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파헤쳐라(3)
* * *
아주 절묘한 순간에 페트리오가 오지 않았는가.
하벨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으려 입술을 깨물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라가 보이질 않았다.
'칼리우스하고 놀고 있나 보네.'
밖을 쳐다보니 벌써 노을이 지고 있었다.
호기심도 많고 노는 걸 제일 좋아하는 아라가 기다리기 지루할 만했다.
보통 자신이 기절할 때 루룸하고 세렌 등 다른 정령들하고 논다고 쫑알거리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딸깍.
문이 열리는 소리가 이어서 들리자 하벨은 화들짝 놀라며 다시 눈을 감았다.
무슨 말을 나눌지 몰라 일단 자는 척하며 숨소리마저 천천히 낮췄다.
"지금 도련님의 몸이 좋지 않다고 말했잖아. 멍청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눈치도 더럽게 없네."
카샬이 목소리를 낮추며 신경질을 냈다.
"그럼 너는? 귀가 먹었어? 도련님의 몸이 좋지 않은 건 알지만, 그렇다고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순 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내가 말씀드리지 않으면 도련님이 나한테 올……."
페트리오까지 속삭이듯 말하다 곧 자신의 입을 가렸다.
하벨이 곤히 자고 있지 않은가.
"이 새끼……."
페트리오는 당장 카샬의 멱살을 쥐었다.
카샬은 기꺼이 멱살을 잡혀주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놀랐냐?"
"분명 깨어나 계신다며."
"그럴 수도 있다고 그랬지. 이제 봤으면 됐지? 보다시피 도련님의 상태가 좋지 않아. 그러니까 할 말이 있어도 나중에……."
"카샬."
카샬은 하벨의 부름에 그대로 몸이 굳어지다 곧 한숨을 내쉬었다.
"깨어나 계셨습니까?"
하벨의 숨소리가 잠을 잘 때와 다르지 않았기에 눈치채지 못했다.
사람이 달라지면 이런 것도 아는 건지.
뒤통수가 얼얼했다.
"이러면 곤란하지."
하벨은 카샬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도련님을 위해서였습니다."
"형님이랑 말을 나눈 건 아니고?"
"맹세코 아닙니다. 물론, 둘째 도련님께서 내기에 이기셨으면 하는 바람이……."
"괜찮으십니까, 도련님?"
페트리오는 카샬의 말을 끊고는 하벨에게 다가갔다.
"…손은 왜 이러십니까?"
페트리오의 미간이 찌푸려지며 당장 카샬을 째려보았다.
그 부분은 할 말이 없기에 카샬은 주춤거리다 시선을 흘렸다.
"그냥 좀 그렇게 됐어."
"검은 물로 된 괴물을 직접 만지셨어."
카샬은 하벨이 얼렁뚱땅 넘어가는 걸 그냥 보고 있지 않았다.
혼나야지.
"제, 제정신… 아니, 너무 위험했습니다!"
페트리오의 입에서 험악한 말이 나올 뻔했다는 사실에 하벨은 눈을 크게 떴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실수했습니다."
페트리오는 금방 허리를 숙였다.
아무리 그래도 하벨한테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실수인 척, 도련님께서 정신 좀 차리게 미쳤냐며 속 시원하게 내뱉지 그랬어?"
"네가 그렇게 하고 싶은가 보네?"
하벨의 시선이 카샬에게 향하자 그는 집사의 올바른 표정을 하며 대답했다.
"제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도련님?"
"네가 그렇게 계속 말하지 않아도 위험할 뻔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
하벨은 붕대에 감긴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런데 다른 것보다 이게 제일 싫어."
밥을 먹을 때 너무 답답했다.
늘 행복했던 식사가 이렇게 슬퍼질 줄이야.
"…아, 이제 팔찌 좀 빼는 게 어떠십니까? 치료 도중에 빠지지 않아서 곤란했습니다."
카샬을 이제야 팔찌를 의식하며 말했다.
"네가 빼도 안 빠진다며?"
"예. 빠지질 않았습니다. 무슨 마법이 걸린 팔찌인지 몰라도 풀어주십시오."
"나도 그래."
"…예?"
카샬이 눈을 깜박거렸다.
"내가 예전부터 말했잖아. 안 빠진다고."
"저 팔찌를 너무 좋아해서 안 빼는 게 아니었단 말입니까?"
"내가 그렇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혹시 제가 한 번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팔찌를 바라보던 페트리오가 말을 꺼냈다.
"이 망할 팔찌를 뺄 수 있다면 수십 번은 더 봐도 돼."
"…음, 마법이 걸린 팔찌는 아닙니다."
"용용이도 그렇게 말하더라."
하벨은 한숨을 가볍게 내쉬었다.
―이거 마법이 걸려있지 않아. 아무 냄새도 안 나. 오히려, 음, 음. 하벨이랑 비슷한 냄새가 나는데?
"어쨌든 나는 이제……."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카샬은 하벨이 다음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체온부터 측정했다.
"안 괜찮습니다."
그리고 딱 잘라 말했다.
"아까보다는 괜찮아."
하벨은 어떻게든 말을 돌리고는 굳어진 페트리오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소용없어 보였다.
"어떻게 됐어? 좋은 소식이면 좋겠는데."
하벨이 묻자 의자를 끌고 오던 페트리오가 한숨을 내쉬었다.
"도련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제가 말씀드릴 내용은 현재 두 가지입니다."
"그래. 용용이가 마법의 흔적을 쫓아 발견한 집, 그리고 웨인 톨."
"우선 제일 먼저 그 집의 정보부터 캤습니다. 변변찮은, 몰락 귀족이었고, 최근 묵게 된 자들이 바로 칼리우스가 발견한 이들이었습니다."
하벨은 시작부터 페트리오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
"그 집에서 일하던 시종의 피를 확보해 약점을 쥐고, 임시로 그곳에 거주하게 된 자들의 피를 구할 수 있게 협력하도록 요구했습니다."
콜록.
하벨이 갑자기 기침을 내뱉자 페트리오는 그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괜찮아."
혹시나 피가 나왔을까 싶어 슬쩍 봤지만, 오늘은 괜찮았다.
카샬이 힐끔 정화 장치를 보자 하벨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손바닥을 내보였다.
"계속 말해봐."
"피를… 얻어 기억을 봤습니다."
"마법사 협회에서 이번 일을 주도한 게 확실해?"
하벨의 물음에 페트리오는 잠깐 기억을 더듬었다.
――
·
·
·
"…모든 건 그분의 의지다."
쪽지를 읽던 한 남자가 근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누군가 침을 꼴깍 삼키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판단하지도 말며 그저 그분의 고결한 의지를 따르거라."
"…하, 하지만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닙니다."
누군가 남자의 말을 반박하며 입을 열었다.
"아직 그건 완벽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이럴 목적으로 만든 게 아니잖습니까?"
남자는 자신의 말을 반박한 자를 쳐다보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렇지."
스겅.
허리에 찬 검을 빼내서는 망설임도 없이 반박한 자의 목구멍에 쑤셨다.
푹!
"그렇다면 아직도 권력자의 개로 전락하고 싶은가? 그분이 우리를 위해 이 모든 걸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도 모르겠는가?"
남자는 얼굴에 튄 피를 닦으며 시선을 돌렸다.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강렬한 증오가 느껴졌다.
"낙인처럼 찍힌 이 문양을, 등록된 마법사와 등록되지 못한 마법사로 나뉜 까닭을. 애초에 누가 우리를 짓누르려고 했는지를 잊지 말거라."
공기가 무거워졌다.
"우리는 마법사다. 뭉치지 못했고, 힘이 없던 이전과 다르단 말이다."
화르륵.
남자가 손아귀를 펼치자 불이 타올랐다.
모든 두려움마저 삼켜버릴 만큼 강렬했다.
"이제 알아들었으면 어서 구속 마법을 풀어. 수습은 내가 한다."
――
"…그 이름을 쓰진 않았지만, 마법사라는 건 확실했습니다. 그분이라고 말하는 누군가를 따르고 있었고요."
페트리오의 말에 하벨은 턱을 매만졌다.
"다만, 등록된 마법사였기에 마법사 협회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고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
페트리오는 팔목을 툭툭 건드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지금 마법사들이 움직이는 원동력은 그간 쌓여왔던 분노로 보였습니다."
"마법사라면 누구나 등록되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하벨은 페트리오가 가리킨 팔목에, 등록된 마법사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바코드를 닮은 문양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맞습니다. 정령사와 갈등이 있는 이유도 그 사실 때문이었고요."
"그건 들어봤어.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 갈등이 얼마나 심한지 몰라. 네가 보기에도 정말 심한 편이야? 아니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 갈등을 키운다고 생각해?"
겨우 한 명의 의견이었지만, 페트리오 역시 마법사였고, 그의 통찰력은 믿을 만했다.
"후자 쪽에 조금 더 기울어져 있긴 하지만 제가 보기에 둘 다라고 생각합니다."
"넌 등록하지 않은 마법사인데도?"
하벨이 실실 웃자 페트리오는 입가를 핥았다.
"…마법사 협회는 정말 낡은 곳이니까요. 거기에 소속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헤레스한테도 저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기에 하벨은 슬그머니 궁금증을 내밀었다.
"듣자 하니까, 마나를 성장시키려면 마나가 담긴, 마성물이 필요하다던데. 그걸 마법사 협회가 독점하고 있다며?"
"맞습니다. 그래서 마법사 협회에 소속될 수밖에 없지만, 웃기게도 또 얽매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어놨습니다."
"그게 뭔데?"
"신분제 같은 등급을 만들어놨습니다. 소속만 된 사람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전혀 없겠죠?"
"아."
하벨은 그제야 페트리오가 왜 누군가 의도적으로 갈등을 일으킨다는 말에 힘을 줬는지를 알아챘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등급을 올리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겠지?"
"맞습니다. 주어진 대로 움직여야 하죠."
"아주 고리타분하네. 하지만 좋은 방법이야."
"좋은… 방법이라뇨?"
페트리오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재차 물어보았다.
"마법사를 뭉치게 하기에 아주 좋은 방법이지. 만약 죄를 저지르는 놈이 대다수가 된다면 그 죄책감도 옅어지는 법이거든."
"그런 분위기는 확실히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아차, 그놈들이 구속 마법도 이야기했습니다."
"……!"
하벨의 웃음이 단번에 사라졌다.
"구속… 마법이라고?"
하벨의 눈매가 날카로워지자 페트리오는 혹여 실수했나 싶어 굳은 표정으로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예. 구속 마법을 풀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무얼 구속했다는 걸까요?"
―연락해. 반은 성공했다고.
'…이 새끼들.'
하벨은 이를 악물었다.
다시 떠올려도 어처구니없는 말이었다.
설마 했는데.
그래도 아니길 빌었는데.
'거대 정화 장치에서 나온 그 괴물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거라니.'
그래서 랜턴에 검은 불꽃이 타올랐다.
어쩌면 마법사 협회 내부에서 만들어진 등급제로 발생한, 옅어진 죄책감에서 비롯됐을지도 몰랐다.
'클로저들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그랬다니.'
마법사 협회가 주도했든 아니든 어차피 부서트리려 했지만, 하벨은 점점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헤일리스 퀸."
하벨이 꺼내는 말에 페트리오는 주춤거렸다.
―헤일리스 퀸! 내 네놈들의 진짜 주인을 찾아내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가?
티에라 가문을 둘러싼 네 땅을 소유했던 귀족 중 아르에느의 귀족, 뮈에르 진젤이 그렇게 꺼내지 않았던가.
"예. 저도 그놈이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찾지 않은 건 아니었다.
지금도 계속 찾고 있지만, 이름만으로 찾는 데 한계가 있었다.
무엇보다 마법사이질 않은가.
"혹시 레디나한테도 물어봤어?"
"레디나한테요?"
하벨이 꺼내는 말에 페트리오는 도리어 의문을 담아 물었다.
"레디나는 마법사 협회를 증오하고 있더라고. 지금 검은 달이 무너졌다고 했지만, 혹시 알아? 이전 암살 대상일 수도 있잖아."
"말이 나온 김에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페트리오는 두 번째, 웨인 톨을 꺼내기 전에 일단 물었다.
"말해봐."
하벨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자리 잡았다.
지금 페트리오가 꺼낼 말은 뻔했다.
"레디나. 레디나 컬이 누구인지는 아십니까?"
"검은 달 소속이자, 지금 내 시녀로 일하고 있지. 그럼 너는 알고 있어?"
"아뇨. 레디나가 제 목을 노렸을 당시, 그러니까 의뢰가 취소되기 전에 만난 것 이외에는 없습니다."
페트리오는 고개를 가로젓다 손가락을 꼭 쥐었다.
"다만… 그때는 지금과 달랐습니다."
"어땠는데?"
"정말 매서운 검으로 보였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경계할 만큼요. 그리고."
페트리오는 개인적인 원한은 이미 버렸다.
그건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의 잘못이었으니.
"그리고 지금과 그 위치가 달랐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레디나를 호위하던 이들까지 있었으니까요."
다만, 하벨이 걱정이었다.
레디나가 단검만 휘둘러도 목이 떨어질 정도로 가까이 있지 않은가.
"도련님. 도련님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은밀히 조사하겠습니다."
"페트리오."
하벨이 이름을 부르자 페트리오는 저절로 긴장됐다.
"고마워."
"……."
"하지만 그럴 필요 없어. 나는 네 잘못을 안고 갈 생각이 없듯 레디나도 마찬가지야. 레디나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든 그건 레디나가 감당해야 할 몫이니까."
잔인하다고 할 수 있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페트리오는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평소와 똑같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제 오지랖이 넓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짜증이라도 낼 줄 알았는데?"
"전 의젓하지 못한 카샬이 아닙니다, 도련님."
"푸하하!"
하벨은 웃음을 터트렸다.
"맞아. 넌 카샬과 달리 의젓하고."
"웨인 톨이 움직였습니다."
"어느 쪽?"
하벨은 천천히 웃음기를 지우며 물었다.
"왕실에서 쫓는 더미가 아니라 진짜 쪽입니다. 2시간 전, 웨인 톨의 저택에서 새로운 놈들이 움직였고, 그 방향은 확실히 왕실에서 쫓은 더미와 달랐습니다."
"좀도둑."
"예, 도련님."
"지금부터 너한테 부탁 하나만 할게. 너도 똑같이 나한테 하나 요구해도 좋아."
"저는……."
"바안 저하와 협력해줘."
"예……?"
"궁지에 몰린 늙은 너구리를 잡으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아서."
궁지에 몰린 늙은 너구리가 주변을 살필 수 있으면 얼마나 살필 수 있겠는가.
그쪽에서 더미를 썼다면 이쪽도 더미를 써야지.
하벨은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로 키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