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시작된다(2)
* * *
"괜찮… 더냐, 하벨아?"
룬델이 다가오자 하벨은 떨어지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룬델에게 왜 그렇게 미안했는지 이제야 알았다는 사실이 파도처럼 밀려와 부끄러웠다.
어서 서둘러 하벨 티에라에게 이 몸을 돌려주겠다고 생각했던 건 단지 그 무거웠던 책임을 짊어지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자신은 모르는, 하지만 이미 영혼 속에 새겨질 만큼 깊었던 그 슬픔이 자신을 말리고 있었다.
가족을 잃은 그 기분을 알고 있으니, 룬델의 가족을 빼앗지 말라고 외치는 줄도 모르고.
"하벨아."
룬델이 다가오자 하벨은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섰다.
"…하벨이, 아닙니다."
하벨은 겁에 질린 목소리를 냈다.
가족을 잃었기에 산산조각이 나 부서지는 그 마음을 알면서도 지금 자신이 그러고 있었다.
이 얼마나 끔찍한가.
"알고 있단다. 이미 내게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더냐."
룬델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하벨은 벽에 등이 닿아서야 또 목소리를 냈다.
"아니, 당신은… 모릅니다.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
왜 이렇게 추한가.
떨어지는 눈물과 손에서 떨어지는 피가 이리도 역겹게 보일 수가 있는가.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단다. 지금은 어서 치료부터 하자꾸나. 피가 많이 나지 않더냐. 얼마나 쓰라릴까."
룬델의 발이 시야에 보였기에 하벨은 얼굴을 들 자신이 없었다.
이 몸을 하벨 티에라에게 돌려줄 수 있을 거라 당연히 생각했다.
그는 시간의 흐름을 비틀어 과거로 돌아온 회귀자가 아닌가.
이 세계에는 자신의 세계보다 더 신비한 힘이 있으니 가능할 거라 그렇게 판단했다.
"방법을… 찾겠습니다. 무슨 방법이든 찾아보겠습니다."
왜 이렇게 안일했는지.
하벨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을 내뱉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룬델에게 가족을 돌려줘야만 했다.
"괜찮단다. 나는……."
"괜찮지 않습니다! 이건 괜찮은 게 아닙니다……!"
룬델이 꺼내는 저 말에 하벨을 울컥해 입을 열었다.
이게 단순히 괜찮다는 문제로 끝낼 게 아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룬델이 자신을 이토록 감싸려고 애를 쓰는 게 이상했다.
하벨 티에라의 아버지가 아닌가.
"저를… 원망하셔도 괜찮습니다. 아니, 그러셔야 합니다. 빨리… 최대한 빨리 이 집을 나가겠습니다."
"내가 너를 왜 원망하겠더냐? 나갈 필요도 없단다."
룬델이 가볍게 웃었다.
다정한 그 목소리가 가시가 되어 자신을 찌르자 미칠 것만 같았다.
"제가."
하벨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불가능합니다.
드웰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리는 듯했다.
―이렇게 커다란 영혼은… 그 누구라도 옮길 수 없습니다.
이 얼마나 끔찍한 소리인가.
끝이 보이는 저 말에 속에서부터 가시가 솟구쳐 자신을 찌르고, 또 찔렀다.
"제가……."
하벨이 가슴팍을 꽉 쥐며 소리쳤다.
"당신의 아들을 뺏어버렸으니까요!"
피가 메말라버린 기분이었다.
손이 멋대로 부들거리자 하벨은 입술을 더 깨물었다.
원하든 원치 않든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지금 하벨 티에라의 육체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었으니.
"네가 빼앗은 게 아니라는 걸 안단다."
하벨은 순간 소름이 돋아나 고개를 올렸다.
"그러니… 너를 원망하지 마렴."
룬델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하벨이 말없이 흘리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얼마나 애가 탔으면 깨문 입술에서 피가 날까.
"꼭… 어디론가 갈 것 같았단다."
―아버지.
하벨이 산에 오르기 전, 자신을 찾아왔다.
분명 잘 시간을 넘겼음에도 사뭇 진지한 하벨의 표정에 혼을 낼 수 없었고, 이상하게 가슴이 아려왔다.
그날, 하벨과 정말 오랜만에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새삼 신기할 정도로 하벨의 진심을 알아버려 기쁘기도 했다.
―제가 정령사가 될 수 없다는 절망감에 빠지기 전에 강해질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볼 걸 그랬습니다.
갑자기 내뱉은 '정령사'라는 말에 흠칫 놀랐지만, 하벨은 지금까지와 달리 한없이 차분했다.
마치 어른이 되어버린 하벨과 마주하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분명 바뀔 수 있었는데, 제가 힘이 없어서. 제가 약해서 아무것도 바꾸질 못했습니다.
'무엇을'이라는 말도.
낯선데, 낯설다는 말도 차마 꺼내지 못하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후회… 했습니다.
모든 감정을 털어버리듯 꺼내는 하벨의 미소는 정말로 긴 시간을 지나온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제 괜찮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이해합니다. 아버지가 저를 얼마나 사랑해주셨는지, 이제는 압니다. 그러니 지금처럼 저를 믿어주세요.
자신을 안아주던 그 품이 평소와 달랐다.
그제야 아려오는 가슴과 이 불안함이 무엇이었는지 알아차렸다.
꼭 어딘가,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아주아주 먼 곳으로 훌쩍 떠날 것만 같았다.
"그래, 하벨이 그 날. 산에 오른 그 날."
룬델은 조심스레 하벨의 손을 잡았다.
"……널 데려왔구나."
룬델이 눈웃음을 지으며 따스하게 하벨을 반겼다.
하벨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왜 이걸 이해하는 건가.
아니, 이걸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내가 멍청했단다."
"절… 원망하셔야죠."
하벨은 자신의 손을 조심스레 잡은 룬델의 저 손길에 속이 탔다.
"네가 아니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내가 그걸 알아보지 못했으니, 얼마나 애가 탔을까."
"제 멱살을 쥐며 소리쳐야죠……!"
"내가 이상해 보일 테지."
"이상합니다. 너무… 이상합니다."
누가 보아도 자신은 하벨 티에라의 자리를 뺏지 않았는가.
원래 있어야 할 하벨 티에라를 내놓으라며 원망하고 분노를 토하고 통곡해야 할 때가 아닌가.
"내 아들이 널 선택하지 않았더냐?"
룬델의 눈동자에 강한 믿음이 엿보였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불안한 목소리를 내는 하벨을 달래듯 룬델은 하벨의 손을 감싼 붕대를 벗기며 조용히 이야기를 꺼냈다.
"보렴. 너는 나에게 계속 진실을 말했고, 몸을 돌려주러 돌아갈 방법을 찾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왜 모를까."
"그건 당연한 일입니다. 이 몸은 제께 아닙니다. 주인이 따로 있는데 이걸 노린다면……."
"아니, 그건 사실 무척 어려운 거란다. 엄청난 용기가 필요할 테고."
하벨은 룬델의 표정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미움받을 각오 역시 필요할 테니, 이 얼마나 두려울까. 너는 내게 이미 많은 믿음을 보여주었구나. 그러니 널 택한 하벨의 선택을 믿는단다."
룬델의 눈빛은 이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따스했고, 부드러웠다.
너무도 미안할 만큼.
"조금만 참으십시오. 제가 반드시 방법을……."
"불가능하다고 듣지 않았더냐. 더는 애쓰지 않아도 된단다."
룬델은 고개를 들어 하벨을 바라보았다.
이 와중에도 자신을 향한 걱정이 담겨 있었다.
"겨우 한 사람일 뿐입니다."
하벨은 바짝 마른 입술을 움직였다.
룬델이 모든 걸 놓아버린 것 같아 자신이 더 애가 탔다.
이건 놓으면 안 될 문제가 아닌가.
자기 아들을 이대로 놓칠 셈은 아니겠지.
"다시 찾으면 됩니다. 제발…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벨아."
룬델은 상처가 터져버린 하벨의 손바닥 위에 새로 꺼낸 손수건을 조심스레 덮었다.
"내가 널 부정한다면, 널 택한 하벨의 선택 역시 부정하는 것이며 이는 곧 날 부정하는 셈이란다."
하벨을 믿기에.
하벨을 사랑하기에 룬델은 지금 눈앞에 있는 하벨을 부정하지 않았다.
제 아들 하벨은 현명한 아이였다. 이런 결과가 나올 걸 알면서도 선택한 게 아닌가.
그럼 부모로서 그 결정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마저 거부한다면 사라진 하벨도, 눈앞에 보이는 하벨도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게 될 테니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벨이 혼란스러워하자 룬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족은 피로서, 꼭 피로서 이어지는 게 아니란다."
"……."
류아가 꺼냈던 그 말에 하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너는 하벨의 대체재가 아니라는 걸 분명히 말해주고 싶구나."
룬델은 손수건을 묶은 뒤, 손을 뻗어 아직도 붉은 자국이 가득한 하벨의 눈 주변을 만졌다.
지금 아플 텐데, 울어서 얼마나 힘들까.
"멀리 왔더냐?"
"……."
"그간 얼마나 힘들었더냐?"
하벨은 또다시 일렁거리는 가슴에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룬델이 자신에게 내보이는 저 마음에 거짓이 없었다.
아니, 비로소 룬델은 정말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벨 티에라가 아닌, 자신을.
"지금……."
하벨이 말을 꺼내려다 목이 메왔다.
지금 자신을 받아주는 거냐는 물음을 꺼내야 하는데.
"그래, 하벨아. 네가 원한다면 나는 널 받아들일 수 있단다."
하벨은 말문이 막혔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자신은 타인일 뿐인데 어떻게 그 말을 꺼낼 수 있는가.
"내가 사라지면… 곤란해서입니까?"
갑자기 하벨 티에라가 사라진다면 룬델에게도 좋지 못한 영향이 가는 건 당연했다.
"아니란다."
"그럼 역시 하벨 티에라라는 대체재가 필요하신 겁니까?"
"앞서 말했지만, 절대로 아니구나. 너는 너이고, 하벨은 하벨이란다. 정령들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단다."
룬델의 눈빛이 더욱 단단해졌다.
지금까지 봤던 그는 말을 함부로 내뱉는 사람이 아니었다.
"너는 하벨이 남긴 씨앗이란다. 아버지로서 그 씨앗을 어떻게 내버리고, 미워하겠더냐."
하벨 역시 아내와 셋째가 남긴 씨앗이었다.
소중히 키워냈지 않은가.
이번에도 소중히 품에 안아야지.
"물론……."
룬델의 입술이 그제야 파르르 떨렸다.
지금 하벨을 절대로 대체재로 볼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
사무치도록 솟구치는 이 그리움은 자신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왜 슬프지 않을까.
목구멍으로 삼켜보아도 가슴이 이리도 찢어지는 것을.
지금 하벨한테 못 할 짓이라는 걸 알지만, 룬델은 그럼에도 간절히 부탁했다.
"아무 말 없이 널 안고 싶을 때가 있을 거란다. 그것만큼은… 그 사실만큼은 이해해줄 수 있겠더냐?"
하벨은 그제야 룬델이 어떤 심정인지를 조금은 이해했다.
자신을 부정한다면 하벨 티에라를 부정하는 셈이었다.
아들의 마지막 남은 흔적을 어떻게 껴안지 않을 수 있을까.
"괜찮습니다. 얼마든지… 괜찮습니다."
하벨은 천천히 팔을 벌렸다.
룬델은 조심, 또 조심스레 다가와 하벨을 안았다.
"…고맙구나."
저 목소리에 지독한 슬픔이 묻어 있었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구슬픈 냄새가 흘러나왔다.
"네가 무슨 선택을 하든 강요하지 않으마. 나는 언제나 널 기다릴 테니."
자신을 꼭 안은 룬델의 팔이 떨려왔다.
두려운 걸까.
아니면 괴로운 걸까.
"다만, 하나씩. 너하고 하나씩 시작할 수 있게 해주렴. 내가 너를 모르는 만큼, 너 또한 나를 모를 테니."
룬델은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예."
저 간절한 부탁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해요. …꼭이요."
하벨은 그제야 룬델을 안은 손에 힘을 주며 눈을 감았다.
볼을 타고 또 눈물이 흘러내렸다.
룬델이 포기하라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룬델에게 너무도 미안해 방법을 찾고 싶었다.
'마법사 협회를… 부서트려야 한다.'
그곳이 어쩌면 자신의 마지막 보류일지도 몰랐다.
* * *
딱딱.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시야를 가린 듯해 앞이 보이지 않았다.
룬델과 간단한 몇 마디를 나눈 뒤 다시 침대에 눕지 않았던가.
곧이어 울면서 들어온 아라의 포근한 감각에 안심했는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잠이 쏟아졌다.
'그리고 눈을 감았을 텐데.'
"거기 아닙니다. 여기 보셔야죠, 용왕님?"
왼쪽에서 류아가 키득거리며 말을 꺼냈다.
"저쪽에서 바닷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이 많다고 알려주는구나."
"정말 그게… 들리십니까, 용왕님? 일부러 바다와 멀리 떨어졌습니다."
무날이 실망한 목소리를 냈다.
'꿈은… 어쩜 저리도 잔인할까.'
자신은 가슴이 미어졌다.
이 순간,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자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야야, 실망하지 마. 이건 용왕님이 잘못한 거야. 이미 결계를 몇 개나 떠안고 계시는데 저기 멀리 있는 바다랑 소통하는 거봐라. 내가 뭐랬어? '쉰다'라는 단어를 모르신다고 했잖아?"
류아가 빈정거리다 말고 갑자기 환호했다.
"…아! 아싸!"
"너 미쳤어?"
무날이 기가 찬 목소리를 냈다.
"야야, 내가 이겼다! 봤지? 용왕님께서는 이 와중에도 일하신다니까! 내가, 어? 딱 걸었잖아? 감사합니다, 용왕님……!"
"지금 내기했단 말인가? 날 가지고?"
자신이 발끈하며 소리쳤다.
'…내기라니.'
참 행복한 모습임에도 가슴이 쓰라렸다.
"설마 무날 너도 내기에 참여했는가?"
"…죄송합니다, 용왕님."
무날이 고개를 숙이는지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네가 사과하면 내가 뭐가 돼?"
"그럼, 너도 사과해."
"가끔 이런 날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용왕님? 그렇죠?"
류아는 살짝 비굴한 목소리를 냈다.
"그래서 꼭 이렇게 가야 하는가?"
자신은 가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눈도 가리고 이게 무슨 짓인지.
"물론입니다, 용왕님."
무날이 힘차게 말했다.
"금방 다 와 갑니다. 어서 갑시다. 어서."
류아는 다시 자신의 등을 밀었다.
어딘가로 향할수록 여러 음식 냄새가 밀려왔다.
바다와 소통하지 않아도 숨을 꾹 참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 이곳에 수십 명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
자신은 비로소 기억이 났다.
정말 행복하다 느낀, 몇 안 되는 소중한 기억이 아닌가.
"자자, 안대를 벗어주십시오!"
류아가 신나게 소리쳤다.
어처구니없다는 듯 자신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안대를 벗었다.
팡!
폭죽이 터지고.
"와아아아!"
환호하는 소리와 함께 자신에게 무언가 뿌려졌다.
색색 종이를 잘라 만든 게 아닌가.
하늘에 터진 폭죽의 잔향과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한껏 차려진 탁자를 보며 자신은 할 말을 잃었다.
"…이게 무엇인가? 난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예, 예. 먹는 건 저희가 다 먹을 겁니다. 일단 앉아주십시오."
류아가 또 자신을 밀자 어쩔 수 없이 끌려가 자리에 앉았다.
이름은 모르겠지만, 먹음직스러운 새 요리가 자신의 앞에 놓여 있었다.
"하나!"
류아가 신나게 외쳤다.
뭔가 다들 들떠 있었고.
"둘!"
자신도 그 분위기가 나쁘지 않아 가만히 있었다.
"셋!"
자신의 눈동자가 돌아갔다. 대체 뭘 준비한 건지.
"생일 축하합니다, 용왕님!"
다들 힘차게 한목소리로 외쳤다.
자신은 얼떨떨했고, 조용히 눈을 깜박거렸다.
하지만 행복해하는 그들의 얼굴을 보니 저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아.
이게 행복이구나.
이게 가족이구나.
그렇게 처음으로 알게 되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