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109화 (109/415)

109화. 드러나다

* * *

쿵.

크라마는 갑자기 변한 하벨의 분위기에 마른침을 삼켰다.

조금 전까지 초면임에도 반쯤 죽어가는 모습에 절로 걱정이 들었다면 지금은 아니었다.

전혀 다른 사람, 아니, 더 익숙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 꼬리가 누구인지 재차 물어야겠어?"

하벨은 슬슬 가면을 벗었다.

여기까지 와서 뭘 더 숨길까.

헤레스와 같이 마법사 협회를 탈퇴한 크라마가 그곳의 정보를 당연히 가지고 있을 줄 알았지만, 거기까지 접근했을 줄이야.

"마법사 협회 장로 중 하나입니다."

"얼굴이 찍혀 있는 것도 아닐 테고, 어떻게 알았지?"

하벨은 사진을 툭 건드렸다.

이 중에 얼굴이 찍힌 사진은 하나도 없었다.

"저는 놈의 얼굴을 봤습니다."

"얼굴을 봤다?"

"예. 장로의 얼굴은 마법사 협회에 소속된 자들도 잘 모를 겁니다. 원래 지은 죄가 많은 놈일수록 자신을 숨기는 법이지요."

[대, 대장은 아니야!]

아라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하벨이 가면단으로 활동했지만, 그는 죄를 지은 적이 없었다.

"마법사 협회의 장로인데 얼굴까지 숨기고 있다는 게 너무 이상한데?"

하벨이 입꼬리를 올리며 묻자 크라마는 눈동자를 여러 번 굴리다 목소리를 냈다.

"마법사 협회에는 애초부터 '장로'라는 직급은 없습니다."

"없다고?"

"외부에서 드러나는 직급은 오직 협회장뿐입니다. 역겹게도 평등을 주장하고 있죠. 사실 평등은 개소리고 내부에서 억지로 만든 직급으로 노예 부리듯 시켜먹고 있는 주제에."

분노를 드러내던 크라마는 순간 눈을 크게 뜨다 곧 말을 돌렸다.

"어쨌든 그렇기에 더 얼굴을 숨기는 법이겠지요. 장로든 뭐든 죽기 싫은 거 아닙니까?"

"그런데 얼굴을 봤다며?"

"예. 봤습니다. 정말 우연히 보았지만요."

크라마는 헤레스 덕에 장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는 말을 삼키며 사진 한 장을 더 꺼냈다.

"장로입니다. 얼굴이 담긴 사진이죠."

"그렇지. 진짜 중요한 정보는 나중에… 숨겨야지."

하벨은 밀려오는 어지러움에 눈을 잠깐 감았다가 떴다.

말을 나누는 것도 오늘따라 힘들었다.

"괜찮으십니까?"

"위치까지 알고 있어?"

"이 사진을 찍었을 당시의 위치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 좀 아쉽네."

하벨은 장로의 얼굴이 찍힌 사진을 바라보았다.

거리가 먼 채로 찍혔어도 얼굴이 나와 있었다.

크라마가 기다렸다가 패를 내보일 정도로 큰 증거가 맞았다.

"그럼 도련님, 제가 무얼 가졌는지를 기억해주셨습니다."

크라마는 고개를 숙이고 문손잡이를 잡았다.

"……?"

하벨은 그 모습에 의문을 느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도련님께 죄송하지만, 일단 이전 의뢰자를 만나 상의할 게 있습니다. 나눠야 할 말도 있고요."

"내게 힘을 빌려달라고 마법사를 잡은 거 아니야?"

"그것도 맞습니다. 아까 말씀드렸잖습니까? 다급했다고요. 제가 또 언제 도련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크라마는 미안함을 드러내며 말했다.

"다음 이야기는 이전 의뢰자를 만난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정도면 꽤 인상 깊었다고 생각합니다."

장로 협회의 정보를 줬다.

설마 티에라 가문의 막내아들이 먹고 튀겠냐는 듯한 말이 섞여 있었다.

하벨은 그제야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아시다시피 마법사 협회는 폐쇄된 곳입니다. 작든 크든 정보가 모여 그곳을 뚫고 들어갈 수 있는 하나의 흐름을 마련하겠지요. 저를 믿어주시겠습니까? 저는 자신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지?"

"현존하는 마법사 협회를 부서트리고 싶습니다. 그곳은 처음부터 잘못된 곳입니다."

크라마는 이전보다 더 강한 목표를 내비치고 있었다.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예. 다른 마법사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마법사는 제가 보아도 위험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을 등록하고 관리해야만 합니다."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정령사는 그런 게 없잖아."

"으레 정령사와 많이 비교하는데 사실 둘은 엄청 다릅니다. 아쉽게도 직접 대화를 할 순 없지만, 정령님들은 바른길을 아시는 분들이죠. 하지만 마법사들은 누군가 통제하지 않으면 금방 주머니에 솟구칠 송곳 같은 존재입니다."

"기사들은 어떤가?"

"그들은 이미 통제되고 있지 않습니까? 권력의 힘 아래에 말입니다."

"마법사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말이지?"

"맞습니다. 마법사의 사고방식은 다릅니다. 기사들이 마나를 육체에 치중한다면 마법사는 정신 쪽이기에 살짝 어긋난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물론, 저는 아니지만요."

크라마가 깊은 자신감을 내보이며 웃자 하벨은 그제야 눈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크라마의 목줄을 쥔 상태였다.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을 테지.

"잘됐어, 크라마."

하벨은 아공간 주머니를 열었다.

"예……?"

크라마는 갑작스러운 칭찬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조심스레 하벨을 바라보았다.

"나랑 목표가 같네."

"……."

크라마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하벨이 꺼낸 건 가면이었다.

달 무늬가 가득 들어간 가면.

"어……. 어."

크라마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그래, 나야."

가면을 얼굴에 가져대며 하벨이 입을 열었다.

"달님."

크라마는 그 이름을 듣자마자 숨을 잠깐 멈췄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너무 기가 차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표정 관리 잘 하고."

"어… 어."

"표정 관리."

재차 이어진 말에 크라마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 벌어진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나 잠깐 사이 분노와 놀람, 그리고 어처구니없어하는 등 다양한 감정이 얼굴에 드러났다.

"…소, 소, 속은 겁니까?"

라르웬이 땅을 사던 것까지?

"속인 거야. 너까지. 혹시 화가 나?"

"아닙… 니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제 목이 아직도 붙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겠다. 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크라마는 깊게 숨을 내쉰 뒤에야 활짝 웃었다.

살았다.

그 사실이 너무도 감동적이었다.

"네가 소유한 마법사 세력은 어느 정도야?"

"아직 다 모인 적이… 없습니다. 세력이 뭉치면 마법사 협회 눈에 띌 게 분명하니까요."

"이번 일로 눈에 띄었을 텐데, 괜찮아?"

"괜찮습니다. 어차피 마법사 협회를 탈퇴했을 때부터 감시 대상 명단에 올랐습니다."

"땅은 정말 포기했고?"

"물론입니다. 제가 가질 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도련님을 보니, 뒤통수가 얼얼하기도 하고 목이 괜히 아프기도 해서 깔끔하게 포기했습니다."

크라마는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하벨은 손가락을 들어 아래를 가리켰다.

"여기에 이제 별장을 지을 거야. 명분이야 가져다 붙이면 그만이니까 크게 생각하지 마."

"…설마."

크라마는 하벨이 던진 말에 한 가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한 명씩 불러. 인부여도 좋고, 시종이어도 괜찮잖아? 별장에 사람이 많이 필요하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으니까. 대신 위장은 너희 쪽에서 알아서 하고. 들키면 죽는 것도 너희니까."

하벨은 더는 빳빳이 앉을 힘이 없어 마차에 기댔다.

별장을 지키는 사람들 모두가 마법사라면, 서로가 얻을 이득도 컸다.

자신은 든든한 아군을.

크라마는 세력이 있을 보금자리를.

"자, 그럼 이제 그만 나가는 게 어때? 새 한 마리 붙여. 연락은 내가 줄 테니까."

하벨은 꺼냈던 가면을 집어넣었다.

이야기는 대충 마무리가 됐다.

"나갔을 때, 표정은 어떻게 할까요? 화낼까요?"

"네 마음대로 해. 표정이 뭐가 중요하겠어?"

어차피 마법사 협회와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다.

표면적으로 아무 관계도 아닐 뿐이지, 서로 각자 의심하며 경계하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어차피 너와 만나서 마법사 협회의 경계심이 더 올라가고, 어쩌면 내 속내를 떠보려고 접근할지도 모르니 더 기쁜 거지."

"도련님."

크라마는 마차 문을 열기 전에 입을 열었다.

"왜?"

"절 너무 무능하게 보지 마십시오. 힘은 누구한테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네 말이 맞으니까."

하벨이 아주 쉽게 동의하자 크라마는 도리어 어색함을 드러냈다.

"그, 그럼 다행입니다. 어쨌든, 지금까지 장로의 정보를 가졌음에도 접근할 수 없었던 건……."

"귀족들?"

"맞습니다. 놈들은 귀족을 방패막이로 쓰고 있었습니다. 귀족의 저택에 숨어 지내다시피 하는데 이걸 어떻게 엎겠습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니 이제는 할 수 있다고 말하려고?"

하벨의 입꼬리가 힘없이 올라갔다.

피의 연회 이후 귀족들이 대거 물갈이되었다.

즉, 마법사들이 방패막이로 사용하던 이들 역시 쓸모없어졌다는 뜻이었다.

"물론입니다."

"그런데 크라마."

"예?"

손에 힘을 주려던 크라마가 잠깐 멈췄다.

자신보고 나가라고 할 때는 언제고.

크라마는 손잡이를 쥐었던 손을 그대로 둔 채로 다시 하벨을 쳐다보았다.

"대화가 길어지실 것 같습니까? 나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헷갈립니다."

"짧아. 표면적인 질문이라서."

"말씀하십시오."

"마법사 협회는 대체 어디에 있는데?"

크라마는 잠깐 눈을 깜박거리다 곧 오만상을 찌푸렸다.

"섬에 있습니다. 악랄한 새끼들이죠?"

"확실히 그러네."

하벨은 왜 크라마가 자신만만했으며 마법사 협회라는 이름이 나왔을 때 왜 바안이 난감해했는지, 그 이유를 알았다.

섬에 있다는 말은 고립되어 있다는 소리이기도 하지만, 달리 말하자면 감시에서 자유롭다는 뜻이기도 했다.

'고립된 상황에서 벗어나면서 감시에서 여전히 자유로울 가장 좋은 방법이 귀족들 속에 숨는 것일 테지.'

"저를 믿어주신 그 선택을 결코,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있잖아, 크라마."

나갈 준비를 하던 크라마는 또 이어진 하벨의 물음에 그냥 손을 떼어버렸다.

"도련님께서 충분히 만족하실 만큼 계속 질문하셔도 됩니다. 저는 기다릴 자신이 있습니다."

이 땅에 자신들의 세력을 데려올 수 있게 허락해준다는데 뭐가 그렇게 급할까.

오늘 온종일 질문해도 괜찮았다.

"마법사 협회가 섬에 있다며?"

"예.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협회가 무너지면 어디로 가려나? 혹시 짐작한 곳이 있어?"

"그… 커다란 탑이 무너질 리가 있겠습니까?"

"더 마음에 안 드네."

누구든 내려다보려고 탑 형식을 띤 게 아닐까 싶었다.

하벨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입가를 만지작거렸다.

"탑 자체도 견고해 아마 밑동이 잘려도 마탑 자체가 부서질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

하벨의 얼굴에 순진무구한 미소가 드리우자 크라마는 꺼림칙함을 느꼈다.

지금 대화 어디에서 저런 미소를 지을 게 있단 말인가.

하벨은 잠깐 칼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아라와 조용히 꼼지락거리고 있던 칼리우스는 하벨의 시선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간지러운 입을 참아냈다.

'여기에 마법사들이 가득하면 용용이도 한결 편안하게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조금 전에 칼리우스가 크라마의 마법에 관심을 가지질 않았는가.

―응. 물론이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마나의 축복을 받은 자, 그게 우리야.

용이 가진 축복과 잠재능력.

'…만약에.'

하벨은 가정 하나를 해보았다.

칼리우스가 자신을 만나지 못하고 마법사에게 쫓기다 기어코 잡혔다면, 멸망의 원인이 되게 한 가장 큰 공로자가 마법사가 아닌가.

그때 칼리우스가 가진 그 힘을 그냥 얻었을 리도 없을 테고.

'그렇다면 용용이에게 마법을 가르쳐준 건 마법사 협회란 말인데. 게다가 이 땅.'

자신이 귀족들을 죽이는 과정에서 얻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면 분명히 마법사 협회 손에 넘어갔겠지.

흠칫.

'…그래서 랜턴의 빛이 꺼지질 않았던 건가?'

마법사 협회가 이 땅을 차지했고, 칼리우스를 손에 넣은 뒤에 이 땅에 왔다면.

'똑같이 발작과도 같은 증세를 내보였겠지. 그리고…….'

탁.

발을 구르는 소리에 하벨은 생각에서 벗어났다.

크라마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용용이의 힘을 보고 말았다.'

무긍무진한 용의 진정한 힘을.

왜 탐이 나지 않겠는가.

그때, 크라마가 죽었을까.

아니면 살았을까.

하벨은 눈을 깜박거리다 한쪽 눈썹을 올렸다.

그나저나.

"…왜 아직도 여기에 있어?"

"가야 하는 겁니까?"

"가라고 말을 했잖아?"

크라마는 기가 찬 표정을 지으며 손잡을 쥐었다.

문이 열리는 '딸깍' 소리가 나기 전에 하벨이 크라마를 붙잡았다.

"아, 크라마."

"아니, 제발, 한 번에 말씀해주십시오."

"장로가 나타난 곳이 어디 있는지는 말해줘야지."

"아……."

크라마는 민망함을 드러내다 쪽지를 꺼내 넘겼다.

'티트란? 거기가 어디지?'

"도련님께서 절 부르시기 전까지 피해있겠습니다. 놈들이 경계를 바짝 설 테니까요. 그럼, 연락할 수단은 뭘로 하면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해도 돼."

"제가 도련님의 창문에 리듬을 타며 두드리겠습니다."

"그래."

하벨이 말을 마무리하자 그제야 크라마는 문을 열었다.

그가 땅에 발을 디디기 전에 하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라마."

"…지금 놀리시는 겁니까?"

"눈치가 빠른데? 이번에는 그래."

하벨은 키득거리다 곧 힘이 빠져 눈짓으로 밖을 가리켰다.

"크라마."

"하. 이제는 또 무슨 일이십니까?"

크라마는 입술을 깨물었다.

[크라마가 화났어, 대장. 이 몸은 이제 그만 놀리는 게 좋다고 생각해.]

아라가 하벨에게 날아와 옷자락을 흔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럴 참이었다.

하지만 경고는 필요할 테지.

"입 조심해. 안 그러면 네 목이 언제 날아갈지 나도 모르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제 목이 소중하니까요. 아, 간은 배 밖으로 튀어나왔지만요."

크라마가 낄낄 웃었다.

"참, 다음에 하실 말씀이 있다면 한 번에 해주십시오."

"글쎄. 장담할 수 없어서."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겠네요."

크라마는 고개를 숙인 뒤에 태연하게 사람들을 향해 걸어갔다.

겁이 없는 건지.

딸깍.

마차 문이 닫히자 하벨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지친다.'

하벨은 숨을 깊게 내쉬었다.

바안하고 페트리오가 웨인 놈의 꼬리를 제대로 잡았을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자신은 어떻게든 마법사 협회의 꼬리를 잡았으니까.

'장로라.'

놈들이 그랬던 것처럼 속에서 썩어가면 볼만하겠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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