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쫓아라, 잡았다
* * *
분명히 조금 전까지 다 죽어가던 하벨이 지금은 전혀 다른 얼굴이 되어 있었다.
페트리오는 이상하게 목이 바짝 말라 하벨을 조심스레 바라보았다.
가끔.
아주 가끔 하벨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마치 거대한 존재와 마주하는 것 같은 느낌.
그 때문인지 자신이 한없이 작아졌다.
"바안 저하는 걱정하지 마."
페트리오의 표정이 굳어 있자 하벨은 그를 안심시키고자 말을 꺼냈다.
"걱정하지 말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책임지고 바안 저하를 설득할 테니까."
라르웬의 내기에서 자신이 이겼다.
무얼 걸었던 건 아니지만, 이번에는 억지를 부릴 만했다.
늙은 너구리가 궁지에 몰릴 때 찾아가는 곳이야말로 웨인과 손을 잡은 자의 정체를 밝힐 수 있을 테지.
그게 마법사 협회의 꼬리라면 더욱 좋고.
하벨은 기대감에 부푼 채 목소리를 냈다.
"잠깐, 형님 좀 불러줄래?"
"알겠습니다."
"아. 혹시 거부하면 이렇게 말해줘."
하벨은 벌써 즐거워 말을 꺼내기 전에 실실 웃었다.
* * *
"…형님 때문에 늙은 너구리가 도망칩니다. 아, 혼자 잡으실 자신이 있나 봅니다."
페트리오는 어색하기 그지없는 말투로 하벨의 말을 그대로 읊었다.
라르웬이 표정이 굳어지자 살짝 주춤거렸다.
엄청난 살기였다.
"라고 말씀하라고 했습니다."
"너는."
"예……?"
왜 왔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얼빠진 페트리오의 모습을 보자 라르웬은 꾹 참았다.
[푸하하핫!]
루룸이 라르웬의 머리 위에서 데구루루 구르며 웃기 바빴다.
[하벨한테 한 방 먹었네, 라르웬? 이거 어쩌나. 뒤통수가 얼얼하겠어?]
루룸이 라르웬의 볼을 찌르자 라르웬은 루룸의 볼을 살짝 쥐었다.
[왜 나한테 화풀이할까?]
루룸의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너는 뭐가 급해서 이렇게 왔는데?"
날이 선 라르웬의 질문에 페트리오는 카샬이 저절로 떠올랐다.
아까 카샬도 유난히 예민하더니.
"혹시 카샬이랑 무슨 내기라도 하셨습니까?"
"내기는 무슨. 가면서 하벨하고 무슨 말을 나눴는지 정도는 말해줄 수 있지?"
"예. 이번에는 도련님께서 미리 허락하셨습니다."
"혹시 너도 동생이 있어?"
"있습니다."
"몇 명?"
"세 명입니다."
"너도 참… 고생이다."
라르웬은 페트리오를 딱하게 바라보았다.
하벨 하나도 벅찬데, 하벨이 셋이나 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머리가 어질거리는 기분이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착한데. 참 착한데. 능구렁이에, 겁도 없고, 무모하고, 몸도 아낄지도 모르고…….'
라르웬은 생각을 멈췄다.
착함 뒤에 자꾸 뭐가 더 붙어서 이러다간 끝이 없을지도 몰랐다.
* * *
라르웬은 자신을 보며 방긋 웃는 하벨을 보자 목까지 치밀어 올랐던 화가 더 부글부글 끓었다.
이렇게 되기 전에 냉큼 돌아와야 하는 게 아닌가.
'하벨은 아직 아프다. 아프다.'
정말로 마차도 타지 못할 만큼 아프지 않은가.
보통 때라면 방에서 돌아다닐 만도 한데, 정말 침대에 붙어 있지 않은가.
"몸은 좀 어때?"
"아픕니다."
하벨은 오늘은 더 솔직히 털어놓았다.
이미 오기 전에 라르웬의 신경을 긁었으니 얌전히 있어야지.
[잘 들었어, 하벨. 너무 재밌더라. 라르웬한테 종종 그렇게 해줘.]
루룸은 하벨을 보자마자 뒷발을 동동 굴렸다.
[어, 아라는?]
"그러니까. 아직도 용용이랑 재밌게 노나봐. 올라올 생각이 없어."
힘이 살짝 빠진 하벨의 목소리에 루룸은 깔깔 웃었다.
[아, 미치겠다. 형제가 왜 이렇게 날 웃겨?]
"난 심각해, 루룸."
하벨은 주먹을 쥐려다 욱신거리자 힘을 빼냈다.
아차.
하벨은 그제야 라르웬을 보며 다시 싱글벙글 웃었다.
"형님. 혹시 기분이 많이 상했나요?"
"아니. 이렇게 날 올라오게 하는 것도 네 능력이지."
라르웬은 하벨이 원하는 걸 보여주었다.
연락용 아이템.
"막내야. 네 것도 꺼내 봐."
라르웬이 말하자 하벨은 아공간 주머니를 열었다.
매번 생각했던 건데, 물어도 될지 망설였던 질문이 떠올랐다.
"그런데 형님."
"왜? …아, 아공간 주머니에 사람은 못 들어가. 딱 물건까지지. 어떻게 아냐고? 누군가 해봤으니까."
"아직 묻지도 않았는데……."
"네 표정이 이제는 대충 보여서."
라르웬은 씩 웃었다.
하벨이 연락용 아이템을 꺼내자 자신이 쥐어 하벨이 인증까지 편하게 마칠 수 있도록 했다.
"한 번도 안 써봤지?"
"예. 써보지 못했습니다."
"어차피 연락용이라 눌러야 할 게 두 개밖에 없어. 여기 빨간 버튼이 연락, 파란 버튼이 연락처 등록이야. 연락처 등록은 최대 20명까지가 한계고."
라르웬은 자신의 연락용 아이템을 흔들었다.
"잘 봐봐."
파란 버튼을 누른 뒤에 하벨의 연락용 아이템에도 똑같이 눌러 두 연락용 아이템을 가까이 댔다.
"이렇게 하면 연락처가 저장돼. 마나 파동을 맞춰서 등록하는 방법이라 이렇게 저장할 수밖에 없어. 물론, 이건 클로저용 임무 기기라서 달라. 내가 옮기고 싶은 걸 선택할 수 있거든."
하벨은 뭔가 현대의 문물과 비슷한 듯 다른 모습에 놀람은 금치 못했다.
'그, 뭐랬더라.'
잠깐 눈을 오래 감았다 뜬 하벨은 곧 단어를 떠올렸다.
'블루투스? 그래, 그거랑 비슷하다.'
"아, 좀도둑. 혹시 너도 있으면 이참에 저장해 놔."
라르웬은 페트리오를 보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도련님께 말씀드릴 참이었습니다."
하벨에게 연락용 아이템이 없다는 게 매번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페트리오까지 저장을 마치고 나서야 라르웬은 빨간 버튼을 누른 뒤, 저장된 연락처 중 룬델 티에라라는 이름을 가리켰다.
"눌러봐."
"지금요……?"
하벨이 놀라며 묻자 라르웬은 키득거렸다.
잘못한 걸 아는 모양이었다.
"기다리고 계시니까."
"바안 저하는."
"여기 나 다음에 있으니까, 천천히 해. 아, 내가 먼저 바안 저하께 연락드려야겠네. 모르는 마나 파장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라르웬은 잠깐 페트리오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루룸."
[칫.]
루룸은 하벨 뒤로 숨어 있다, 라르웬이 꺼내는 말에 그를 향해 다가갔다.
[하벨이 얼어붙었는데?]
"뭐, 그런 날도 있어야겠지."
하벨을 쳐다본 라르웬이 키득거렸다.
룬델과 하벨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감은 자신보다 더 멀었다.
얼마나 어려울까.
하지만 저게 첫걸음이지 되지 않을까 싶었다.
탁.
문이 닫히자 하벨은 심호흡했다.
갑자기 왜 이렇게 떨리는지.
'전화 공포증이라는 말이 왜 있는지 알겠다.'
하벨은 인간들이 꺼내던 그 말에 잠깐이라도 '나약하구나' 하고 생각했던 자신을 탓하며 눈을 질끈 감고 룬델 티에라라는 이름을 눌렀다.
연락용 아이템에서 갑자기 진동이 몰려왔다.
진동이 멈춘 뒤에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벨아?>
하벨은 그제야 떨렸던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걸 느꼈다.
<하벨이 맞더냐?>
"맞습… 니다."
천천히 자신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언제 들어도 참 반가운 목소리가 아닌가.
* * *
"…이쪽은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하벨 공."
바안은 숨 좀 돌릴 겸 연락용 아이템을 이용해 상황을 보고했다.
―저하께 드릴 부탁이 있습니다.
어제 하벨에게 연락이 왔다.
라르웬이 사전에 연락을 해줬지만, 하벨에게서 '부탁'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큰 사건에 휘말릴지도 모르는 예감이 들었다.
―우선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이번 기상국장, 웨인 톨의 사건을 페트리오 비발체 경과 협력해 주셨으면 합니다.
왜 티에라 가문이 아닌, 페트리오 비발체가 움직여야 하는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번 연회 사건에 티에라 가문의 힘을 모르게 된 이들이 어디 있는가.
수많은 견제가 들어간 상황에서 감시자들 역시 많을 테지.
페트리오는 이전부터 적들이 많았고, 티에라 가문의 위상에 묻혀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한 편이었다.
"지금 나는 웨인 놈이 의심하지 않게 이전처럼 더미로 만든 자들을 쫓도록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러고 있고요."
<그럼 저하께서 웨인 놈을 만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공께서 알려주신 대로 웨인 놈을 떠보는 척 가장하는 걸 잊지 않았습니다. 이제 막 웨인을 만나 돌아온 참이고요."
바안은 장갑을 벗었고, 찻잔을 손에 쥐었다.
후.
숨이 길게 내뱉어졌다.
―저하, 후회하실 겁니다. 저희 톨 가문이 왕실에 바친 건 충성이었습니다. 대체 무슨 일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일은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웨인의 태도는 왕자를 대하는 게 아니었다.
언제든지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오만함에 비롯된 시선이었다.
늘 받았고, 거기에 익숙해져 지금까지 몰랐던 시선.
그 사실을 알자 경멸이 일어나고, 아주 깊게 짓눌러 놨던 수치감에 휩싸였다.
"고맙습니다."
바안은 또 하벨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저한테는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원래 저하께서 하고자 한 일이 아닙니까?>
고마움조차 거부하는 하벨의 말에 바안은 가볍게 웃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 고마움은 받아주세요."
사람이 참 한결같았다.
말로는 자신을 위한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더 많이 바뀌고 달라진 건 하벨 주위의 사람이 아닌가.
이러니 하벨한테 챙겨줄 게 없을까 한 번 더 살펴보게 됐다.
이번 일로 왕실이 하벨에게 입은 은혜도 다 갚지 못했으니.
<저하. 놈이 소유한 저택에 들어갈 준비를 마치셨습니까?>
하벨은 조금 전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말을 걸었다.
바안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물론입니다. 공께서 내게 바랐던 부분이자, 나 역시 바라고 있던 일입니다."
웨인을 왕실에 구금시킨 후로 언제든 그의 저택에 들어갈 수 있게 병사들을 준비해뒀다.
이렇게 움직일 수 있게 왕실에 힘을 돌려준 자는 다름 아닌 하벨이었다.
<아마 한 번 더 놈을 만나셔야 할 겁니다.>
"페트리오 경한테 좋은 소식을 들었나 봅니다."
페트리오는 현장을 담당했고, 자신은 구금된 웨인을 담당하기로 했으니 상대적으로 정보를 빨리 받을 수 있는 쪽은 페트리오였다.
<저도 아직입니다. 하지만 곧, 저하께서도 받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니 움직이셔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늙은 너구리의 집을 뒤져보죠. 놈이 가진 정보와 날씨 예보를 위한 기술까지 손에 넣는다면 참 좋겠습니다."
바안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웠다.
그게 자신의 목적이었으니.
"아, 끊기 전에 한 가지 알려드릴 게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저하.>
"마법사 협회 내에 움직임이 조금 빨라졌습니다. 아직 어떤 쪽인지 모르겠지만, 거대 정화 장치 소식과 연결해보면야 뻔하지 않을까 싶네요."
<감사합니다, 저하. 그럼 제가 한 가지만 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공께서는 얼마든지 요구해도 됩니다."
<웨인 놈하고 말을 나누고 싶습니다.>
바안은 잠깐 웃음을 터트렸다.
"아, 미안합니다. 잠깐, 웨인 놈의 얼굴이 상상됐습니다. 물론입니다, 하벨 공. 그 정도는 해드리죠. 그럼."
바안은 연락을 끊어내고는 조용히 차를 마셨다.
회복되고 있는 왕실의 힘을 어떻게 써야 할지, 앞으로 왕국의 앞길을 막는 자들이 누구일지 생각을 하나씩 정리했다.
적어도 지금 적이 될 자는 또렷해지고 있었다.
마법사 협회.
예상치도 못한 복병에 뒤통수가 쓰라렸다.
'이렇게 야금야금 성장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귀족 뒤에서 귀족만큼이나 크게 성장한 세력이 바로 마법사 협회였다.
정치에 개입하지 않겠다던 맹세를 너무 믿었던가.
감춰져 있기에, 들추려 하지 않았기에 이렇게 되어버린 건 아닌지.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게."
바안의 목소리와 함께 기사가 들어왔다.
"저하, 알려드릴 소식이 있습니다."
* * *
"…와. 그쪽으로 갔다고? 정말?"
하벨은 아라의 꼬리를 만지작거리다 말고 비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에 칼리우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쪽이 어딘데? 이 몸도 듣고 싶어!]
하벨이 꼬리를 놓자 아라는 연락용 아이템에 귀를 묻다시피 하며 눈을 깜박거렸다.
<그렇습니다. 지금 왕실이 쫓고 있는 더미 이외에, 웨인 놈의 진짜 전령이 막 칼리우스가 흔적을 쫓아 찾아낸 바로 그 장소로 들어가는 걸 확인했습니다.>
"너도 아직 들키지 않았고?"
거대 정화 장치로 향했을 때도 혹여 꼬리가 붙을까, 계속 조심하지 않았던가.
<예. 저도 계속 조심하고 있습니다. 제게 가면단을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럼. 뒷세계에 가장 오래 몸을 담았던 이들인데 쉽게 정체를 들킬 리가 있겠는가.'
대놓고 뒷세계를 의심했던 자신과 상황은 달랐다.
마법사 협회 쪽에서 바라본다면 갑자기 정체 모를 자가 나타나 자신들의 일을 망쳐버렸다.
클로저는 틈의 세계가 나타났기에 왔을 뿐이니 용의선상에서 지운다고 한다면 범인은 없었다.
얼마나 당황스럽겠는가.
귀족의 끄나풀에 불과한 뒷세계를 의심할 수도 없고.
'그러니 멈출 수도 없었겠지.'
잘됐다.
하벨은 씩 웃었다.
"좀도둑."
<예, 도련님.>
"쳐부숴."
이제 뭘 망설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