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그럴 수가
* * *
[이 몸이 왕궁에 왔어! 이 몸이 물의 힘을 빌려서…….]
아라는 활짝 웃다가 갑자기 비틀거렸다.
하벨은 다급히 아라를 붙잡았다.
"왜 그래, 아라야? 어디 아파?"
[으어어… 이 몸은 지쳤어.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야.]
"힘을 너무 많이 썼나 보네."
하벨은 용왕의 힘으로 물을 만들어 아라의 입에 넣어주었다.
욤욤.
물을 먹자마자 아라의 축 처진 꼬리가 다시 빙글빙글 돌아갔다.
[너무 맛있어! 매일 먹어도 맛있어! 대장이 주는 물은 정말 특별해!]
아라의 귀가 파닥거렸다.
정화제로 오염을 지운 물을 먹어도 이 맛이 나지 않았다.
하벨이 용왕이라 그런 걸까.
원래 하벨은 하벨 티에라가 아니라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다.
그럼 원래 하벨은 어떻게 생겼을까.
아라는 말을 꺼내려다 하벨이 또 주는 물을 먹으며 배시시 웃었다.
찰팍.
하벨은 그제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분수대인가?'
다리를 움직이자 자신의 발밑에 있던 분수대 속 물이 덩달아 흔들렸다.
'일단 아라가 장거리를 이동할 힘을 가졌다는 걸 확인했으니 이제…….'
하벨은 조용한 복도에서 무겁게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착착.
갑옷이 바닥과 맞는 소리.
기사들이었다.
'…이런.'
하벨은 당장 조심스레 분수대 밖으로 나왔다.
신발을 벗고 옷으로 감싼 뒤, 까치발로 살금살금 이동해 분수 석상 뒤에 숨었다.
[대장 지금 숨바꼭질 중이야?]
아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쉿.
하벨은 가면 위에 검지를 올렸다.
지금 왕실 기사들한테 들킨다면 이게 무슨 창피한 일일까.
해명은 또 어떻게 해야 할지, 룬델을 어떤 낯짝으로 봐야 할지.
마음에 걸리는 게 많았다.
착착.
갑옷이 땅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오오.]
아라가 꼬리를 쥐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곧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이 몸이 슬쩍 보고 올까? 정령사가 아니면 이 몸을 볼 수 없는데?]
하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혹시나 저 기사들 사이에 정령사가 있을 수도 있었다.
에르티안 왕국에 있는 모든 정령사가 티에라 가문 밑에 일하지는 않을 테니.
하벨은 그들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천천히 숨이 가빠지는 기분을 느꼈다.
걸어 다닐 만큼 몸이 회복됐을 테지만, 어쩐지 무겁기도 했다.
'…심리적인 게 작용을 하는 건가.'
어쩌면 자신이 용왕이었을 때 겪었던 일들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랄 정도로 작은 일일지 모르겠지만, 아니었다.
겪어보지 못했던 일이었기에 더 숨이 막혀오지 않았는가.
착착.
소리가 점점 멀어졌지만, 하벨은 아직도 숨을 죽였다.
가끔 정령 기사들이 하는 훈련을 보면서 기사들의 귀가 얼마나 예민한지 깨달았다.
마나를 응용해서 신체에 두르는 오러 대신 정령들의 도움을 빌려 공격의 수단으로 사용할 뿐이지, 육체적인 부분은 기사들에게 밀리지 않았다.
'…됐다.'
하벨은 소리가 완전히 멀어져서야 다시 신발을 신었다.
"아라야."
[응?]
"물을 쓸 수 있어?"
[아니. 이 몸은 지금 지쳤어. 힘을 뽑아내려고 해도 아직 요만큼밖에 안 돼.]
아라가 앞발을 흔들며 만든 물은 손바닥보다 3배쯤 큰 크기였다.
자신이 들어가기에 턱없이 모자란 크기.
'나는 되려나?'
저번에 정령들이 반영구 정화제의 힘을 준 덕에 용왕의 힘이 덩달아 성장했다.
분명 부릴 수 있는 물의 양이 늘어났을 테지.
'아니다. 그걸로는 모자라.'
아라가 어떤 방식으로 물에서 물로 이동하는지 두 번의 경험을 통해 알았다.
비록 좌표 설정이 불안정했지만, 타고난 자연의 힘을 통해 마치 자석처럼 물과 물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하지만 자신이 사용하던 힘은 달랐다.
물과 자신을 잇는 연결망이 존재하며 그 연결망을 통해 이동하는 방식이었기에 물을 탐지하는 능력까지 넓어야 했다.
지금은 연결망이 죽어버린 터라 탐지 능력도 거의 없는 상태였다.
'내가 태어났을 때가 딱 이런 상황이었는데. 모든 게 혼란스러웠던 순간이었지.'
하벨은 숨을 천천히 고르며 일단 생각을 접었다.
아라 말대로 숨바꼭질을 하는 기분이라 되게 설레긴 했지만, 한가한 상황은 아니었다.
'아라가 힘을 회복할 때까지 몸을 숨겨야 한다. 여기는 위험해. 조금 더 멀리.'
지금 기사들이 순찰을 돌고 있기에 그들이 지나온 곳으로 가야 상대적으로 안전했다.
발소리를 죽이되, 빠른 걸음으로 기사들이 나왔던 곳으로 걸었다.
'이런, 방이 나와야 하는데.'
짧은 복도를 지나자 좌우로 길게 이어진 복도가 나왔다.
하벨은 난감했다.
'이거, 좋지 않아.'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황인 것도 위험하지만, 잘못 갔다가는 순찰하는 다른 기사들에게 딱 걸릴지도 몰랐다.
두근두근.
심장이 멋대로 기쁘게 날뛰었다.
되게 설레는 상황이 아닌가.
[왼쪽!]
아라가 소리쳤다.
어느새 바닥에 내려와 귀를 붙이고 있었다.
[대장은 지금 왼쪽으로 가야 해!]
"…왜?"
너무도 단언하기에 하벨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몰라. 땅이 그렇게 말해주는데? '안전한 길은 왼쪽이다'라고.]
'그럼 가야지.'
하벨은 왼쪽으로 거침없이 이동했다.
[이 몸이 있지! 이번에 이동하는 힘을 얻으면서 자연이 말해주는 소리가 더 잘 들려!]
아라가 하벨의 어깨에 매달려 뒷발을 흔들었다.
[헤헤, 이 몸은 지금 뭔가 신나! 대장도 그랬으면 좋겠다!]
숨바꼭질과 다른 재미가 있었다.
"재미야 당연히 있지."
하벨이 목소리를 죽이며 키득거렸다.
뭔가 모험하는 기분이 들지 않는가.
생각해보면 들켜도 마지막 방법이 있었다.
지금 연락용 아이템도 있으니, 바안한테 부탁하면 될 테지.
왜 왕실로 왔는지는 나중에 대충 설명하고.
[어!]
아라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왜?"
[레디나가 이쪽으로 갔어! 방금 땅이 이 몸한테 보여줬어! 뒷모습이었지만, 분명 레디나야! 이 몸은 레디나를 좋아하니까 모를 리가 없어!]
아라가 기뻐하며 벽면에 걸린 그림을 가리켰다.
'…이건.'
하벨은 아라의 말을 당연히 믿었다.
'비밀 통로다!'
갑자기 가슴이 더 세게 뛰기 시작했다.
이번에 드웰에게 선고받은, '하벨 티에라한테 몸을 돌려주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밀려왔던 답답함이 조금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미안하다, 하벨 티에라. 잠깐만. 잠깐만 구경할 시간을 주거라.'
하벨은 그림을 살짝 들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이런 장면이 많이 나왔지만, 애석하게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벨은 그림이 걸렸던 벽을 더듬거렸다.
'뭐가 만져지진 않는데?'
[대장. 여기 봐. 여기 아주, 아주 작은 점이 있다?]
아라가 손가락을 들어 살포시 눌렀다.
딸깍.
무언가 눌러지자 아라는 당황해 바로 하벨에게 붙었다.
바로 옆에 벽이 사라졌다.
하벨은 그대로 눈을 크게 떴다.
[우와아아아! 이, 이게 뭐야? 대장, 이걸 뭐라고 하는 거야?]
아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하벨을 바라보았다.
어서 알려달라고 주먹을 동그랗게 말며 흔들었다.
"…비밀 통로."
[비밀 통로다아!]
아라가 처음 왕궁에 왔을 때처럼 만세를 불렀다.
* * *
화르륵.
하벨은 아라한테 정령수를 찔끔 받아 손가락 끝에 불을 켰다.
두 사람이 지나가기엔 너무도 좁다란 통로였다.
'…레디나가 여길 왜 온 거지?'
이쪽이 웨인 톨이 있는 감옥이랑 이어진 걸까.
"지금은 어때, 아라야?"
하벨은 다른 손으로 아라에게 용왕의 힘으로 만든 물을 주며 물었다.
맛있게 받아먹던 아라가 꼬리를 흔들며 대답했다.
[음음, 조금만 더 있으면 이 몸은 힘을 낼 수 있어!]
"그럼 기운이 나면 말해줘. 슬슬 저택으로 돌아갈 때가 된 것 같아서."
하벨은 가면을 올려 코피를 닦아냈다.
지금 정화 장치에 든 정화제로 부족한지 몸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망토를 열어 슬쩍 본 정화 장치는 아직 멀쩡했다.
장갑을 슬쩍 내리자 푸르게 물든 살결이 보였다.
가슴팍까지 올라왔던 물의 저주로 일어난 증상이 손등까지 내려왔다.
상태가 좋아졌다.
[아직도 아파, 대장?]
아라가 살결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이 몸이 아프지 말라고 계속 쓰다듬어주는데.]
"아프진 않아. 힘이 살짝 없을 뿐이지."
아라는 다른 손가락을 들어 하벨의 볼을 찔렀다.
[거짓말은 나쁘다구, 대장!]
거짓말은 아닌데.
하벨은 찝찝함 마음을 붙잡으며 계속 앞으로만 걸었다.
'…갈림길이다.'
왼쪽, 오른쪽, 위쪽까지 세 가지 갈림길이 나왔다.
[이 몸은 이제 모르겠어. 어디로 가야 할까?]
"이럴 땐 다 가봐야지."
하벨은 세 가지 갈림길 모두 들려보려고 했다.
처음 왼쪽으로 향했다.
몇 발자국만 내디뎌도 미로처럼 새로운 갈림길이 재차 모습을 드러나자 하벨은 다시 처음 갈림길이 나왔던 그 장소로 돌아갔다.
'단순한 비밀 통로가 아닌가?'
어쩌면 이 비밀 통로가 왕족이 사용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점점 더 흥미가 샘솟았다.
왼쪽으로 갔으니 이제 정면으로 갈 차례였다.
화르르륵!
발을 앞으로 내밀자마자 팔찌에 달린 랜턴에 검은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이건… 또 왜 이래?'
하벨은 금세 불쾌함에 휩싸였다.
자신이 좌표를 찍어서 이곳에 왔을 뿐인데 꼭 하벨 티에라의 손에 놀아난 것 같지 않은가.
그럴 리가.
'시간의 장난인가.'
하벨 티에라가 회귀자로서 건드린 시간이 억지로 원래 자리로 돌아가려는 걸까.
하벨은 무엇이 되었든 앞으로 걸어나갔다.
다 알고도 외면할 생각은 없었고, 하벨 티에라가 이 상황을 만들었든 시간이 만들었든 피하지 못한다면 상황 자체를 부서트려놓을 생각이었다.
더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휘둘리고 후회하는 건 이제 지긋지긋했으니.
[그쪽이야, 대장?]
"모르겠어."
[길을 잃으면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고 했어.]
"누가 그렇게 말했어?"
[루룸이랑 세렌이. 그래서 이 몸도 용용이한테 알려줬다?]
아라가 너무도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
"맞아. 혹시나 길을 잃으면 그 자리에 있어.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갈 테니까. 잘못하다가는 날 잃어버릴 수가 있어."
[그, 그건 싫어! 이 몸은 얌전히 있을 거야.]
아라는 기겁하며 하벨의 옷자락을 잡았다.
짤랑.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랜턴이 흔들리며 방향을 알려줬다.
이쯤 되면 슬슬 짜증보다 호기심이 일었다.
대체 무엇을 알려주려고 저러는지.
섬뜩.
발을 내디디려다 말고 갑자기 몰려오는 경고 같은 느낌에 하벨은 그대로 다리를 뒤로 빼 몸을 살짝 뉘었다.
슉!
무언가 땅에 꽂혔다.
번뜩거리는 모양새가 비수였다.
[이이익!]
후.
하벨은 당장 불꽃을 꺼트렸고, 손가락을 튕겼다.
딱.
하벨의 신호에 아라가 정령수를 밀어 넣자 하벨은 비수가 날아온 방향을 기억하며 식물을 키워나갔다.
쿠쿠쿠.
이건 적을 맞추기 위한 용도가 아니었다.
하벨은 자신이 낀 장갑을 의식하며 왼손에 물을 만들어냈다.
오른손에는 불을 만들어내자마자 식물을 만졌다.
화르르륵!
심지처럼 순식간에 식물에 불이 붙자 좁다란 공간에 시야가 확보됐다.
왼쪽에서 무언가 일렁거리는 게 보였다.
'적은 저기 있다!'
하벨은 식물에 붙은 불을 꺼트리며 달렸다.
섬뜩한 느낌이 몰려오기 전 왼손과 오른손을 맞부딪혔다.
팡!
물과 불이 만나 연기가 퍼져나갔고, 하벨은 불을 꺼 그 손에 독을 만들어냈다.
왼손에 만들어진 물과 오른손에 만들어진 독을 합치자 이번에는 단검보다 조금 큰 검이 만들어졌다.
휘이이잉.
바람이 불면 안 되는 이 장소에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적은 저쪽에 있다.'
하벨은 자신이 만들어낸 연기에 휩싸여 물과 독으로 된 검을 찔렀다.
동시에 물을 뿌릴 준비를 했다.
적어도 적의 검이 자신의 목을 노리지 않았다면.
[에, 에잇!]
아라가 다급히 소리쳤다.
갑자기 땅에서 식물이 솟구쳤다.
팅!
단검이 적의 손에 떨어졌고, 하벨은 비로소 코앞에 보이는 적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바로 물과 독으로 만든 검을 지워버렸다.
어쩐지 연기가 짙어졌다 싶었는데.
"레디나……?"
레디나가 아닌가.
타닷.
하벨은 놀란 마음을 접고는 다시 손가락에 불꽃을 퍼트렸다.
시야가 밝아지자 이제야 확실히 보였다.
레디나가 맞았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하벨이 물었다.
그녀는 뒤집어쓴 복면을 내리며 황당함이 가득한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건 자신이 물어볼 말이 아닌가.
"…도련님?"
하벨은 긴가민가한 레디나의 모습에 덩달아 가면을 벗었다.
그 표정이 너무도 해맑아 레디나는 기가 찬 목소리를 냈다.
"도련님께서 왜 여기에서 나오시… 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