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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107화 (107/415)

107화. 그래서 누구라고?(2)

* * *

* * *

탁탁.

타자기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빨라졌다가 느려지며 반복되는 소리에 하벨은 배시시 웃었다.

아라가 그 작은 손으로 하나하나 누르는 걸 생각하니 밀려오는 잠을 억지로 버틸 수 있었다.

슬쩍 눈을 떠 바라보았다.

〔한 번 아무거나 써보세요.〕

〔나아날너옵쟈디나어나나아ㅣㄷ도도ㄴ나버ㄹ 어고나시ㅍ안다마마 ㅎㅎ.〕

.

.

.

〔아라님은 뭐가 제일 좋습니까?〕

〔이 몸이 젤 조아하는 거ㄴ 대장!!!!!!!!!〕

〔정말 그렇게 도련님이 좋아요?〕

〔응ㅇ! 대장이 맨날 행복해하고 말해줘. 그래서 대자잉 행복했으면 좋겠어!!~!!〕

'…하.'

하벨은 종이에 적힌 내용을 보자마자 아픔이 싹 사라진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 자신을 이렇게도 좋아해주는 그 기분은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

탁탁.

타자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카샤은 대장이 조아/?〕

〔제 목숨을 구해주신 분입니다. 어떻게 싫어하겠습니까? 물론, 가끔은 때려주고 싶습니다. 아주 많이요.〕

〔대장 때리면 안대. 떼ㄱ!!!!!!!!!!!!!!!!!!!!〕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얄미울 때가 있잖습니까. 저도 사람인지라 어쩔 수 없네요. 아, 아라 님께서는 도련님 말고 뭐가 제일 좋습니까?〕

〔초코릿. 설탕〕

〔아. 그 두 개를 정말 좋아하.〕

"뭐하십니까, 도련님?"

카샬은 타자기를 가리며 물었다.

[자고 있던 거 아니었어? 떽! 대장은 지금 자야 한다구! 대장은 아파.]

아라가 하벨에게 다가와 앞발로 이마를 꽁 때린 후 바로 '호호' 바람을 불며 쓰다듬었다.

"혹시 타자 소리가 시끄러우셨습니까? 소리를 아예 없애겠습니다."

"아니야. 듣기 좋아. 그냥 뭘 썼나 궁금했지. 나 빼고 재미있게 놀잖아?"

하벨은 눈을 조금 더 크게 떴다.

[대장, 대장! 되게 재미있어! 말하는 거랑 다르구. 음, 음, 이 몸이 타자기를 쳤다? 이 몸이 열심히 썼어!]

"잘했어, 아라야."

하벨은 아라를 머리를 쓰다듬었다.

삑삑삑.

아라의 웃음소리가 체온계에 묻혀버렸다.

카샬은 태연하게 체온을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대략 20분쯤 흘렀는데, 그사이 열이 조금 떨어지셨습니다."

"그래? 어쩐지 조금 살만하더라. 나도 밖에……."

"보셨습니까, 아라 님?"

타탁.

[으으으응.]

〔응!!!!!!〕

"저런 경우가 때리고 싶다는 예시 중 하나입니다."

[알았어!]

〔아알써!!!!!!!!〕

"그런데 아라야, 느낌표는 왜 이렇게 많이 써?"

하벨이 묻자 아라는 타자기를 앞발로 문지르며 배시시 웃었다.

[뭔가 기분이 좋아. 이 몸의 기쁜 소리를 막막 표현해주는 것 같아.]

찰랑.

하벨은 말을 꺼내려다 말고 갑자기 타오르는 랜턴에 한쪽 눈썹을 올렸다.

'이만한 크기의 불꽃이라면…….'

칼리우스가 아닌가.

"카샬."

카샬은 타자를 치려다 하벨의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자 고개까지 돌렸다.

"왜 그러십니까? 많이 아프십니까?"

"칼리우스는 어디에 있어?"

"지금 다른 마차에 있습니다. 저랑 달리 '시종'이기에 마차에 같이 탈 순 없습니다."

손님도 아닌 이상, 이 이상 편애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별장에서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과 함께 마차에……."

"지금 불러줘."

"…알겠습니다."

카샬은 하벨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짐작할 수 없는 부분이었기에 일단 움직였다.

[대장. 용용이가 걱정이 돼서 그래?]

아라는 마차 문이 열리자 밖을 힐끔 보며 물었다.

"걱정이라면 걱정이겠지."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이 땅에 들어서면 랜턴에 검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제는 랜턴의 검은 불꽃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멸망의 원인이 되는 무언가를 보면 멋대로 자신에게 알려주는 짜증 나는 랜턴이 아닌가.

하지만 랜턴의 뜻과 달리 개같은 마법사 협회 손에 이 땅을 넘길 수 없으니 놈들이 넘보지도 못하게 하려고 이곳에 왔다.

'땅은 이제 괜찮겠지만, 용용이한테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세상을 멸망시킬 용.

그 존재만으로도 움직일 이유가 생겼다.

하벨이 슬쩍 움직이자 아라가 바로 말을 꺼내며 양팔을 길게 벌렸다.

[안 돼, 대장!]

"아라야."

[응.]

"혹시 도중에 쉬었을 때, 용용이랑 만났어?"

거의 잠에 취해서 기억은 잘 나지 않았지만, 분명히 중간에 잠깐 마차가 멈췄었다.

[응. 그때 용용이랑 잠깐 놀았어. 술래잡기했어! 용용이는 이 몸을 잡지 못했어!]

아라는 앞발로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용용이의 상태가 괜찮았다는 건데?'

하벨은 슬쩍 마차 문을 열었다.

배시시 웃던 아라는 다급히 하벨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대, 대장! 큰일 난다구! 카샬이 오면…….]

"이거 놔!"

열린 문틈 사이로 차갑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라가 말을 멈췄다.

[용용이 목소리인데? 용용이가 맞는데… 어음, 왜 이렇게 무서워?]

아라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하벨은 마차 문을 힘겹게 열었다.

"…하아."

조금만 움직였을 뿐인데 금세 숨이 가빠왔다.

링거를 단, 공중 부양이 가능한 마법 아이템도 하벨의 움직임을 따라 같이 움직였다.

[대장! 지금 얼굴이 또 새하얗게 변했어! 어서 기대라구!]

아라가 반대편으로 날아와 하벨을 힘차게 밀자 그가 멈췄다.

도리어 아라가 놀라던 차, 누군가 땅을 뒹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라는 귀를 쫑긋 세우며 고개를 돌렸다.

카샬이 후드로 누군가를 덮어 강하게 억누르고 있었다.

그가 짓누르는 대상은 체구로 보나, 작은 주먹을 보나 칼리우스였다.

'용용이인데.'

아라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카샬과 칼리우스 뒤로 숨을 고르며 주저앉은 시종들이 보이질 않는가.

"…하."

낮은 하벨의 숨소리.

아라는 갑자기 털이 바짝 서는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다시 돌렸을 때, 하벨의 눈동자는 더할 나위 없이 차가워 아라는 그대로 굳었다.

잠깐 에메랄드색이 아니라 푸르게 보인 것 같기도 했다.

쓱쓱.

하벨의 손가락이 옆구리를 간질이자 아라는 그제야 웃음을 토해냈다.

헤헤.

"지금 뭐 하는 거야?"

하지만 하벨이 내뱉은 음성에 아라는 또 그대로 모든 행동을 멈췄다.

딸꾹.

하벨인데 하벨이 아닌 것 같았다.

"…도련님."

카샬이 놀라며 위를 바라보았다.

활짝 열린 마차 문 속에 하벨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닥에 깔려있던 칼리우스마저 얌전해졌지만, 카샬은 하벨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내려오시면 안 됩니다."

신형 마차가 이곳 어디든 간에 제일 안전했다.

그대로 카샬은 일어났다.

"문 닫으십시오!"

저게 무슨 개짓거리인지.

지금 주변에 깔린 마법사들이 몇 놈인가.

다 알면서 문을 열다니.

'이건 완전 적들한테 자신을 죽이라고 알리는 꼴이잖아!'

지이이잉.

옆으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실처럼 이어져 마차를 향해 쏘아진 무언가 보였다.

카샬은 검으로 필사적으로 궤도를 틀었다.

콰아아앙!

마차 주변에 흙먼지가 일어났다.

"하벨…!"

그제야 칼리우스가 다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이 커졌다.

자신 때문이었다.

이 땅에 온 뒤로 뭔가 이상했다.

들끓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건 내 감정이 아니었어.'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화가 나고, 무언가를 확인해야겠다는 의지밖에 남지 않았다.

자신을 말리던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지만, 기어코 마차에서 나오고 말았다.

어디에서 이 감정이 더 깊게 느껴지는지 확인해야겠다는 생각뿐이라 달려가다 말고 카샬한테 붙잡힌 기억이 났다.

'내가.'

칼리우스는 그제야 자신이 카샬한테 무얼 하려고 했는지를 눈치챘다.

'…카샬을 죽이려고 했어.'

아마 하벨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면.

칼리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를 향해 뛰었다.

갑자기 바람이 일어나 흙먼지를 가라앉혔다.

"……?"

칼리우스는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고마워."

하벨의 말과 함께 누군가 보였다.

마차를 둘러싸 그를 보호한 자는 정령들이었다.

[누가, 우리 하벨을 건드려?]

정령들은 분노했다.

하벨은 자신들이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가 쫓을 테니까, 아라 너는 하벨을 다독여줘.]

정령들은 곧바로 두 조로 쪼개졌다.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칼리우스는 알지 못했다.

"…하."

카샬이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괜찮아, 카샬."

하벨은 여유로움을 뽐내며 오히려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선이 칼리우스를 향한 순간, 매서워졌다.

꿇어.

마치 그렇게 들려오는 듯해 칼리우스는 치미는 울음을 참으며 무릎을 꿇었다.

"용용아."

하벨은 부드럽게 칼리우스를 불렀다.

"……응."

"올라와. 오늘은 내가 내려가기가 힘들어서."

하벨은 이어 카샬을 보았다.

"모가지를 꺾고 싶으면 가도 되고."

"아닙니다. 오늘은 자제하죠. 우선 주변 정리부터 하겠습니다."

다급히 후드로 칼리우스의 얼굴을 가리긴 했으나, 본 자들이 많았다.

처리할 게 갑자기 생겨버렸다.

"그래."

콜록.

하벨은 기침과 함께 터져 나오는 핏방울을 닦으며 대답했다.

* * *

"…미안해, 하벨."

칼리우스는 마차 안임에도 여전히 후드를 꾹 눌러쓴 채로 말했다.

"미안한 걸 알고 있다니. 이걸 다행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

하벨은 말이 곱게 나올 수가 없었다.

시한폭탄이라 생각했는데, 정말일 줄이야.

재수 없는 랜턴이지만, 성능 하나는 끝내줬다.

"용용아."

"……응."

[어, 어, 어음.]

칼리우스는 시무룩하고, 하벨은 살짝 날이 선 상태라 아라는 중간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많아. 이번에는 더 늘어났고."

솔직히 하벨 자신도 깜짝 놀랐다.

주변에 감시자들이 늘어난 건 알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문을 열자마자 습격이라니.

순간, 욕지거리가 튀어나올 뻔했지만, 꾹 참았다.

"기억해, 칼리우스."

이름이 불리자 칼리우스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겁에 질린 걸 알지만, 칼리우스가 가진 힘을 직접 보았기에 하벨은 그 모습에도 그냥 넘어가질 않았다.

"네 행동 하나가 이 목숨을 살리고 죽일 수 있다는 걸."

모르면 알려줘야지.

적어도 칼리우스의 마나가 회복되기 전까지 이런 일은 또 일어나면 안 될 테니.

"기억… 할게. 꼭, 기억할게."

칼리우스는 고개를 들고, 여러 번 곱씹듯 말을 내뱉었다.

"그래. 기억하면 됐어."

그제야 하벨은 미소를 보였고, 사태가 끝났음을 알자 아라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용용아."

"응."

"실수는 할 수 있어. 다음번에 그러지 않으면 되는 거야."

"…응, 하벨."

칼리우스는 후드를 걷고 하벨과 마주했다.

평소처럼 따뜻한 하벨의 시선에 칼리우스는 갑자기 눈물이 샘솟았다.

"미안해, 하벨. 진짜 미안해. 내가, 내가 일부러 이러려고 한 게 아니었어."

칼리우스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후드를 꽉 쥐었다.

뿍.

후드가 단숨에 찢어졌지만, 하벨은 한쪽 눈썹만 올린 채로 그냥 얌전히 말만 들었다.

"여기에 온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어. 하지만 이건 내 감정이 아니야."

'…땅에 문제가 있다고?'

하벨은 랜턴을 힐끔 바라보았다.

칼리우스를 상징하듯 미친 듯이 타오르던 불꽃은 이 땅에 나타났던 검은 불꽃의 크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직 무언가가 해결된 게 아니란 말이겠지.

'용용이하고 이 땅이 이어져 있다는 건가?'

하벨은 머리를 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해줘."

"나도 모르겠어. 이 감정이 나를 조종하는 것 같았어. 그래서 내 발이 멋대로 움직이고, 하벨 네가 아니었으면 카샬을 죽였을지도 몰라."

[…아, 아니야. 이 몸이 알아! 용용이는 그러지 못했을 거야!]

아라가 깜짝 놀랐지만, 곧 칼리우스를 안아주었다.

"그러니까, 이 땅이 널 조종하는 것 같다는 거지?"

하벨이 묻자 칼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응! 그렇게 느껴졌어!"

"지금은 괜찮고?"

"……."

칼리우스는 하벨의 물음에 눈물을 지워나갔다.

"…괜찮아. 하벨이 날 부르니까, 그 감각이 싹 지워졌고, 지금도 괜찮아."

'조사해볼 가치는 있다.'

이미 칼리우스가 멸망의 원인 중 하나라는 걸 명확히 안 이상, 적어도 옆에 낀 저 시한폭탄이 터지지 않도록 조치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탁!

갑자기 마차 문이 열려 하벨은 깜짝 놀랐다.

"하벨!"

라르웬이 다급히 하벨을 부르며 그를 바라보았다.

"너……."

울고 있는 칼리우스와 하벨.

그럴 리는 없지만, 자신이 봐도 하벨이 칼리우스를 괴롭히는 것처럼 보였다.

"괜찮아? 방금 큰 소리가 나서 바로 달려왔어."

"땅은 사셨습니까, 형님?"

"지금 땅이 먼저야?"

"물론입니다."

[마법사가 하벨을 공격했어. 지금 정령들이 뒤쫓고 있나 봐.]

루룸이 라르웬에게 방금 벌어진 일을 보고하자 그는 단번에 이를 악물었다.

"이 개새끼들이……!"

라르웬이 뒤를 돌자 레디나가 보여 순간 흠칫거렸다.

그녀의 조용한 분노에 하벨은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안 돼.

레디나는 그 고갯짓에 입술을 꽉 깨물며 분노를 잠재워야 했다.

하지만 피가 들끓는 기분이었다.

누가 감히, 하벨을.

"…제가!"

겨우 달려온 크라마가 숨소리가 가득 섞은 채 소리쳤다.

"제가… 압니다."

"안다고?"

라르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예.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가 숨을 돌리려 고개를 숙인 사이, 하벨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그렇지.'

주변에 마법사 협회에서 보낸 마법사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딴 건 신경 쓰지 않는 대범함.

마법사 협회에 대항할 사업 동료로서 1차선은 합격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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