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차례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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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괜찮은 건가?'
하벨은 페트리오를 가리키던 랜턴의 빛이 바뀌었을 때처럼 또 빛이 변한 상황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함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을 닮은 바안이 자신과 같은 길을 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약속은 지켰다, 왕이여.'
하벨은 에르티안의 왕과 한 약속을 떠올렸다.
'이제 편히 눈을 감거라.'
"하벨 공."
바안은 미소를 지으며 하벨을 불렀다.
처음 암살자를 심문했을 때 보였던 그 불안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이 말이 늦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정말로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하벨이 정령사가 되지 않았는가.
반드시 축하해야 할 일이었다.
"고맙……."
딸깍.
하벨이 말을 잇기도 전에 머릿속에서 갑자기 그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하벨 티에라의 과거를 떠올리기 전에 나는 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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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께서 승하해 성대한 장례식이 열렸다.
왕실의 행사에 내가 가는 걸 극도로 꺼리던 아버지께서 이번만큼은 순순히 허락하셨다.
대신 귀족들에게 얼씬도 하지 말라며 엄포에 가까운 말을 꺼냈다.
왜 저렇게 귀족을 싫어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그토록 다정하던 아버지께서 조금 다른 모습이 되시니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저분이란다. 기억하더냐?"
룬델이 손가락으로 누군가를 가리켰다.
돌아가신 전하의 옆에 힘없이 서 있는 자는 왕자 바안이었다.
"기억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의 탄생일 날, 왕 옆에 주눅이 든 채 서 있던 모습이 생각이 났다.
"말을… 걸어줄 수 있겠더냐?"
아버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제가요?"
"그래. 아마 네가 가장 편하지 않을까 싶구나."
아.
생각이 조금은 삐뚤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정령사가 되지 못했고.
왕자는 여전히 무능하지 않은가.
아무리 나한테 들어오는 정보가 적다 해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 나라의 왕권이 무너졌다는 걸.
아마도 이번 일로 더 무너질 테지.
"미안하구나, 하벨아. 잠깐이라도 저하가 편안했으면 하는구나."
"그럼 아버지께서 말씀드리는 게 편하지 않을까요?"
"아마 내가 간다면 저하께서 격식을 차리려 애를 쓰지 않을까 싶구나. 저하께서는 나를 계속 어려워했으니까."
그럼 나는요.
순간 울컥해 그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을 뻔했다.
왕자는 제대로 보면서 나는.
나는 왜 제대로 봐주지 않으신데요.
지금 아버지가 바라보는 나 말이에요.
"그냥 옆에만 있어 주면 된단다. 네가 말을 걸어도 아무 말씀 하지 않으실 거란다."
"…알겠어요, 아버지."
나는 언제나처럼 속마음을 숨긴 채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가 귀족들을 막을 사이 왕자에게 걸어갔다. 발걸음이 살짝 무거웠다.
"저하, 신 하벨 티에라입니다. 상심이 얼마나 크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고맙습니다."
왕자는 애써 웃었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이 눈에 맺힌 눈망울을 보자 분명 자신보다 키가 큼에도 한없이 작아 보였다.
누가 봐도 만만한 느낌이 가득한 저 사람이 왕자라니.
내가 그를 본 첫인상 그대로 유약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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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닥치세요, 룬델 공!"
왕자, 아니, 왕이 된 바안이 아버지를 향해 표독스럽게 말을 꺼냈다.
지금 바안은 아버지의 집무실에 딸린 다른 방에 내가 있다는 걸 모를 테지.
쿵쿵.
심장이 뛰었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바안은 지금 전쟁을 일으키려 준비하고 있었다.
내가 있는 방에 어렴풋이 들려오는 대화를 들었을 때, 코스모피안 왕국을 언급한 듯했다.
"지금 그대가 무슨 말을 꺼냈는지 아나요, 룬델 공?"
문틈 사이로 보이는 바안의 표정은 이전과 달랐다.
왕의 장례식에서 바안을 본 뒤 얼마 흐르지도 않았는데.
"그래도 전쟁은 안 됩니다, 전하."
"이미 내가 몇십 명의 피를 묻히고 왔는지 아십니까?"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날 짓누르려던 귀족들을 죽이고 온 참입니다."
바안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의 유약함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고, 오히려 포악함만이 가득했다.
"놈들은 내가 죽였습니다. 아주 볼만하더군요. 진작 이럴 걸 그랬습니다. 진작 놈들의 목을 쥐어 뜯어버렸어야 했는데…!"
바안이 낄낄 웃었다.
"전하! 폭력과 힘으로만 나라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시끄럽습니다!"
바안은 소리쳤다.
"내가… 왕입니다."
증오가 엿보였다.
"이 나라는 내겁니다."
광기마저 드러났다.
"나는 내 아버지를 그리 외롭게 보내지 않을 겁니다."
순간 바안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 작은 문틈 사이에 나와 바안의 시선이 마주했다.
쿵.
심장이 요동쳤다.
"그 누구도 날 말릴 수 없을 겁니다."
쿵.
나를 보았을까.
"소중한 걸 지키려면 나에게 협력해야 할 텐데요?"
쿵.
서늘하기까지 한 바안의 목소리가 나의 목덜미를 핥았다.
나를 보고… 경고하는 건가.
활짝 휘어진 바안의 눈웃음에 그 기분을 버릴 수 없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룬델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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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로 얼마나 흘렀을까.
티에라 가문에서도 이번 코스모피안 왕국과의 전쟁에 합류한다는 소식이 아버지 입에서 흘러나왔다.
또 나인가.
또 내가 약점이 되어 잡힌 것인가.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
더는 참을 수 없어 아버지를 찾아갔다.
평소보다 더 새하얗게 변한 아버지의 머리카락이 눈에 밟혔다.
지금 머리가 가장 복잡한 사람은 아버지일 테지만, 이 말만큼은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 때문입니까?"
"밤이 늦었구나, 하벨아."
"제가 아버지의 약점이 되었습니까?"
"그런 일은 없단다."
"…제가 아버지의 발목을 잡은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정령사 가문인 이곳에서 정령들이 자신을 버렸다.
이 가문의 모든 힘과 안전은 정령들에게서 나왔기에 저택에 있어도 자신은 밖과 똑같이 모든 위험에 노출된 상태였다.
괜히 저 말이 떠도는 게 아니었다.
"누가, 누가… 그런 말을 하더냐?"
형님이요.
누님이.
나를… 죽이러 온 암살자들이.
치밀어 오르는 말을 삼켰다.
"…아버지."
"그래, 하벨아."
"포기하지 마십시오."
"……?"
"저 때문에 더는, 무엇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벨아."
"저는……."
그 말을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차마 꺼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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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바안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며 벌린 입을 채 다물지 못했다.
하벨이 입가를 손으로 가렸지만, 손가락 틈으로 새어 나오는 새빨간 핏줄기에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 기분이었다.
하벨이 피를 토했다.
"괜… 찮습니다."
하벨은 경악을 넘어 또 다른 충격에 빠진 바안과 아라의 모습에 다급히 말을 꺼냈다.
이건 하벨 티에라의 과거 기억을 본 후유증이었다.
물론 아프지 않은 건 아니지만, 저들이 생각할 일보다 훨씬 괜찮다는 걸 보여줘야 하지 않겠는가.
"아, 앉아 있으세요! 내가 사람을 불러오겠습니다!"
바안은 벌벌 떨다시피 했다.
아버지를 보았을 때 그 붉은 피가 다시금 떠올랐다.
사람은 참 쉽게 죽는구나.
참 쉽게 떠날 수 있구나.
그 생각이 머릿속에 빠르게 차오르자 미칠 것만 같았다.
죽음은 너무도 두려웠다.
왕의 자리보다 더 아득하고, 더 무서운 존재야말로 바로 죽음이었다.
하벨까지 보낼 수는 없었다.
"저하."
하벨은 익숙하게 아공간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고 손을 닦은 뒤 아라를 토닥거렸다.
그제야 아라의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버렸다.
"오늘은 저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이전 피의 연회를 떠올리게 할 겸, 귀족들에게 경고 차원에서 왔을 뿐입니다."
하벨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오늘 바안을 만나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공께서 피를 토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물의 저주라는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잖습니까?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벨은 태연하게 반응하며 바안을 만나러 온 또 다른 목적을 꺼내려 준비했다.
"이렇게… 정말 이렇게 심각할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공의 멱살을 잡고……."
바안은 자신의 손을 보더니 부르르 떨었다.
대체 환자를 상대로 무슨 짓을 하려고 한 건지.
다시금 자신이 벌인 짓거리가 얼마나 한심스러웠고, 하벨이 자신을 위해 무얼 했는지 눈에 보였다.
저 몸으로 그토록 열변을 토했다.
자신의 정신을 되돌리려고.
"저하."
하벨은 바안을 다급히 불렀다.
바안의 눈동자에 깃든 감정은 자신도 익히 보았던 것과 비슷했다.
마치 구원자를 보는 시선이었다.
이런 것까지는 사양이었다.
저건 어차피 찰나의 감정일 뿐이었다.
하벨은 아라를 토닥이며 말을 꺼냈다.
"저는 저하의 구원자가 아닙니다. 처음 말씀드렸다시피 전하의 약속을 지키러 왔고, 음, 티에라 가문의 의지도 전하러 왔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힘내' 정도겠네요."
"압니다. 공이…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는지요. 하지만……."
바안은 여전히 홀로 심각해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아니. 아라도 심각하지 참. 내가 이상한 건가?'
아라는 입을 오물인 채로 자신의 옷자락을 잡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무슨 말이라도 하면 좋겠는데.
"이번 일은 내가 헤쳐나가야 한다는 걸 압니다. 이렇게 직접 의지를 표현해준 하벨 공과 티에라 가문에 진심으로 고마움도 느낍니다. 하지만 나는 걱정할 겁니다."
"예……?"
"내 사람이라 생각하는 모두를 걱정할 겁니다. 공도 내게 백성 중 하나입니다. 당연히 짊어져야 할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아.'
하벨은 괜스레 민망해졌다.
바안은 이제 왕이고, 자신은 그에게 있어 백성 중 하나였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테니 바안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짊어지게 한다는 건 불가능하지 않은가.
"그러니 하벨 공께서 내게 너무 부담 갖지 말았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알겠다뇨?"
"제가 너무 선을 그은 듯해 이제 그러지 않겠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하벨은 그제야 바안이 편해졌다.
바안이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는 이상 어쩌면 제일 편안할 수 있는 관계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렇다면야.
하벨은 잠깐 흠칫거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정신 차려라. 하벨 티에라에게 이 몸을 돌려주기 전까지다.'
저 중요한 사실이 조금씩 흐려지고 있는 게 섬뜩하게 다가왔다.
이곳이,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다.
"이러다 말도 놓는 게 아닌지 모르겠네요."
"원하신다면 놓겠습니다. 원하십니까?"
하벨은 바안이 던진 말을 물며 자신의 시선을 돌렸다.
"아뇨. 내가 싫습니다."
"저하께서 먼저 꺼낸 말입니다."
"그렇긴… 하죠."
"저하."
"네."
"편안해진 김에. 아, 미안함도 섞어 이참에 절 위해 판 좀 깔아주시겠습니까, 저하?"
살살 바안 자신을 긁는 하벨의 목소리에 바안은 당황스러웠다.
저 말은 막연하게 흘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판이라뇨? 아니, '편안하게'라는 말에 정말 너무 편안하게 나오는 거 아닌가요?"
"이미 말을 내뱉은 뒤입니다. 주워 담기엔 글렀습니다. 이제부터 저는 편안하게 저하를 대할 테니까요."
"일단… 음, 앉으세요. 너무 오래 세워뒀네요."
"차도 주시죠? 저는 유자차요."
대놓고 차를 요구하는 하벨의 태도에 바안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갑자기 뻔뻔해지지 않았는가.
"내가 말실수를 크게 했네요. 공께 '편안하게'라는 말을 꺼내는 게 아니었는데요."
"다시금 늦었습니다, 저하."
하벨은 자리에 앉아 토닥이던 아라를 내려놓았다.
아까부터 하벨의 손이 허공을 떠돌아 바안은 긴가민가하며 물었다.
"하벨 공. 혹시 그곳에 정령님이 계십니까?"
"맞습니다. 울고 있어요."
하벨은 테이블에 떨어진 한 방울의 눈물을 가리켰다.
하벨이 짧게 숨을 내쉬자 아라는 겨우 멈췄던 눈물이 또 맺혔다.
[…어디 또 아파?]
"아니, 아라야."
"하벨 공. 유자차를 먹고 싶다고 했나요?"
바안은 허공을 향해 움직이는 하벨의 손짓에도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정령사이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으니.
"그렇습니다, 저하."
"내가 가죠. 환자는 앉아 계세요."
"그러려고 했습니다."
"앞으로 공한테 무얼 허락하기 전에 생각을 좀 더 깊이 해야겠다 싶습니다."
"옳으신 생각입니다. 그게 왕의 덕목 중 하나죠. 일단 의심해라."
"그럼 공이 내게 요구하는 판이 무엇인지 간단하게 말해줄 수 있겠습니까?"
바안은 아직도 울렁거리는 이 슬픔을 이겨내지 못했음을 알았다.
그렇다면 다른 일로 시선을 돌리는 게 최선이지 않을까.
"마법사 협회가 꼴 보기 싫으시죠?"
하벨은 방긋 웃으며 바안을 또 살살 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