경우인 거 맞지?"
하벨은 넌지시 물었다.
"달라. 그건 그 마법사들이 하벨을 건드려서 너무 화가 났어."
칼리우스는 인상을 살짝 쓰며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나도 모르게 때릴 뻔했어. 나는 그러면 안 되는데."
"누가 그렇게 말했어? 카샬이?"
"저는 왜 또?"
"쉿. 조용히 좀 해."
하벨이 카샬의 입을 또 막자 칼리우스는 꺄르르 웃으며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여기가."
머릿속에 든 용의 지식이 자신은 세상의 수호자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세상을 수호하는 자라면, 폭력은 안 된다고 믿었다.
"그 지식이?"
"으응."
"인내심도 좋네. 나 같으면 벌써 때렸어."
"하지만… 있잖아. 만약 내가 사람을 죽이면 어떡해?"
칼리우스는 두려움을 대놓고 드러냈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누군가를 죽이고 싶진 않았다.
거기까지 손을 댄다면 정말 자신이 어떻게 될지 모를 것만 같았다.
"네가 힘이 좋긴 한데, 죽기 직전까지만 쥐어패기만 하면 되는 거거든."
"정말 그러면 되는 거야?"
해법이 생각보다 간단해 칼리우스는 걱정이 싹 사라지는 걸 느꼈다.
"다음에 해보자."
하벨이 해맑게 웃자 헤레스는 주춤거렸고, 카샬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음에?"
칼리우스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다음에'라니.
또 같이 있을 수 있다니.
"그래. 그래도 정 모르면 여기 전문가가 시범을 보여줄 거야."
하벨은 레디나를 이어 카샬을 가리켰다.
레디나는 방긋 웃었고, 카샬은 귀찮은지 미간을 찌푸렸다.
"응! 좋아!"
하벨은 해맑은 칼리우스의 모습에 잠깐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용용아."
"으응?"
"네 머릿속에 있는 지식이 뭐라고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신경 꺼."
"응?"
칼리우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벨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지식은 지식일 뿐, 알 게 뭐야. 행동하는 건 너잖아. 끌려다닐 필요 없다고."
"지식을 따르지 않아도 되는 거였어?"
"일단 참고는 해야지. 음, 내가 봤을 때, 네가 꼭 해야 하는 일은 두 가지라고 생각해."
"멸망이 일어나면 막아야 해! 그땐 내가 진짜 열심히 힘낼 거야."
"오, 맞아. 그리고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자들을 막아야 할 테고."
"…아!"
칼리우스는 눈을 크게 떴다.
"하벨은 진짜 똑똑해. 바로 알아버렸어."
"……."
하벨은 입만 벙긋거렸다.
아니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긍정하기에도 너무 모호했다.
사실 아주 간단했고, 아주 힘든 일이었으니.
"…도련님. 있잖아,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칼리우스는 수줍게 말을 꺼내며 입꼬리를 올렸다.
화르르륵!
조금 전에 랜턴에 붙었던 검은 불꽃 말고 세상을 파멸로 이끌 용을 상징하듯 거센 불줄기가 피어올랐다.
하벨은 랜턴을 보며 단번에 불만을 품었다.
'왜 또?'
마치 자신의 마음을 읽었을까.
그 불길이 이상하게 줄어들어 하벨은 기가 찼다.
'이거 원, 이 정도나 됐으면 랜턴에 뭐라도 달린 거 아닌가?'
꺼지는 것도, 켜지는 것도 순 자기 마음대로였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칼리우스가 숨을 몇 번이고 내쉬다 힘차게 외쳤다.
"도련님이 와서 기뻤어! 엄청!"
칼리우스의 눈이 살포시 감겼다.
예상치도 못한 말에 하벨은 눈만 깜박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