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114화 (114/415)

114화. 그렇게 적을 알았다(3)

* * *

* * *

"…푸흡."

라르웬은 차를 먹다 말고 살짝 뿜었다.

[더럽게. 아직도 그래? 인간 나이로 어른이면서.]

세렌이 뿜어진 차를 둥글게 말아 도로 라르웬의 찻잔에 넣었다.

[세렌!]

루룸이 소리를 높이며 세렌을 불렀다.

[왜, 루룸?]

[잘했어.]

루룸이 키득거렸고, 세렌은 고개를 황급히 돌렸다.

라르웬은 찝찝한 눈길로 잠깐 찻잔을 바라보다 다시 카샬을 재촉했다.

"그러니까… 데론이라고? 우리가 만났던 그놈?"

"그렇습니다, 둘째 도련님."

카샬은 라르웬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대답했다.

"뒤는 내가 책임질 테니, 하벨이 원하는 대로 해주거라."

룬델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도련님께서 날뛰실 겁니다."

카샬이 룬델을 말렸지만, 그는 여전히 흔들리지 않았다.

"나도 그 뒤에 누가 있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더냐?"

마법사 협회일지, 다른 세력일지.

어느 쪽이라도 괘씸했고, 또 안타까웠다.

자신은 정령사 가문의 가주로서 물의 오염을 막는 이 일을 게을리할 수 없었다. 손에 놓을 수도 없었고.

정령들이 자신의 힘이었고, 그런 그들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의무였으니.

설령 족쇄가 된다 해도 지금 이 일을 놓게 된다면 어떤 결말로 향할지 너무도 뻔했다.

다만, 넬시아와 라르웬, 그리고 하벨에게 너무도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알겠습니다, 가주님.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카샬은 허리를 숙인 뒤 밖으로 나갔다.

"세렌."

룬델은 차를 한 모금 마신 뒤에 입을 열었다.

[왜? 또 걱정이 쌓였지? 오늘, 네 흰머리가 몇 개나 자랐나 내가 세야겠어?]

세렌이 날개를 파닥거리자 룬델은 가볍게 웃었다.

"마법사들이 갈 곳은 뻔해."

[그래. 마법사의 탑이 있는 섬으로 향하는 배라면 몇 군데 없지. 누구라도 오염된 바다에 빠져 죽기 싫을 테니까.]

"최악의 상황은 막아야 하지 않겠어?"

하벨이 손에 쥐려고 했던 꼬리를 다 잃고, 오히려 역공을 맞는 상황을.

상상만으로도 암담하지 않은가.

"아버지."

"그래, 라르웬."

"거기까지 신경 쓰실 수 있습니까?"

라르웬의 물음에는 걱정이 섞여 있었다.

물의 오염이라는 해결하기 벅찬 문제 위에 거대 정화 장치라는 큰 문제가 또 놓인 상태였다.

"신경을 써야지. 하벨 일이 아니더냐."

라르웬은 오늘따라 더 지쳐 보이는 룬델을 잠깐 바라보았다.

티에라 가문이 소유한 영토를 뒤덮은, 정령들이 만든 결계의 유지 관리는 물론 전 나라로 퍼져가는 정화제 생산과 관리 유통에, 정화제 때문에 일어나는 여러 좋지 않은 일에, 가문 관리에, 정령들까지.

룬델의 몸이 열 개가 되어도 모자랄 일을 감당하고 있지 않은가.

라르웬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정화제의 양이… 저번 달과 비교하면 줄었습니다."

"…그래."

룬델은 목소리에 씁쓸함을 담았다.

정화제가 줄어들었다는 말은 달리 말하자면 정령들과 정령사가 죽거나, 세렌하고 아라처럼 물의 특성이 강한 정령들이 태어나지 않는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거대 정화 장치에서 본래의 쓰임을 역행해 만들어진, 검은 물이 정령들을 먹었다는 말을 하벨한테서 들었다.

'그 존재 때문인가.'

뭐가 됐든, 최악의 상황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는 게 직감이 됐다.

정령들이 정령사 이외에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을 뿐, 그들이 죽지 않는 건 아니었다.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표현을 달리할 뿐.

'세상의 근원인 물이 오염됐기에 새로 태어나는 정령들의 숫자도 줄어들고, 설령 태어나더라도 본래 지녀야 할 물의 특성마저 사라지고 있으니. 저 특성이 없으면 정화제를 만들 수 없다.'

시간이 쳇바퀴처럼 굴러가지만, 점점 자신의 목을 조여오고 있었다.

자신을 믿고 이곳에 머무르는 정령들의 믿음을 깨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누님께서도 아버지를 걱정하는 편지를 몇 번이나 보내지 않았습니까?"

"넬시아가 온다더구나."

"…누님이요?"

"읽어보거라."

룬델은 라르웬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아버지. 꼭 만나서 말씀드릴 일이 있습니다. 조만간 찾아뵙겠습니다.

"…좋은 소식이 아닌 모양입니다."

"그래. 이번 거대 정화 장치 일이 그쪽까지 번진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구나."

룬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물의 오염을 유지하고자 얼마나 많은 정화제를 만들고, 풀었는가.

이런 상황에서 정화제까지 줄어들다니.

'부디, 정령 왕국에서는 문제가 없길 바라는데.'

강한 쇄국 정책으로 성문을 걸어 잠근, 정령사로만 이루어진 나라가 있었다.

성문은 걸어 잠갔지만, 정화제 공급만큼은 자신들에게 맡겼고, 그 역할을 넬시아가 담당하고 있었다.

넬시아가 온다는 건 정령 왕국, '헤스트리아'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 싶은 마음이 컸다.

"아버지."

라르웬은 머뭇거리다 말을 꺼냈다.

"…하벨이 특별한 겁니까?"

"반영구 정화제를 말하는 것이더냐?"

"그렇습니다."

"그건 나도 처음 보았단다. 자료를 뒤져보아도 존재하지 않은 형태고."

"벌써 두 번째입니다. 하벨이 계속 저 정화제를 만들 수 있다면 물의 오염을 막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벨이 특별하다는 건 역시……."

"라르웬!"

룬델이 갑자기 언성을 높였고, 라르웬은 눈동자를 살짝 내렸다.

"…설마, 말했더냐?"

"아뇨. 말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 일은 이번 일은 아무 상관이 없다."

룬델은 못을 박았다.

"라르웬. 그래서 하벨이 특별하다고 해서 모든 걸 하벨에게 맡길 테더냐? 우리 가문을 보거라."

룬델은 조용히 손가락으로 탁자를 건드렸다.

"가문이 특별하기에 나도, 너도, 아니, 우리 모두에게 달려드는 하루살이들을 보지 않았더냐?"

"입조심… 하겠습니다, 아버지."

"그래. 입조심을 하지 그랬더냐, 라르웬?"

"……?"

라르웬의 눈이 커졌고, 룬델의 시선이 살짝 매서워졌다.

"하벨에게 마성물이 필요하다고?"

"크흠. 벌써 아버지 귀에 닿았습니까?"

"하벨에게도 말했더냐?"

"…아뇨. 타이밍이 엇갈렸습니다. 제가 갈 때마다 자고 있더라고요. 저도 작성해야 하는 보고서가 꽤 많아서 정신없었습니다."

"어흠."

룬델은 자신 뒤에 처리해야 할 서류를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알죠, 알죠. 서류의 양이라면 아버지가 더 많습니다."

라르웬은 키득거렸다.

저 모습을 하벨이 봤어야 했는데.

"어쨌든, 이번에 틈의 세계가 너무 자주 일어났잖습니까?"

"그래. 과하구나. 이런 일은 처음이지 않더냐."

"맞습니다. 유독 하벨 주변에……."

"우연이다. 이제껏 그런 일은 없었으니."

룬델은 곧바로 정색했다.

"아버지."

"라르웬. 그만해주거라."

"…죄송합니다."

라르웬은 아직도 그 일을 잊지 못하는 룬델의 모습에 당황하며 입을 다물었다.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구나."

"이해합니다, 아버지. 저는 그때, 어렸으니까요. 그럼에도 몇 장면이 또렷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습니다."

"하벨이 틈의 세계를 만났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계속 가슴이 불안하단다."

찻잔을 쥔 룬델의 표정은 한껏 일그러졌다.

'놈들이… 그 괴물이, 하벨을 데려갈까 봐. 나는 그게 두렵다.'

룬델은 차마 그 말을 내뱉지 못했다.

자신이 지금 하벨이 과거의 하벨과 다름을 인정한 순간, 보고 말았다.

하벨의 눈동자에 깃든 강한 두려움을.

무언가를 빼앗았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힌 그 눈동자를.

저 말은 사실을 말할 용기도 없고, 하벨의 그 눈동자를 또 마주할 수 없는 자신이 내뱉을 소리가 아니었다.

* * *

"…이제 슬슬 올 때가 됐는데."

하벨은 아라의 배를 손가락 끝으로 안마하며 열린 창문 밖을 힐끔 바라보았다.

바람이 차갑게 불어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누구요? 페트리오요? 하긴 연락이 늦네요."

레디나가 눈을 깜박거렸다.

"아니. 아마 좀도둑은 지금 붙잡은 마법사한테서 캐낸 정보로 더 좋은 걸 찾고 있지 않을까 싶네."

피를 통해 기억을 읽을 수 있는 페트리오의 힘이라면 이미 보고가 와야 하지만, 살짝 늦어졌다.

마법사 협회 장로 일 때문에 움직일 인원이 또 쪼개진 상황이라 정신이 없을 테고.

"도련님. 카샬한테 이미 들으셨겠지만, 오늘 검은 달을 만났어요."

"말할 수 없는 부분이라면 굳이 말하려 하지 않아도 괜찮아."

"혹시 웨인 톨을 직접 죽이고 싶으세요?"

"아니. 걔는 이미 바안 저하 손에 넘어갔어. 나한테 더는 쓸모도 없고."

애초에 날씨를 예측하는 기술을 원하지도 않았고 웨인 톨은 그저 곁다리였다.

진짜 자신이 바라던 건 거대 정화 장치 정보와 마법사 협회의 정보였으니.

이미 둘 다 웨인을 통해 얻지 않았는가.

그걸로 쓸모를 다했는데 뭘 직접 죽이기까지.

"아, 그럼 누가 죽여도 상관없다는 말씀인가요?"

레디나가 그제야 편안하게 웃었다.

"혹시 의뢰가 들어왔어?"

"제 의뢰는 아니에요."

"그 의뢰를 맡은 사람이 지부나 간부의 위치를 알고 있겠네?"

"맞아요. 역시 도련님의 눈을 속일 순 없네요. 웨인을 죽일 때 기다렸다가 덮쳐서 정보를 캐려고요. 그래도 괜찮나요?"

"당연히 괜찮지. 오히려 말해줘서 고마운데?"

하벨은 아라를 간질이던 손을 멈췄다.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되는 부분임에도 레디나가 일정이나 여러 가지 등 자신을 위해 말해준 게 아닌가.

"에이, 고맙다는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니에요. 지금까지 도련님 덕에 사라진 놈들이 몇이에요?"

이번 연회에서 죽은 귀족 중 검은 달이 달라지기 전에 처리했어야 할 귀족들도 꽤 많았다. 얼마나 속이 시원했는가.

이제 하벨이 마법사 협회까지 건드릴 셈이었고.

'악'을 처단하는 하벨이야말로 자신이 바라던 진짜 검은 달 그 자체였다.

"도련님."

레디나는 싱긋 웃으며 하벨을 불렀다.

혹시 또 무슨 장난을 칠까 싶어 하벨은 살짝 경계하며 대답했다.

"왜?"

"정체 모를 의뢰자의 재촉에 도련님을 죽이는 의뢰 날짜가 단축됐어요. 저도 시간이 좀 촉박하네요."

"검은 달에 다녀와야겠어?"

"음… 일단은요. 최대한 정보를 많이 얻은 상태로 빠져나와야 저도 좋잖아요? 사실 언제 갈지 모르지만, 일단 알아두셨으면 좋겠어요. 물론, 훌쩍 떠날 생각은 없어요."

"괜찮아. 훌쩍 떠나도 네가 이렇게 말했으니까 오해하는 일 없을 거야."

"정말요?"

레디나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혹시나 자신이 떠난 뒤에 돌아올 곳이 없을까 봐, 하벨의 방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부터 고민이 많았다.

잠입을 위해 머문 곳은 많으나, 진짜 집이라는 생각이 든 곳은 이곳이 처음이었다.

"그래. 계약서에 서명했잖아? 계약 위반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알죠! 당연히 알고 있어요! 고마워요, 도련님! 역시 제 신님이세요!"

레디나는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근엄한 척하는 하벨의 볼을 향해 손을 뻗다 순간 멈췄다.

저 볼을 찌르면 진짜 화를 내겠지.

아쉽지만, 치맛자락을 잡고는 고개를 살며시 숙였다 올렸다.

여전히 '신'이라는 말을 싫어하는 저 모습에 레디나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 말을 이제 됐어, 레디나."

하벨은 벌써 켜지는, 점보다 작은 랜턴의 검은 빛을 확인했다.

'놈이 왔네?'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똑똑.

노크 소리에 레디나는 목소리를 내며 문을 열었다.

"카샬이에요."

문이 열리자마자 카샬은 누군가를 내던졌다.

"으… 으읍!"

하벨은 그가 데려온 자가 데론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귀족은 그때 처음 보았으니 잊을 수가 없었다.

"창문은 왜 열어두신 겁니까? 감기 걸리시려고 작정하셨습니까?"

카샬은 들어오자마자 이불을 동여맨 하벨과 열린 창문을 보며 기겁했다.

"네가 이쪽으로 올 거라 생각했지. 설마 이대로 온 거야?"

"납치는 제가 한 게 아닙니다. 저는 저택에 도착한 데론을 도련님의 방까지 몰래 데려왔을 뿐입니다."

"여기까지 오려면 정령 기사들을 통과해야 할 텐데 혹시 비밀 통로라도 있어?"

이전 암살자 사건으로 기사들이 싹 물갈이가 되긴 했지만, 여전히 두 개의 문과 각각 5명의 기사를 지나와야 하지 않은가.

"창문으로 왔습니다. 어차피 가주님도 알고 계시니 정령님들이 본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탁.

카샬은 창문을 닫았다.

"하긴 그렇지."

하벨은 데론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대장. 데론은 나쁜 사람인데 왜 인사하는 거야?]

아라가 하벨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인사는 아는 사람한테, 좋은 사람한테 하는 게 아닌가.

"얄밉게 하려고."

하벨은 얼굴을 긁적이는 척 소맷자락에 딸려온 아라한테 속삭였다.

[이, 인사가 얄미울 수도 있어?]

하벨은 입을 살짝 벌린 아라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안녕, 데론."

하벨은 아라를 위해 조금 더 활짝 웃었다.

어차피 웃는 상이라 조금만 웃어도 금세 티가 났다.

봐.

자신이 너무 얄미워 데론이 눈을 부릅뜨지 않는가.

"약속은 잘 지키고 있는지 궁금해서 편지를 보냈는데, 네가 이 꼴이라면 거절한 게 분명하네. 왜?"

"읍읍!"

"풀어줘."

카샬이 입마개를 풀어주자마자 데론은 언성을 높였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하벨은 링거 거치대를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르륵.

방에 울려 퍼지는 그 소리에 데론은 이유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하벨이 가만히 데론을 내려다보았다.

"머리가 울리니까, 조용히 좀 해줄래?"

하벨은 데론의 배를 발을 올리며 천천히 힘을 주었다.

"으… 흡!"

"이게 무슨 짓이냐고? 네가 사람이 아니니까. 네가 사람이면 나도 이런 짓은 안 해."

가라앉은 하벨의 목소리에 어깨에 매달려 있던 아라가 흠칫거렸고, 데론은 고통을 참으며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몸이 좀 안 좋아서 길게 물어보고 싶지 않아."

하벨은 발을 떼며 숨을 잠깐 깊게 들이마셨다.

저 얼굴을 오래 보고 싶지 않았다.

"웨인 톨의 빚을 갚아준 게 너라며."

순간, 데론의 얼굴이 흘러내릴 정도로 놀라 얼어붙었다.

"부정할 생각하지 마. 네 입보다 정확한 것들이 네놈 저택에 널려있을 테니까."

일이 아주 살짝 길어지고 룬델이 정령 기사를 움직여야 한다는 점이 마음에 걸리지만, 어차피 사실을 털어놓아도 곧 그렇게 될 테지.

"살아서 나가고 싶으면 말해. 너 하나 사라진다고 세상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하벨은 가볍게 말을 던졌다.

"마법사 협회야?"

하벨이 굳어진 데론을 위해 넌지시 말을 꺼냈다.

순간, 데론의 눈동자에 빛이 들어온 듯 반짝거렸다.

"아니네. 마법사 협회가 아니었어."

그럼 누구지?

하벨은 잠깐 손가락을 튕겼다.

"…마법사 협회가 정말 아닙니까?"

카샬은 자신의 예측과 다르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방금 어떻게든 이 사태를 벗어나려고 눈동자를 굴리는 걸 봤는데?"

일명 동아줄을 잡을 때 튀어나오는 눈빛이었다.

"네가 돈이 나올 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저 도, 돈 많습니다!"

데론은 다급히 소리쳤다.

"얼마 전에 틈의 세계가 열렸잖아? 그때 입었던 피해조차 비용이 없어서 아직도 복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물의 저주 때문에 사람이 푸른 동상이 된 채 죽어버리지 않았던가.

그때, 그 땅을 바로 데론이 소유하고 있었다.

데론은 진땀을 흘리더니 다급히 무릎을 꿇었다.

그때 보았던 귀족의 품위는 어디 갔는지.

"…웨인 톨, 그놈이 그렇게 말했습니까?"

"글쎄."

"속지 마십시오. 놈은 마법사 협회의 끄나풀입니다! 이대로 우리 귀족들을 갈라치기를 해 에르티안 왕국을 두 쪽으로 나누려고 하고……."

"티에라 가문은 귀족이 아닌데?"

하벨은 데론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너, 제대로 된 걸 알고 있구나. 단순한 놈이 아니었어."

곧 하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네놈이 소유한 영토는 티에라 가문이랑 가깝고, 수도랑 떨어져 있지? 일단 넌 마법사 협회와 아무 관계도 없고 말이야."

하벨이 말을 꺼낼수록 날카로운 뱀이 되어 데론의 목을 칭칭 감았다.

표정을 유지하려 애를 쓰나 데론의 낯빛이 점점 새파랗게 질려갔다.

"방금 우리 귀족이라고 말했는데, 넌 아니야."

당황하면 실수를 하기 마련이고, 그 실수는 곧 좋은 정보를 가져다줬다.

"티에라 가문이 귀족들을 박살 냈는데, 증오해도 모자랄 판에 우리 귀족이라니?"

하벨의 눈이 휘었다.

"아, 알았다."

서로 앙숙일지라도 자신들의 세계를 파괴하려는 자들에게 더한 용납을 못 하는 귀족의 특성상 저런 태도를 보일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다른 나라에서 보낸 첩자구나."

이 나라가 자신의 나라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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