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좀도둑, 도착!(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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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가 많이 무거운데?"
페트리오는 하벨의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입을 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카샬의 시선이 평소와 달랐다.
하물며 시비조차 걸지 않았다.
"이봐, 카샬. 오늘 무슨 날이야? 내 생일… 아니지. 애초에 네가 내 생일을 알 리가 있겠어?"
페트리오는 말을 하다 말고 미간을 찌푸렸다.
"조용히 문이나 닫고 와, 좀도둑."
카샬이 문을 가리켰다.
페트리오는 마지 못해 문을 닫고는 카샬을 따라갔다.
"정보에 빠삭하다더니 거짓말이네."
갑자기 자신을 찌르는 카샬의 말에 페트리오는 이제야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안정감을 찾았다.
"그럼 그렇지. 네가 달라지는 걸 기대하느니,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이 되는 게 빠르겠지."
카샬은 빈정거리는 페트리오의 말에도 그저 웃기 바빴다.
나중에 하벨이 꺼내는 말을 들어도 저렇게 태평할 수 있는지 벌써 기대가 됐다.
'무려 왕이 죽었다는 소식인…….'
곧 카샬은 생각을 멈추고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문을 열자 침대에 앉아 불하고 물을 꺼내 저글링을 하는 하벨의 모습에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손뼉을 마주치는 레디나는 또 뭔지.
분명히 하벨이 쓸데없는 짓을 하면 말려달라고 말했는데.
'…아니지. 레디나가 내가 왔다는 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카샬이 의문을 가지자 하벨이 불과 물을 지워내고는 보란 듯이 웃었다.
"도련님. 지금 정령수를 가지고 뭐 하는 겁니까? 설마, 일부러 제 혈압이 솟구치도록 이런 일을 벌이신 겁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난 가만히 있었고, 움직이지도 않았어. 너랑 한 약속은 다 지키고 있었는데? 믿기 어려우면 레디나한테 물어봐."
도리어 하벨이 억울해하자 카샬은 뒤통수가 따끔따끔했다.
물론, 자신이 정령수를 가지고 놀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건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아닌가.
"도련님께서 하신 말씀은 다 사실이에요."
레디나마저 입꼬리를 올리자 카샬은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억누르려 얼마 뒤에 받는 월급을 떠올렸다.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졌다.
"왔어, 페트리오?"
페트리오는 들어오다 말고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머뭇거렸다.
하벨이 평소보다 과하게 자신을 환영하는 듯한 느낌에 조금 전 카샬처럼 뭔가 꺼림칙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습니까? 좀 이상합니다."
"안녕, 페트리오!"
옆방에서 놀고 있던 칼리우스가 달려와 페트리오에게 인사했다.
페트리오는 반사적으로 손을 흔들었다.
다시 왔던 곳으로 달려가는 칼리우스의 해맑은 모습에 페트리오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용용이랑 아라랑 같이 놀고 있거든."
"그렇죠. 도련님께서도 1시간 전까지 같이 색칠 놀이하셨고요. 좋아하셨잖습니까?"
그저 평범하게 꺼낸 말에 카샬이 넌지시 찌르자 하벨의 눈썹이 꿈틀거렸고, 레디나가 웃음을 참으려 입을 틀어막았다.
지금은 웃을 때가 아니었다.
페트리오가 왔으니 본격적으로 왕을 시해한 범인과 관련된 단서를 파악할 때가 아닌가.
"오늘 좀 이상하지?"
하벨이 페트리오를 보며 물었다.
"예. 너무 이상합니다."
"내가 아주 큰 일이 있다고 말했잖아? 그것 때문이야. 혹시 잊어버린 건 아니지? 그렇지?"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오면서 별의별 생각이 다 나더군요. 하지만 추측하는 건 그만뒀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큰일을 떠올려봤자 도련님이 벌이시는 일에 비하면 턱없이 작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무척 아쉬울 테지만, 이번에는 내가 벌인 일이 아니야."
하벨의 목소리가 퉁명스러웠다.
하다못해 페트리오까지. 기분이 묘했다.
자신이 뭘 어쨌길래 다들 사고뭉치로 보는 건지.
'…류아도.'
하벨은 순간 생각을 멈췄다.
류아의 이름을 떠올리자마자 죽었던 기억과 함께 몸이 관통된 느낌이 몰려오며 믿을 수 없었던 장면까지 따라왔다.
'생각하지 마라. 아무것도.'
하벨은 섬뜩해진 그 감각을 떨쳐내려 애써 마른 침을 삼키고 목소리를 냈다.
"…그전에 네가 가져온 정보부터 줄래?"
"도련님. 저도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페트리오는 하벨의 물음에 대답하기에 앞서 이곳에 오면서부터 생각하던 부분부터 꺼냈다.
"묻고 싶은 게 뭔데?"
"마법 암호문은 해석하셨습니까?"
페트리오는 그게 마음에 내내 걸렸다.
자신이 살펴보았지만, 보통 마법 암호문은 아니었다.
아직 미완성이었고, 그 미완성인 부분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마나가 다 털리지 않았던가.
"용용이가 알려주던데? 그게 엄청 어려운 마법인가 보네?"
"단지 '엄청'이 아닙니다. 역시 용은 다르다는 존경심이 몰아칩니다. 그토록 복잡한 암호를 풀다니. 마나가 꽤 회복된 모양입니다."
페트리오는 칼리우스가 나왔던 방을 잠깐 살피며 말했다.
하벨의 혀가 입속에서 천천히 굴러갔다.
"갑자기 마나 이야기는 왜 하는 거야? 설마 마법 암호문을 푸는데 마나가 많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지?"
"정확하십니다. 숨겨진 문자를 발견하고, 뒤섞인 문자를 바로 잡고, 유지하도록 고정하고. 이렇게만 해도 마나가 상당히 필요로 합니다. 거기에 해석까지 하려고 한다면 음……."
"용용이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하벨은 숨을 짧게 들이켜며 묻자 카샬이 대답했다.
"그거야 도련님께서 물어보지 않으셨잖습니까? 칼리우스가 마나를 펑펑 쓰는지 아닌지 말입니다."
"……."
하벨이 침묵하자 레디나는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녀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칼리우스의 마나를 채우러 이곳에 왔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마나를 펑펑 써버리게 하다니.
그것만큼 우스운 게 어디 있는가.
레디나는 하벨의 이런 인간미가 가득한 모습이 참 좋았다.
"그… 도련님."
페트리오가 충격에 빠진 하벨을 보며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시작은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이었으니 말을 돌릴 게 필요했다.
"제가 이미 카샬한테 알려줬지만, 칼리우스가 뒤쫓은 그 장소에 있던 마법사의 기억을 읽어 마법 암호문과 더불어 다음 거대 정화 장치 실험 장소를 알아냈습니다."
"…그래. 그건 이미 카샬한테 들었지."
하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디나가 데론의 저택에 가져온 코스모피안 왕국과 결탁한 이들의 자료를 읽으면서 듣지 않았던가.
"내가 나도 모르게 용용이의 마나를 쓰게 했다니……."
또 하벨의 입에 그 말이 오르내리자 페트리오는 빠르게 말을 이어 나갔다.
"이전에 웨인 톨이 건드렸던 거대 정화 장치 이외에 마법 반응이 있던 거대 정화 장치가 있었다는 사실도 말씀드렸습니다. 혹시 기억하십니까? 물론, 기억하고 있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그건 하나의 과정일 뿐입니다."
"기억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마법사들을 덮치려 그 두 가지 장소를 계속 살피고 있었습니다. 물론, 크라마가 현재 가면단과 함께 장로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아."
하벨이 무언가를 떠올리듯 말을 꺼내자 페트리오는 설마 하며 물었다.
"잊어버리신 거 아니겠죠?"
"잊지는 않았어. 그런데 내 기억 속에 순서가 조금 뒤로 미뤄졌을 뿐이야."
드웰이라는 마법사가 찾아와 자신의 영혼을 살폈다.
돌려줄 수 없다.
그 말에 모든 신경이 그쪽으로 집중되고 말았다.
'그리고 왕이 죽었지.'
지금 마법사 협회 장로가 눈에 들어올 리가 있겠는가.
"그래서 좀도둑? 그 두 개 사이에 뭘 발견한 거야? 어서 알려줘."
"잠복 끝에 마법사들을 포획 후 제 마법을 통해 기억을 읽었습니다."
페트리오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묻어났다.
"마법사들이 어디에서 돈을 가져오는지를 보았습니다. 그 돈을 준 자의 얼굴과 이름을 또렷이 기억했고요."
"그러니까, 마법사 협회의 자금줄을 찾았다?"
하벨의 미소가 길어지자 페트리오는 주춤거렸다.
"아직 정확한 건 아니지만, 비슷합니다. 현재 크라마가 동물을 이용해 놈을 찾고 있습니다."
원치 않게 마법사 협회의 장로와 함께 자금줄 행방까지 알아내야 했지만, 크라마는 오히려 기뻐했다.
―이 빡빡함. 오히려 기분이 좋습니다. 마법 연구하면 말입니다, 아, 마법사라서 아시겠네요. 보통 이틀 철야는 기본 아닙니까? 그것보다 페트리오 씨, 혹시 마법사 협회가 증오스럽다거나, 부서트리고 싶으시다면 저한테 꼭 말씀해주십시오.
살짝 엇나가 있는 모습에 역시 마법사다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던가.
'아주 좋은 소식이다.'
하벨은 다시금 생각해도 입꼬리가 내려가질 않았다.
모름지기 어떤 나라든 어떤 단체든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돈이었다.
그 돈을 틀어막고.
마법사들을 휘어잡고.
협회장을 죽인다면.
'잘하면 마법사 협회를 장악할 수도 있겠는데?'
하벨은 실실 나오는 웃음을 막지 않았다.
마법사 협회는 에르티안 왕국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다른 나라에 퍼져 있다는 게 가장 큰 문제가 아닌가.
거대 정화 장치를 역으로 이용하고, 정령들을 잡아 오염된 물을 검은 물로 바꾸는 그 과정이 에르티안 왕국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면 어떡할 건가.
"도련님. 지금 이상한 생각하지 마십시오."
카샬이 딱 잘라 말했다.
너무도 불안하게 하벨의 눈동자에 장난기가 가득 담기지 않았는가.
뭘 또 엎으려고.
아니, 뭘 또 박살 내려고.
"아직 별생각 안 했어. 그냥 가능성만 되짚어 봤을 뿐이니까."
"그러니까,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마십시오!"
카샬은 바로 페트리오를 째려보았다.
"네놈이 도련님의 장작에 불을 붙였잖아! 오면서 도련님께서 생각하실 수 있는 최악의 가능성은 버리고 말씀드려야 할 것 아니야?"
"내가 오면서 몇 번이나 생각했을 것 같아? 마차 안에서 뽑은 머리카락만 몇 개인데!"
페트리오의 언성이 덩달아 올라갔다.
하벨은 불이었다.
작은 불꽃에도 쉼 없이 타오르는 불.
'그래서 내가 얼마나 생각했는데.'
마법사 협회의 자금줄 행방 소식을 알림과 동시에 하벨이 생각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을 파악하는 시간을 가졌다.
자신이 생각한 하벨이 움직일 방향은 마법사 협회의 자금줄을 파악한 후에 그곳을 도리어 차지하는 식이 아닐까 싶었다.
"아니. 왜 또 싸우는데? 어린아이도 아니고 무슨 만나기만 하면 싸워?"
하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턱을 괴어 열심히 구경하던 레디나가 황당한 하벨의 표정에 넌지시 물었다.
"그럼 도련님. 도련님은 어떤 생각을 하셨는데요?"
"음. 마법사 협회를 가지면 어떨까 싶었는데?"
"……."
순식간에 침묵이 내려앉자 하벨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진심… 으로 하시는 말씀이세요?"
레디나가 긴가민가하며 물었다.
"그럼. 마법사 협회 전체를 박살 내려면 우선 에르티안 왕국의 마법사 협회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서."
에르티안 왕국에 있는 마법사 협회만 박살 내면 뭐하겠는가.
애초에 마법사 협회는 왕국 전체로 퍼져 있어 다시 또 끊임없이 자라날 텐데.
에르티안 왕국에 있는 마법사 협회가 꼬리일지, 몸통일지, 아니면 독자적인 노선을 선택한 건지 모르지만, 애초에 확실히 처리할 생각이 없었으면 건드리지도 않았다.
"손가락부터 하나씩 잘라가야지."
하벨은 눈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잠을 건드리고, 물을 건드리고, 정령까지 건드렸다.
아니, 놈들이 자신을 건드린 그때부터 쳐부수기로 했다.
"도련님께서 마법사 협회에 원한이 그렇게나 크신 줄은 몰랐어요."
레디나가 눈을 깜박거렸다.
이미 하벨이 마법사 협회를 없앤다고 말했을 때부터 예상하긴 했지만, 이건 자신이 생각한 짐작을 넘어섰다.
"원한이 없는 건 아닌데,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너도 없애고 싶잖아, 레디나?"
"당연히 그렇죠. 놈들은 이미 세상을 갉아먹는 악이에요. 검은 달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기에 놈들이 저렇게 더 날뛰는 걸 테고요."
하벨은 레디나의 대답을 들으며 페트리오를 바라보았다.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저는 등록되지 않은 마법사입니다. 이 사실을 들키면 마법사 협회 소속 마법사한테 사냥당하겠지만, 지금까지 잘 숨기고 발까지 담그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에르티안 왕국의 귀족으로서 나라에 잘 보여야 하기에 저야 이 기회를 놓칠 수야 없는 처지입니다."
페트리오는 하벨이 자신을 짊어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그가 합리화할 수 있는 말을 꺼냈다.
"저야 월급을 받는 처지이니 하기 싫다고 할 수 없……."
"넌 안 물어봤어, 카샬."
하벨은 카샬의 말을 자르고는 레디나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카샬이야 집사로 있는 이상 하고 싶지 않아도 할 수밖에 없었다.
"레디나. 이제 좀도둑한테 그걸 넘겨줘."
하벨은 페트리오의 보고가 만족스러웠다.
마법사 협회를 압박할 무기가 하나씩 손에 넣지 않았는가.
이제 확인해야 할 건 하나였다.
자신이 페트리오를 기다렸던 이유이자, 지금 에르티안의 위기를 구할 수 있는 자.
자신도 이곳에 전쟁이 일어나는 건 원하지 않았으니.
"…제가 무얼 봐야 하는 겁니까?"
페트리오는 레디나가 꺼낸 피가 들은 작은 병을 보자 흠칫거렸다.
예사롭지 않았다.
"왕을 죽인 범인의 기억. 그거면 충분해."
하벨이 가볍게 던진 말에 뚜껑을 열고 피로 손가락을 찍던 페트리오가 그대로 고개를 갸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