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누가 그랬을까(3)
* * *
"아직도 마법 암호문이 완벽하진 않아서 지금 내가 읽을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야."
기억을 더듬던 칼리우스는 이 이상 하벨에게 말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확신하고 입을 열었다.
칼리우스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이상해."
하지만 하벨이 말을 던졌고, 카샬이 이를 날름 주웠다.
"확실히 이상합니다."
하벨에 이어 카샬까지 같은 말을 꺼내자 칼리우스는 당황했다.
"내, 내가 잘못 해석했나 봐. 다시 해석할게. 그럴 수 있어!"
분명히 합쳐진 마법 암호문에 그렇게 적혀 있었는데.
칼리우스의 다급한 목소리에 하벨을 아차 했다.
"용용아."
"으, 으응."
"나한테는 눈치 안 봐도 돼. 아, 이참에 카샬한테 일을 배우니까, 카샬을 닮아가는 걸 어떨까?"
"도련님.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저도 눈치는 봅니다."
카샬은 듣다 말고 기가 차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저 말에 하벨은 보란 듯이 손가락으로 카샬을 가리켰다.
"봤지? 일단 나는 카샬의 주인인데 꼬박꼬박 말대답도 하잖아. 물론, 카샬을 완전히 닮으라는 건 아니고, 반의반, 또 그 반의반의 반만 닮자, 용용아."
"하지만 내가 틀리면 어떡해?"
"그러면 죽었다고 생각하고 수습하면 되는 거야. 그렇게 계속 구르다 보면 알게 되는 거지. 실수하기 전에 제대로 보자, 이렇게."
하벨이 활짝 웃자 칼리우스도 덩달아 미소를 피웠다.
"아!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면서 수습하면 되는 거구나!"
[……?]
아라가 저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틀린 것 같은데 뭐가 틀렸는지 몰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바로 그거야, 용용아. 방금 내가 이상하다고 말을 꺼낸 건 네가 해석한 내용 말고 암호문이 흩어진 걸 말했던 거야. 결국, 첫 번째 얻었던 암호문과 이어져 있었잖아?"
하나는 크라마와 레디나가 칼리우스가 폭주했던 그 땅을 노리고 온 마법사 협회의 끄나풀을 족치다 발견했다.
두 번째는 칼리우스가 추적한 거대 정화 장치와 관련된 마법사 협회 끄나풀을 페트리오가 조사한 후에 찾아낸 게 아닌가.
"저렇게 중요한 내용이라면 가장 중요한 장소에 숨기는 게 당연할 텐데요."
카샬이 하벨이 생각한 의문을 긁어주었다.
"그러니까. 내용 자체만 보면 문제는 없지만, 이렇게 조각난 암호문만 바라본다면 뭔가 함정 같은 느낌이 들어."
하벨은 턱을 몇 번 긁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함정이란 생각이 들지만, 다시 한번 머리를 굴려본다면 도리어 안전할 수 있었다.
마치 집 뒤편에 전설적인 무기가 묻힌 기분이지 않는가.
"어디 가, 하벨?"
걷다가 쓰러지면 어쩌나 싶은 마음에 칼리우스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주님을 만나러 갈 거라 일어날 필요 없어. 잠깐 둘이 놀고 있어."
시간이 살짝 지체되었지만, 왕이 죽었다는 소식은 룬델이 빨리 알든 아니든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같이 가겠습니다."
카샬이 눈을 살짝 매섭게 떴다.
이번에는 눈을 떼지 않으리라.
* * *
"…콜록, 콜록."
룬델은 태연하게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오는 하벨을 보자마자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분명 한동안은 얼굴을 마주하기가 힘들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볼 줄이야.
'낯빛이 여전히 좋지 않구나.'
하벨을 보아 좋은 마음과 여전히 좋지 않은 하벨의 낯빛에 측은한 마음이 공존했다.
조금 더 쉬다 올 것이지.
"무슨 일이 생겼더냐?"
하벨이 소파에 앉자 룬델은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아직 자신이 하벨에게 꺼냈던, 자기 아들이 되어주겠냐는 제안에 대답을 들을 시기는 아니었다.
"왕이 죽었습니다."
하벨이 말을 꺼냈다.
룬델이 걸음을 멈췄고, 하벨 뒤에 서 있던 카샬마저 눈을 떠 황당한 시선으로 하벨을 바라보았다.
"…바, 방금 갔다 오신 곳이 왕실이셨습니까?"
말을 더듬거리며 카샬이 입을 열었다.
"왕실로 가다니? 설마……."
[뭐야? 아라가 물의 이동을 익혔어?]
하벨의 등장에 아라를 찾던 세렌이 룬델의 말을 자르며 하벨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세렌의 눈동자에 감동이 물결치고 있었다.
"맞아. 아라가 익혔어."
[역시. 아라라면 해낼 줄 알았어. 그래서 아라는 지금 어디에 있는데? 축하해줘야지!]
"지금 용용이하고 놀고 있지. 되게 행복하게."
하벨은 일부러 뒷말에 힘을 주었다.
세렌이 아라를 좋아하는 거라면 이곳 정령들도 다 알고 있으니까.
[용…….]
세렌의 부리가 '딱딱' 부딪혔다.
[그 용이 또 아라랑……. 나도 그렇게 못 해 봤는데. 내가 먼저 아라랑 만났는데.]
저번에도 칼리우스와 아라가 행복하게 노는 걸 보았는데.
얼마나 짜증이 치솟던지, 지금도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용용이 괴롭힐 생각하지 마, 세렌."
걔가 세상을 파괴할 용이란 말이지.
하벨은 뒷말을 삼키며 세렌의 날개를 찔렀다.
탁!
세렌은 날개를 휘둘러 하벨의 손을 쳤다.
[내가 그런 유치한 짓을 할 것 같아? 어린아이는 내가 아니라 너야. 아직 반백 년도 안 살아봤으면서!]
하벨은 아니라고 말하려 했지만, 이 세계에 온 지가 34일 정도 지났으니 어쩌겠는가.
"그러고 보니 용용이는 아직 아라가 물의 이동을 익혔다는 사실을 모를 텐데. 축하해주면 엄청 기뻐하겠다?"
하벨은 활짝 웃으며 세렌을 살살 긁었다.
적어도 자신이 오기 전까지는 칼리우스는 그 사실을 몰랐으니 일단은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럼 내가 먼저… 잠깐만. 그런데 방금 꺼낸 말 말이야.]
세렌은 기뻐하다 말고 뒤늦게 하벨이 내뱉은 말을 떠올렸다.
[왕이 죽다니? 이거 장난으로 꺼낼 말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장난이면 진짜 실망할지도 모르니까, 지금 사과해.]
"장난 아니야. 내가 방금 목격했고, 범인을 붙잡고 온 길이니까."
"……!"
카샬은 기껏 감았던 눈을 다시 뜰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꼴로 이동한 것도 모자라 한술 더 떴다니.
"하벨아, 좀 더 자세히 말해주거라."
룬델은 이미 웃음기를 지운 채로 자리에 앉았다.
당장 바안에게 연락하고 싶었지만, 일단 상황 설명을 듣는 게 먼저였다.
"바안 저하께는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당연하게도 상태가 좋지는 않았지만.
하벨은 아공간 주머니를 열어 레디나가 챙긴 쪽지와 왕을 죽인 놈의 단검, 잘린 옷자락을 꺼냈다.
"레디나가 불로 확인해봤지만, 쪽지에 따로 비밀이 숨겨져 있지는 않았습니다."
룬델이 쪽지부터 쥐자 하벨은 설명을 붙였다.
"그리고 이 단검은 에르티안 왕국에서 만든 게 아니라고 하더군요."
"말이 안 됩니다, 도련님."
설명을 듣다 말고 카샬이 반박했다.
"암살자는 자신의 정보를 최소화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그 나라에서 만들어진 물건을 사용하는 게 기본입니다."
"나랑 레디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이 증거물만 봐도 본인을 너무 드러내고 있잖아?"
"그래서 하벨 너는 이것 자체가 거짓 정보를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생각하더냐?"
룬델의 눈썹이 올라갔다.
"맞습니다. 누가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놈들이 겨냥한 목표는 누가 보아도 '바안' 저하가 아닙니까?"
"바안 저하를 흔들기 위한 목표라기에 이야기 단위 자체가 너무 커져 버렸단다, 하벨아."
왕이 죽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수지가 맞지 않았다.
굳이 왜 바안을 흔들어야 하는가.
"이번 일을 벌인 적들의 목표가 단지, 에르티안 왕국에서 끝나는 게 아니니까요."
"에르티안 왕국에서 끝나지 않는다? …으음. 저하가 아닌 전하를 노렸다는 점에서 그렇게 말한 것이더냐?"
룬델은 의문을 품었다.
"맞습니다."
"네 생각을 말해주렴."
"전하는 현명하십니다. 노련함도 있을 테니, 슬픔을 이겨내실 힘이 있을 겁니다. 하여, 진짜 적을 향해 더 날카로운 칼이 되실 테지요."
나이가 있다고 모두가 현명한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하벨 자신이 본 에르티안 왕국의 왕은 현명했다.
팔과 다리가 잘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왕국 자체를 유지했으니.
"하지만 바안 저하는 아닙니다. 불안합니다. 미성숙합니다. 그 자체로 거대한 폭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적은 바안 저하가 복수에 눈이 멀어 어딘가 돌진해 터트리길 원한다는 말이더냐?"
"맞습니다. 어차피 에르티안 왕국을 약합니다. 그 약한 왕국이라도 누군가를 위해 터질 폭탄이 될 수 있습니다. 에트리안 왕국이 다른 나라와 전쟁을 벌일 동안 이득을 얻을 누군가가 말입니다."
하벨은 왕국 자체도 하나의 수단으로 바라보는 누군가의 관점에서 시작된 일이라는 가능성을 두었다.
이번 일의 범인은 현존하는 나라 중 하나일 수도 있고, 에르티안 왕국을 이용해 이득을 볼 여러 나라가 될 수도 있었다.
"왕실에 아직도 첩자가 남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고는 적이 왕족이 사용하는 비밀 통로로 기습할 수 있었겠습니까?"
"…왕실 기사가 전하를 지키지도 않았단 말이더냐?"
차분히 묻는 룬델의 목소리에 당혹함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하벨이 '적'이라 말하는 모양새에 한 명이라고 짐작했으니.
"놈은 강했습니다."
오러를 뿜은 것도 모자라 레디나의 공격을 몇 번이나 피했다.
그 정도로 강한 놈이었다.
자신들이 오기 전 어떤 전투가 벌어졌는지는 몰랐다.
분명 놈도 사람이기에 지쳤을 테지.
"제가 갔을 때, 이미 기사 7명이 죽어 있었습니다."
"도련님! 진짜 미치셨습니까?"
카샬은 그 말에 룬델 앞이라는 것도 잊고 언성을 높였다.
일반 기사도 아닌, 왕실 기사가 아닌가.
카샬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아니, 대체… 어떻게 살아 돌아오신 겁니까?"
분명 하벨은 레디나와 함께 오지 않았던가.
레디나의 공격을 읽을 정도라면 그녀도 벅찼을 텐데.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나는 용왕이라고."
하벨은 씩 웃었다.
이 세계에서 자신은 낯선 자일 뿐, 이 힘을 노릴 자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 하벨 티에라한테 몸을 돌려줄 때를 대비해 일부러 정령수로 물을 만드는 척 내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정체를 거의 믿는 눈치이기도 하고 저들을 믿기에 하벨은 용왕의 힘을 끌어올렸다.
세렌의 눈동자가 갑자기 커졌다.
[물이… 울리고 있어.]
"그게 무슨 말이지, 세렌?"
룬델이 물었다.
하벨의 분위기가 살짝 바뀐 듯한 느낌이 있었지만, 아직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을 텐데.
[하지만 울리고 있어. 내가 물의 특성이 강한 걸 알면서 지금 날 의심해, 룬델?]
세렌의 눈매가 살짝 날카로워지다 말고 한 곳에 고정되었다.
찰랑.
너무도 청아한 물이 허공에서 나타났다.
하벨의 손에서 만들어진 물이 서서히 움직여 한 형태의 모습으로 바뀌고 있었다.
[…아라?]
물의 형태가 아라를 닮았다.
마치 이를 알았다는 듯 손과 꼬리 부분이 가볍게 흔들렸다.
"……?"
룬델은 잠깐 숨을 멈췄다.
천천히 눈동자를 굴려 하벨의 주변을 살폈다.
오늘은 아라가 따라오지 않았다.
세렌도 움직인 적이 없었다.
아니, 지금 세렌마저 경악해 부리를 벌리고 있지 않은가.
"왜 그러십니까?"
카샬이 어리둥절하며 물었다.
방금 하벨이 물을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이게 뭐라고 새삼스럽게 놀라는지.
이번이 한 번이 아닐 텐데.
[너, 너, 이거 어떻게 한 거야?]
세렌은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혹시 물 마법사였……. 아니, 내가 무슨 멍청한 소리를.]
마법사는 순환의 길이 마나로 가득 차 있기에 정령수를 받을 수가 없었다.
하벨은 정령사가 맞았다.
하지만 정령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물을 만들어내는 것도 모자라 형태까지 바꾸지 않았는가.
"이게 용왕으로서 제가 가진 힘입니다."
하벨은 물을 흔들며 실실 웃었다.
―다만, 하나씩. 너하고 하나씩 시작할 수 있게 해주렴. 내가 너를 모르는 만큼, 너 또한 나를 모를 테니.
"하나 시작한 게 맞겠지요, 가주님?"
룬델이 하나씩 시작하자고 하지 않았는가.
마음이 여전히 불편하고, 아직 몸을 돌려줄 방법을 찾을 생각이었지만, 룬델에게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가 자신이 하벨 티에라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이토록 소중히 생각해주지 않는가.
"그게… 어떻게 가능하더냐?"
룬델은 얼떨떨함을 드러냈지만, 역시나 자신을 이전과 다르게 보지 않았다.
"이게 제가 가진 힘입니다. 그 외에는 무어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하벨은 룬델의 질문에 자세히 대답해줄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자신도 그냥 주어진 걸 받았을 뿐, 이게 어떻게 돌아간다는 건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냥 숨을 쉬는 것처럼 당연한 행동 중 하나였다.
"원래 물을 부리는 재주가 있었단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하벨은 자신이 물과 바다의 지배자라는 말을 꺼내려고 하다 그냥 말았다.
이미 정령 없이 물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는 게 어려울 테니.
하지만 룬델의 반응에 하벨은 만족스러웠다.
룬델이 저렇게 놀란다면 다른 사람은 오죽할까.
"어쨌든, 이 힘으로 운 좋게 살아남았습니다."
"…그게 힘의 부작용인 셈이고?"
자연스레 흘러내리는 하벨의 코피에 룬델은 미간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그렇지.
힘에 아무런 대가가 없을 리가 없었다.
"몸이 버티질 못해서 일어나는 부작용입니다."
덤덤한 하벨의 대답에 카샬이 손수건을 건네며 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정령님의 힘으로 만들어낸… 물이 아니란 말씀입니까?"
어쩐지 카샬이 혼란스러워 보였지만, 하벨은 그냥 손수건만 받았다.
자신이 말을 꺼내봤자, 아직 카샬은 준비가 덜 됐을 테고, 그가 혼란스러워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가주님."
하벨은 코피를 닦은 후에 말했다.
"그래, 하벨아."
"티에라 가문은 이번 일에 무엇을 할 생각이십니까?"
왕이 죽었다.
앞으로 티에라 가문의 움직임이 몹시나 중요한 순간임은 분명했다.
룬델은 하벨의 질문에 잠깐 생각했다.
왕의 자리가 공석이 되었기에 자연스럽게 왕자인 바안이 왕이 될 테지.
"티에라 가문은 바안 전하를 지킬 생각이란다."
룬델은 진중하게 말문을 열었다.
바안 저하가 아닌 바안 전하.
호칭이 달라졌다.
이미 바안을 왕으로서 생각하고 있는 룬델의 태도에 하벨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저도 안심하고 약속을 지키러 가겠습니다."
"약속이라니?"
"전하께서 승하하실 때, 바안 저하가 엇나가지 않게 돕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한데……."
"지금 제정신이겠습니까?"
하벨은 자신의 머리를 몇 번 두드렸다.
일단 바안한테 연락해 분노에 잡아먹히지 말라고 말했지만, 그게 어디 쉽겠는가.
갑자기 아버지를 잃었다.
그것도 한낱 암살자로 추정되는 자에게.
왕실 기사들마저 무용지물이었고, 왕실 보안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든 게 혼란스러울 테지.
'…무엇보다 검은 불꽃.'
환하게 빛나던 바안의 불꽃이 검은 불꽃으로 바뀐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이번 일이 코스모피안 왕국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그때, 자신이 '코스모피안' 왕국을 언급하자마자 랜턴의 불꽃이 바뀌지 않았던가.
"하벨아."
룬델이 간지러운 입을 참듯 숨을 들이켜며 하벨을 불렀다.
지금이라니.
상황이 급한 건 이해하지만, 왕에게 그런 부탁을 들었기에 의지를 내는 것 역시 이해하지만, 룬델은 섣불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물론 지금 당장 간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벨이 뒤이어 꺼낸 말에 안도하는 숨소리가 카샬에게서 들려왔다.
하지만 하벨은 보란 듯이 비웃음을 그리며 바로 목소리를 냈다.
"조만간 움직일 겁니다. 그러니 일단, 정보를 흘려주십시오."
바안도 신경 쓰이지만, 페트리오가 가져올 정보가 더 신경 쓰였다.
마법사 협회를 박살낸다는 목표는 아직 멈추지 않았으니까.
"제가 갈 동안 바안 저하에게 날파리들이 붙지 못하게 말입니다."
왕이 죽으면서 바안을 보호할 가장 큰 울타리가 사라진 셈이었다.
"또 피의 연회를 보기 싫으면 알아서 기어줬으면 좋겠지만, 혹시 모르니까요."
하벨이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