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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137화 (137/415)

137화. 차례대로(2)

* * *

"…마법사 협회가 꼴 보기 싫다뇨?"

바안은 그게 무슨 말인가 싶어 다시 물었다.

분명 그냥 묻는 말은 아닐 텐데.

"저는 꼴 보기 싫습니다, 저하."

"혹시… 아버지 일하고 관련이 있습니까?"

"아."

하벨의 눈이 잠깐 커졌다.

에르티안 왕과 한 약속.

바안을 위해 방패막이 되어주겠다는 룬델의 의지.

그리고 자신이 마법사 협회에 벌일 일을 위해 미리 바안에게 판을 짜달라는 부탁 말고 말해야 하는 게 또 있었다.

에르티안 왕과 한 약속과 겹쳐 묻혀버린 일 중 하나였다.

"…정말 아버지하고 관련이 있는 겁니까?"

"아니라고는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하벨은 마법사 협회와 바안을 뒤흔들려는 세력 사이에 어떤 연결 고리도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둘 사이가 이어졌는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럼 공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대체 뭡니까?"

"유자차가 먼저입니다, 저하."

"…대화의 맥을 빠르게 끊는 법을 배웠습니다."

"습득력이 빠르시니, 훌륭하네요."

"네. 잘 보고 배워야겠습니다. 하벨 공께 배워야 할 부분이 많으니까요."

바안은 살짝 신경질이 나다 말고 빠르게 가라앉았다.

하벨의 말투가 달라지면 뭐 어떻겠는가. 본질이 달라지지 않으면 그뿐이었다.

누가 자신을 위해 이런 일까지 한단 말인가.

바안은 방을 빠져나와 숨을 몰아쉬다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바안아.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기억하거라. 이 왕국에서 너를 조언하기 위해 있는 자문관 이외에 오직 너를 위해 조언해줄 조언자를 찾아야 한다. 내 조언자는 룬델 티에라 공이었다. 그래서 너무도 미안하고 또 미안한 마음뿐이란다.

'…아버지.'

바안은 아직도 손에서 느껴지는 아버지의 따스했던 그 손길을 떠올렸다.

'저도 찾지 않았나 싶습니다.'

태연하게 유자차를 요구하는 저 뻔뻔함은 자신을 왕자도 아니고, 왕도 아닌 모습으로 바라보았기에 가능할 테니까.

'…왜 하벨을 사고뭉치라고 말했는지 이제야 이해합니다, 룬델 공.'

바안은 웃음이 터졌다.

얼마 만에 웃는 걸까.

* * *

[…대장 있잖아.]

아라가 훌쩍이며 말을 꺼냈다.

"나는 진짜 괜찮아, 아라야."

하벨은 옷에 묻은 피를 어떻게 해야 하나 싶다가 입을 열었다.

장식품으로 가리면 어떻게든 되겠지.

"음, 이게 왜 이렇게 됐냐면… 내가 어떤 기억을 봤어."

[기억이라니?]

아라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나 말고 하벨 티에라의 기억을 봤어."

하벨은 아직도 아라의 눈동자에 맺힌 눈물을 손가락 끝으로 닦아주며 말했다.

솔직히 좀 섬뜩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바안이 저렇게 삐뚤어질 줄이야. 언뜻 보아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전쟁을 일으킨 후, 모든 걸 불살라버렸을지도 몰랐다.

그야말로 세상의 파멸을 앞당기는 불씨가 아니었나.

'…그리고, 음, 룬델하고 하벨 티에라하고 생각보다 사이가 좋지 않아 보이는데?'

하벨은 잠깐 의문을 품었다.

하벨 티에라가 룬델을 원망하는 듯한 말을 벌써 몇 번이나 들었을까.

[으음… 용왕인 대장이 아니라 진짜 하벨 티에라를 말하는 거야?]

하벨은 처음부터 자신이 하벨 티에라가 아니라 용왕이라고 알려주었기에 아라는 아주 쉽게 하벨이 꺼내는 저 말을 이해했다.

"맞아, 아라야."

[그게 왜 그렇게 아픈 거야? 이 몸도 한 번씩 잠자기 전에 기억을 떠올리면 되게 행복한데?]

"아마도 내 기억이 아닌데 강제로 보게 되니까 아픈 게 아닐까 싶어."

하벨은 아라한테도 사실을 숨기고 싶진 않았다.

대신 '회귀'라는 사실만 빼내며 말을 꺼냈다.

그 복잡한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지금은 괜찮다는 거지."

[대장 있잖아.]

"그래, 아라야."

[현실은 너무 슬퍼.]

"슬프다니?"

하벨은 바안이 올까 문 쪽을 살피다 말고 자신의 손에 축 늘어진 아라를 다급히 바라보았다.

혹시나 벌써 세상의 슬픔을 알아버린 건 아닐까, 괜히 조마조마했다.

아까 아라한테 카샬 옆에서 마법 타자기로 타자 치면서 놀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아라는 바안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때 조금 더 아라를 말릴 걸 그랬나.

[이 몸이 읽은 책에 나온 왕하고 왕자는 다 행복했어. 그런데 현실은 달라서… 이 몸은 오늘 충격을 받았어.]

아라 자신은 오늘 전혀 모르는 감정을 직접 느꼈다.

슬픔을 넘어서면 그렇게 되는구나.

왜 정령들이 정령사의 감정을 보는 게 두려운지 다시금 알아버렸다.

저 감정이 자신한테 쏟아진다면 얼마나 무서울까.

아마도 자신의 꼬리를 잡고 매일매일 울어버릴지도 몰랐다.

"아라야 그건……."

하벨은 말을 꺼내려다 말고 머뭇거렸다.

[왕은 행복하면 안 된다. 대장이 한 저 말 때문에 그런 거야? 대장은 왕이었잖아.]

아라는 눈동자만 위로 올려 하벨을 보았다.

대답을 갈구하는 저 눈빛에 하벨은 울렁거리는 가슴을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감당해야 할… 무게가 다르니까. 백성들의 숫자만큼 어깨를 짓누르거든."

[아팠어?]

아라가 고개를 들고 하벨의 손을 쓰다듬었다.

찌르르.

교감이 느껴졌다.

"응. 아팠어."

[슬펐어?]

"슬펐어."

아라는 살짝 울먹였다.

[대장. 왜 왕은 행복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한 거야?]

"왕은 모두를 껴안고 있으니까."

하벨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런 이야기를 아라랑 할 줄은 몰랐지만, 하벨은 최선을 다해 자신이 생각했던 답을 꺼내 놓았다.

"내가 행복하려면 분명 누군가를 내려놓아야 할 텐데, 그렇다면 과연 얼마나 내려놓아야 할까. 저들의 행복을 위해 내가 왕이 되었는데, 저들을 불행하게 한다면 내가 왕이 맞을까? 그래서 나는 내 행복을 제일 먼저 접어버렸어."

자신의 행복이 아닌, 인연으로 이어져 가족이 된 그들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랐다.

모두 죽어버렸지만.

[그래서 대장이 매일 이 몸한테 행복해야 한다고 말해주는 거였어?]

아라는 하벨을 쓰다듬던 손을 멈추고 입을 가득 오므렸다.

천천히 흔들리던 아라의 눈동자에 곧 힘이 가득 들어갔다.

[그건 싫어.]

"…싫다니?"

[대장이 모두를 행복하게 했는데 대장 혼자만 슬픈 건 싫어!]

"아라야. 그건……."

[이 몸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려면 왕이 제일 먼저 행복해져야 한다고 생각해. 대장은 대장의 행복을 버리면 안 됐어! 그건 나쁜 행동이라구!]

아라는 눈을 질끈 감으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이 몸한테 '행복해져라'라고 말하기 전에 대장이, …대장부터 행복해야 해!]

하벨은 저 말에 뿌듯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아라가 자신의 말을 그냥 다 수용하기보다는 지금 할 수 있는 만큼 생각하고 그 생각을 표현하지 않았는가.

"아라야. 사실 뭐가 나쁘고 그런 건 없어. 나는 나대로 겪고 느꼈던 걸 말했을 뿐이니까."

하벨은 아라를 쓰다듬었다.

아라에게는 다른 정령에게 없는 어떤 힘이 있었다.

아직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이전 재무부 장관을 죽이기 전에 확인하지 않았던가.

"늘 말했지만, 아라 너는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면 돼."

아라가 살며시 눈을 떴다.

[…그래도 되는 거야?]

"그럼, 아라야."

하벨은 아라의 볼을 눌렀다.

[그럼, 그럼 이 몸은 대장의 슬픔을 지워주고 전부 다 기쁨으로 채워줄래!]

아라가 앞발을 하늘 높이 뻗으며 배시시 웃었다.

"기대할게, 아라야."

사실 이미 저 말로도 충분했다.

아라가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행복을 주었던가.

[응응! 이 몸은 완전 힘낼 거야!]

아라는 힘차게 대답하다 귀를 파닥거렸다.

'…그러고 보면 정령들에게도 왕이 존재한다고 했지?'

정령들이 지금 사람을 죽이지 못하는 이유는 정령왕의 명령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 정도로 어마어마한 존재라면 꼭 만나고 싶었다.

[…헛!]

아라의 꼬리가 멈췄다.

[바안이다!]

"오래 기다렸습니까? 아까 내가 기사들과 시종을 너무 멀리 물렸어요. 종을 흔들어도 오지 않아 찾으러 갔다 왔습니다."

바안이 걸어오며 물었다.

"아뇨. 유자차를 먹는다는데 기쁜 마음으로 기다려야죠."

"아주 맛있게 우려 달라고 했으니 곧 올 겁니다."

바안은 자리에 앉았다.

"이제 그 판이 무엇인지 말해보세요."

"화내시면 안 됩니다."

"내가 화를 낼 정도인가요?"

"아까 제 멱살을 잡으셨던 분이니 더한 것도 할 거라 생각이 듭니다."

활짝 웃는 하벨의 표정에 바안은 시선을 살짝 흘렸다.

"…잊으세요."

"명령이라도 안 듣습니다."

"명령도… 안 듣는다고요? 이제 내 말은 몹시 무거울 텐데요?"

"예. 그게 접니다."

하벨은 마치 목을 내놓은 듯 행동했지만, 바안은 이상하게도 짜증이 나지 않았다.

그게 참 신기해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겁대가리 없는 사람은 처음이라서 그런 걸까.

"그리고 저하께서 설마 좀생이처럼 그런 행동을 하시겠습니까? 왕이란 자고로 마음이 넓어야 합니다. 이건 기본 아닙니까?"

"망아지란 말 혹시 들어보셨나요?"

"멋지네요. 말은 언제봐도 멋지잖습니까?"

[오오! 이 몸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 그, 머리카락이 엄청 예뻤어!]

아라가 꼬리를 흔들었고, 바안은 피식거렸다.

"일단 화를 내지 않겠다고 말하겠습니다."

"좋습니다."

하벨은 일단 약속을 받고 입을 열었다.

"이건 거래라는 것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하."

조금 전 바안이 편안하게 대하라고는 했지만, 시작부터 너무 편안해질 수는 없었다.

하여 하벨은 제일 깔끔한 '거래'를 둔 관계를 선택해 밝혔다.

"판을 위한 거래입니까?"

바안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럼, 하벨 공은 이 판에 무얼 걸 겁니까?"

"저하께서 가장 궁금해하실 일을 걸겠습니다."

"판. 깔아보죠."

바안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하벨 자신이 무슨 판을 까는지 듣지 않은 건 엄연히 바안의 잘못이기에 하벨 역시 망설이지 않았다.

"코스모피안 왕국은 일단 제외하십시오."

"……?"

"암살자에게 비밀 통로를 알려준 자가 누구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마도 인상착의와 생김새를 말씀드리면 바로 찾으실 테지요."

"하벨 공.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이번 일은 저하의 복수심을 이용해 코스모피안 왕국과 전쟁을 벌이려는 누군가의 계략입니다."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까?"

바안은 갑자기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걸 느꼈다.

미래를 보고 왔다.

그렇게 말할 수도 없으니 하벨은 말을 돌렸다.

"제 근처에 누가 있는지 이미 아시잖습니까."

페트리오 비발체.

바안은 그 이름을 단번에 떠올렸다.

귀족들이 힘을 얻는 과정에 페트리오의 도움을 받지 않은 이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물론, 과거 일은 이미 아버지가 용서했기에 바안도 더는 페트리오를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실이 힘을 얻는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었는가.

"…아무리 페트리오 경이라도 이렇게 빨리 알아내는 게 가능한 겁니까?"

"저하. 외람되오나, 한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하벨은 조금 전과 달리 공손함을 드러냈다.

"말하세요."

"페트리오는 이전 귀족들조차 다 같이 힘을 합쳐 끌어내렸을 만큼 치밀하고 위험한 자입니다. 하여 무슨 일이 있어도 척을 지지 마십시오."

아직은 아니지만, 하벨은 오늘 바안이 페트리오가 가진 힘을 보았기에 나중에라도 충분히 욕심을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페트리오의 성격상, 움켜쥐려면 쥘수록 튕겨갈 테니 결코 올바른 선택이 아니었다.

오히려 다시 삐뚤어질 수도 있으니 아차 하면 에르티안 왕국의 가장 큰 적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하벨 공의 사람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거래로 이루어진 관계입니다."

하벨은 페트리오에게 여러 번이나 짊어지지 않겠다고 말했다.

페트리오의 복수를 도와줬으며 그가 자신을 위해 일할 때마다 돈이든, 힘이든 하나씩 쥐여주었다.

가장 깔끔한 관계가 아닌가.

"제가 앞으로 깔 판은 저하를 위해서도 도움이 됩니다."

"도움이 된다뇨?"

"범인이 누구인지 찾고 싶지 않으십니까?"

하벨이 던진 말에 바안은 흔들렸다.

"이번 전하의 장례식 때, 나라들을 모조리 부르십시오."

"다… 부르란 말입니까? 그렇게 된다면 아버지께서 살해당하셨다는 사실을 밝히는 셈입니다."

"진실이 궁금합니까? 아니면 이미 깎인 에르티안의 체면이 중요합니까?"

"내게 있어… 새로운 시작이자 왕으로서 서게 되는 첫 시련인 셈이네요."

바안은 이미 정답을 알고 있는 하벨의 태도에 씁쓸함 역시 숨기지 않았다.

모두가 에르티안을 만만하게 보는 와중에 더 깎일 이미지가 어디 있단 말인가.

"아마 초대는 거절하지 못할 겁니다. 괜히 불똥 튀기고 싶지 않을 테니까요."

"하벨 공은 거기서 무얼 할 겁니까?"

바안은 그 말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득은 컸다.

하지만 하벨은.

나라들이 모일 그 장례식에서 대체 무슨 이득이 있을까.

"저는 그곳에서 물 마법사가 될 생각입니다, 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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