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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133화 (133/415)

133화. 왕의 길이란

* * *

라르웬의 등장에 잠깐 놀라던 카샬, 레디나가 방긋 웃었고, 페트리오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굳어진 하벨을 바라보았다.

"안녕, 도련님!"

칼리우스가 해맑게 웃으며 라르웬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순간 화가 났던 라르웬은 그 소리에 애써 미소를 그리며 칼리우스를 따라 손을 흔들었다.

"반가워, 용용아."

라르웬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카샬, 레디나, 페트리오를 보았다.

"너희들도, 반가워. 갑자기 이렇게 불쑥 찾아와 놀라게 한 건 사과할게."

"아닙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둘째 도련님. 얼른, 도련님의 머리카락을 미셔야 할 순간입니다."

칼리우스의 예법이 눈에 밟혔지만, 카샬은 일단 그 사실을 외면하며 이전에 라르웬이 하벨에게 꺼낸 말을 기억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몰래 나가면 안 되지. 너, 다음번에도 가출했다가는 머리카락을 확 다 밀어버릴 거다.

"참나, 기억력은 참 좋아."

라르웬은 코웃음을 살짝 치며 하벨에게 다가갔다.

"잠깐만, 라르웬. 하벨의 머리카락은 건들지 마. 나는 하벨을 함부로 하는 사람이 누구든 싫어."

라르웬이 한 걸음 떼자마자 칼리우스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참 노골적인 살기가 아닌가 싶을 때, 하벨이 칼리우스를 불렀다.

"용용아, 그만둬."

칼리우스가 그 말에 흠칫거리자 레디나가 라르웬과 하벨 사이에 껴들었다.

"둘째 도련님. 무슨 일이 있어도 도련님의 머리카락은 안 돼요!"

레디나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그건 신도인 제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습니다. 다른 건 괜찮은데, 제 신이… 대머리인 건 싫어요!"

[맞아! 이 몸도 반대야! 대장의 머리카락 색은 바다 같단 말이야! 대장이 대머리라도 이 몸은 대장이 너무 좋지만, 그래도 싫어!]

아라도 레디나 앞으로 가 양팔을 벌렸다.

[아라야. 라르웬이 화가 나면 아무리 눈에 보이는 게 없긴 하지만, 그래도 하벨은 알아봐. 오히려 하벨이 싫어하는 일은 무서워서 못 하는 겁쟁이인데?]

루룸은 아라에게 다가가 이마에 손가락을 튕겨서는 키득거렸다.

"…라르웬 님께서 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지만, 일단 진정하십시오. 그 방법으로 도련님을 막기는 어려울 겁니다. 오히려 더 눈에 띄지 않을까 싶습니다."

페트리오까지 조용히 목소리를 내자 라르웬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도 어서 약속을 이행하라는 카샬의 시선이 거슬렸지만, 하벨을 생각해주는 이들이 저렇게 많으니 오히려 자신이 뿌듯하기도 했다.

"저렇게 말리니 머리카락은 일단 보류야."

쳇.

카샬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막내야. 지금 어딜 간다는 건지 말해봐. 헤레스가 어디 가도 된다고 허락은 했고?"

헤레스 이야기가 나오자 하벨은 조금 주춤거렸다.

오늘은 꼼짝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헤레스한테는 말하고 갈 겁니다."

"잘도 허락하겠다. 그래서 어딜 간다는 건데?"

"왕실로 갈 겁니다."

하벨은 라르웬의 시선을 살짝 피하며 말했다.

아직 라르웬과 다 풀지 못한 관계 때문에 마음이 조금 무거웠다.

"…후."

라르웬이 숨을 삼켰다.

"방금 그 소식을 듣자마자 놀라서 달려왔는데… 정말 전하께서 승하하셨다니."

루룸이 세렌한테 놀러 가다 말고 자신한테 달려와 말해주지 않았던가.

"말리실 겁니까, 형님?"

"아니. 방금 문 앞에서 네가 간다는 소리에 진짜 황당했지만, 이번에는 말릴 순 없지."

라르웬은 고개를 가로저었고, 카샬은 도리어 황당해하며 말을 꺼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둘째 도련님? 도련님께서 얼마 전에 쓰러지셨다는 사실을 잊으셨습니까? 아직 물의 저주로 손등이 푸른 상태입니다."

"나도 알아."

라르웬의 눈썹 사이가 좁혀졌다.

지금 솔직히 말하자면 여기서 가장 애가 타는 건 자신일 테지.

하지만 왕이 죽었다.

곧 일어날 이 혼란을 잠재우려면 아주 거센 호랑이가 왕실로 향해야 했다.

그만한 덩치를 가진 호랑이가 지금 티에라 가문 말고 누가 있던가.

'오늘 처음으로 내가 '클로저'라는 게 원망스러울 지경인데.'

이번에 자신이 하벨을 따라 같이 왕실로 향했다.

클로저로서 틈의 세계 일을 등한시했다는 이유로 지금 징계를 먹지 않았던가.

이와 같은 일이 또 일어난다면 다른 나라로 발령이 떨어질지도 몰랐다.

'이번에는 몸을 사려야 해.'

비정상적인 틈의 세계의 등장과 그때마다 하벨이 있었다는 이 묘한 관계가 다른 클로저의 귀에 들어간다면 제아무리 아버지일지라도 하벨이 본부로 소환되는 걸 막기 어려울 테지.

오히려 티에라 가문을 노리던 자들이 날을 세우고 덤빌지도 몰랐다.

라르웬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었다.

"가는 건 좋아."

"어디 아프십니까?"

하벨은 미심쩍은 눈으로 라르웬을 바라보았다.

가출했다고 머리까지 때리지 않았던가.

비가 온 뒤에도 움직였다고 혼내고 그랬는데.

"그럴 리가. 틈의 세계에 나온 괴물한테 배가 뚫렸어도 내 정신은 멀쩡했는데?"

[어엇! 배, 배가… 뚫렸어?]

아라가 깜짝 놀라며 라르웬에게 다가가 배를 만졌다.

[아직도 아파?]

"아니. 이미 다 나아서 아프진 않아."

라르웬은 아라를 쓰다듬으며 하벨을 쳐다보았다.

"지금은 누구라도 왕실로 가야 할 상황이잖아? 다 알면서 묻긴."

라르웬은 하벨의 이마를 가볍게 찔렀다.

"네가 물론 잘하겠지만, 잘 때 두 발 뻗고 자게 가서 뭘 어떻게 할 건지만 말해줘."

"일단, 바안 저하를 머리를 후려칠 겁니다."

"머리를 왜 쳐?"

라르웬은 진심으로 놀라며 물었다.

벌써 불안해졌다.

"여차하면요. 만약 제정신 못 차리면 쳐야죠."

"진짜… 치는 건 아니겠지?"

"걱정하지 마세요. 뒷감당은 내가 하겠습니다."

당당한 하벨의 말에 라르웬은 손바닥을 내보이며 다른 손으로 눈을 잠깐 가렸다 내렸다.

"…목이라도 내놓게? 아무리 그래도 왕자를 치면 안 된다."

"바안 저하가 엇나가지 않게 돕겠다고 전하하고 약속했습니다. 물론, 나도 거기까지는 바라지 않습니다."

가벼워 보이는 말과 달리 하벨의 눈동자는 가라앉았다.

"전쟁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일어나서는 안 되니까요."

"그래. 네 말이 맞아, 막내야. 전쟁은 일어나면 안 되는 거지."

라르웬은 한결 후련한 표정으로 하벨의 주먹을 가리켰다.

"그리고 이 주먹도 나가면 안 되는 거고."

지금 하벨은 딱 움직일 수 있는 상태이지 않은가.

여전히 가지 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그 말보다 우선해야 할 말을 꺼냈다.

"하벨을 잘 부탁해."

라르웬은 고개를 돌려 레디나와 칼리우스, 그리고 페트리오를 바라보았다.

"…저는요?"

그 속에 카샬은 없었다.

* * *

"…진짜 조금 전에는 그만두고 싶었습니다. 다 때려치울까, 그렇게 말입니다. 둘째 도련님께도 실망입니다. 어떻게 도련님을 안 말릴 수가 있습니까? 예?"

카샬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고 또 쓸었다.

[아, 안 되는데! 카샬! 그만두지 마! 이 몸은 카샬이 좋단 말이야.]

마차 창문에 붙어 있던 아라가 깜짝 놀라며 카샬의 옷자락을 흔들었다.

"그래서 갈 곳은 있고?"

밖을 바라보던 하벨이 보란 듯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제가 있겠습니까? 있으면 때려치웠죠. 망할, 모셔야 할 분의 난이도만 올랐잖습니까?"

카샬은 아주 잠깐, 지금 하벨 말고 하벨 티에라를 원망했다.

기왕 누굴 데리고 오려면 정상적인 사람으로 데리고 와야 하는 게 아닌가.

"그렇게 화가 나면 내가 뭘 하든 간에 그냥 지켜보면 되는 거 아니야?"

"지켜보면 속이 터져서 말이 나오는데 그걸 어떻게 참습니까? 도련님께서 움직이면 10번 중 5번 이상을 쓰러지시는 걸 알면서도 참는다는 건 집사로서 직무유기입니다."

카샬이 손을 내리자 짜증이 섞인 표정이 드러났다.

"그리고 참을 수 있었으면 애초에 집사를 왜 합니까? 그냥 시종을 하고 말죠. 아니, 그냥 시종할 걸 그랬습니다. 이러다 위장약이라도 먹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카샬."

"왜요?"

"일단 오해는 좀 풀어."

"무슨 오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퉁명스러운 카샬의 말에 하벨은 하벨 티에라의 몸을 가리켰다.

"내가 되도록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좀 억울해서 말해야겠어."

"억울요? 억울한 건 접니다. 뜯어말려도 욕먹고, 안 뜯어말려도 욕먹는 저 말입니다!"

"그거 말고, 이 몸이 너무 약해."

하벨이 던지는 말에 카샬은 감정이 미끄러져 내리듯 표정에서 짜증이 사라졌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별로 움직인 건 없어. 아마 아라는 알 거야."

[……?]

아라가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벨은 검지를 들어 한 마디 남기고 움켜쥐었다.

"나는 진짜 이만큼만 움직였는데 몸이 벌써 난리가 나 있어. 너도 이 몸이 얼마나 약한지 알고 있잖아?"

"…당연히 알고야 있죠. 그러니까 조심조심 다뤄달라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까?"

"그게 달라. 육체만 따졌을 때는 아주 멀쩡해. 문제는 물의 저주와 정령수를 이용해 힘을 썼을 때 오는 반발감 때문이야."

하벨은 용왕의 힘까지 언급하려다 말았다.

어차피 이 몸은 인간이기에 용왕의 힘을 버티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오히려 이만큼이나 버틴 것만으로도 용하다 싶을 정도였다.

"결론은 나도 억울하다는 거지. 이제 설명이 다 된 거지?"

하벨은 드디어 오해를 푸나 싶어 기대감이 어린 시선으로 카샬을 보았다.

"아뇨."

"하여튼, 너는 참 매정해."

"예. 제가 좀 그럽니다."

"아라가 네가 매정하다는 말에 충격받았는데?"

"…거짓말입니다, 아라 님."

카샬은 말을 바로 바꿨다.

[이 몸은 충격받지 않았어. 거짓말하는 건 대장이야! 이 몸은 카샬이 착한 거 알고 있다구.]

아라는 계속 카샬의 옷자락을 흔들었다.

"아라는 거짓말을 싫어하는데?"

하벨은 순진한 미소와 함께 말을 꺼냈다.

아라가 옷자락을 놓고 하벨의 팔을 깨물었다.

[대장이 지금 거짓말하고 있잖아!]

"아 참, 카샬."

카샬의 눈썹이 꿈틀거릴 때쯤, 하벨은 아라의 배를 간질이며 입을 열었다.

"왜 그러십니까?"

카샬은 벌써 의심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보았다.

"방금 오해를 풀려고 말했는데 진짜 하나도 소용이 없었네. 뭘 그렇게 의심하고 있어?"

"당연하잖습니까. 저는 도련님의 머릿속을 알 수 없으니까요."

"그래. 너는 내가 얌전히 침대에 누워 있고, 하하 호호하면서 얌전히 밥이나 먹고, 얌전히 산책이나 하다가 때론 책을 보면서 지내길 원하는 것 같네."

"아뇨. 그렇게 생활하면 재미없잖습니까. 최소한 쓰러지지 않으실 범위 안에만 움직이시면 됩니다."

이번에는 하벨이 카샬을 의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검 좀 줄 수 있어?"

"검에 관심이 생기셨습니까?"

카샬은 순순히 검을 꺼내 하벨에게 넘기려다 말고 멈칫거렸다.

"여기에서 휘두르시면 안 됩니다."

"카샬. 내가……."

"34일 되셨잖습니까."

하벨은 순간 울컥했지만, 카샬의 의기양양한 표정은 죽어도 보기 싫어 억지로 웃었다.

"그럼. 나중에 100일 되면 케이크 만들어 줘. 만들어준다고 네 입으로 말했으니까."

하벨은 포탈로 들어서기 전에 용왕의 힘을 끌어모아 물을 만들었다.

금세 아라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이 몸한테 주려고?]

"아니, 아라야. 이번에는 주인이 따로 있어."

―침대만 좋아하는 정령이 있고, 옷만 좋아하는 정령도 있고 그런 거지. 그럼 침대 정령이고, 옷 정령이니까. 보통 그런 정령들은 음, 그 물건하고 동화되어 있더라고.

정령이 물건에 녹아들 수 있다고 루룸이 말해주었다.

그 뒤에 아라가 카샬의 검에 정령으로 추정되는 존재를 봤다고 했고.

신경 쓰였다.

자신이 봤을 때, 카샬은 마나를 사용하지 않은 게 아니라 사용하지 못했으니.

―카샬한테 마나가 있냐고? 아니. 카샬은 마나 냄새가 하나도 안 나는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봐, 하벨?

혹시나 해 칼리우스가 다른 마차를 탈 때 잠깐 불러 물어봤다.

'궁금하면 확인해 봐야지.'

하벨은 만든 물로 카샬의 검 주변을 맴돌게 했다.

이토록 신선한 물은 처음일 텐데.

먹고 싶을 텐데.

킁킁.

무언가 냄새를 맡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

아라가 침을 꼴깍 삼키다 말고 깜짝 놀랐다.

카샬의 검에서 무언가 꿈틀거렸다.

족제비를 닮은 듯한 정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물을 보며 꼬리를 흔드는가 싶더니 바로 온몸의 털을 곤두세우며 살기를 드러냈다.

[카샬은 못 줘!]

분노를 넘어 증오가 섞인 목소리와 함께 정령은 사라졌다.

'…뭐야? 진짜 정령이 있었잖아?'

하벨은 신기함에 입꼬리를 가득 올렸다.

[…대장.]

새로운 정령의 등장에 깜짝 놀란 것도 잠시, 아라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이 몸은 진짜 아무것도 안 했는데. 어떻게 인사할지 머릿속으로 막막 떠올리고 있었는데.]

아라의 눈망울이 잠깐 일렁거렸다.

너무했다.

"…도련님."

카샬의 목소리가 갑자기 떨리자 하벨은 아라를 달래다 말고 카샬을 보았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에 하벨은 당황했다.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방금, 제가 있잖습니까."

"그래."

"방금……."

"방금 왜?"

"…여우를 봤습니다."

카샬 자신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은 안 보이지만요, 분명 도련님 옆에 떠 있던 새하얀 여우를 봤습니다."

"……?"

하벨은 눈을 크게 떴다.

"혹시, 혹시… 아라 님이십니까?"

어느새 뜬 카샬의 눈동자가 물결치고 있었다.

그건 환희였다.

[오오! 맞아! 이 몸이야! 이 몸은 대장이 떠올렸던 북극여우의 모습을 본떠서 이 몸이 되었어!]

아라의 꼬리가 언제 시무룩했는지 살랑살랑 움직였다.

"아라가… 보였다고?"

하벨은 카샬을 빤히 바라보았다.

슬픔과 기쁨이 공존한 그 모습은 참 낯설었다.

함부로 말하지 못할 무슨 사정이 보였지만, 하벨은 기뻐하며 입꼬리를 가득 올렸다.

아마도 물의 친화력이 높지만, 정령을 보지 못했던 하벨 티에라 같은 경우가 아닐까.

"내가 도와줄게, 카샬."

"……?"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내가 처음에 그랬어."

"……."

"네가 괜찮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

하벨 자신이 경험자로서 카샬을 도울 수 있을 테지.

"……."

카샬은 난생처음 들어보는 말을 들은 듯 잠깐 하벨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꺼내려던 카샬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입술마저 깨물었다.

여전히 카샬의 낯선 표정에 하벨은 이 이상 아무 말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당장 카샬이 '예'라고 대답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일인 듯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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