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134화 (134/415)

134화. 왕의 길이란(2)

* * *

* * *

"…말하겠습니다."

이빨을 모조리 뽑았기에 놈이 어설픈 발음으로 지껄였다.

바안이 손을 들자 달궈진 인두를 들고 있던 병사가 뒤로 물러섰다.

팔 하나가 잘려 나머지 팔 하나로만 천장에 매달아두었다.

그 꼴이 우습다기보다는 왜 저렇게 해도 죽지 않냐는 원망이 꿈틀거렸다.

분명 놈을 저렇게 만든 게 하벨 본인이라는 말을 직접 들었다.

―암살자를 잡은 건 접니다.

하지만 바안은 하벨이 어떻게 그랬는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저하."

옆에서 자신의 왕실 집사가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자신은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다물게 했다.

분명 진정하라는 말이겠지.

다 시끄러웠다.

지껄이는 말 하나하나가 죄다 역겨웠다.

아버지가 죽었다.

밖을 나가셔서 변고를 당한 게 아니라, 이 멀쩡한 왕실에서 저놈에게 복부가 관통되어 죽었다.

왕족만이 아는 비밀 통로는 대체 어떻게 알았으며 아버지를 지키지 못한 그 기사들은 저놈이 아니라 자신의 손에 죽어야 했다.

속에서 자꾸만 무언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건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지금은 아무 생각하지 마시고, 놈을 심문하십시오. 하지만, 죽이시면 안 됩니다.

하벨이 저놈을 죽이지 말라고 했다.

왜.

그저 의문을 품고 겨우 남은 이성으로 저 말에 매달리고 있었다.

"…코, 코스모피안 왕국."

바안은 놈의 입에서 튀어나온 저 대답을 듣자마자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을 느꼈다.

'코스모피안……?'

얼마 전, 하벨이 알아낸 자료라며 룬델이 왕실로 보내주지 않았던가.

코스모피안 왕국이 에르티안 왕국을 노리기 위해서 무얼 했는지 그 자료에 아주 자세히 적혀 있었다.

그때 얼마나 참담했는지.

아버지의 얼굴이 얼마나 일그러졌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 나름대로 왕권을 무너트린 귀족들의 눈을 피해 왕국의 사정을 파악했다고 했는데, 코스모피안 왕국이 이렇게 깊게 뿌리 박힐 때 동안 몰랐다니.

비참했다.

그때의 비참함이 들끓었다.

―아무것도 판단하지 마십시오.

하벨이 내뱉은 경고 같던 그 음성마저 머릿속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왜 그래야 하는가.

왜 저 말을 듣고 있어야 하는가.

드르륵.

바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큼성큼 걸어가 놈에게 주먹을 먹였다.

퍽!

'코스모피안?'

퍼억!

손맛이 더러웠다.

퍽!

"뭐, 코스모피안?"

손등에 달라붙는 피의 촉감이 너무도 질척해 끔찍했다.

하지만 도무지 멈춰지지 않았다.

"코스모피안?"

눈에 핏대가 서고.

"코스모피아안…?"

눈앞에 하얗게 변했다.

"저하."

하벨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

흠칫.

어쩐지 소름이 돋아났다.

바안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하벨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제야 바안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암살자에게 자신이 무얼 했는지 알았고, 제 손에 놈의 피가 묻은 모습에 밀려드는 당황함을 막기 어려웠다.

"…하벨 공. 어떻게 여길……."

"제가 막무가내로 들어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저하."

하벨은 난장판이 된 이 상황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는데… 거참. 아니,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인가?'

하지만 주변에 흘러가는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아 보였다.

아무리 왕이 죽었어도 하나뿐인 왕자가 저렇게 미쳐 날뛰면 덩달아 불안해지는 건 당연했다.

"아니……."

하벨의 사과에 바안은 갑자기 정신이 번뜩 들었다.

"…아닙니다."

자신이 너무도 작아 보였다.

이미 이빨이 빠지고, 잦은 고문으로 손가락조차 들지 못하는 저 암살자에게 이성을 잃고, 그것도 모자라 폭력까지 쓴 꼴을 이곳에 있는 모두가 보았다는 게 아닌가.

바안의 눈동자가 천천히 주변으로 향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저들의 시선이 유난히 곤두선 기분이었다.

마치 질책하고, 비난하고, 험담하는 그런 느낌에 심장이 빨라졌다.

"저하."

하지만 또 들려오는 하벨의 목소리에 바안은 자연스럽게 그를 보고 있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시선을 끄는 하벨의 목소리에 문득 부러움이 넘실거렸다.

지금 이 자리에 누가 왕자고, 누가 일반인인가.

"저들의 입은 무거울 것이며 오늘의 일은 외부로 나가지 않을 겁니다."

하벨은 바안의 시선에서 엿보이는 두려움과 부러움을 읽고 먼저 경고했다.

오늘 일이 외부로 발설될 시 죽은 목숨이라는 걸.

"물러… 가거라."

바안의 시선이 하벨을 쫓아온 왕실 기사들을 향했다.

보고 있자니 이가 갈렸다.

왕실 기사라는 것들이 어찌 저렇게 무능할까.

"저하."

하벨의 부름에 바안은 흠칫거렸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바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해서는 안 될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러다 자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저하와의 독대를 허락해주시겠습니까?"

"…허락합니다."

무얼 망설이겠는가.

바안은 지금 당장 하벨의 바짓자락이라도 붙잡고 싶었다.

아니, 너무도 간절했다.

* * *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습니다."

바안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하벨을 향해 다급히 몸을 돌렸다.

"내가 지금까지 배우고 익혔던 모든 게 무너져내린 기분입니다."

바안의 얼굴에 절망감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를 보자마자 타올랐던 랜턴의 검은 불꽃이 여전히 활활 피어올랐다.

"나는……."

바안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놈을 그냥… 죽이고 싶었습니다. 누가 그랬는지, 왜 그랬는지 알고 싶지 않았습니다."

바안의 손가락이 꿈틀거리다 곧 주먹을 쥐었다.

"아니죠. 왜… 왜 내가 참아야 합니까?"

천천히 풀어지는 바안의 눈동자에 증오가 천천히 차올랐다.

"공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봤을 거 아닙니까?"

사람이 저렇게 많은 피를 쏟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버지는 붉게 물들었다.

자신을 향해 언제나 지어주던 그 다정한 눈빛은 이미 텅 비어버린 껍데기가 되었고, 할 수 있다며 격려해주던 그 손길마저 차디차게 식어버렸다.

"나는… 그 모습에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바안의 일그러지던 표정마저 풀어지기 시작했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었습니다."

하벨은 그저 바안을 바라보았고, 아라는 귀를 접은 채로 하벨에게 매달렸다.

[이 몸은 지금 바안이… 무서워.]

처음에는 바안이 너무도 상처받은 모습에 아라 자신은 그가 가여웠지만, 지금은 달랐다.

어딘가 어긋나 보였다.

그게 무엇인지 몰라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내가 이제껏 버틸 수 있었던 내 버팀목이 사라졌습니다."

바안은 차분해 보였고, 그렇기에 하벨은 그의 마음이 조금씩 부서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어디선가 많이 본 모습.

하벨은 지끈거리는 두통과 함께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내가 사랑하는 존재가… 유일한 내 편이었던 아버지가 사라졌습니다."

바안은 바들거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하벨 공."

―…바다여.

갑자기 자신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바안과 같이 슬픔에 젖은 목소리였다.

"내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내게 방향을 알려주거라. 이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거라. …제발. 제발.

흠칫.

하벨은 잠깐 몸을 떨었다.

머릿속에서 떨어져 나간 기억이 조금씩 생각이 났다.

세계를 갉아먹던 수족을 모조리 섬멸해 육지에 살던 인간들도, 바다에 존재하던 어인들마저 환희에 물든 그 순간, 오직 자신만이 미래를 잃어버렸다.

가족을 모조리 잃은, 그 슬픔이 너무도 벅차 처음을 함께했던 바다를 껴안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가슴 속에서 그때 느꼈던 절망감이 생생하게 몰려왔다.

'…닮았다.'

처음에는 왕자로서 어설픈 모습에, 갓 왕이 되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고.

그다음에는 절망감에 비틀거리는 바안의 모습에, 똑같이 절망감으로 가득 찬 자신이 떠올랐다.

마치 과거의 자신을 그 자리에 데려다 놓은 것처럼 닮아 있었다.

'운명은 참 얄궂구나.'

하벨은 자신의 몸을 훑고 가는 어떤 감정을 느꼈다.

측은함인지, 안쓰러움인지, 아니면 불쾌함인지.

그 감정을 정확히 이렇다고 판단할 수 없었다.

"…아니. 이럴 게 아닙니다."

바안은 솟구치는 눈물을 꾹 눌렀다.

"방금 내가 놈의 입에서 코스모피안 왕국이라는 이름을 들었습니다."

[아니야. 그거 거짓말이야! 이 몸이 들었는데, 일부러 그런 거랬어!]

아라가 고개와 앞발을 나란히 흔들었다.

"그래서 어떡하실 겁니까, 저하?"

하벨이 물었다.

가족을 모조리 잃어버린 자신에게 남은 건 이제 자신이 짊어져야 할 존재들과 바다, 그리고 너무도 커다란 공허함뿐이었다.

복수할 대상도 사라진 이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또 방황하고 말았다.

"…죽여버릴 겁니다. 먼저 우릴, 아니 나를 건든 건 놈들이니까요."

바안은 이를 갈았다.

바안은 지금 이 감정을 터트릴 자가 존재했고, 이미 아버지를 통해 왕이 어떤 존재인지 배울 수 있었다.

그게 자신과 바안이 다른 점이었다.

"내가 앞으로 하는 일은 전부 정당합니다."

빠르게 차오르는 증오의 불꽃이 바안을 삼켜갔다.

덩달아 랜턴의 불꽃이 흔들렸다.

자신과 바안이 다르기에 바안은 더 많이 바뀔 수 있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저하?"

하벨은 랜턴이 아닌, 에르티안 왕에게 했던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잘못된 길을 가려는 바안을 향해 말을 꺼냈다.

이미 자신이 왕실에 도착함으로써 일단 귀족들을 억누를 방패가 되었다.

하지만 왕이 죽었다는 사실은 아무리 숨겨도 새어나갈 수밖에 없는 큰 사건이었다.

지금.

아니, 곧 바안은 에르티안 왕국을 이끌 수 있는 존재인지 귀족들에게 시험을 받을 테지.

"이제 내가… 왕입니다."

살짝 크게 뜬 바안의 눈동자에 핏줄이 섰다.

목소리에 가득 담긴 건 바람이 아닌, 악뿐이었다.

[이 몸이 보기에… 아니야. 왕 아저씨가 더 좋았어.]

아라가 고개를 살짝 내밀다 바안의 표독스러운 시선에 곧 머리를 흔들었다.

"누가 그럽니까?"

하벨은 당당하게 내뱉는 바안의 말에 비웃음을 그렸다.

"…지금 나를 비웃었습니까?"

바안은 마지막 이성을 붙잡으며 천천히 물었다.

또 그 시선이 쏟아졌다.

조금 전 자신이 보인 추태에 기사들도, 병사들도, 하물며 암살자마저 자신에게 보이던 한심하다는 눈빛.

"예, 저하. 그렇습니다."

하벨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바안은 그의 멱살을 잡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아라의 털이 바짝 올라갔다.

"아무리… 아무리 공일지라도 건들면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안은 힘겹게, 아주 힘겹게 말을 꺼내며 하벨의 멱살을 잡은 손을 흔들었다.

"마찬가지입니다, 저하. 아무리 저하일지라도 해서는 안 될 행동이 있습니다."

"지금 나를 힐난하기 위해 독대를 요청한 겁니까?"

"전하를 마지막으로 본 건 접니다."

'전하'라는 말에 하벨의 멱살을 잡은 바안의 손에 잠깐 힘이 풀렸다.

어서 다음 이야기를 해달라는 저 간절한 눈빛에 하벨은 입을 열었다.

―도련님. 이건 정보와 아무 관계없지만, 적어도 저하께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암살자를 마주한 상황에서도 전하께서 바안 저하를 걱정하셨습니다.

"전하께서는 암살자를 마주한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저하를 생각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하여 제가 전하께 한 가지 약속을 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저하가 엇나가지 않도록 돕겠다고요. 저는 지금 그 약속을 지키는 것뿐입니다."

하벨은 자신의 정당성부터 밝혔다.

"그럼 왜……."

"왜 지키지 못했냐는 말은 제게 하실 말씀이 아니죠. 그 말씀은 왕실 기사들에게 퍼부으셔야죠. 아니, 왕실 기사들이 저 모양일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한 저하 자신에게 하셔야죠."

하벨은 싱긋 웃었다.

참 얄미워 바안의 손에 다시금 힘이 들어갔다.

"저하, 저는 암살자를 잡아다 드리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저를 원망하는 행동이 얼마나 유치한지 아시면서 왜 이럴까요?"

"압니다! 알고 있습니다!"

"제가 분명히 분노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그게 쉽겠습니까? 이게 쉬워 보입니까?"

바안의 목에 핏대가 섰다.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모든 핏기가 가신 그 싸늘한 시신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내 아버지 죽었다고! 내 아버지가……!"

"압니다."

"네가 뭘 알아?"

바안은 울컥 치미는 이 분노를 삼키지 못하고 토했다.

아버지가 자신한테 어떤 존재였는지 하벨은, 아니 그 누구도 평생 이해하지 못할 테지.

"평생을 보호 속에 받으며 살아온 네가 뭘 아냐고! 나는 아니야! 나는 평생을 족쇄에 묶여 있었어! 쏟아지는 귀족들의 시선을 맞으며 감시에, 또 감시에, 지긋하게 이어지는 시선 속에서 살았다고! 이곳은 나한테 있어 감옥이나……."

"저하께서는 이제 왕이십니다."

"……."

바안은 숨을 멈췄다.

아버지가 승하하고 나서 제일 먼저 들은 이야기였다.

다음 왕은 자신이라고.

하지만 그 깊이가 달랐다.

바안은 비로소 하벨을 제대로 쳐다보았다.

시선을 살짝 내려다보자 아직 수염도 나지 않은 앳된 얼굴이 보였다.

하지만 자신을 걱정하던 아버지처럼 그 시선이 너무도 깊었다.

"저하께서 이제 이 에르티안 왕국을 이끌어나가실 왕이십니다."

"……."

바안은 그제야 멱살을 잡은 손을 힘없이 놓았다.

아직 창백한 하벨의 낯빛이 뒤이어 눈에 들어왔다.

얼마 전에 쓰러졌다던 하벨이 왕실로 왔다.

티에라 가문에서 왜 하벨을 보냈겠는가.

아직 모자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미안… 합니다."

바안은 미성숙한 자신의 행동에 그제야 미칠 듯한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이건 순전히 화풀이였다.

하벨이 기사들만큼 위협적이지 않으니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아주 추한 행동이 아닌가.

"괜찮습니다, 저하."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하벨 공."

"괜찮습니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가… 방금 공에게 했던 그 소리는 전부……."

바안은 순간 목이 멨다.

아.

왜 모든 게 엉망일까.

아버지가 죽고 모두가 의심스러웠던 순간에 당장 떠오른 사람은 하벨이었다.

스승님 같았고, 훌륭한 조언자였다.

지금 자신이 그 관계마저 부서트리지 않았는가.

하벨도 좋아서 보호 속에 지낸 게 아니었을 텐데.

힘을 잃은 왕실 때문에 그 피해를 고스란히 받지 않았는가.

"저하."

"미안합니다. 내가… 내뱉으면 안 되는 소리를 꺼냈… 습니다."

"원래 모든 게 완벽한 자는 없습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벨은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원래 왕은 실패하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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