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그래서 누구라고?
* * *
* * *
"…하."
하벨의 숨소리가 달라지자 루룸하고 창문 밖을 쳐다보던 아라의 귀가 쫑긋 섰다.
[대장?]
라르웬은 마차 문을 열려다 말고 하벨을 바라보았다.
숨소리가 갑자기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혹시 숨이 안 쉬어져?"
걱정이 담긴 목소리에 반쯤 정신을 놓던 하벨은 화들짝 놀라며 라르웬을 보았다.
하벨은 눈을 동그랗게 떠서는 식은땀마저 흘리고 있었다.
'…정신 차려. 이러면 안 돼.'
아픈 티를 내면 곤란했다.
왕은 절대로 아파서도 안 될 존재가 아닌가.
"나는……."
[대장? 나쁜 꿈 꿨어?]
"그러게. 왜 그렇게 놀라? 진짜 기절했던 거 아니지?"
라르웬이 하벨을 빤히 보며 손바닥을 흔들었다.
'…아.'
하벨의 눈동자가 차차 감겼다.
여기는 바닷속이 아니고, 자신은 이제 용왕이 아니었다.
벌써 몇 번이나 이 몸으로 아침을 맞이했던가.
처음으로 티에라 가문의 영토를 감싼 면사포를 닮은 결계를 확인했던 그 날, 다른 세상으로 왔다는 걸 깨달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자신은 바다 저 밑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을 줄이야.
'나는…….'
여기서는 약해도 괜찮았다.
'죽었다.'
이곳에서는 적어도 피와 살점이 썩어간다고 생각할 정도로 곯고 곯아버린 마음을 떠안고 있지 않아도 괜찮았다.
자신의 몸을 꿰뚫었던 날붙이들의 감촉을 떠올리며 하벨은 입을 열었다.
"…조금요."
하벨은 반쯤 눈을 감은 채로 다시 마차 벽에 기댔다.
이렇게 약한 소리가 나오는 걸 보니 틈의 세계 때문에 일어난 부작용일지 몰랐다.
틈의 세계를 벌써 몇 번이나 만났던가.
'정신을… 건드린다고 했나?'
룬델이 분명 그렇게 말했던 것 같았다.
그러니 오늘만은 예외였다.
흔들흔들.
검은 불꽃이 붙은 채로 흔들리는 랜턴을 바라보다 시선을 밖으로 돌렸다.
재수 없는 랜턴.
망할 하벨 티에라.
"하……."
하벨은 다시금 숨을 깊게 내쉬었다.
"지금 계속 숨쉬기가 힘드시다면 이걸 착용하시겠습니까?"
카샬이 가면을 내밀었다.
비가 내릴 때 쓰는 가면이라 안에 여과기와 산소호흡기 같은 기능이 있었다.
"아니야. 그 정도는 아니니까, 괜찮아."
하벨은 시선을 돌려 카샬을 보았다.
지금도 정화제가 가득 섞인 링거를 맞고 있음에도 어지러움과 메슥거림, 그리고 열이 반복해서 찾아왔다.
마차를 타자마자 바로 상태가 나빠진 걸 보면 몸이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약해진 게 틀림없었다.
하벨은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조심하자. 조심해야지.'
반쯤 뚫린 손바닥을 통해 직접 오염된 물이 들어갔다.
오염된 물에 내성이 없는 하벨 티에라한테는 독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 정도나 됐으면 꽤 버티고 있는 상태라고 봐야 하는가.'
정화제를 만드는 동안 자신의 몸에 들어왔던 정령수와 어젯밤 찾아온 정령들 덕에 이렇게 버티고 있을지도 몰랐다.
정령들이 반영구 정화제가 가진 힘을 어떻게 가져왔는지 몰라도 그 덕에 어젯밤보다 훨씬 상태가 좋아졌다.
어쩌면 자신이 가진 용왕의 힘이 성장한 것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이 몸이 정령수를 넣어줄까? 그러면 덜 아프지 않을까?]
아라가 자신을 토닥거리자 정령들의 포근했던 그 손길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방긋 올라갔다.
"…약은 먹었는데."
라르웬은 입술을 깨물며 카샬을 바라보았다.
"예. 드실 건 다 드셨습니다."
"역시 포탈을 타야 했나."
"그건 안 됩니다. 분명히 버티지 못하셨을 겁니다."
카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하벨의 상태가 나빠져 또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는데 마차를 탈 정도로 회복되어서 정말 다행이지 않은가.
"그래. 버티지 못했겠지. 나는 혹시나 막내가 억지로 마차 밖으로 나간다고 말할 줄 알고 계속 걱정했는데. 역시 기우였나 보네."
말과 달리 라르웬은 착잡함을 드러냈다.
말라비틀어져 간 모습이 안타까운데, 저 상태로는 어디든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니 또 안심됐다.
[내가 왔다 갔다 하면 틈틈이 알려줄 테니까, 라르웬 넌 어서 내려. 벌써 사람들이 몰려오잖아? 이 이상 소란스럽길 원해?]
루룸은 마차 문을 두드렸다.
이번에는 티에라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을 달고 움직였기에 이미 수도에서부터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이곳이 아무리 큰 마을이 아니더라도 티에라 가문이라는 사실만으로 벌써 사람들이 몰려왔다.
지금은 정령 기사들이 집 근처를 둘러막고 있지만, 시간을 지체할수록 더 많은 사람이 몰려 막기 힘들지도 몰랐다.
혹시나 습격이 있을 수도 있고.
[아라야.]
[응?]
[하벨 잘 지켜.]
루룸은 아라를 쓰다듬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응응! 이 몸이 잘할 수 있어!]
아라는 눈에 힘을 가득 주며 힘차게 대답했다.
"막내야. 레디나한테는 내가 잘 말할게. 적어도 좀도둑보다는 막혀있진 않더라고."
"형님. 레디나한테 연기를 시키지 마세요."
하벨은 눈동자를 굴려 라르웬을 보았다.
아라를 제외한 누구도 짊어지지 않는다고 해놓고 할 수 없는 걸 요구하는 건 웃기지도 않는 짓거리였다.
자신이 그런 걸 용납할 마음도 없었고.
"지금 레디나의 연기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순간인데?"
라르웬은 살짝 기가 찬 목소리를 냈다.
레디나는 암살자가 아닌가.
잠입도 많이 했을 테니 생각보다 잘해 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벨은 기댔던 머리마저 뗐다.
"이번 일은 임시 아군조차 속일 만큼 완벽해야 합니다."
자신들은 수도에서 내려와 이곳에 멈췄다.
누가 보아도 처음부터 땅을 사러 온 사람처럼 보일 테지.
"그래야 적의 의심과 생각을 지워버릴 수 있을 테니까요."
적이 자신들의 행보를 보며 생각할 수 있는 건 두 가지였다.
하나, 이미 땅의 용도를 알고 있었다.
둘, 땅의 소유자가 애초부터 티에라 가문이었다.
이 중 두 번째를 지워야 했다.
'충분히 지울 수 있다. 티에라 가문이 이런 멍청한 짓을 하겠냐는 생각이 제일 먼저 발목을 잡을 테니까.'
티에라 가문이 처음부터 땅의 소유자가 맞다면 이번에 벌이는 행동은 급에 맞지 않을 정도로 유치한 소꿉놀이가 아닌가.
'그래서 지금 상황이 더 마음에 든다.'
하벨은 웃음기를 띄었다.
"티에라 가문의 무력을 보였으니 이제 정보력을 부풀려 적을 압박할 차례입니다."
그 두 번째를 지우면 자연스레 적이 티에라 가문의 크기를 상상하지 않겠는가.
압박감은 곧 적들의 실책을 유도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자 그들의 움직임마저 예측할 수 있는 검이 될 테니.
"그럼 레디나한테 뭐라고 전달해줄까?"
라르웬은 물었다.
"적을 상대하듯."
그게 레디나가 가장 자연스럽게 라르웬을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알겠어."
라르웬은 망설이지 않고 마차에서 내렸다.
"믿… 습니다, 형님."
하벨은 새삼스러운 말을 꺼냈다.
이런 말까지 꺼내도 될지 몰랐지만, 그냥 자연스럽게 나왔다.
라르웬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놀람이 섞인 그의 눈이 감기더니 입꼬리를 씩 올렸다.
"오냐, 막내야."
라르웬은 루룸과 그때, 그 집으로 걸어갔다.
"…왜 그래?"
마차 문이 닫히고 카샬이 새삼 놀랍다는 표정을 하자 하벨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뇨. 별거 아닙니다. 잠깐 눈 감고 계십시오."
하벨과 라르웬의 사이가 좋아진 것 같다는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어떻게 꺼낼까.
카샬은 하벨의 정화 장치를 확인한 뒤 마법 타자기를 꺼냈다.
상황은 이래도 일은 해야지.
룬델에게 올릴 보고서를 작성해야 했다.
[카샬! 이 몸이 눌러봐도 돼? 응?]
아라가 카샬에게 매달렸다.
"아라 님……?"
카샬은 놀란 눈으로 하벨을 쳐다보았다.
어서 아라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려주길 바랐다.
평소라면 입을 꾹 다물고 있었겠지만, 하벨은 카샬을 놀릴 힘도 없었다.
"아라가 눌러봐도 되냐고 하는데?"
"아라 님."
카샬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이때다 싶어 말을 꺼냈다.
"혹시 글자를 아십니까?"
[응응! 대장이랑 같이 배웠어!]
"알아."
"그렇다면 저랑 잠깐 대화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오오오! 이 몸은 너무 좋아!]
아라의 꼬리가 흔들렸다.
카샬은 얼굴을 스치는 보드라운 감각에 아라의 꼬리가 흔들리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럼 먼저 눌러주시죠. 아, 종이는 상관하지 마십시오. 얼마든지 있습니다."
카샬은 평소에 볼 수 없었던 상냥한 웃음과 목소리를 내보였다.
'…욱.'
괴로운 건 온전히 하벨의 몫이었다.
탁.
탁.
[헤헤.]
하지만 아라가 행복하니 됐다 싶었다.
* * *
"저는 무례한 거 딱 질색인데요?"
레디나가 딱 잘라 말하자 옆에 앉아 있던 크라마의 눈이 커졌다.
갑자기 티에라 가문이 찾아왔다.
대체 어떻게 왔는지 몰라도 티에라라는 이름만으로 모든 게 해결이 되는 기분이었다.
오늘따라 구름이도 유독 차분한 것 같았고.
하지만 이 땅은 이미 달님의 것이 아닌가.
혹시나.
정말 혹시나 달님이 티에라 가문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아귀가 딱딱 맞지 않는가.
'…이 멍청아.'
하지만 크라마는 방금 레디나가 꺼낸 말에 생각을 싹 지웠다.
만약 자신의 생각대로라면 구름이 역시 티에라 가문의 사람이 아닌가.
지금 온 사람이 단순히 티에라 가문의 사람도 아니라, 무려 둘째인 라르웬 티에라였다.
"지금 뭐라고 했나?"
라르웬은 싱긋 웃으며 되물었다.
"사전에 연락도 없이 오셨잖아요. 그래서 딱 질색이라고요."
―적을 상대하듯
라르웬을 보자마자 요즈음 몸에 밴 시녀로서 행동이 나올 뻔했지만, 하벨의 말을 떠올리며 정신을 다잡았다.
솔직히 자신의 신념으로는 라르웬을 상대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싸움이라면 말이 다르지 않은가.
라르웬은 검을 섞고 싶은 상대였다.
"무례는 인정하지."
라르웬은 자신에게 날아오는 루룸을 보며 말을 살짝 늘였다.
[사람들 틈에 마법사가 섞여 있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여기 집 주변에 마법이 펼쳐져 있었어. 멍청하긴. 저렇게 마구잡이로 마법을 펼쳐놓고 어떻게 안 들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까.]
루룸의 보고에 라르웬은 만족스러웠다.
딱 하벨이 원하는, 적들이 자신들의 말을 염탐하는 상황이 펼쳐지질 않았는가.
'거창하게 움직이길 잘했네.'
"그럼 돌아가시죠."
레디나는 문을 가리켰다.
"그대가 이곳 주인이 맞는가?"
모든 게 다 갖춰진 상황에서 라르웬은 거침없이 움직였다.
움직일 생각도 없이, 오히려 손깍지를 끼자 레디나는 그의 신호를 받아들였다.
예상대로다.
―마법사들이 우리를 감시하고 있을 거다.
라르웬은 하벨의 말을 전해주며 덤으로 주변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는가.
"아뇨. 그럴 리가 있나요."
레디나는 차마 그렇다고 말할 수 없었다.
"제 주인은 따로 있어요. 그러니 이만 돌아가시죠. 좋은 말이 나올 때 말입니다."
"그럴 리가. 그대의 주인이 분명 그대한테 모든 권한을 다 넘겼을 텐데."
라르웬의 입꼬리가 길어졌다.
사실을 반쯤 기반으로 한 이야기에 레디나는 어렵다고 느꼈다.
싸움이라는 밑바탕이 깔려있었지만, 말로서 싸우는 건 난감했다.
"저는……."
"시치미 떼기에 서로의 시간이 아까우니 이만 인정하고 들어가는 게 어떻겠나?"
라르웬은 레디나의 말을 잘랐다.
"좋아요. 그건 인정하죠. 하지만 당신한테 이 땅을 팔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일단 말부터 들어주게."
라르웬은 단호한 레디나의 말을 살살 돌렸다.
"이곳에 그게 가득한 걸 알고 있네."
어차피 감시하는 자나, 자신들이나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마치 비밀을 털어놓듯 라르웬은 목소리를 좀 더 낮췄다.
"마성물."
"……."
크라마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이게 티에라 가문인가.
자신들은 정말 어렵게 찾아낸 땅이었는데.
"돈도 많은 우리 정령사 가문에서 갑자기 왜 이러실까요? 그새 돈독이 올랐을 리는 없고요."
레디나는 다리를 살짝 꼬아서는 여유롭게 라르웬을 살살 긁었다.
"아니면……."
말꼬리를 늘이다 곧 키득거렸다.
"정화제에 무슨 문제가 생겼나요?"
"그럴 리가 있겠는가?"
"그럼 이유를 들어야 저도 대화할 마음이 생기지 않겠어요? 과연 제가 급할까요, 당신이 급할까요?"
"좋아."
라르웬은 깍지를 낀 손을 풀었다.
"하벨."
숨을 내쉰 뒤, 라르웬은 모두가 주목할 수 있게 하벨의 이름부터 던졌다.
그리고 자연스레 어깨에 힘을 살짝 빼냈다.
"내 동생을 위해서야."
너무 진지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 진정성 있어 보였다.
[푸, 푸하핫!]
하지만 루룸의 웃음이 터져버렸다.
[계속해 봐. 아니, 계속해 줘, 라르웬.]
라르웬에게 착 붙어 있던 루룸은 발을 동동 굴렸다.
"하벨 티에라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레디나는 반가운 그 이름에 자신도 모르게 톤이 높아졌다.
"그래."
"그게 땅이랑 무슨 관계죠?"
"이건 이번 일과 별개로 외부에 알려지면 안 될 소식이라네. 들을 준비는 됐는가?"
순간, 살기를 강하게 눌러 담은 라르웬의 목소리에 크라마와 레디나가 움찔거렸다.
"외부에 알려지면 당장 그대들의 목을 치도록 하지."
"좋아요. 저는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좋아하거든요."
레디나는 짜릿한 그 감각에 오히려 호기심이 돌았다.
연기라는 걸 알아도 몹시 궁금했다.
"하벨에게 마성물이 필요하네."
라르웬은 큰 거짓말을 퍼트렸다.
마성물은 마나를 성장시키는데 필요한 존재였다.
거짓말이자 동시에 거짓말을 듣고 있을 자에게 큰 혼란을 주는 말.
하벨 티에라가 마법의 재능을 피웠다.
[와아, 라르웬. 너 진짜 못됐다.]
루룸은 싱글벙글했다.
[하벨이 마법에 재능을 피웠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동시에 마법에 관심이 많다는 뜻이 될 수도 있지.]
대체 어느 쪽일지 얼마나 혼란스러울까.
"어차피 그대들은 이 땅을 지키지 못해."
라르웬은 분위기를 압도한 뒤에 천천히 목적을 향해 달렸다.
"이유는 그대들이 잘 알 테지."
라르웬의 시선이 크라마를 향해 옮겨졌다.
대체 어디까지 꿰뚫고 있는 건지.
크라마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자, 그대들이 원하는 조건에 무조건 맞춰줄 테니, 땅을 넘기겠는가?"
라르웬은 손을 살며시 내밀었다.
"물론, 거절해도 괜찮네. 하지만 그건 알아두게."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을 놈들에게 하는 말.
"티에라 가문은 원하는 건 다 손에 넣을 셈이라서. 그게 무엇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