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누가 그랬을까
* * *
"안녕……?"
머릿속에 '펑'하고 터지는 소리가 들려와 카샬은 이성의 끈을 잠깐 놓치고 말았다.
"지금 안녕이라고 하셨습니까, 도련님?"
하벨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링거를 빼둔 채 대체 어디로 가신 겁니까? 제정신입니까? 아무리 요새 무모하게 행동하셔도 그렇죠. 하지 말아야 할 행동과 해야 하는 행동을 구분하지 못하시면 어떡하십니까!"
하벨은 난데없이 쏟아지는 카샬의 분노에 눈을 깜박거렸다.
왜 저렇게 화가 났을까.
[카샬이 정말 화났어. 어떡해, 대장.]
이동기를 사용한 후유증으로 하벨의 어깨에서 힘없이 늘어져 있던 아라가 눈을 크게 떴다.
"잠깐만요, 카샬."
레디나가 복면을 벗어서는 카샬에게 다가갔다.
자신도 갑자기 왕실에 하벨이 등장해 무척 놀랐지만, 카샬은 오죽하겠는가.
"일단 진정해요. 지금 도련님 상태가 좋지 않거든요. 그렇게 윽박이라도 지르다가 쓰러지시면 어떡해요?"
하벨은 지금 레디나가 장난을 치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일단 카샬이 진정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동의했다.
"그래, 진정해, 카샬."
잠깐 숨을 몰아쉬던 카샬은 이어지는 하벨의 말에 목에 핏대가 섰다.
지금 자신이 누구 때문에 화가 났는데.
천천히 흔들리는 링거가 눈에 밟혀 혈압이 오르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도련님. 왜 애써 진정하고 있는 카샬을 건드리세요?"
레디나는 오죽했으면 하벨을 타박했다.
아직 가면을 벗지 않은 하벨의 표정이 어떨지 상상이 갔다.
분명 웃고 있을 테지.
그것도 무척 행복하게.
"아니, 내가 뭘 어떻게 했는데?"
하벨은 억울했다.
진정하라는 말밖에 하지 않았는데.
[대장은 아무것도 안 했는데?]
하벨의 시선에 아라가 덩달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아."
카샬은 어떻게든 언성을 높이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도련님. 정말 제 피가 거꾸로 솟아야 속이 시원하십니까?"
"아니, 일단 내 설명부터 들어봐. 화는 그 뒤에 내도 늦지 않잖아?"
하벨은 가면을 벗으려다 말았다.
피를 제대로 닦지 않아 지금 얼굴 꼴이 얼마나 나쁠까.
분명 더 화낼 테지.
"저도 정령사 가문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를 보았습니다. 지금 도련님이 무엇을 했는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카샬이 입을 열었다.
방금 하벨과 레디나가 등장했을 때 일어났던 물보라는 분명 룬델이 사용하던 이동기와 반응이 비슷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모든 걸 다 떠나 이거 하나만 여쭤보겠습니다, 도련님. 왜 말없이 움직이신 겁니까?"
호소가 섞이다시피 한 카샬의 물음에 하벨은 가면을 벗었다.
하벨 티에라가 가출해 산에 올랐던 그 날, 모든 게 뒤바뀌지 않았던가.
말없이 움직인 사실에 왜 이렇게 예민한지 모를 수 없었다.
"이건 내가 잘못했어, 카샬. 금방 올 거라 생각……."
"실례합니다."
카샬은 하벨의 입가에 아직 지워지지 못한 피를 보자 당장 망토를 들춰 정화 장치를 확인했다.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그제야 이성의 끈을 잡았다.
"일단, 헤레스 씨를 불러오겠습니다."
링거부터 달아야 할 듯했다.
그게 먼저였다.
"…헤, 헤레스를? 네가 하면 되잖아."
하벨이 말을 더듬었다.
"저는 집사입니다. 주사는 응급조치 차원이죠."
"잠깐만, 카샬. 지금 더 급한 일이 있어."
하벨이 카샬을 붙잡자 그는 의심 어린 눈으로 하벨을 바라보았다.
[맞아. 엄청 엄청 급한 일이 있어. 왕이 죽었…….]
아라는 말을 꺼내다 말고 그제야 충격을 받았다.
나쁜 사람이 아닌, 알던 사람이 죽는 건 처음이었다.
갑자기 죽음이 무서워져 하벨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카샬, 이건 사실이에요. 정말 급한 일이 있어요."
레디나까지 두둔하자 카샬은 그제야 굳어진 표정을 풀었다.
"그게 뭐냐면요……."
"그래도 도련님이 먼저야. 도련님, 헤레스 씨를 불러올 테니 얌전히 계십시오."
카샬은 하벨의 대답을 듣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방을 벗어나다 돌아왔다.
"생각해보니 옷부터 갈아입어야겠습니다. 씻는 건……."
잠깐 말을 멈춘 카샬은 불만을 섞어 다시 목소리를 냈다.
"일단 뒤로 미루겠습니다."
* * *
하벨은 레디나에게 향하는 아라를 보다 연락용 아이템을 꺼냈다.
일단 이렇게 잡혀버린 이상, 바안에게라도 먼저 말하는 게 우선이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하벨은 주춤거렸다.
'왕이 죽었다고. 그걸 내가 봤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면…….'
―푸욱!
하벨은 갑자기 귓가에 들리는 그 소리에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왕의 복부가 꿰뚫리던 그 순간, 기억을 보지 않았던가.
누가 자신을 죽였는지.
어떻게, 어떤 무기로 죽였는지.
'…그리고 류아가.'
류아가 그곳에 있었다.
하벨은 눈을 뜨려다 말고 얼굴을 쓸었다.
'그럴 리가 없다.'
분명 잘못 본 게 틀림없었다.
시야도 희미하지 않았던가.
아니, 애초에 이미 죽었던 류아가 어떻게 살아 돌아온단 말인가.
'그래. 사람들이 말하던 주마등이 틀림없었다.'
죽기 전에 본다던 생전의 기억.
자신도 그걸 봤지만, 불안정한 기억 때문에 류아가 돌아왔다고 착각한 게 아닐까.
'류아는 분명히, 내가 보는 앞에서 죽었다.'
수족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이 쥐고 있던 무기에 관통되어, 그렇게 죽어버렸다.
그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지이이잉.
하벨은 연락용 아이템에서 울리는 소리에 흠칫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저하."
하벨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갑자기 미안… 합니다, 하벨 공.>
이미 바안은 짙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서 떨고 있었다.
<내가,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그 마음으로 공에게 연락했습니다.>
혼란스러움과 당혹감마저 목소리에 묻혀 꼭 길을 잃어버린 아이 같았다.
<내… 빛을 잃어버렸습니다. 내가 명령을 내려야 하는데, 모르겠습니다. 혼란스럽고 버거워서. 아니, 누굴 믿어야 할지 몰라서, 그래서, 그래서…….>
"정신 차리십시오, 저하."
얼마나 바안이 혼란스러웠으면 왕실 내부가 아닌, 외부의 사람인 자신한테 연락했겠는가.
"제가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하벨은 사실을 알렸다.
<…….>
바안은 잠깐 침묵했다.
<내가 지금, 머리가 돌아가질 않습니다. 제발, 제발, 오해하지 않게 말해주십시오.>
"암살자를 잡은 건 접니다."
<…공이 암살자를 잡았다뇨? 공이 어떻게요?>
"그건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지금은 아무 생각하지 마시고, 놈을 심문하십시오. 하지만, 죽이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내가 무얼 하면 되겠습니까?>
"아무것도 판단하지 마십시오."
<어째서입니까?>
바안은 울먹였다.
<내… 아버지가 죽었습니다. 범인이 누구인지, 왜 죽였는지 판단할 권한은 있잖습니까?>
"나중에. 뒤늦게 판단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나는 지금… 미칠 것만 같습니다! 놈이 너무도 증오스러워서 당장 죽이고 싶습니다!>
"저하."
하벨은 바안에게 이해한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 위로 같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정신을 붙잡을 무언가가 필요한 참이었다.
"그럼 죽이십시오."
<죽이라뇨? 저, 정말 놈을 죽여도 됩니까?>
"아무것도 밝히고 싶지 않고, 그저 증오에 몸을 맡길 것 같으면 죽이십시오. 그리고 후회하십시오."
<…하벨 공? 지금 장난하는 겁니까? 지금…….>
"후회가 싫으시면 참아내셔야 합니다. 인내하셔야 합니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합니다. 참아내기가 벅차단 말입니다!>
"이렇게 징징거릴 거라면 내려놓으십시오. 다음 왕은 저하십니다. 저하가 이 에르티안의 다음 왕이란 말입니다!"
덩달아 하벨의 언성마저 높아졌다.
흐느끼는 바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얼마나 참으면 됩니까? 당장 저놈을 죽여버리고 싶습니다.>
"조금만. 그러니 절대로 분노에 먹히지 마십시오."
하벨이 지금 당부할 수 있는 건 하나였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바안이 먼저 연락용 아이템을 끊었다.
정말로 그가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성을 잡은 듯 보였다.
"레디나."
하벨은 침대에서 일어나 레디나가 앉아 있던 테이블로 향했다.
"…괴롭겠네요."
레디나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아버지가 죽었으니 바안이 얼마나 괴로울까.
하벨은 덤덤하게 물었다.
"아까 놈의 품을 뒤졌을 때 뭘 발견했어?"
"챙기느라 바빠서 자세히는 보지 못했어요. 보고 뭔지 말해주세요."
레디나는 왕을 죽인 놈의 품을 뒤져 가져온 물건을 하벨에게 내밀었다.
단검, 쪽지, 찢어온 옷자락.
하벨은 바로 쪽지부터 확인했다.
―목표 : 토끼의 왕. 실패 시 자결을 고려. 탈출구는 그곳.
흐린 글씨, 쪽지에 찍힌 폭탄 모양처럼 검은 점 위에 꼭지가 살짝 그려진 문양이 보였다.
[사과를 닮았어! 대장은 사과 좋아하잖아.]
아라는 문양을 보며 헤헤 웃었다.
'…임무 확인서다.'
하벨은 쪽지를 레디나에게 넘겼다.
"이 무늬 본 적 있어?"
"……음."
레디나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잠깐 불 좀 켜주실래요?"
"불로 확인이 되는 거야?"
"물론이죠."
하벨은 레디나의 대답에 아라를 바라보았다.
[불로 뭘 확인한다는지 몰라도 이 몸은 지금 콩닥콩닥해.]
아라는 하벨에게 정령수를 넣으며 눈을 반짝거렸다.
화륵.
하벨의 손가락에 불이 붙자 레디나는 불 위에 종이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황당한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아니. 이렇게 문양을 대놓고 드러냈다고요?"
"그 점을 역으로 이용할 수도 있는 거 아니야?"
"그건 이상해요. 놈은 일단 잘 훈련된 암살자였어요. 야생에 떠도는 그런 거친 맛이 없었고요."
[야생에 떠도는 그런 거친 맛이 뭐야? 이 몸은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맛이야.]
"정형화된 훈련을 받았다는 거지?"
하벨이 물었다.
"맞아요. 그렇게 훈련을 받은 자가 쪽지 하나를 관리 못 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아요. 보통은 옷 사이나 신발 밑창이나, 입 안 등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있는데. 저 완전 쉽게 가져왔잖아요?"
레디나는 증거 중 하나인 단검을 들었다.
"놈은 검을 썼을 텐데?"
"증거를 다 가져오기엔 그래서 품을 뒤져서 발견한 거예요. 중요한 건 이 단검 말이에요, 이건 에르티안 왕국에서 만든 게 아니에요."
"그걸 어떻게 알아?"
"제가 단검을 한두 번 쓰겠어요? 나라마다 방식이 달라요. 보통, …아니, 왕 암살은 보통은 아니죠."
레디나는 자신의 눈썹을 만지작거렸다.
왕이 죽었다.
솔직히 이 정도로 큰 사건은 처음 보다시피 해 이제야 얼떨떨함이 뒤늦게 밀려왔다.
레디나는 잠깐 말을 멈추다 다시 목소리를 냈다.
"어쨌든, 이런 경우 누가 범인인지 모르게 하려고 그 나라의 단검을 쓰는 게 맞아요. 만약 일이 잘못됐을 때, 누구든 덤터기를 쓰게 해야 하는데 저러면 할 수 없잖아요?"
"하긴 그렇지. 죽을 때 죽더라도 한 놈의 목이라도 베는 편이 덜 억울할 테니까."
"그래서 옷도 베어왔어요. 놈이 입고 있던 시종 옷 말고 그 안쪽의 옷이요. 그런데 도련님."
"왜?"
"어디 높은 관직에 있다 오셨어요?"
조금 전 본의 아니게 하벨과 바안이 나누던 말을 들었지만, 뭔가 소름이 쫙 끼치지 않았던가.
정말로 하벨이 왕이라도 되는 줄 알았다.
"어떻게 알았어? 티가 나?"
하벨이 평소처럼 실실거려 레디나는 이게 농담인지 진담인지 파악하기가 헷갈렸다.
"뭔가 티가 나네요. 그……, 옷도 단검처럼 확인해보시면 될 거예요."
레디나는 말을 더듬거렸다.
농담이라기에 너무 진지하지 않은가.
"아, 혹시 몰라 피는 단검에 묻힌 채 가져왔어요."
"잘했어. 좀도둑이 놈의 기억을 읽는다면……."
하벨은 안도하다 말고 순간 긴가민가한 느낌에 말을 꺼냈다.
"좀도둑이나 크라마나 여기에 온 적 없어?"
"저야 모르죠. 데론이 죽는 걸 보고 왕실로 갔잖아요."
레디나가 눈을 깜박거리자 하벨은 곧바로 아라를 바라보았다.
[이 몸도 모르는데? 헤레스가 오기 전까지는 용용이하고 놀고 있었다구.]
하벨은 잠깐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새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벌레나 먹고 있는 걸까.
아공간 주머니를 열어 레디나가 가져온 것들을 집어넣고는 연락용 아이템을 꺼냈다.
페트리오의 이름을 눌러 목소리를 내뱉었다.
"좀……."
<도련님!>
페트리오가 다짜고짜 소리치자 하벨은 당황스러웠다.
"……?"
<사, 살아 계신 겁니까!>
"당연히 살아 있지. 왜 멋대로 나를 죽이는데?"
<쪽지에 답장이 없었습니다. 크라마가 새를 움직여보아도 커튼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누가 봐도 카샬 짓이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개…….>
페트리오는 욕지거리를 내뱉는가 싶더니 힘겹게 참는지 숨을 몇 번이나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쨌든, 계속 지연되는 연락에 직접 티에라 가문으로 가던 중입니다.>
"좋아. 마침 네가 필요했어. 얼마나 걸릴 것 같아?"
<…몇 시간 뒤면 도착입니다. 혹시 저번처럼 가출이라도 하셨습니까? 잘 곳이라면 바로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페트리오가 긴가민가하며 묻자 레디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벨이 시선이 닿아도 레디나는 이를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양손으로 턱을 괴며 재미있는 먹잇감을 잡았다는 듯 웃었다.
"가출 전적이 화려하신 모양이에요. 얼마나 그랬으면 페트리오까지 저 말이 나오겠어요?"
"아직 한 번밖에 안 했어."
하벨은 억울했다.
"오늘로 두 번이네요?"
레디나는 턱을 괴던 한 손을 들어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역시.>
페트리오가 레디나의 말을 듣고는 또 한숨을 내쉬었다.
말을 아끼려 노력한 듯하나, '역시' 안에 많은 것들이 담겨왔다.
"이거, 아무래도 이상한데?"
하벨은 연락용 아이템을 바라보다 흔들었다.
레디나는 그렇다고 치는데 페트리오는 어떻게 이 대화를 들을 수 있는지.
<뭐가 이상합니까? 혹시 또 무슨 일이 생기셨습니까?>
"일이야 생겼지. 아주 큰 일이. 그런데 레디나의 목소리를 왜 이렇게 잘 들어?"
<저도 일단은 마법사입니다, 도련님. 아무래도 마나 덕에 일반인보다는 귀가 좋습니다. 도련님께서… 아닙니다.>
페트리오는 말을 꺼내다 말고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벨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방금 자신의 귀가 좋지 않다는 말을 하려는 것 같았다.
"좀도둑. 네가 카샬하고 좀 친해지더니 카샬을 닮아가네?"
레디나도.
페트리오도.
<도련님. 그 말씀만은 제발 하지 말아주십시오. …아주, 아주 치욕스럽습니다.>
"아니, 카샬은 대체 뭘 하고 돌아다니길래 평이 이렇게 나빠?"
하벨은 진심으로 치욕을 드러낸 페트리오의 반응에 의아했다.
레디나도 카샬을 닮아간다는 말에 무척 싫어하지 않았는가.
"카샬은 도련님 앞에서야 순한 양이죠."
"그게 순한 양이라고?"
하벨은 기가 찼다.
그 꼴이 순한 양이라니. 대체 얼마나 막 하길래.
<카샬 그 새… 아니, 그놈에게 입이란, 그냥 지껄이는 곳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그냥 말하면 될 걸 꼭 날을 세우고 말하니, 저도 모르게 입이 험해집니다.>
[아닌데. 카샬은 착한데? 이 몸하고 마법 타자기로도 대화도 나누고 그랬는데.]
아라가 웅얼거리듯이 목소리를 냈다.
"그런 것치고는 잘 지내잖아?"
하벨이 사실을 꺼내자 레디나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고, 페트리오는 말꼬리를 흐렸다.
<…걔가, 참. 그렇습니다.>
"맞아요. 카샬은 참 그래요."
"그렇다니?"
하벨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이게 뭐라고 해야 하나? 미운 정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해준다고 해야 하나."
레디나는 여전히 의아한 말을 꺼내다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쨌든, 도련님. 지금 가고 있습니다. 만나서 제가 알아온 것들을 직접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래."
하벨은 연락용 아이템을 끊으며 레디나를 바라보았다.
"옵니다. 저는 그럼."
나지막한 레디나의 목소리에 하벨은 그제야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로 뛰어들기 바로 직전에 뒤에서 헤레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헤레스의 음성이 무거웠다.
하벨이 어색하게 웃으며 뒤를 돌자 테이블에 앉아 있던 레디나가 보이지 않았다.
커튼이 흔들거리는 모습에 하벨은 묘한 배신감을 느꼈다.
이렇게 혼자 도망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