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왕의 길이란(3)
* * *
모든 게 어렵고, 혼란스러웠던 그때, 자신에게도 누군가 이렇게 조언을 해줬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원래부터 모든 건 어렵고, 실패하는 게 당연하다는 걸.
아라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고, 바안은 울상에 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왕은 실패하면 안 됩니다."
"왕은 모든 걸 지킬 수 없습니다."
"하… 지만 지켜야 합니다. 왕이기에 지켜야 합니다."
하벨은 바안의 대답에 잠깐 웃음이 나왔다.
이전에 자신이 생각한 그대로 대답이 튀어나와 참 신기했다.
"그래서 왕은 실패하는 자입니다. 처음부터 불가능한 목표를 안고 가기에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공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하. 왕은 실패해도 왕국은 실패하면 안 됩니다. 그게 왕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기억이 조각났지만, 하벨은 남아 있는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말을 꺼냈다.
자신의 나라가 관료들의 손에 떨어졌음에도 자신은 백성들을 버리지 않았다.
―용왕님. 백성들을 지키고 싶으시다면 아무것도 하지 마시고, 그냥 왕좌에 앉아 계십시오. 그것만이 백성들을 지킬 유일한 방법입니다.
'아니. 나는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나를 놓아버렸다.'
하벨은 천천히 자신의 행동을 받아들였다.
후회하냐고 묻는다면 후회했다.
저 상황이 오지 않게 막았어야 했는데 막지 못했다.
몇 번을 생각해도 아쉽고, 참 서글픈 일이었다.
"전하께서는 실패하셨지만, 백성들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하벨은 차마 자신이 그랬노라 밝힐 수 없어 에르티안의 왕을 끌어왔다.
하지만 죽은 사람을 입에 올리는 게 마음이 편안한 건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바안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렇기에 에르티안 왕국이 아직 건재합니다. 하지만 저하께서는 본인을 위해 백성들을 놓으실 셈입니까?"
복수를 힐난하는 것처럼 들렸기에 바안은 주먹을 꽉 쥐었다.
"공께서 이리… 이리 말할 순 없어요. 단순한 복수심이라 볼 수 있지만, 아닙니다. 나는……."
"저하. 눈을 조금 더 뜨십시오. 아직 잃어버린 건 전하뿐입니다."
"아직… 이라뇨?"
"정체 모를 적이 저하마저 앗아가려고 했습니다. 이 나라의 미래이자 정말 마지막 남은 뿌리인 '바안 에르티안'을 잃어버릴 뻔하지 않았습니까?"
하벨은 손을 들어 바안을 가리켰다.
배를 뚫을 것처럼 날카로운 손가락에 바안은 흠칫거렸다.
갑자기 몸이 무거워진 기분이 들었다.
"저하까지 무너지시면 잃을 게 정말 많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정 궁금하시다면 직접 겪어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후회와 절망을 뚫고 가실 자신이 있으시다면요."
하벨의 가벼운 목소리는 마냥 편안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럼 내 이 들끓는 증오는 어떻게 다스릴……."
"저하."
하벨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전쟁을 벌이신 후에 생겨날 수많은 죽음을 감당할 자신이 있으십니까? 넘쳐 흐르는 사람들의 슬픔과 원망을 인내하고 바라볼 용기가 있으십니까?"
어쩐지 섬뜩하게 들려와 바안은 마른 침을 삼켰다.
정말로 하벨은 수많은 목숨을 감당한 적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전하의 목숨이 '겨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과연 저하께서 왕의 자리를 버리고, 수많은 목숨을 희생시키며 반드시 해야 하는 복수인지 잘 생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무얼 생각하는지 몰라도 바안의 눈동자에 깃든 분노가 천천히 가라앉는 게 보였다.
"참아야… 하는 겁니까?"
대신 분함이 목소리에 뒤섞여 있었다.
"예. 참으셔야 합니다."
"…이토록 불합리한 상황에서도 참아야 한단 말입니까?"
"그게 왕입니다, 저하."
하벨은 씁쓸함을 드러내며 말했다.
"참고, 참고, 또 참으며 가장 낮게 웅크려 모든 걸 봐야 합니다."
그걸 어떻게 잘 알고 있냐고.
바안은 목구멍까지 그 말이 치솟았다.
"복수를 원하신다고 하셨습니까?"
하벨의 눈동자가 살짝 일렁거렸다.
이유는 몰라도 그도 누군가를 잃어본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저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방금… 공께서 복수를 참으라 하지 않았습니까?"
"참으라고 말씀드렸지, 하지 말라는 말씀은 드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반대하는 건 전쟁입니다. 더 효율적인 방법을 사용하셔야죠."
어느새 하벨이 장난기를 드러내자 덩달아 바안 자신마저 마음에 들끓던 감정이 한순간 사라져버린 기분을 느꼈다.
"이미 저하의 적이 이 나라를 건드렸습니다. 또 건들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죠. 이미… 큰일을 일으켰는데 두 번이라고 왜 못 하겠습니까. 일단 똑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왕궁의 보안부터 올려야 합니다. 왕족이 사용하는 비밀 통로도 막아야 하고요."
하벨은 그 대답에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보셨습니까? 저하께서 앞으로 무얼 하셔야 하는지 이제야 보이시잖습니까."
"……."
"분노에 사로잡히지 마십시오. 증오에 몸을 맡기지 마십시오. 그 끝은."
하벨이 잠깐 말을 멈추자 아라도, 바안도 숨을 참은 채로 하벨의 뒷말을 기다렸다.
"…짙은 절망뿐입니다, 저하."
"이미 가본 사람처럼 말하네요."
바안은 씁쓸함을 입에 담았다.
하벨이 침묵하자 바안은 뒷말을 이었다.
"왕의 길이 가시밭길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절망스러울 줄이야."
"왕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저하."
누가 왕이 행복하다고 했는가.
왕은 행복해서는 안 될 자리였다.
나라의 행복은 왕의 행복을 먹고 자라기에 왕이 지독하게 괴롭고, 외로워야 나라가 평화로울 수 있었다.
자신의 세계에 수족이 사라진 뒤 너무도 평화롭지 않았는가.
자신만 제외하고.
'오직 나만이, 아니, 내가 희생해 얻은 평화였다.'
"…하벨 공."
바안은 머뭇거리다 말을 꺼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바안의 시선이 조금씩 달라지자 하벨은 엇나간 그의 발걸음이 찬찬히 방향을 바꾸는 게 보였다.
"물론입니다. 제가 무조건 옳을 수 없습니다. 저하께서는 저하의 길을 가시면 됩니다."
그래도 자신이 바안에게 그 말을 꺼내는 이유는 하나였다.
자신은 실패했다.
실패했기에 왕의 자리를 향해 걸어가는 저 어린 왕이 적어도 덜 아프고, 덜 괴로운 곳으로 향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바안은 어리숙했던 나와 닮았으니.'
"공께서는… 알면 알수록 더 모르겠습니다."
바안은 또다시 하벨을 달리 보았다.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
분명 자신보다 어린데 어리지 않았고.
가벼운데 깊으며 언뜻 보였던 고독함과 슬픔은 자신의 아버지보다 더 짙었으니.
대체 정체가 무엇일까.
"몰라도 괜찮습니다. 이제부터 알면 되잖습니까?"
하벨은 씩 웃었다.
"다음이… 있는 겁니까?"
귀를 의심할 만한 말에 바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물론이죠, 저하. 원래는 한두 번 보고 이제 그만 만나도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하벨 자기 일을 위해서라도 바안과 이 에르티안 왕국은 건재해야 했다.
하벨은 아직도 타오르는 랜턴의 불꽃을 잠깐 쳐다보았다.
"저하."
"네."
"제게 미안하십니까?"
"…아주 많이 그렇습니다."
"그럼 지금 제가 할 행동은 순전히 저의 독단적인 행동일 뿐, 티에라 가문과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미리 밝히겠습니다."
하벨은 주먹을 꽉 쥐었다.
"왜… 주먹을 쥐는 겁니까?"
바안이 달라진 하벨의 눈빛에 살짝 뒷걸음질 쳤다.
[대장, 안 돼! 라르웬이 그러면 안 된다고 했어!]
아라가 하벨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하벨은 아라를 쳐다보며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아라야. 예부터 집 떠난 정신을 되찾아오려면.'
하벨은 팔을 살짝 걷어 올렸다.
'…주먹이 가장 좋은 특효약이다.'
어차피 이곳엔 자신과 바안뿐이었다.
무얼 못 할까.
"저하께서 아직도 복수에 미련을 떨치지 못하신 듯 보입니다."
"…귀신입니까?"
"딱 한 대면 됩니다."
"뭐가요?"
"아픔 말입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도 형님께 가출했다고 머리 맞았습니다."
"…공이 가출이요? 공이요?"
바안은 뒷걸음치던 발길을 멈췄다.
방금 튼튼하게 세워뒀던 하벨을 향한 존경심의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예. 가출 한 번."
하벨은 나아가다 말고 잠깐 걸음을 멈추고 생각했다.
"…아니, 한 번 반 했습니다. 저하도 가출했다고 치십시오."
"아니, 하지 않은 행동을 했다고 하면 어떡합니까?"
"원래 왕이 되시면 억울한 일은 많습니다. 선행 학습했다 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게 왜 선행 학습입니까?"
"저한테 미안하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렇다고 맞는 건 싫습니다."
"왕은 혼자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반드시 누군가는 싫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하벨은 자신의 경험을 떠올렸다.
옆에서 이러면 안 된다, 저러면 안 된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필요했다.
"그 사람의 조언은 가장 객관적일 수 있기에 다양한 의견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정말 그래?]
아라는 어느새 하벨의 옷자락만 쥐고는 귀를 쫑긋 세웠다.
"…그게 바로 저인 겁니다."
하벨이 활짝 웃자 바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조언으로 둔갑시키며 그런 말을 꺼내지 마세요. 속지 않습니다."
"단지 우스운 소리로 꺼내는 조언이 아닙니다."
"그럼 대체 무엇입니까? 그렇게도 화가 났다면 차라리 욕을 하세요."
"오늘의 아픔을 기억할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저하."
하벨이 활짝 웃었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무거웠다.
바안은 주먹을 쥐었다.
뒷걸음질 쳤던 것보다 더 큰 보폭으로 하벨에게 다가갔다.
"하벨 공."
"예, 저하."
"이 아픔이 정말 내가 무너지려고 할 때 도움이 됩니까?"
"그럼요."
하벨은 자신의 팔을 가리켰다.
"맞아봤자 얼마나 아픕니까?"
"맞으면 무엇이든 아픕니다."
바안은 살짝 실소를 내뱉었다.
"하지만."
고마움이 가슴 속에서 꿈틀거렸다.
하루아침에 이 분노도, 원망도 가라앉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방향을 달리 봐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놈에게 더 완벽한 복수를 하면 되는 게 아닌가.
"오늘 이날을 기억하겠습니다, 하벨 공."
그 순간을 위해 반드시 자신은 오늘을 기억해야만 했다.
"때리셔도 됩니다. 내 이름을 걸고 오늘 일어난 그 무엇도 공에게 해가 가는 일이 없다 맹세하겠습니다."
딱.
하벨이 손가락을 튕기자 아라는 반사적으로 정령수를 넣었다.
화르르륵.
바안은 하벨의 손가락에서 피어난 붉은 불꽃에 눈을 크게 떴다.
"하… 벨 공."
바안의 목소리와 함께 시선이 흔들렸다.
도무지 눈앞에서 펼쳐진 사실을 믿는 게 어려웠다.
불꽃이라니.
"설마 마법사… 였습니까?"
"아뇨, 저하."
하벨은 불꽃의 모습을 바꿔나갔다.
"저는 정령사입니다."
[어!]
아라가 꼬리를 흔들고, 이빨이 보일 정도로 활짝 웃었다.
[이 몸이다!]
"이 여우를 기억하십시오."
"…여우요?"
"저도 가장 괴롭고, 힘들었던 시기에 여우를 보았습니다."
모든 게 새하얀 세상으로 덮인 세상에서 새끼 여우를 보았다.
어미를 잃었는지, 홀로 걷고 있던 그 여우 역시 자신을 보았다.
하벨은 눈동자를 돌려 아라를 향했다.
아라가 그 여우의 모습을 했고, 자신은 아라를 보면서 후회하지 않겠노라 생각했다.
"저는 여우가 좋습니다."
아라는 하벨의 말에 꼬리를 잡고는 얼굴을 파묻었다.
헤헤.
행복을 담은 소리가 들려왔다.
"저하께서도 이 여우를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이건……."
바안은 따뜻하고 포근해 보이는 여우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지요."
저렇게 불로 된 여우가 손을 흔들고, 꼬리를 흔드는데.
그걸 만든 자가 티에라 가문의 유일한 둔재인 하벨 티에라가 아닌가.
바안은 '어떻게'라는 말은 감히 올리지 않았다.
그저 하벨이 불가능을 뚫고 만들어낸 저 사실을 바라보며 가슴 속에 작은 희망의 씨앗을 심어두었다.
"…이번에도 고맙습니다, 하벨 공."
바안은 눈동자에 사라졌던 총명함이 깃들었다.
"저는 곧 왕이 되겠지요."
"그렇습니다."
"현명한 왕이 되겠다고 함부로 말하지 못하겠지만, 이건 약속하겠습니다. 적어도 우둔한 왕은 되지 않겠습니다."
바안은 자신을 위해 이곳에 달려와 준, 조언가이며 스승이며 또 친우가 되고픈 하벨을 향해 약속했다.
후.
랜턴의 검은 불꽃이 꺼졌다.
화르르륵!
예전보다 더 환하게 타오르는 불꽃이 랜턴에 피어올랐다.
그 빛깔은 환히 웃는 바안을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