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쥐었다(2)
* * *
한 마법사의 목에서 피가 튀겼다.
레디나가 활짝 웃으며 쓰러지는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툭.
마법사가 땅에 뒹구는 소리와 함께 마법사들이 레디나를 인식했다.
여기저기 숨소리가 끊어져 있었다.
마법을 쓰고 있거나, 이미 사용했을지도 몰랐다.
이 근처에는 마법의 매개체가 될 것들이 널려 있으니.
레디나의 몸이 연기에 휘감기기도 전에 사방에서 무언가 다가오고 있음을 눈치챘다.
'우와. 이건 좀…….'
바람 소리가 날카로웠다.
겹겹이 둘린 바람이 회오리치며 다가오는 게 보였다.
탁.
레디나가 똑같이 바람을 둘러 검을 휘두르기 전에 갑자기 적이 만든 바람이 멈췄다.
"으… 으아악!"
여러 명이 동시에 겹쳐진 비명이 건물 뒤쪽에서 들려왔다.
"거참, 더럽게 노네."
마법사들의 다리를 베어 땅에 눕힌 카샬은 그들의 복부를 뚫고, 목을 그으며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가 쥔 검에 피가 뚝뚝 떨어졌다.
음침하게 몰래 숨어 있을 줄이야.
화르르륵!
그때, 두 줄기의 화염이 화살처럼 레디나와 카샬을 노렸다.
팅!
레디나는 이미 모습을 감춰 화염은 엉뚱한 곳에 떨어졌고, 카샬은 당황하지 않고 마법을 유지할 매개체를 베어내며 칼리우스를 보았다.
"카……."
치미는 반가움에 칼리우스는 카샬과 레디나의 이름을 부르려던 차 말을 멈췄다.
무언가 떼구루루 굴러왔다.
마나가 가득 담긴 물체가 무엇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작은 구슬들이 튀었다.
그 방향이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쫓아온 마법사들을 향했다.
투투투투!
겨우 작은 구슬이라고 생각했지만, 근처에 있던 마법사들의 몸을 파고들어서는 피를 뽑아냈다.
칼리우스는 반사적으로 아라의 눈을 가렸다.
'…마법사들이 나를 도왔다고?'
칼리우스가 시선을 돌리자 건물 창문에 누군가 엄지를 올렸다가 사라졌다.
'아!'
칼리우스는 그제야 알아챘다.
아까 '크라마의 사람들'이라고 하벨과 페트리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마법사들이 자신을 도와주고 있었다.
갑자기 가슴이 따뜻해졌다.
"이러신다고… 달라질 건 없습니다."
절뚝거리던 마법사들이 칼리우스에게 경고하고는 거리를 살짝 벌렸다.
지원군이 오든 간에 다 죽이면 그뿐이었다.
갑자기 땅이 울렸다.
"지금 뭐 하려는 거야?"
칼리우스가 깜짝 놀라며 그들에게 물었다.
발밑에서 무언가 올라오려고 하고 있었다.
"보면 아시겠죠?"
마법사의 대답에 칼리우스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위험했다. 이건 자신이 막아야 했다.
'마법을 사용한다면…….'
칼리우스는 저들을 때려눕힐 생각을 하다 흠칫거렸다.
자신은 세상의 수호자인데 이런 생각을 해도 되는 걸까.
하지만 레디나하고 카샬에게 큰일이 날 수도 있는데.
칼리우스가 망설이던 차 거대한 힘이 땅을 짓누르는 게 느껴졌다.
"……?"
마법사들은 당황했고, 칼리우스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누구지?'
한참을 헤매던 칼리우스는 골목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걸 보며 활짝 웃었다.
하벨이었다.
[대장!]
아라가 코를 킁킁하며 냄새를 맡더니 힘차게 하벨을 불렀다.
살짝 벌어진 칼리우스의 손가락 틈으로 정말 하벨이 보였다.
"용용아, 왜 가만히 있어? 보호막 둘러야지."
하벨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꽂혀오자 칼리우스는 당장 아라를 껴안으며 자신의 마나로 바람의 벽을 만들었다.
[용용아. 이 몸은 지금 바로 대장한테 가야 하…….]
아라가 아등바등하다 행동을 멈추고 그제야 앞을 제대로 바라보았다.
[정령들이다!]
아라는 눈을 반짝거렸다.
[세상에, 대장이 정령들하고 함께 있어!]
감격도 잠깐, 하벨 근처에 날아다니는 정령들의 표정은 몹시 화가 나 보였기에 아라는 귀를 살짝 접었다.
[…왜 저렇게 화가 났지?]
칼리우스는 주눅이 든 아라를 쓰다듬으며 정령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땅에서 튀어나오는 무언가를 누르고 있었다.
[또 네놈들이야, 마법사?]
[진짜 짜증 나! 대체 언제까지 정령사들을 사냥할 건데?]
[너희는 이 땅 밑에 그 무엇도 못 꺼내. 우리가 막을 거니까.]
정령들은 마법사를 보자마자 분노를 토했다.
하벨은 랜턴에 검은 불꽃이 나타나는 걸 보다 말고 화가 난 정령들을 힐끔 바라보았다.
―너, 정령사 맞지? 우릴 봤잖아?
날쌔게 달리는 칼리우스의 뒤를 쫓던 와중에 정령들이 말을 걸어왔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하벨은 당연히 자신이 아니겠거니 생각하며 달리자 정령들이 자신의 앞길을 막았다.
―왜 우릴 피해? …아, 이 냄새 때문이야? 나는, 아니 여기 있는 정령들은 지금 이 냄새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
이어진 말 역시 처음이라 하벨은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어 먼저 카샬과 레디나부터 보냈다.
―얼른 돌아가. 당분간 여기 올 생각도 하지 마. 지금 정령사들이 사냥당하고 있다고.
처음에 그게 무슨 말인지 의아했다.
마법사와 정령사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알지만, 사냥이라니.
하지만 방금 정령들이 터트린 분노에 정말로 심각한 상황임을 인지했다.
'마법사 협회가 정령사 사냥까지 한다? 왜?'
고민도 잠깐, 하벨은 땅의 진동이 멈춘 걸 느꼈다.
그 순간, 칼리우스가 도망치지 못하게 그를 둘러싼 마법사들이 거의 동시에 자신을 보았다.
그 눈빛에 맹렬한 증오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겨우 이 일로 나를 저런 눈빛으로 본다고?'
하벨은 그들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느낌이 확 와닿았다.
임무에 방해가 된다면 그 대상이 어린아이든 상관없이 죽일 기세가 아닌가.
"도련님. 걱정하지 마세요. 뭐가 오든 제가 멈춥니다. 제가."
하벨 옆에 선 헤레스가 마나의 떨림을 느꼈다.
뭔가 다가올지도 몰랐다.
헤레스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마법이 유지될 매개체가 이곳에 널려 있지 않은가.
폐가에, 나무에, 건물까지.
머리 위로 바람 소리가 휙휙 날리자 마법이 아주 거세게 자신들을 휘감고 있음을 알았다.
"하늘이야!"
그때, 칼리우스가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쿠쿠쿵!
"어쩐지 어둡더라. 번개가 내려오겠네."
하벨이 툭 하고 내뱉는 소리에 헤레스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무 태평하지 않은가.
"정령수를 부탁해."
하벨은 헤레스를 향해 씩 웃어주고는 아라 대신 정령들에게 부탁했다.
정령수가 밀려들자 하벨은 씨앗을 만들어 앞으로 힘껏 던졌다.
땅에 떨어지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지만, 하벨은 단숨에 식물을 위로 키워나갔다.
'번개에는 피뢰침이지.'
쿠르르릉!
쾅!
하늘에서 떨어진 번개가 식물로 떨어지자 금세 불이 붙었다.
칼리우스의 눈이 흔들렸다.
저놈들이 하벨을 노리지 않았는가.
쾅!
또다시 떨어진 번개에 의도적인 마나의 떨림이 느껴지자 헤레스는 숨을 참았다.
나무로 향하던 번개가 하벨에게 쏟아졌다.
꽈악.
헤레스는 하벨에게 향하는 번개 자체를 매개체로 삼아 마법을 아예 붙잡았다.
부들부들.
순간, 헤레스의 온몸이 흔들렸다.
한 명이 시전한 마법이 아니기에 순환의 길에서 빠져나가는 마나 자체가 컸다.
하벨은 자신의 몇 발자국 앞에서 번개가 멈춘 모습에 기가 찼다.
이게 가능하다니.
설마하니 헤레스가 가진 허공에 물체를 잡는 마법으로 번개까지 멈출 줄이야.
"괜찮아, 헤레스?"
"아마 대답하지 못할 겁니다."
페트리오가 헤레스를 대신해 말을 꺼냈다.
지금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저 번개가 고스란히 하벨에게 향할 테지.
"집중하십쇼!"
어디선가 울리는 목소리는 조금 전 취업에 실패했다며 투덜거리던 그 목소리와 닮아 있었다.
쉬이이익.
기다란 빛의 끈이 나타나 헤레스가 붙잡은 번개를 덩달아 같이 붙들었다.
하벨은 그제야 시선을 올렸다.
아직도 하늘을 덮은 인위적인 구름이 사라지지 않았다.
마법사가 한 명일 때는 몰랐지만, 여러 명이 되자 상황 자체가 달랐다.
'왜 저들이 위험하다고 했는지 단번에 와닿네.'
마법사들이 우르르 일어나 뭉친다면 골치가 아픈 정도가 아니었다.
쿠르르릉!
헤레스가 멈춘 번개 이외에 또 다른 번개가 밀려올 기세라 하벨은 뿌려뒀던 씨앗 하나를 더 틔우려 했다.
이미 식물 하나는 불에 타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지만 하벨은 멈췄다.
[대장! 용용이가 이상해!]
다급한 아라의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저런.'
하벨은 칼리우스의 머리카락이 흩날리자 가볍게 입을 열었다.
라르웬이 자신이 싫어하는 걸 건드렸다는 이유로 칼리우스가 화를 내지 않았던가.
잠깐 잊어버렸다.
"용용아, 워."
하벨이 꺼낸 저 장난스러운 말에도 칼리우스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게 먹힌다고?'
페트리오는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쿵!
자신이 틔운 나무 옆에 어디선가 나타난 강철이 뚝 떨어지자 하벨은 흠칫 놀랐다.
페트리오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입니다."
폐가 근처 건물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던 누군가가 엄지를 올렸다.
[…저것들이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정령들은 칼리우스를 노린 마법사들을 향해 털을 바짝 올렸다.
[지금 우리 앞에서 자연의 힘이 섞인 마법을 쓴 거야?]
[혼 좀 나봐라!]
정령 중 번개의 특성을 가진 이들이 당장 달려가 번개를 발로 걷어찼다.
[에잇!]
번개가 역으로 꺾어버렸다.
헤레스가 마법의 흐름이 달라짐을 느끼고 자신의 마법을 멈췄다.
"…하악."
헤레스는 뒤늦게 숨을 골랐다.
쿠르르릉!
번개가 하늘로 타고 올라가다 마법사들에게 내려왔다.
[네놈들의 마법이다!]
콰앙!
조금 전보다 더 강해진 번개의 위력에 땅이 파이고, 마법사들을 집어삼켰다.
'정령들의 힘이 이 정도나 되는 거였어?'
하벨은 번쩍거리는 빛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언제나 정령사들을 통해 싸우는 것만 보았지 정령들이 직접 움직이는 건 처음이었다.
부정한 것들이 없는 상황에서 정령들이 가진 힘은 자신이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
콰앙!
또다시 내리친 번개에 죽지만 않았을 뿐, 적들은 온몸에 화상을 입고는 도미노처럼 힘없이 쓰러졌다.
연이은 순간에 벌써 놈들이 가진 전력의 반이나 앗아버리지 않았는가.
'왜 마법사들이 필사적으로 부정한 걸 늘리려는지 알겠네.'
번개가 멈추자 하벨은 상황을 주시했다.
사아아아.
연기가 피어올랐다.
적들이 상황의 심각함을 느꼈는지 흩어졌다.
번개에 잠깐 주춤거렸던 카샬이 달려나가자 그 소리에 마법사들이 잠깐 멈칫거렸다.
너무 빠르지 않은가.
푸욱!
"암살자를 두고 한눈파는 건 안 되는데."
레디나가 마법사 뒤에서 나타나 단검으로 놈의 심장 뚫어버렸다.
워낙 한순간이었기에 가장 가까이 서 있던 마법사가 뒤늦게 채찍을 휘둘렀지만, 애꿎은 바닥만 쓸어내렸다.
찰싹!
"쓸모없는 팔은 내놔야지."
레디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채찍을 든 마법사의 팔을 잘라버렸다.
"으아아악!"
비명이 터지자 레디나는 키득거리며 연기에 휘감겼다.
'도련님께서 저런 모습을 닮으시면 안 되는데.'
카샬은 레디나가 팔을 자른 마법사의 복부를 뚫어버리며 혀를 찼다.
검을 뽑기도 전에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비수인가?'
소리가 작은 걸로 보아서 비수임이 틀림없었다.
'금속을 움직이는 마법인가?'
카샬은 아직 죽어가고 있는 마법사를 방패 삼아 방향을 바꾸었다.
푹!
푸욱!
몇 개의 비수가 꽂혔는지 모르겠지만, 카샬은 힘없이 늘어진 마법사를 밀치며 달렸다.
쉬익!
카샬의 검이 그대로 마법사의 목을 베어냈고, 바로 멈춰서며 등을 돌렸다.
'이놈은 금속을 움직이지 않았어.'
목이 베인 마법사의 손에 그을림이 살짝 보였다.
콰지지직.
어디선가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 뭘 하려는 거야?'
카샬은 의문을 품고는 아직 남은 마법사들을 뒤쫓아가다 흠칫거렸다.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저들이 또 숨을 멈췄다.
"저놈들 지금 마법 썼어요!"
크라마의 사람 중 한 명이 소리쳤다.
쾅!
적 중 누군가가 그를 향해 화염을 쐈지만, 카샬은 오히려 하벨을 힐끔 보았다.
하벨이 너무 조용하지 않은가.
후드에 얼굴이 가려 어떤 표정을 짓는지 잘 보이질 않았다.
'그대로 가만히 계십…….'
생각하자마자 갑자기 하벨이 움직였다.
'그럴 리가 없지!'
카샬은 당황하며 몸을 왼쪽으로 움직였다.
날카롭게 쏘아진 돌덩어리가 카샬의 옆을 지나가 근처 건물에 박혀버렸다.
콱!
유리창이 부서지고, 건물이 살짝 흔들렸지만, 카샬은 신경 쓰지 않았다.
하벨이 왜 움직였는지.
그 사실에 가슴이 불안하게 뛰었다.
하벨의 예상대로 칼리우스를 쫓던 마법사들이 제 발로 찾아왔고 저들을 붙잡아 페트리오가 심문만 한다면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상황이 이미 만들어졌는데.
'지금 도련님께서 굳이 움직일 이유가 없어.'
카샬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콰드드드.
갑자기 폐가가 들썩거리며 움직였다.
마치 누군가 하나씩 재조립하는 것처럼 폐가가 벗겨지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돌아간 그때, 하벨 주변에 바람이 살랑 불었다.
'누군지 몰라도 시선을 끌어줘서 다행이네.'
하벨은 폐가에서 벗겨진 여러 부품이 한 마법사에게 몰린다는 걸 확인했다.
하지만 저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어차피 한 번에 잡으면 그만인 것을.'
하벨은 자신의 발밑에 연결된 물을 느꼈다.
적들이 바람을 뿌리든, 번개를 내리치든.
크라마의 사람들이 여기저기 퍼져 적들을 방해하든, 죽이든.
하벨은 묵묵히 기다려 상황을 단숨에 휘어잡을 순간만을 노렸다.
누구도 보지 못하는 땅속에 물을 이동시켰다.
'마지막 한 놈.'
하벨은 멀리 도망간 마법사의 발밑에 물을 적셨다.
첨벙.
그 소리가 자신의 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용왕의 힘이 성장했기에 물의 소리를 조금이나마 들을 수 있었다.
"간다."
하벨은 밀려드는 정령수를 죄다 소비할 정도로 적들의 발밑에 길게 이어놨던 물을 땅 밖으로 솟아오르게 했다.
소리도 없이 올라가 놈들의 발목을 잡았다.
착.
물이 찰싹 달라붙자 마법사들의 발목을 땅속으로 끌어내릴 기세로 힘껏 땅을 파고들었다.
'당겨!'
쑤우욱.
마법사들이 동시에 넘어졌고, 하벨은 사라진 정령수의 양만큼이나 솟구치는 불순물에 신음을 속으로 삼켰다.
'…월척이다!'
하벨은 입술을 깨물며 그대로 신나게 마법사들을 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