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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117화 (117/415)

117화. 한 번 보겠습니다(3)

* * *

<웨인 놈에게 물어야 봐야 할 거라뇨? 또 뭐가 생긴 겁니까?>

바안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섞여 있었다.

하벨은 이를 이해했다.

아직도 웨인에게 더 캘 정보가 남아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덜컥 두려워졌을 테지.

왕권이 무너지면서 이미 고쳐야 할 것들이 많을 텐데, 여기서 무언가 또 나왔다는 것 자체가 부담일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벨은 그런 이유라도 사실을 숨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역시, 데론이 마법사 협회와 관련이 있던 겁니까?>

바안의 목소리에 묻은 씁쓸함에 아라가 금화를 안은 채로 입을 살짝 오므렸다.

[이 몸도 지금 시무룩한데.]

두 번째 거대 정화 장치 사건 이후 정령들이 하벨한테 반영구 정화제 힘을 가져다줬을 때, 머릿속에서 힘 하나가 떠올랐다.

세렌처럼 물과 물을 이동하는 힘.

자신도 가능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하벨이 또 자신을 보호하고자 피를 흘리지 않았는가.

"아뇨, 저하."

하벨은 아라의 앞발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이, 이 몸은 괜찮아. 반만. 아니, 이 몸 발가락만큼.]

아라는 기어코 울먹이다 하벨의 품에 파고들었다.

<…지금 아니라고 했나요?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겠죠?>

"제대로 들으셨습니다. 데론은 마법사 협회의 끄나풀이 아닙니다."

<그, 그럼 어디인지 말해줄 수 있나요?>

바안의 목소리가 떨렸다.

왕족이기에 당연히 감정을 조절할 방법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두려움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자신을 믿는 걸까.

아니면 어리숙한 연기를 하는 걸까.

"……?"

갑자기 랜턴에 불이 들어왔다.

환한 빛을 뿜었던 랜턴의 빛이 곧 죽어가듯 차츰차츰 흐릿해지고, 작아지고 있었다.

이게 왜 이러는 걸까.

하벨은 찝찝함을 느끼며 목소리를 냈다.

"코스모……."

화르륵.

갑자기 랜턴의 빛이 검은 불꽃으로 뒤바뀌었다.

마치 건드려서는 안 될 무언가를 찔렀다는 경고처럼 그 불꽃의 크기가 점점 커졌다.

칼리우스보다 반 정도나 작은 불꽃.

하지만 생각보다 큰 크기에 하벨은 혼란스러웠다.

'뭘 말하려는 건가?'

바안하고 코스모피안 왕국 사이에 뭐가 있다는 건지, 아니면 무언가가 벌어져 바안이 멸망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는 건지.

하벨은 이번만큼은 자신이 멸망의 버튼을 누른 것 같아 찝찝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망할.'

분명 바안의 불꽃색이 바뀌었으니 바안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게 틀림없었다.

[대장? 또 머리가 아파?]

아라가 훌쩍이다 말고 고개를 들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벨 공?>

이어 들려오는 바안의 목소리에 하벨은 이불을 쥐며 말했다.

"아, 잠깐 딴생각이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하."

난감했다.

이번에는 자신의 말로 시작된 게 아닌가.

'치졸하다, 하벨 티에라.'

하벨은 랜턴을 노려보았다.

<혹시 공이 말하려던 게 코스모피안 왕국입니까?>

"맞습니다, 저하. 데론 뒤에 있던 자는 코스모피안 왕국입니다."

하벨은 일단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고 바안에게 전해야 할 정보를 꺼냈다.

<티에라… 가문을 노렸겠군요.>

"그렇습니다."

<미안합니다, 하벨 공. 왕국이… 그대들을 보호했어야 했습니다.>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안은 괴로움에 침음을 흘리다 다시 목소리를 냈다.

<이건 왕국의 책임입니다. 몇 번이나 그대들에게 피해만 주는군요.>

"지금부터라도 움직이시면 됩니다. 괜찮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요."

<이번에 바뀐 귀족들부터 다시 알아보겠습니다. 내가 안일했습니다. 기존 세력들의 흔적을 지워버리는 데에만 집중했네요.>

바안은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책임자임에도 하나만 보았고, 둘 이상을 보지 않은 사실은 크나큰 실수임이 분명하기에 하벨은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하벨 공. 웨인 놈과 연락할 수 있게 지금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저하."

하벨은 바안이 끊기 전에 그를 불렀다.

조금 전에 봤던 검은 불꽃 때문일지도 몰랐다.

<듣고 있습니다.>

"다. 전부 다 끌어안을 수는 없습니다."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하라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목숨을 중요하게 받아들이되, 희생은 언제나 있다고 생각하시고 자책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이건 내가 놓친 겁니다.>

"그러니 제가 주워드렸잖습니까. 꼭 저하께서 주우실 필요 없습니다."

살살 달래는 하벨의 말에 바안은 부끄러움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합니다. 방금은 내가 어린아이처럼 굴었습니다.>

"저하. 왕이 된다는 건 고독과 함께하는 겁니다. 하지만 고독에 사로잡히시면 안 됩니다. 주변을 살피고, 손을 내미십시오. 그게 결코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하벨은 오지랖이라는 걸 알지만, 자신의 전철을 밟으려는 듯한 모습에 말이 절로 나왔다.

왕이기에 오로지 홀로 감당해야 한다고 미련하게 참고, 참았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태어나서 죽고 또 태어나는 당연한 순환을 받아들였어야 했는데.

바안은 잠깐 말이 없었다.

자신의 말이 좋지 않게 들릴 수 있었기에 하벨은 그냥 그가 연락을 끊을 때까지 기다렸다.

<…공이 그런 말씀을 하니 내가 진짜 어린아이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런 말치고 바안의 목소리는 밝았다.

<하지만 왠지 마음이 놓이네요.>

"마음이… 놓이십니까?"

<네. 마음이 놓이네요. 솔직히 왕이 되고자 공부했으나, 두렵습니다.>

"두려울 겁니다. 그건 당연합니다."

자신도 그랬으니까.

<누군가를 의지해도 될지 아닐지 그것 또한 망설였는데, 다행입니다.>

바안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득 섞여 있었다.

<고맙습니다, 하벨 공. 그럼,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바안은 연락을 끊었다.

"…하."

하벨은 고개를 젖혀 천장을 보며 숨을 잠깐 몰아쉬었다.

아라를 토닥거리고 있는 와중에 발소리가 들렸다.

"안녕, 하벨, 아라야!"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하벨 자신의 손가락 끝에서 아라가 떠는 진동이 느껴졌다.

하벨은 키득거렸다.

"용용이잖아."

[요, 용용아!]

"…아!"

칼리우스가 깜짝 놀라며 되돌아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똑똑.

문이 멀리 있음에도 제법 큰 소리가 났다.

칼리우스가 재빨리 뛰어왔다.

"안녕하십니까, 도련님. 아라야!"

의젓하게 목소리를 내는가 싶더니 아라를 보자마자 칼리우스는 배시시 웃었다.

[안녕, 용용아!]

"용용아, 둘이 있을 때는 그냥 하벨이라고 불러."

이상하게 칼리우스한테 저 말을 들으니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되는 거야? 나 방금 '안녕하십니까, 도련님'이라는 말을 엄청 연습하고 오는 길인데? 이렇게 말하면 카샬이… 나, 혼낼 텐데."

지금도 예의를 지키는 게 아닌데.

하벨은 순진한 눈으로 우물쭈물하는 칼리우스를 보며 피식 웃었다.

"내가 카샬한테 잘 말해줄게. 그러니까 그냥 불러도 괜찮아."

"고마워, 하벨!"

칼리우스는 의자부터 찾았다.

의자를 침대 옆에.

완벽한 그 모습에 칼리우스는 뿌듯함을 드러냈다.

짝짝짝.

아라가 손뼉을 마주치자 칼리우스는 쑥스러움에 시선을 살짝 내리며 옷자락을 만졌다.

"용용아."

하벨이 부드럽게 칼리우스를 불렀다.

바안을 기다리는 동안 잠깐 말을 꺼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응?"

"지금 힘들다거나, 어려운 거 있어?"

"없는데."

[대장이 묻는 말에 거짓말하면 안 돼, 용용아. 만약 그러면 이 몸은 실망할지도 몰라.]

아라가 칼리우스의 볼을 만지작거리자 그는 주먹에 힘을 주었다.

"힘든 거 하나도 없어. 정말이야. 정말로 그냥 계속 매일 좋아. 매일 즐거워! 밥도 맛있고. 푹신푹신한 침대도 있고. 옷도 부드럽고."

억지로 짜낸 말이 아니라는 건 말하는 도중에 튀어나오는 웃음에서 알 수 있었다.

하벨은 마음이 살짝 가라앉았다.

"그럼 혹시 이전에는 있었어?"

하벨의 물음에 칼리우스는 그대로 입을 벌렸다.

"…그, 그게."

칼리우스는 손톱을 뜯으며 눈동자를 좌우로 움직였다.

"복수하고 싶어?"

"나는… 나는 세상의 수호자야. 그러면 안 돼."

"누가 그렇게 말해?"

"요, 용의 지식이. 용의 지식이 사람을 함부로 죽이면 안 된다고 그랬어! 나는 그래서 사람을 죽이면 안 돼!"

"그럼 그 자식들이 너한테 함부로 하는 건 괜찮고?"

"나는 참아도 돼. 아니, 참을 수 있어. 용이니까!"

"만약 그 자식들이 나한테 네가 당한 대로 한다면 그때도 참을 수 있어?"

"그, 그건 싫어!"

칼리우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아라는 움찔거렸다.

"하벨 널 어떻게 만났는데. 내가 어떻게… 찾았는데. 나는 하벨 네가 괴롭힘 받는 거 못 참아! 내 동족은 아무도 못 건드려! 내가, 용서하지 않을 거야!"

칼리우스의 눈동자가 뾰족하게 날이 서자 그의 뺨을 만지려던 아라가 그대로 눈을 뜬 상태로 굳어졌다.

피부가 쓰라릴 만큼 기세가 높았다.

이러다 죄다 몰려올지도 몰라 하벨은 차분히 목소리를 냈다.

"봐, 용용아."

칼리우스의 기세가 빠르게 가라앉고, 그가 흠칫 놀랐을 때, 하벨은 제대로 알려주었다.

"너도 그런 존재야."

"……."

칼리우스는 눈을 깜박거렸고, 천천히 자신을 가리켰다.

"…내가?"

"그래."

하벨은 칼리우스의 눈동자에 어린 혼란을 보며 여기에서 멈췄다.

이건 한 번에 풀릴 게 아니었으니.

지금까지 쌓아왔던 것들이 와르르 무너질 텐데 그 충격을 어떻게든 완화해야 했다.

"일단 내 말을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용용아."

"알… 았어. 일단 기억해둘게. 잊지 않을 거야."

"혹시 마법사와 말을 나누고 싶어?"

"마법사는 좀 무서운데, 마법이 궁금해. 알고 싶어."

"안 무서운 마법사를 소개해줘도 괜찮아?"

정확히는 자신한테만 무서운 마법사가 있었다.

일단 헤레스한테 말하는 게 먼저였다.

아라가 입을 열려다 하벨을 보았다.

고개를 살짝 가로젓자 아라는 다급히 자신의 입을 가렸다.

"하벨이 소개해주는 사람이니까, 나는 믿어."

"용용아. 나를……."

지이잉.

하벨은 연락용 아이템에서 울리는 소리에 말을 멈췄다.

"잠깐만."

"아라랑 조용히 놀고 있을게."

칼리우스는 아라와 함께 손을 잡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칼리우스가 조금 전 일을 사과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릴 때쯤, 바안의 목소리가 연락용 아이템 너머로 새어 나왔다.

<오래 기다렸습니까, 하벨 공?>

"아닙니다, 저하. 잠깐이었을 뿐입니다."

<무얼 묻고자 하는지 몰라도 놈이 쉽게 입을 열진 않을 겁니다. 아, 나도 들어도 되는 이야기입니까?>

"물론입니다. 어차피 저하의 귀에 들려올 텐데요. 그리고 간단한 물음입니다."

<알겠습니다.>

끼이익.

무언가를 여는 소리가 들렸다.

<…하, 또 저하이십니까? 저는 분명히 아무것도 모른다고…….>

"안녕."

하벨은 또 인사했다.

아마 마지막 인사일 테니.

어김없이 랜턴에 검은 불꽃이 타올랐다.

<네, 네놈은 하벨 티에라? 이 개…….>

"데론을 통해 다 들었어. 이중첩자 질을 했다며?"

<…….>

"마법사 협회에서 왜 네놈 가문의 기술이 필요한 건데?"

<머리 굴리지 말거라, 웨인. 이 감옥이 지금 네놈을 보호하고 있는 곳으로 바뀌었으니.>

<저, 저하. 저는 결단코 그런 적이…….>

"마법사 협회가 널 도와줄 것 같아? 너도 알잖아. 마법사 협회에서 필요한 건 멍청한 네가 아니라 그 기술이라는 걸. 지금 누구한테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침묵이 오갔다.

고작 몇 분의 침묵으로 웨인은 전혀 다른 목소리를 내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저하!>

어차피 그 끝은 달라지지 않겠지만, 웨인의 말 한마디가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제게… 나, 날씨를 조종할 힘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날씨를 조종한다고?'

하벨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저, 정말입니다, 저하!>

웨인은 억울하듯이 호소했다.

<무, 물! 오염된 물을 조종할 수 있다면 날씨를 조종하는 게 뭐가 어렵겠습니까?>

후.

갑자기 랜턴의 불꽃이 꺼져버렸다.

이렇게 쉽게?

마치 저 말이 진짜라고 강조하는 것 같지 않은가.

하벨이 손가락을 들어 랜턴을 건드리려고 하자 그 소리가 들려왔다.

딸깍.

버튼을 누르는 소리이자 하벨 티에라의 과거 기억을 볼 수 있는 그 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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