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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112화 (112/415)

112화. 그렇게 적을 알았다

* * *

'…데론이라면.'

기상청 앞에서 바안을 만난 후에 그곳 수장을 부르다 자발적으로 찾아온 귀족이 아닌가.

'분명히 검은 불꽃이 피어났지?'

하벨은 랜턴에 불이 붙었던 상황을 떠올렸다.

그때는 그냥 넘기지 않았던가.

어쩌다 엮인, 대수롭지 않은 귀족일 뿐이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속이 들끓었다.

'이 또한 단순한 일이 아니란 말인가.'

대체 어디까지 보았고, 어디까지 자신에게 알려주려는 건지.

'…하벨 티에라.'

시간의 흐름을 바꾸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단 한 명이 원래 흐름과 다른 선택을 해도 셀 수 없이 많은 선택지를 놓기에 시간은 어그러짐을 허용하지 않았다.

회귀자.

그 존재로 모든 흐름이 엇나가기 시작했고, 이를 알아챈 시간이 모든 걸 다시 되돌리려고 움직인 게 아닐까.

'그래서 계속 마주치는 것이라면…….'

하벨은 갑자기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시간이 제자리로 돌아가려고 향할 곳이 어디인지 뻔했다.

이 세상의 멸망.

예정된 결말을 향해 움직이겠지.

[…대장?]

아라가 위를 쳐다보며 물었다.

하벨의 눈빛이 가라앉아 있었다.

상상만 해본, 아주아주 깊은 바다가 갑자기 떠올랐다.

[대장. 어디 아픈 거 아니지?]

하벨은 아라의 물음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어쩌면.

자신은 또 무거운 그 짐을 짊어져야만 하는 게 아닐까.

'…제발.'

덜컥 숨이 막혀왔다.

부서질 듯 지끈거리는 머리를 쥐려 덜덜 떨리는 손을 움직여 움켜쥐었다.

[대장! 대장!]

아라가 자신을 흔들었다.

<…하벨 공? 혹시 너무 놀랐나요?>

계속 이어진 하벨의 침묵에 바안이 말을 꺼낼 때쯤, 레디나가 목소리를 냈다.

"도련님, 괜찮으세요?"

참으려고 했지만, 레디나는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하벨의 상태가 이상하지 않은가.

너무 괴로워 보였다.

<거기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하벨 공의 상태가 어떤가요?>

"도련님께서……."

"괜… 찮습니다, 저하. 잠깐."

하벨은 머리를 쥐었던 손을 내려놓으며 아라와 레디나가 안심할 수 있게 웃어 보였다.

[이, 이 몸은 간이 떨어질 뻔했어.]

아라는 힘없이 이불 위로 떨어졌다.

하벨은 손가락을 들어 아라의 배를 간질였다.

아라는 웃지 않고 하벨의 손가락을 꼭 쥐었다. 마치 자신을 위로하는 것 같았다.

이미 실패했던 일이 거의 한꺼번에 머릿속에 쏟아졌다.

버거워서.

너무 버거워서 견디기 어려워서 그랬을 뿐이었다.

"잠깐 두통이 왔을 뿐입니다."

하벨은 숨을 골랐다.

자신이 생각한, 그 최악의 상황이 올 리가 없었다.

이 몸을 본래 하벨 티에라한테 돌려줄 테니까.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계속 말씀하셔도 됩니다, 저하."

하벨은 아직도 굳어 있는 레디나한테 손바닥을 내보이며 괜찮다는 의사를 재차 밝혔다.

심장 떨리는 줄 알았어요.

레디나는 입을 움직인 후에야 숨을 길게 내쉬었다.

<정말 괜찮은 겁니까? 일단 쉬는 게 어떻겠습니까?>

"시간이 없잖습니까, 저하. 데론이 언제 도망칠지 모르는 상황이 아닙니까?"

<공이… 움직일 겁니까? 그건 반대입니다.>

"아뇨. 이번에는 데려와야죠. 제가 잘 캐보겠습니다."

하벨의 말을 듣던 레디나가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가리켰다.

제가 가요?

하벨이 고개를 가로젓자 레디나는 바로 아쉬움을 드러냈다.

안타깝지만, 이번에 갈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선뜻 망설여집니다. 이번 일이 혹 공의 몸을 또 상하게 하지 않을지, 룬델 공을 생각하니 지금도 오싹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하. 저도 눈치 보고 있습니다. 아마 이해도 해주실 겁니다."

거대 정화 장치를 알아보는 과정에서 웨인 톨이 마법사 협회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벨은 예쁘게 담긴 과자를 두 개를 쓰러트렸다.

탁.

'바안과 페트리오가 웨인 톨을 파보는 와중에 데론이 뜬금없이 튀어나왔지.'

이번에는 세 개.

타악.

그리고 쓰러지지 않은 마지막 과자 하나.

마법사 협회와 웨인 톨의 중간 다리 역할을 하던 자가 데론인지 아니면 또 다른 게 있는지.

지금 그걸 알아야 했다.

하벨이 손을 움직이자 아라가 덥석 쥐었다.

[먹을 걸로 장난치면 안 돼, 대장! 떽!]

'만약 데론이 중간 다리 역할을 담당하는 거라면 무조건 잡아야지.'

하벨의 입꼬리가 씩 올라가자 아라는 앞발에 힘을 주었다.

누구보다 정보를 빨리 쥘 기회인데 뭘 망설이겠는가.

<공의 생각대로 웨인 놈은 날씨를 예측하는 기술을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가주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죠.>

[그러엄. 부당한 방법은 쓰면 안 되지. 이러면 벌을 받는다고 했어!]

아라는 다시 날아와 연락용 아이템에 귀를 가져다 대며 말했다.

<이런 말을 하는 게 우습긴 하나, 비리라는 건 어느 시대에든 존재했습니다. 톨 가문이 대대로 더 정확한 날씨 정보를 귀족들에게 팔며 부를 축적했더군요.>

"그래서 빚을 진 겁니까?"

<맞습니다. 형편없어진 기술에 톨 가문을 지원하던 귀족들마저 발길을 끊었습니다. 그간 최악의 날씨 적중률을 보여줬기에 저 기술을 파는 것조차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기술은 있었습니까?"

<예. 다행히도 있었습니다. 며칠 뒤에 이것마저 마법사 협회에 넘길 생각이었던 모양입니다. 이 기술을 두고 나눈 편지로 확인했죠.>

바안은 잠깐 침음을 흘렸다.

<…으음. 그 편지가 마법사 협회를 압박할 수단이 되지 못한다는 게 안타깝다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네요.>

국가에서 개발한 기술도 아닌, 가문의 기술이기에 처벌은 어려웠다.

그 상황을 알지만, 하벨의 귀에는 다른 의문이 들려왔다.

"기술까지 마법사 협회에 넘기려고 했다뇨?"

<놈이 빚을 진 곳 중 하나가 마법사 협회이기도 했습니다. 그 빚 때문에 기어코 저 기술을 팔아넘기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저하. 방금 저하께서 데론이 그 빚을 메워줬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데론이 갚아준 빚은 마법사 협회와 다른 귀족들에게 진 빚이 맞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마법사 협회에 추가로 돈을 또 빌린 모양입니다.>

"굳이 왜… 또 빌렸을까요?"

<사업 계획서를 발견하긴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조금 헷갈립니다. 데론이 마법사 협회와 진짜 관련이 없는 건지, 아니면 이 또한 기술을 손에 넣기 위해 마법사 협회에서 벌인 일인지 말입니다.>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저하."

데론에게 확인해야 할 건 이전과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 중요도가 조금 높아졌다.

<아닙니다. 계속 뒤지고 있으니 또 새로운 게 나오면 연락주겠습니다.>

"저하."

<네, 하벨 공.>

"마법사에 대항할 방법을 아십니까?"

자신은 그 방법을 알지 못했다.

마법사라는 존재는 자신에게 있어 새로운 생물이나 마찬가지였다.

<대항할 방법은 언제나 있었습니다. 저들의 강점도, 약점도 모두 마성물과 이어져 있습니다. 이제 하나씩 뺏어와야죠.>

"저들이 가만히 뺏기겠습니까?"

<그렇지는 않겠지요. 마법사 협회가 이곳 에르티안에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래서 더 까다로운 놈들이 아니겠습니까? 협력하실 나라는 있습니까?"

하벨은 조금 더 멀리 보았다.

나라의 힘이 마법사 협회보다 크다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었을 때, 그 안이 어떻게 되어 있을지 모르는 상태가 아닌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럴 나라는 없습니다. 에르티안 왕국의 왕권이 무너지면서 이 나라를 먹을 생각뿐이지 누가 우리와 협력을 하겠습니까?>

바안의 목소리에 씁쓸함이 묻어났다.

<하지만 기사들이 있습니다. 사실상 마법사의 앙숙과도 같은 존재는 정령사가 아니라 같은 마나를 사용하는 기사입니다.>

'기사가 그런 존재였다니.'

분명 크라마가 기사는 권력에 복종했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던가.

<걱정하지 마세요. 계속 마법사 협회를 견제하고, 뺏겠습니다.>

바안은 조용히 마법사 협회와 전쟁을 선포했다.

분명 자신에게 도와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음에도 불구하고 바안은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벨 공께 하지 말라는 말은 드리지 못합니다. 공께서 말한 대로 지금은 급하니까요. 하지만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움직이길 바랍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이… 걱정이라는 단어를 조금 더 정확히 아셨으면 합니다.>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으음……. 알겠습니다. 그럼.>

바안은 무언가 말을 꺼내려다 삼키며 연락을 끊었다.

[이상하다, 대장. 대장은 걱정이라는 단어를 잘 알고 있는데.]

연락용 아이템에서 얼굴을 뗀 아라는 그대로 하벨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잘 알고 있지."

바안이 자신에게 저런 말을 꺼내는 건 고마움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 고마움이 과연 얼마나 갈까.

자신은 고마움이 변질되는 과정을 본 적이 있었다.

질투라는 이름에 빠져 자신을 갉아먹으려고 했던 이들이 몇인가.

"레디나."

하벨은 레디나한테 손을 뻗었다.

그녀는 실실 웃으며 연락용 아이템을 내밀었다.

"네, 도련님."

"혹시 저하와 나눈 대화에 웃긴 게 있었어?"

[아니. 이 몸은 없었는데? 머리가 핑그르르 돌 것만 같아.]

아라는 하벨의 머리에 올라가 등을 누웠다.

[하지만 이 몸은 이해할 거야. 다시 생각해봐야지.]

방금 대화에 여러 가지가 나왔지만, 확인할 건 몇 가지 없었다.

데론이 마법사 협회와 관련이 있는가, 없는가.

마법사와 기사가 앙숙이라는 점.

아라는 멍한 표정으로 꼬리를 흔들었다.

"있죠."

레디나는 잠깐 생각하는 척하다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있었다고?"

"네. 바로 도련님이요."

"내가 웃겨?"

"도련님께서는 걱정이 참 많은 사람이라는 게 느껴져서요. 다른 나라와 협력하고 있냐는 건 굳이 묻지 않아도 되는 말이잖아요."

레디나의 예리한 물음에 하벨은 주춤거렸다.

"그렇긴 하지만, 그편이 여러모로 효율적이잖아?"

"확실히 효율적이죠. 보통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지만요. 이 나라의 주인은 결국 바안 저하가 될 테고, 도련님께서 자문관도 아닌 이상 왜 거기까지 생각할까요?"

레디나는 하벨이 자신을 포함해 다른 이들을 얼마나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다.

본인을 위하는 일이라 가끔 말하고는 하지만, 결국 가장 이득을 보는 이들은 하벨이 아닌 자신을 포함한 주변사람들이었다.

"그럴 수도 있지. 내가 오지랖이 넓은가 봐."

하벨의 미간이 찌푸려지자 레디나는 입이 간지러웠다.

하벨이 곤란한 모습이 왜 이렇게 재미있는지.

"레디나, 편지를 보낼 때가 있어."

"편지요?"

레디나는 눈을 깜박거리다 곧 숨을 짧게 들이마셨다.

"아. 조금 전에 제가 데론한테 간다고 했는데 거절하신 그 일 하고 관련이 있는 거 맞아요?"

"맞아. 이전에 데론 놈하고 약속한 게 있거든."

"벌써 만나셨어요?"

"어쩌다가? 오보를 줄여주겠다는 약속을 잘 지키고 있는지 궁금해서 한 번 들어보겠다고 편지에 적으면 될 거야."

데론한테 초대장을 보낼 생각이었다.

정식으로.

과연 티에라 가문에서 한 초대를 거절할 수 있을까.

아니, 거절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오게 되어 있었으니.

"당장 준비할게요. 아, 카샬한테 먼저 이 사실을 알리고 올 테니……."

레디나는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눈을 크게 뜨며 곧 양손을 움켜쥐었다.

"도련님! 제가 얻은 게 있었는데 말씀드리는 걸 잊어버렸어요!"

"아, 크라마하고 마법사를 처단할 때 좋은 소식을 가져다준다고 했지?"

"맞아요. 방금 떠올랐는데 음식에 수면제를 탔냐는 도련님의 말 때문에 너무 기가 차서 잊어버리고 말았어요."

레디나는 소맷자락에 손을 넣더니 둥글게 말린 종이를 꺼냈다.

"마법 암호문이에요."

[마법 암호문?]

아라가 눈을 반짝거렸고, 하벨은 간식이 담긴 그릇에 손을 뻗다가 멈췄다.

그곳에 있던 마법사들을 처단하고 땅을 차지할 수 있게 해준 것만으로도 큰 수확인데 하나가 더 있다니.

"으음. 짜잔, 하는 소리를 내고 싶지만, 크라마 씨가 뭐가 더 필요하다고 그랬어요. 지금으로서는 해석할 수 없대요."

"괜찮아."

근처에 마법 암호문을 맡길 사람이 가까이 있어 다행이었다.

헤레스와 칼리우스까지 있지 않은가.

특히 칼리우스에게 기대가 컸다.

"칼리우스한테, 아니 용용이한테 맡기시려고요? 어차피 카샬을 만나러 갈 거라 같이 불러드릴까요?"

"그래 주면 고맙지."

"저도 고맙습니다, 도련님."

"……."

하벨이 갑자기 얼어붙자 레디나는 실실 웃었다.

"도련님께서는 저희한테 고맙다는 말을 자주 하시는데, 저희가 하면 왜 굳어지시는지 모르겠네요."

"장난이라면 됐어."

"진심인데요? 제가 무슨 장난만 치시는 줄 아세요?"

레디나는 문을 열고 하벨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도련님께서 제 신이시라는 말, 이것도 절대로 농담이 아니에요."

하벨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레디나는 행복해하며 밖으로 나왔다.

'재밌어.'

레디나의 걸음이 가벼웠다.

―카샬. 내가 몰라서 그런데 암살자가 보통 인질을 잡아?

자신이 동료라 믿었던 자에게 뒤통수를 맞고 묶여 있었을 때, 어떤 마음이었는지 아마 하벨은 모를 테지.

호기심이 가득한 눈동자.

가벼운 목소리.

그리고 자신이 암살자라는 사실에도 달라지지 않았던 표정.

검은 달을 바꿔보지도 못하고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한 그 순간, 그 모든 것들과 마주했다.

낯설었고, 어색하지만, 한없이 순수했던 하벨의 미소까지.

삶이 이어진 순간 본 그 미소는 신의 얼굴만큼 자애로웠다.

그게 신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신일까.

레디나는 콧노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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