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파헤쳐라
* * *
정체 모를 적.
정보조차 거의 없는, 검은 물로 이뤄진 그 괴물을 만나게 된다면 그 누구라도, 하물며 라르웬조차 공황에 빠질 수밖에 없을 테지.
"물론, 형님이 막지 못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벨은 미소를 흘렸다.
"하지만 망설이고 있을 사이에 클로저들이 얼마나 죽어가겠습니까?"
"지금 마법사 협회가… 의도적으로 클로저를 노렸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하벨의 안색이 창백하고, 그를 얼른 침대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걸 알지만, 라르웬은 목이 바짝 마른 느낌에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클로저는 틈의 세계를 닫고자 만들어진, 재앙을 막기 위한 곳이었다.
마법사 협회와 목적 자체가 달랐다.
그렇기에 이곳만큼은 정치적 개입을 하지 않겠다고 나라들끼리 약속하지 않았는가.
"그건 모릅니다. 하지만 구속 마법이 걸려있었습니다."
하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저 누군가 개입했음을 확실히 밝혔다.
[맞아! 용용이가 그렇게 말했어!]
뒤이어 아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히익!]
고개를 빼꼼 내밀던 아라는 그대로 기겁했다.
[대장! 피, 피 났어?]
피라는 말에 라르웬은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클로저 일보다 중요한 건 하벨이지 않은가.
"일단 누워. 이야기는 그다음이야."
라르웬은 침대를 가리켰다.
* * *
"…하."
라르웬은 또 한숨을 내쉬었다.
카샬한테도 비슷한 보고를 들었지만, 하벨에게서 재차 '가능성'을 들으니 더 골치가 아팠다.
"이번 일을 마법사 협회에서 벌였다고 막 단정 지을 수가 없는 게, 등록된 마법사들은 거의 강제로 마법사 협회에 소속되어 있다고. 그게 싫으면 등록되지 않은 마법사가 돼서 쫓기는 일뿐이니까."
"형님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압니다."
마법사 협회와 협회 소속원 사이에 어떤 긴밀함이 없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겠지.
마치 학교에서 학생이 무슨 일을 저지르는지 모르는 것처럼.
"하지만 둘 사이에 접점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마법사가 잘못했으면 당연히 저들을 관리하는 마법사 협회에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저번과 이번 일 역시 명백하게 마법사가 개입되어 있었다.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그건 나도 동의해. 마법사 협회는 책임을 피할 수 없지. 문제는… 마법사 협회가 에르티안 왕국에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나라에 있는 마법사 협회와 이어져 있다는 점이지."
라르웬의 표정이 다시금 가라앉았다.
마법사 협회는 컸다.
처음에 그들은 오직 마법의 발전과 세상의 평화에만 관심을 쏟겠다는 맹세하에 각 나라의 교류를 인정해주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일까.
마법사 협회가 이상하게 변질되기 시작했을 때가.
'맹세는… 분명 유효할 텐데.'
까면 깔수록 튀어나오는 마법사라는 이름에 라르웬도 답답했으나, 무턱대고 건드릴 단체가 아니었다.
그들은 폭탄이었고, 그 위험도는 어쩌면 귀족보다 더 컸다.
귀족들의 힘이 권력과 돈에서 나온다고 한다면 마법사들은 정말로 무력이었으니.
"지금은 추측만으로 함부로 건드릴 수 없어. 설령 건드렸다고 해도 꼬리만 잘리겠지. 너는 그걸 바라는 게 아니잖아."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 두실 셈입니까?"
하벨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처음에는 잠을 깨웠습니다."
티에라 가문과 가장 가까이 있는 티에라 마을 속 뒷세계.
그곳을 지배해 티에라 가문을 향한 날을 세우려 했다.
하지만 적은 실패했다.
"그다음에는 숨통을 쥐려고 했습니다."
티에라 가문을 감싼 네 영토.
그 영토를 소유한 귀족들을 포섭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적은 이 또한 실패했다.
"또 그다음에 놈들이 벌인 일에 왕실 사건이 포함되어 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벨은 비웃음을 토했다.
재무부 장관과 자문관, 이 둘이 벌였다고 보기에 이상할 만큼 쇠퇴해진 에르티안 왕국.
분명히 갑자기, 왕조차 모르게 그 권력을 뺏기고 말았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적은 이것조차 실패했다.
"그리고 그다음이 뭔지, 뭐가 나올지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건 압니다."
―이건… 이건 안 됩니다! 사람으로서 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검은 물을 통해 그 속에 담긴 기억을 보지 않았던가.
사람으로 해서는 안 될 행동.
그게 대체 무엇인지.
―연락해. 반은 성공했다고.
자신이 보았던 검은 물로 된 괴물의 모습이 반 정도나 성공했다고 한다면 그 이상은 어떻다는 건가.
"놈들이 건드리면 안 될 걸 건드렸다는 걸요."
이 모든 사건에 멸망을 알리는, 랜턴의 검은 불꽃이 커졌다.
이번 일 역시 마찬가지였고.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검은 물은 정령을 삼켰다.
―살려줘.
―도와줘.
―아파.
그들의 울부짖음을 보았는데, 어떻게 외면하겠는가.
"아니. 나도 내버려 둘 생각은 전혀 없어. 오염된 거대 정화 장치에서 만들어진 검은 물이 괴물이 되어버리다니."
가라앉은 하벨의 눈빛 속 피어오른 결연함에 라르웬 역시 목소리에 힘을 줬다.
이건 이제 별개의 문제로 둘 만큼 심각해졌다.
그런 괴물이 하나가 아니라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아나지 않는가.
"다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를 너도 알고 있잖아?"
라르웬의 물음에 하벨은 주먹을 쥐려다 밀려오는 통증에 움찔거렸다.
'아직 마법사 협회의 꼬리가 잡히지 않았다.'
정황상 추측일 뿐, 무엇하나 확실한 게 없었다.
하벨은 모습을 보이지 않는 페트리오와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레디나를 의식하며 의자에 앉은 칼리우스를 쳐다보았다.
"용용아."
"응, 하벨."
"흔적을 쫓았어?"
자신이 쓰러지든 말든 거대 정화 장치를 가져간 놈들의 흔적은 무조건 찾아야 했다.
애초에 그걸 위해 자신이 두 번이나 그곳에 갔고, 칼리우스까지 데려오지 않았는가.
'설마 또 가는 건 아니겠지?'
"걱정하지 마, 하벨. 이미 쫓았어!"
칼리우스의 시선이 카샬을 향했다.
"카샬이 하벨 네가 깨어나면 다시 그쪽으로 무조건 갈 거라고 말해서 고민 끝에 흔적을 쫓았어."
"……?"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 짓지 마십시오. 그 몸을 이끌고라도 가실 분이 아닙니까?"
카샬은 하벨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자 도리어 어처구니없어하며 비웃음을 그렸다.
"안타깝지만, 막내야. 넌 오늘내일 저택으로 돌아갈 거야."
이어 라르웬까지 단호한 태도를 보이며 하벨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만큼 네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좀 알라는 거지.]
루룸이 하벨에게 다가와 볼을 찔렀다.
하벨이 의아한 눈빛을 짓자 루룸은 고개를 살짝 돌리며 말했다.
[뭘 그렇게 봐? 나도 틈틈이 네 걱정은 하고 있어. 그걸 직접 표현하는 게 서툴 뿐이지.]
[루룸도 서툰 게 있어? 이 몸처럼?]
아라도 위로 날아 하벨의 반대쪽 뺨을 찔렀다.
씰룩.
뭐가 재미있는지 아라의 볼이 부풀어 올랐다.
[아라 네 말이 맞아.]
[응? 이 몸은 루룸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나는 정령이 다 알고 태어난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니었어.]
루룸은 고개를 돌려 하벨을 바라보았다.
세계를 이루는 물이 검게 오염되어 부정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걸 벌써 두 번이나 원래대로 되돌리지 않았는가.
[고마워, 하벨.]
진심을 담은 고마움에 하벨의 눈이 살포시 감기자 루룸 역시 활짝 웃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어디 나갈 생각도 하지 마, 요 말썽꾸러기야.]
언제 웃었냐는 듯이 루룸은 평소처럼 하벨을 보며 가시를 세웠다.
어제 하벨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했던가.
"용용아. 계속 말해줘."
하벨은 분위기가 점점 이상해지자 칼리우스를 다시 재촉했다.
칼리우스의 눈동자가 빙그르르 돌아가더니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에 곧 활짝 웃었다.
뭔가 간지러운 느낌이 몰려왔다.
"나는 페트리오랑 함께 움직였어."
"좀도둑은 지금 어디에 있는데?"
"좀도둑이 누군데?"
[페트리오야.]
아라가 대답하자 칼리우스는 눈을 깜박거렸다.
"되게 신기한 별명이다. 페트리오가 뭘 훔쳤어?"
"정화제를 훔치려고 했지. 그래서, 용용아?"
"아차. 내가 하늘이 까맣게 변할 때까지 마나의 흔적을 쫓았고, 어떤 집 앞에서 멈췄어. 그러니까 페트리오가 이제 나는 돌아가도 된다고 말했어. 그래서 페트리오의 사람들이 여기까지 데려다줬어."
"페트리오는 지금 조사 중이라는 말이네?"
칼리우스가 흔적을 쫓았기에 페트리오가 덜미를 붙잡았다.
조사 과정 중에 칼리우스가 굳이 개입되어야 할 이유가 없이 돌려보내는 게 당연했다.
"카샬, 혹시 레디나한테서 연락이 왔어?"
"도련님."
"나는 아까부터 안 움직이고 있어. 형님도 매섭게 보지 마시고 사실을 보시죠. 지금 가만히 있잖습니까."
하벨이 저들이 계속 걸고넘어지던 조건을 건드리지 않았다는 걸 몸소 보여주자 카샬과 라르웬의 표정이 어두워져 갔다.
저 입이 문제인데.
"받으십시오."
카샬은 할 수 없이 레디나가 보낸 쪽지를 건넸다.
―합류 완료. 임무 수행 준비. 도련님도 성장의 임무를 수행 바람. 밥. 간식. 잊지 말길.
첫날.
―크라마와 함께 아직 벌레 소탕 중. 벌레가 제법 질김. 자꾸 새로운 아지트가 등장함. 불 마법에 머리카락이 좀 탔음. 짜증 남.
둘째 날.
―땅에 군침 질질 흘리는 벌레들 소탕 거의 완료 중. 진짜 아지트를 발견. 조만간 좋은 소식으로 연락 주겠음. 기대해도 좋음.
그리고 오늘 순이었다.
하벨은 키득거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성과가 좋은가 보네?"
"레디나가 가장 잘하는 일이잖습니까."
카샬은 굳이 '암살'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지금은 좋은 것만 봐도 모자랄 나이가 아닌가.
"형님."
하벨은 종이를 카샬에게 다시 넘기며 라르웬을 불렀다.
슬슬 발동이 걸리는가 싶어 라르웬은 깔끔하게 말을 꺼냈다.
"그 땅을 말하는 거라면 걱정하지 마. 이미 아버지하고 말을 다 끝냈으니까."
"뭐라……."
"우리가 그 땅을 산다고. 때마침 레디나랑 크라마인지, 크림인지 하는 마법사와 놈이 이끄는 마법사들도 거기에 있다며?"
[크라마야, 이 바보야.]
루룸이 라르웬의 머리카락을 살짝 당겼다.
"맞습니다. 지금 모든 사건과 시선이 왕실로 향했기에 마법사 협회에서 움직이기 좋을 시기가 아닐까 싶어 보냈습니다."
하벨이 실실 웃자 라르웬은 바로 못을 박았다.
"땅을 사는 척 연기해도 내가 해. 넌 아니야, 막내야."
"그 정도는 저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너는 바로 저택으로 간다고."
"…예?"
"머리카락을 쥐어서라도 널 저택으로 보내야 하지만, 지금 네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서 여기까지로 봐주는 거야."
"형님. 그건 안 됩니다."
"왜 안 된다는 건데?"
"크라마의 목줄을 쥔 건 납니다. 크라마가 그 땅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계속 엮일 수밖에 없죠. 형님이 감당하실 셈입니까?"
네가 이 과정을 다 떠안을래?
그렇게 물어보는 말에 라르웬은 기가 찬 듯이 웃음을 흘렸다.
"…싸우는 거 아니지?"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칼리우스는 슬쩍 입을 열었다.
[싸우는 거 아니야, 용용아. 이 몸은 많이 봐서 알아.]
아라가 배시시 웃었다.
"하벨."
라르웬의 목소리가 가라앉자 아라가 웃음을 멈췄다.
[싸, 싸우나 봐. 어떡해!]
아라는 그제야 하벨에게 날아가 옷자락을 쥐고 흔들고, 라르웬에게 가서도 옷자락을 흔들었다.
[싸우면 안 돼, 대장! 라르웬도!]
"걱정하지 마. 안 싸우니까."
라르웬은 속에 치미는 감정을 밖으로 내던지는 듯한 상상을 한 뒤에 하벨을 보았다.
이건 무턱대고 화를 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니까.
"예, 형님."
하지만 하벨은 평소와 똑같지 않은가.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마음이 울컥했다.
"이번 일은 어쩔 수 없었다는 거 알아. 정말 고맙기도 하고."
라르웬은 의자를 가지고 옆에 앉았다.
오, 바로 옆에 앉았어.
칼리우스의 감탄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실없는 소리 때문인지 라르웬의 입가가 살짝 씰룩거렸다.
"네가 막지 못했으면 클로저의 피해가 엄청났을 거야."
괴물이 되어버린 오염된 물은 틈의 세계와 달리 정화제라는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정화제를 만들 수 있는 건 그 속에서 정령사인 자신뿐이었다.
"내가 막지 못했으면 형님이 했겠죠."
하벨은 양손이 따끔거리자 후회를 섞으며 말했다.
"나도 정령사니까, 정화제를 만들 수야 있지."
라르웬은 자랑스러움을 담아 하벨을 보았다.
"하지만 너만큼은 다루지 못해."
"……?"
그게 무슨 말이냐는 하벨의 시선에 라르웬은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싶어 일단 팔짱을 꼈다.
"정령수는 결국, 이름에도 적힌 것처럼 물이란 말이지. 물은 다루기가 제일 까다로워. 아예 다루지 못하는 정령사도 있을 정도야."
[오오, 그럼 대장이 특별하다는 거야?]
아라가 기뻐하며 물었다.
"그래. 정화제는 정령수를 받아들이면 일단은 만들어지긴 해. 하지만 검은 물로 된 괴물을 처리하려면 거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며?"
"맞습니다."
"그럼 정령수를 물처럼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거고, 그런 의미에서 하벨은 특별한 셈이지."
라르웬은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였다.
―하벨이 가진 물의 친화력은 나를 뛰어넘는구나. 왜 지금까지 이 사실을 몰랐는지, 하벨이 정령을 보지 못했는지가 상당히 의문스럽단다.
이상하다.
룬델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그래도 형님은 해냈을 겁니다."
하벨은 라르웬이 가진 가능성을 보며 말했다.
"그렇게 혀에 기름칠해도 이번에는 넘어가지 않을 거야."
"기름칠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그래, 그래. 뭐든 좋아. 이제 슬슬 뭐가 하고 싶길래 그래, 막내야?"
라르웬의 시선이 살짝 감겼다.
칼리우스가 거대 정화 장치를 해체할 때 생긴 마나의 흔적을 쫓았고, 지금 이걸 페트리오가 다시 확인하고 있지 않은가.
하벨이 애초에 거대 정화 장치를 쫓은 이유는 이전에 검은 물에 잡아먹힌 정령들과 오염이 사라진 강 때문이었다.
―형님. 나요, 거대 정화 장치 쪽을 파고 싶습니다. 가주님께서 하지 못한 일을 내가 하려는 게 아닙니다. 내가 하고 싶습니다. 그때 본 강이 참 예뻐서요.
거대 정화 장치를 쫓던 과정에서 기상국장 웨인 톨이 거대 정화 장치를 해체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렇게 마법사까지 얽혀버리지 않았는가.
'하벨이 마법사 협회를 부서트린다는 말은 이전에도 계속했었고.'
"바안 저하와 연락하고 싶습니다."
하벨은 얼른 말을 꺼냈다.
"웨인 놈을 쫓아야 하는 이유가 더 생기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도 거대 정화 장치에 마법사와 얽혔으니까.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카샬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